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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手의 비밀
황대권 작가는 야생초 편지에서 '토종이 사라진 사회, 토종이 사라져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사회,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지금 우리는....'이라고 했다.
글을 읽으며 더욱 더 가슴이 저미는 슬픔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사라진 전통무예와 많은 단체들이 전통무예라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현실에서의 초조함과 태권도와 조선, 고려 그리고 삼국시대를 넘어 고조선 아니 그 이전부터 이 땅에서 살아 온 조상들이 남긴 위대한 전통을 잃어버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어리석음과 못남 때문 이었는데 우연한 기회를 통하여 대한민국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무예 스포츠로 승화되어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태권도와 문헌상으로 세계 최고 오래된 기록인 우리의 전통무예 수벽치기(수박, 수박희)와 만남은 그야말로 한줄기 빛이 아닐 수 없었다.
수벽치기를 처음 접한 것은 2001년 6월 경원대학교에서 아시아태권도연맹 주최로 열린 세미나에서 태권도와 수벽치기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이전에는 막연히 수벽치기보다는 수박, 수박희라는 명칭으로 문헌상으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만 볼 수 있는 전설 속의 무예로 알고 있었는데 육태안 전인의 시연을 통하여 수벽치기를 접한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태권도가 우리 민족 무예로 거듭 나기 위해서는 수벽치기와의 접목이 이루어 져야 한다. 태권도의 정체성을 해소하고 민족무예의 맥을 이어 가기 위해서는 수벽치기가 태권도안에 들어와야 한다. 그래야 일제 36년을 뛰어 넘어 고조선으로, 삼국시대로, 고려로, 조선으로, 대한민국으로 영원히 이어져 가는 민족무예라는 ”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수벽치기가 그 은밀의 장막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태껸의 송덕기옹에게 1972년부터 틈틈히 시간을 내어 충주에서 서울 오가며 약 2년 동안 지도를 받은 후 충주에서 태껸의 완성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며 자료를 찾아다니던 신한승옹은 우연히 공원에서 특이하게 손뼉을 치며 운동을 하는 한 노인을 만났다고 한다.
처음에는 노인에게 신분을 숨기고 사사 받고자 했으나 노인은 거절하며 마음을 열지 않기에 할 수 없이 신분을 밝히고 후세에 길이 물려 줄 사명감을 피력하며 설득하여 몇몇 기법을 전수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전국을 돌며 전통 무예를 정리하던 육태안씨를 타계하기 반 년 전에 운명적으로 만나 수벽치기를 전수하고 임종을 지켜 주던 육태안씨에게 수벽치기의 복원을 당부하며 세상을 떠났다. 이후 육태안씨는 몇 년을 천신만고 끝에 신한승옹에게 수벽치기를 전수 하였던 김일동전인을 찾아 삼고초려의 심정으로 정성을 다하니 이에 감동 받은 김전인은 부족했던 부분에 대한 기법을 전수하여 고려청자의 비법과 함께 영원히 사라질 뻔한 민족무예 수벽치기(수벽타, 수박, 수박희)는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일동전인의 수벽치기는 체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을 이어간다는 측면에서 보면 손뼉치기 몇 가지와 한 두 가지 호흡법만으로도 아주 중요한 것인 것이다.
이러한 내용과 자료를 육태안전인을 통하여 접한 나는 의문이 있었으나 자료를 정리 하던 중 인간문화재 송덕기옹의 태껸을 박종관씨가 정리하여 놓은 교본을 보다 책갈피에서 예전에 스크랩하여 놓았던 기억에서 잊혀졌던 한 장의 기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신한승옹이 타계하기 전인 1987년 5월에 동방생명에서 발간된 아시아에 꽃피운 우리 문화라는 매거진인데 태껸 전수관에서 단 두 명만이 5년의 과정을 마쳤고 지금은 9명의 수련생이 수련하고 있어 마음이 놓인다는 것과 태껸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수벽치기를 복원해야 한다는 기사였는데 이것은 태껸의 인간 문화재 신한승옹이 임종을 지켜 주던 육태안전인에게 민족무예의 지킴이로서의 사명과 함께 모든 자료를 물려 주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수벽치기는 그렇게 소중한 인연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수련을 통한 수벽치기와 태권도의 접목은 기법상 많은 차이점이 있었고 개인적인 사정상 너무 힘들고 어려웠으나 민족무예의 지킴이라는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육태안 전인의 적극적인 思考(사고)와 配慮(배려)로 최선을 다하던 어느 날,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史學(사학)을 전공하는 허인욱군과 우연히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허군과 나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관장님! 우리 나라에 세 명의 의적이 있다고 하는데 아십니까?”
