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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옛 성전에 머물러 있는 기독교 그대가 간음하는 여자이다.
마5:27~32.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지난 번에 이 간음의 이야기는 성전의 이야기, 율법의 이야기라는 걸 잠시 언급해 드렸죠? 오늘은 본격적으로 이 간음의 이야기를 성전의 이야기와 접목을 시켜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간음하지 말라. 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우모이큐세이스’ 라는 그 어구를 히브리어로 바꾸어 보면 ‘로티니어푸’ 에요. 구약의 십계명에 나온 이 말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가져다가 헬라어로 바꾸시는 거예요. 이 단어의 기본 동사는 ‘나푸’ 인데 그 ‘나푸’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자음 ‘능알렉페’ 로 구성이 되어 있어요. 그 문자들의 각자의 의미는 아래, 하나님, 입이에요. 아래에서 하나님의 입으로 전해는 말. 그러니까 곡해되어 전해지는 말. 아래 성전에서 통용되는 말 이런 뜻이거든요. 그게 간음이라는 거예요.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혼인을 파괴하다. 우상을 숭배하다. 간음하다. 가 맞아요. 그러나 그건 히브리어라는 문자가 생겨난 이후에 사람들이 합의하여 정의한 내용이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담아 주셨던 의미와는 사뭇 거리가 멀단 말이에요. 여러분이 잘 알아야 두셔야 할 것이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애굽을 나올 때가 애굽의 18 왕조 때였어요. 그때에는 애굽에도 문자가 없었고 히브리 사람들에게도 문자가 없었어요. 문자라는 게 없었어요. 말만 있었어요. 당시에 사용되는 문자라는 건 고작 해 봐야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써서 올려 드리는 거룩한 예식에서의 글뿐이었어요.
그것도 애굽에만 있었어요. 애굽 문자가 최초잖아요. 그건 일반인들이 사용하던 그런 언어가 아니었어요. 일반인들에게서 통용되던 문자는 그로부터 한참 후인 페니키아 때에 생겼죠? 문자가. 페니키아 때에 사람들이 무역을 하기 시작했어요. 물물교환이 아니라. 그때에 무역을 하기 위해 글자가 필요해서 그때 비로소 문자가 생겼단 말이에요. 사람들이 통용하는 문자는. 그러니까 모세가 이스라엘을 끌고 애굽에서 나올 때는 문자가 없었단 말이에요.
언어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애굽 문자가 이집트 문자가 시나이 문자로 시나이 문자에서 페니키아 문자로 페니키아 문자에서 가나인 문자로 발전했다 그러죠? 그건 언어학자들이 연구해 놓은 거예요. 히브리어는 그 한참 뒤에 생겨난 거예요. 그 어원을 따져 들어가 보면 이집트 문자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가 있지요. 그렇게 모세 당시에는 사람들이 신에게 문자를 올려드리는 제례용 문자가 전부였는데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더니 거꾸로 신이 인간에게 글을 써서 내려 준거예요. 이게 기독교인 거예요.
그건 경천동지할만한 일이었어요. 당시 글이라는 건 신에게만 올려지는 거였는데 신이 글을 써서 율법(제례문자)을 통하여 인간에게 줬다니까요. 이 세상 모든 종교는 인간 측에서 신에게로 올라가는 거지만 기독교는 신이 인간에게로 내려오는 거예요. 성육신, 모세는 왕족이었기 때문에 애굽의 글을 알았겠죠? 제사 지내는 제례문자지만 하나님은 그 언어로 십계명을 주신 거란 말이에요. 글자가 그거 밖에 없었어요. 히브리 언어는 아직 있지도 않았던 때이니까. 그런데 그건 사람 사이에서 통용될 수 없었던 문자라고 그랬잖아요. 신전에서만 쓰이던 문자니까.