“음....한 명은 홍길동이고 또 한 명은 임꺽정,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장길산이 아닌가? ”
“네! 맞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행방을 혹시 아십니까? ”
“임꺽정은 관군에게 사살되었다고 하고, 장길산은 잘 모르겠고, 홍길동은 오끼나와에다 율도국을 세웠다고 하던데.....”
“ 네! 맞습니다. 임꺽정은 사살되었고 장길산은 아직도 그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고, 홍길동은 그의 무덤이 조사결과 오끼나와에 있는 것이 사실로 판명 되었고 그 후손이 지금도 오끼나와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 오끼나와 ’
나는 오끼나와라는 말에 마치 천년동안 잠을 자다 깨듯 정신이 퍼뜩 들었다.
오키나와는 일본 가라테(空手)의 모태가 되는 곳이 아닌가?
그런 오키나와에서는 무술을 일컬어 테(手)라고 했다.
'오키나와 테!'
이 오키나와 테는 당수라는 명칭도 있지만 당수라는 명칭은 1625년 明나라의 진원빈이 권법을 가르친 기록과 더불어 오오시마 필기 제3권에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6년 전(1756년) 류쿠왕국에 청나라 사신이 왔는데 그 호위무관으로 온 公相君(공상군)이라는 사람이 組合術이라는 주먹 기술을 보여 주고 이를 류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즉 당수는 공상군이 류큐사람들에게 무술을 가르친 이후에 쓰여 진 명칭인 것이다. 하지만 중국무술이 전해지기 전이나 전해진 후에도 오키나와에서는 여전히 무술을 말하거나 표기 할 때는 테(手)였다.
그렇다면 오키나와에서는 왜? 무술을 일컬어 테(手)라고 하였는가?
참으로 의문이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이러한 手의 비밀에 대하여 육태안전인은 手搏(수박)에서 오끼나와 人들은 쓰기 쉽게 搏자를 생략하고 手라고 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였는데 나의 생각은 금무정책의 영향으로 오키나와인들이 서로에게 隱語(은어)로 전해진 명칭이 아닌가 한다. 중국 무술 중에 손 手로 시작되는 무술 명칭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오키나와 테(手)는 조선에서 건너 간 무술임이 분명한 것인데, 과연 누가 우리의 전통무예를 오키나와에 전하였는가? 이것은 홍길동이라는 실존 인물을 통해서 전하여 졌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여기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옛 류쿠왕국에는 토착무술이 있는데 그 이름을 테(手)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중국에서 건너온 唐手(당수)라고도 하였다.
2. 이러한 오끼나와에서 무술을 唐手(당수)라고 부르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625년에 명나라 사람 진원빈이 류쿠에 와서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사꾸가와가 1700년 중국으로부터 당수를 배워 전했다고 하며 가장 정확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오오시마 필기 제3권에 6년 전(1756년) 류쿠왕국에 청나라 사신이 왔는데 그 호위무관으로 온 公相君(공상군)이라는 사람이 組合術이라는 주먹 기술을 보여 주고 이를 류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3. 진원빈이나 공상군 또는 사꾸가와 등이 중국무술을 전하여 당수라는 명칭이 불리기 전에 중국무술을 전한 기록보다 앞서는 것은 '홍길동이 조선의 병법과 무술을 전해준 것인데 홍길동이 오끼나와 파조간도로 가서 율도국을 세우고 해상왕국을 건국한 사연은 다음과 같다.
① 세종 22년(1440년)에 전라도 장성현 아차곡(아치실)에서 태어난 홍길동은 서얼의 관리등용을 금지 하는 경국대전의 반포로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집을 떠나 나주목 관할 장성현, 갈재(葦嶺)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광주 무등산, 영암 월출산에 본거지를 정하고 주로 탐관오리와 토호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에게 나눠 주는 의적 활빈 활동을 하였다. 그 후 지리산 근처의 경상도 하동군 화계현 보리암자에 지휘부를 두고 관군과 대항하였으며, 멀리 경상도 진주에까지 세력을 펼쳤다가 이 후 김천 황악산에 들어가 학조대사에게서 병법과 무술(수벽치기)를 배웠다.
1500년(연산군 6년) 10월 22일 무오사화(1498년)로 인해 상당수의 사림파가 목숨을 잃거나 귀양을 가게되고 수년에 걸친 전국적인 가뭄으로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여 가족과 함께 함경도지방에 가서 살도록 하는 대 사면령을 내림. 이로 인해 홍길동 집단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체포되는 형식으로 자수한 이후 1500년(연산군 6년) 11월 남해 삼천리 유배형을 받고 1500년 12월 5일 하떼루마지마(파조간도)에 정착하였다.
② 1501 ∼ 1503년 이시가키지마(석원도) 오하마무라(대병촌) 후루수토지역에 집단거주지 조성하고 인근의 지배권을 장악(죽부도, 서표도, 여나국도…)하였다.