그러면 모세에게 그 글을 줬을 때 모세가 그걸 읽을 수 있다? 실제로는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아기가 엄마라는 말을 한 번 내 놓을 때까지 육천 번 이상을 들어야 된다고 그래요. 육천 번을 듣고 엄마라고 했을 때 그 아기가 그 엄마의 의미가 뭔지를 알아요? 몰라요. 모세는 그 글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십일을 잡아놓고 가르쳐주신 거예요. 복음을 설명해 주신 거예요. 그 위에서 모세하고 장기 두고 노신 거 아니에요. 뭘 사십일 동안이나 그걸 새기셨나? 뭐 이러는 거예요. 설명해 준 거예요.
사십일은 우리의 육신의 시간인 인생 역경의 역사를 상징하는 숫자죠? 우리 이 역사, 인생동안에 하나님은 그 복음, 하늘의 비밀, ‘무스테리온’을 설명하시는 거란 말이에요. 그걸 모세가 자기가 아는 문자로 이제 기록을 했겠죠?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히브리어로 기록이 된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당시에 히브리 언어는 자음만 있었고요. 띄어쓰기도 없었어요. 그걸 어떻게 읽어요. 못 읽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에게 읽으라고 준 게 아니다. 라는 뜻이에요.
인간이 인간의 눈으로 성경을 보다 보면 반드시 곡해를 하게 되요. 하늘의 비밀은 묵시는 이 시공의 역사, 인간에게 파악되지 않아요. 이해되어지는 게 아니라 그것이 여러분 안으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그걸 설명하려고 할 때 이게 내 안에는 있는데 인간의 언어로 또 다시 엉뚱하게 나오는 걸 왕왕 경험하는 거예요. 내 안에는 있는데 이게 내 안에 있는 말로 나오자마자 그건 또 간음하는 말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말씀 안에 은혜와 능력을 담아서 그것 자체가 능력이에요. 그걸 이해하고 내가 사유해서 능력화 시키는 게 아니라 말씀이라는 것 자체가 능력이라니까요. 말씀에 은혜와 능력을 담아서 살려내는 힘으로 준 거지 우리가 읽고 해석해서 하나님께 뭔가 그 보답을 해라. 그에 상응하는 어떤 행위를 올려야 된다. 라는 그런 의미로 준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건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지 말고 입으로만 나불 거리지 말고 행동을 좀 해라. 이런 말이 아니라니까요.
히브리어 알파벳(자음, 모음) 한자 한자에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그걸 통해서 성경을 읽는 것과 그걸 모르고 읽는 건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나는 거예요. 즉 성경은 우리의 글자나 영어로 해석하여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그대로 기록한 원문을 그대로 읽어내야 하는 것으로 또 애초에 인간들의 언어로 읽고 이해하라고 준 것이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안경을 통하지 않고는 모든 성경이 로고스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게 되요.
즉 성경을 히브리나 헬라어의 원문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이(자기 신앙따라 해석되어지니) 하나님의 언어가 아니라 그 알파벳 안에서 모든 성경이 해석되어 지는 것이다. 그 안에다 성경의 모든 진리의 언어가 귀결시켜 노놓으셨기 때문이지요. 성경에 기록된 언어가 하나님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을 한 예만 들어봅니다.
원래 아담, 사람은 하나님의 구별된 진리로 존재하기 위해 그렇게 쑴 세워지기 위해 창조된 거예요.
그게 아담의 존재 목적 이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아담은 하나님의 진리가 되는걸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 그 사람을 받아 하나님화 되는걸 목적으로 하여 사는 거예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되요 그분의 숨을 받아야 되요. 그분의 호흡을 받아야 되요. 르와흐를 받아야 생명이 되는 거라 말이지요, 그렇게 아담이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자가 되어서 이제 생기를 르와흐, 진리, 영을 받아, 말씀을 받아 그 진리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바가 되면 성경은 그를 가르켜 하아담(사람) 이라고 그래요. 관사를 붙여요 거기 앞에다가 아담 앞에다가 하아담 이라고 그래요.
사람이라고 그래요. 그 하아담은 역시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아담에 자손을 낳게 되지요? 그걸 하아담 하벤 이라고 불러요 그러면 그걸 한국말로 번역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그 사람에 그 아들이겠지요? 성경에선 그걸 인자라고 그래요 인자 예수님께서 당신을 인자 하아담 하벤 이라고 부르신건 그 인자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그 사람에 그 아들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진리로 낳는 아들들 이걸 인자라고 그래요 아담이 낳고 그다음에 또 낳고 그렇게 라인이 계속 이어진단 말이에요.
근데 그게 예수님에게 와서 완료가 되잖아요 아-- 인자가 이거였구나 라고 알게 되고 그 인자로부터 이제 교회가 하아담 하벤 인자로 또 출생이 된다 말이에요. 그래서 그 하아담의 그 자손 진리의 라인이 바로 이게 낳을 교회를 이야기 하는 거였구나 라고 알게 되잖아요
그래서 그 예수님이 나를 인자라고 한거예요. 예수님이 내가 하아담 하벤이야 라고 이야기 한 거란 말 이예요 그러니까 인자는 예수님 한분만을 가리키는게 아니예요 진리가 된 그 아담 그 하아담 그래서 그 아담이 오실자의 표상 이다라고 한거란 말 이예요 계속 그래서 아담이 오실자 예수의 표상 이라고 이야기 하는 거란 말 이예요 그 라인의 족보가 누가 복음에 나와요. 한번 가 볼까요.
누가복음 3장 23절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진리로 가르치세요)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노미조 예요 지난번에 배웠지요 노미조 하지마 노모스가 율법이니까, 노미조 하지마가 뭐예요? 사람들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두 마음으로 판단 하지마 그래요. 그런데 노미조를 하니까 어떻게 되요?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로 보이는 거예요 )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하고 족보가 나오지요? 그게 꼭대기 까지 올라가면 38절요 그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하아담) 그 이상은 하나님 이시니라
그럼 맨 위가 누구? 하나님 하나님이 낳는 거지요 지금 이게요 지금 다 소유격이거든요. 그러니까 원어 본문은 원래 원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아담 아담의 셋 이렇게 번역을 해야 맞는데 지금 거꾸로 번역을 해 놓은 거예요. 하나님이 아담을 낳으시구 아담이 셋을 낳고 이렇게 인자의 라인 하나님이 아담을 낳아 놓았더니 하아담이 진리로 사람을 계속 낳아가는 거예요 그리고는 결국 요셉 그리고 요셉의 아들 요셉이 낳은 예수 거기에서 이렇게 마쳐지는 거예요 이게 인자의 라인 이예요
그래서 이 예수가 그 인자의 라인 족보를 완료하는 분으로 그려져 있는거란 말 이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하나님이 하아담 그를 진리로 낳았어요 어떻게? 생기를 부어서 르와흐를 부어 가지고 다 상징입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진리로 계속 누군가를 낳아요 그리고 그 낳은 자가 맨 마지막까지 내려가니까 예수예요 근데 이 예수님이 인자로서 교회를 낳는 거란 말 이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교회를 진리로 낳게한 그 일을 작은 그리스도들이 그리스도인들 크리스토스가 복수 잖아요 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진리로 설명을 해 드리는 거란 말이죠. 이게 인자의 족보 인자의 라인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30세쯤 이라고 번역된 어구는 30 해처럼 이라고 그랬지요 이 예수님의 나이를 이렇게 추측해 본게 아니에요 30세쯤 되셨을까 가 아니라 30처럼 이예요 30세 처럼 이게 뭐라고 그랬지요?
요셉이 메시아의 모형으로 애굽의 총리로 선게 30세지요 그렇게 메시아를 설명하기 위해 몸으로 입으로 설명 하기위해 제사장은 몇 살부터 할 수 있어요? 30부터예요 몇 살까지? 50까지 50은 희년 이예요 그래서 바리세인들이 그런 거지요 예수님 보고 너 50도 못된 놈이 감히 그런 말을 해?