1504년 미야코지마(궁고도)의 추장인 나카소네의 혹독한 압제와 과중한 세금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원주민을 규합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카소네 집단을 섬의 동북부 밀림지역으로 몰아내고 상비옥산(上比屋山)에 조선 도래인들의 집단주거를 위해 초가집 군락을 조성하였다.
1505 ∼ 1508년 구메지마(久米島)에 상륙, 추장인 마다후쓰를 몰아내고 일본, 유구국, 중국을 상대로 중계무역을 하면서 동지나해의 해상권을 장악 섬의 요처에 적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선양식의 성(城)을 구축하였다.
③ 1510년 한문본 홍길동전인 위도왕전에서 그의 나이 70세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위와 같은 홍길동의 기록으로 보아 중국무술이 공산군이나 진원빈에 의해 오끼나와에 전해지기 전에 이미 홍길동에 의해 1500년 12월 5일이후 조선의 문화, 그리고 무예와 병법이 확실히 전해 졌으며 이러한 기록은 1609년 일본 왜국 시마즈가 류쿠를 오끼나와로 지배하면서 禁武(금무)정책을 취했고 류쿠인들은 그 정책에 맞서 맨손 격투술을 더욱 발달 시켜 왔다는 기록보다 백 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오끼나와 테를 최초로 空手(공수)로 표기한 것은 하나기 쵸모(花城長茂,1869-1945)로써 1906년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공수(空手)보다는 당수(唐手)라는 명칭이 많이 쓰였는데 공수도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은 후나고시 기찐이 오끼나와 테를 일본의 실정에 맞게 명칭과 기술들을 변형시켜 보급하기 시작한 1921년 이후이며 공수도(空手道)라는 한자표기로 통일 된 것은 일본이 군국주의로 감에 따라 적국인 중국을 연상시키는 말 대신 공수로 하자는 의견에 따라 미야기 쵸준, 하나기등이 공수로 통일한 1936년도이다. 이러한 가라테가 대한민국에 처음 보급된 것은 일본에 유학한 학생들이 가라테를 배워 귀국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1944년 개관한 청도관의 이원국을 비롯 노병직, 전상섭, 윤병인, 최홍희등이 유학시절 가라테를 배워 귀국 후 보급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전상섭관장은 유도를 수련했고, 윤병인관장은 가라테이전에 우리나라의 옛 영토인 만주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만주권법(일명 장백권법)을 배워 상당한 경지에 이룬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 유학시절 가라테 수련생들을 혼내 준 것을 계기로 후나고시와 쌍벽을 이루던 도야마 칸켄교수에게 인정받아 서로 교류하기로 하고 곧바로 4단으로 昇段(승단)하여 대학내 사범이 되어 가라테인을 지도하였으며, 무덕관의 황기관장은 일본에 유학하지도 않았고 가라테를 배우지 않았으며 만주에서 중국 무술인 태극권과 담퇴 2로를 수련 후 귀국하여 가라테의 수련체계를 도입하여 지도하다 무예도보통지를 접하고 복원을 시도하며 수박도를 창시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태권도가 초창기 가라테만을 도입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이후 경무대 무도사범이었던 사운당 박철희 사범은 전통무예에 관심을 갖고 1958년 태껸의 송덕기옹과 만나 60년 로마올림픽에 한국문화를 알렸고, 1961년 9월 19일 협회명칭을 태수도로 잠시 불리던 것을 태권도 (최홍희씨에 의해 1955년 4월 11일 태껸의 어원에서 태권도로 창안)로 명칭이 된 것을 1965년 8월 5일 대한태권도협회로 개칭하였다.(1963년 제44회 전국체전에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태수도였다.) 이후 태껸과의 접목, 그리고 스포츠 경기화를 이루며 김운용총재( 경동중학교시절 윤병인 사범에게 사사 받음) 체제 하에 새로운 형태의 무예로 세계화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태권도와 수벽치기의 만남은 우리민족의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태권도의 출발선에 가라테가 있었고 가라테의 모태는 오끼나와 테였기 때문이다. 또한 오키나와 테의 모태는 다름 아닌 우리 고유의 무예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 중기 이후 민속놀이로 발전된 태껸 이전의 무예인 수벽치기(手癖打), 수박(手搏·手拍) 수박희로서 홍길동 이전에는 누가 전하였는지 알 길이 없으나 홍길동이 파조간도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간 이후 우리의 무예가 오끼나와에 전하여 졌으며 이후 금무정책으로 인하여 오끼나와인들은 수벽(박)에서 쓰기 어려운 박(搏), 벽(癖)자는 생략하고 은어로써 테(手)라고 불린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