어떤 목사님이 심지어 50살 까지 사셨다구 가르치셨다구 그러던데 예전에는 한번 또 그분이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하셨다고 그래 가지고 그냥 또 문제를 일으켰었죠? 30에 제사장이 시작되어 50 희년에 완성되기 때문에 30부터 50까지만 제사장 일을 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니가 50이야? 50도 안된 놈이 왜 50의 행세를 해? 왜 니가 마치 완성이고 니가 마치 전부인거 처럼 행세를 해 이말 이란 말 이예요
50살 처럼 늙었단 말이 아니라 고생을 많이해서? 아니라니까요 호지 않은 금옷 입고 있었다니까요 금보다 더 비싼. 자 그러면 왕 이제 선지자 제사장 30이지요 그럼 왕 오실 왕의 모형이 누구였지요? 다윗 다윗이 왕위에 올라간게 몇 살? 30 그러면 제사장 왕 선지자 이게 누구의 역할 이예요? 다 기름을 붓지요 왜? 메시아의 역할이기 때문에 메시아가 기름을 붓다 말씀으로 덮다 라는 뜻 이예요 기름으로 붓다 금으로 싸다 말씀으로 덮다 다 같은 말 이예요 여러분. 그래서 금하고 기름 하고는 같은 단어로 써요 심지어 히브리 사람들이
그러면 한번 보세요 그 메시야 메시야는 죽어야 할 우리 대신에 속전을 속전으로 오시는 분 이잖아요 구약에 율법에 소가 사람을 받아 죽이면 죽여 버리면 속전으로 얼마를 주게 돼 있어요? 은 30 으로 주게 돼 있어요. 그러면 소는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을 모형으로 담고 있는 것인데 그걸 하나님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냥 소로만 볼 수 있는 거예요 이게 율법 이예요 율법이 모든 인간들을 받아서 죽입니다 율법에 묶이면 다 죽어요 다 사망이란 말 이예요 그런데 이를 살릴 수 있는 속전이 얼마? 은 30 예수님이 얼마에 팔렸어요? 은 30에 그러니까 이 30은 메시야의 숫자란 말 이예요 그래서 30 세쯤에가 아니라 30 처럼 시작 하신 거예요 뭐를? 메시야의 사역을
근데 그 앞에 아오고스토스 에이미 라는 어구가 붙어 있어요 예수께서 메시야의 일을 시작 하시자 에이미 Be 동사예요 그처럼 되는 자들이 생겨 나드라는 거예요 그들을 아들이라고 부르잖아요 에베소서에서 나오죠? 우리를 창세전에 아들로 부르셨다라고 그러죠 아들이 뭐예요 그 사람의 그 아들 인자들이 되는 거예요 또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 예수를 선악의 눈으로 판단해서 노미조 해서 요셉의 아들로만 보드라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그러는거죠 아니다 그 분은 단순히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인자 하아담 하벤의 라인으로 오신 분이야 그 라인을 완성하시는 분이야 라고 족보를 쫙 펼치는 거예요
그리고 맨 끝에 하나님 완성자 예수 이렇게 족보 제시를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담 아담의 셋 셋의 에노스 계속 내려가다가 요셉의 예수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요셉이라는 단어 얏싸프 는요 뭣뭣을 더해주다 라고 했죠 얏싸프 라는 단어가 뭔뭣을 더 해서 완성 시키는게 요셉 얏싸프예요 야곱의 열두 아들을 누가 완성해요? 요셉은 몇 번째 아들? 11번째 아들 12번째 아들은 베냐민 오른손에 아들 이지요 완성된 아들 이예요 오른쪽은 항상 완성된 아들 요셉이 이 하나를 더하여 아들을 완성 시키는 거예요 12로
그래서 요셉 밑으로 베냐민 하나가 오는 거지요 그래서 요셉에 아들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으로 등장 하는 거예요 아버지는 아들로 말 하는 거니까 여러분 므낫세는 빼앗다 제거하다 없애버리다 란 뜻 이예요 므낫세가 그런데 그 단어는 아랫것으로 해석해 주다 하는 뜻 이예요 므낫세가 아랫것으로 위엣것을 해석해 주는 말씀으로 오신 분이 누구예요? 예수지요 그분은 제거 되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므낫세가 장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위엣것을 아랫것으로 설명하는 말씀이 이땅에서 제거 되면 씨가 되어 제거되면 어떤 일이 일어 난다고 그래요?
많은 열매가 맺는다고 그러지요? 에브라임의 단어의 뜻이 많은 열매란 뜻 이예요 그러니까 요셉은 마지막으로 어떤걸 더 하기 위해 온 자예요 그래서 그렇게 완성 시키는 자 인데 그는 아들로 이야기해야 되는 거지요 그러면 뭐지요? 위엣것을 아랫것으로 설명하는 말씀이 제거되고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거 예수로 이걸 완성하는 자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아버지가 요셉 이예요 성경은 그냥 우연히 우발적으로 기록된 단어가 한 단어도 없어요
저도 그래서 처음엔 아람어나 히브리어 헬라어를 신학 다닐 때 잠깐 하였을 뿐인데 성경을 풀어가면 갈 수록 그 말씀의 본질을 원어가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별도로 몇년동안 원어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원어성경 연구원의 신학장을 찾아가 몇년동안 배우기 시작하였지만 그래서 성경은 중국어처럼 뜻 글자입니다. 즉 그 글자안에 하나님의 본질을 다 넣어 놓으신 것이지요. 즉 예수라면 호세아로서 구원자라는 뜻이고 다윗은 사랑받는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 그것을 갖다 영세명으로 사용하고도 있지만 어떻던 그 하나님의 언어를 모르고는 모든 성경을 온전히 풀어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떻던 그 진리말씀을 문자적으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긴 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나님의 진리를 올바로 전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하게 하는 자들을 아비라고 불러요. 왜? 아들을 있게 하는 자가 아비잖아요. 씨를 심는 게 아버지죠? 씨를 심는 게 아버지에요. 그래서 씨를 심어 아들을 낳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진리를 심는 자를 아비라고 그래요. 여러분 재미있는 게요. 히브리어 아버지란 말을 파자하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에요. 아버지라는 게. 하나님의 집이라고 쓰고 그걸 아버지라고 읽어요.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 성령의 전이 됐죠? 그걸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의 집이죠? 그러면 여러분을 뭐라고 읽는 줄 알아요? 아버지라고 읽어요. 여러분을. 그래서 예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가 그 말이에요. 아버지가 뭐 내 안에 어떻게 들어오겠어요? 내가 가르치니 아버지인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씨를 뿌려 자녀를 낳으면 아들인 예수가 되는 것이고요. 우리는 아버지라고 하니 저 하늘의 하나님을 말하는 줄 압니다. 그건 율법이지요. 이렇듯이 그 하나님의 언어를 모르면 전부 성경을 풀어 내기는 커녕 거짓된 자가 되어 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율법을 그냥 가르치는 사람, 교훈을 주는 사람을 선생이라고 그래요. 몽학 선생. 고린도전서 4장 14절 보세요.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일만 스승, 물이오익파이다고고스, 이게 무수하게 많은 몽학선생이라는 뜻이에요. 몽학선생, 파이다고고스.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많지 아니하다. 라는 게 우폴로스, 거의 없다. 에요. 그런데 어디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는 자들 중에 대부분이 일만 스승, 몽학선생인데 아들을 만드는 아비는 거의 없다. 우폴로스. 거의 없다. 그런데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자기 귀에 재미있고 좋은 이야기, 듣기 쉬운 이야기를 해주는 선생, 몽학선생을 두기를 즐겨한다고 그러잖아요. 거의 없대요. 그러면서 바울이 뭐라고 그래요. 내가, 내가 낳은 아들, 디모데를 보낸다. 라고 그래요.
아들이란 말을 거기 쓰죠? 내가 진리로 낳은 아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고 나서 뭐 한다고 그래요? 내가 각처에서 교회에서 아들을 만들기 위해 가르치던 것을 그 아들이 생각나게 할 거야~ 그러면 디모데가 뭐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가 되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그래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이런 것들이 이 진리 안에서 이해되면 삼위일체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한가지 더 병폐는 문자를 그래도 낫다고 하는 영적으로 풀어간다는 대부분의 종들도 전부 성경의 기록된 문자 그대로 그것을 영적으로 푼다고 하고 있고 또 그것들끼리 짝을 맞춘다는 것으로 이것은 언어도단인 것이지요. 그 언어는 바로 생명인데 그것의 본질의 의미를 모르고 보이는 문자를 해석해대면 엉터리가 되어 지는 것. 이에서 더 여러분이 잘 아셔야 할 것이 헬라어의 로고스는 진리의 말씀, 그걸 가리키는 게 맞아요. 그래서 로고스 교회, 로고스 성경, 그러나 그 로고스 자체는 진리를 담은 말일 뿐이에요. 진리를 가리키기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닌 것. 이걸 로고스(이성, 문자)라고 그래요.
마치 빛이 어두움을 드러내러 왔다. 라는 그런 개념과 흡사한 거예요. 빛이(예수) 어두움을 드러내러 왔다는 건 빛에 의해 어두움이 설명된다는 뜻이죠? 그러면 이 빛의 실체는 뭐에요? 뭘로 보여야 되요? 어두움을 설명하려면 빛이 어두움으로 나타나요. 역사 속에서는요. 빛이 어두움을 드러내러 밝히러 왔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빛은 어두움을 내용으로 하여 우리에게 보여지게 된다니까요. 그게 빛이 어두움을 밝힌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 역사 속의 빛은 어두움의 빛,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그런 이중성 그건 나중에 다시 설명해 드리겠지만,
아무튼 그러한 연유로 헬라어에서는 ‘레고’ 로고스에서 나온 거죠. ‘레고’와 ‘그레오 레마’를 달리 써요. 레마 선교회 이런 사람들 혹시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달라요. 트레스티아스 그 사람들 말하는 거예요. 그 말이 아니라 로고스는 그릇의 의미가 강하고 ‘그레오 레마’는 진리를 자체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로고스라는 건 레마를 담은 그릇이에요. 그러니까 문자를 여러분이 이걸 진리인양 문자 그대로 여러분이 해석하여 읽게 되면 로고스에 머무는 거고 그 안에 들어 있는 행간 진리를 알아야 여러분은 그거를 레마로 읽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는 로고스를 읽거나 들으면서 그걸 레마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고 같은 로고스를 읽으면서도 그걸 그냥 표면적인 그릇인 덧 문자 그대로인 로고스로만 이해를 하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에요. 대부분이 그런데 후자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 로고스라고 부르는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이 이 땅에 내려왔다. 이게 다 로고스에요. 그 분은 레마에요. 진리잖아요. 그분이. 그런데 눈과 귀가 열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씀이신 예수님은 로고스로만 보여요.
그릇으로만 보인다니까요. 표피밖에 못 봐요. 빛이신 그분이 어두움들에게는 어두움으로만 보여요. 그래서 죽여 버린 거예요. 왜 어두움인 우리의 정체를 폭로시키느냐~ 는 거죠. 성도는 말씀을 예수를 그렇게 표면적으로는 봐서는 안 되는 거예요. 성도는 말씀 안에서 예수라는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산 위에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은 한 마디로 예수였어요. 열 가지 항목을 하나하나 잘 지켜서 하나님을 감동시켜 보라고 주신 아니란 말입니다. 말씀은 그 어느 곳 그 어느 곳을 뒤져도 다 예수밖에 없어요. 따라서 십계명도 예수에요. 그 열 가지가 담고 있는 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그랬잖아요.
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그 연합의 현실, 그 한 몸의 현실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말씀이 이룰 것이다. 라는 언약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거예요. 그게 계명이고 모세 오경이고 성경 66권이란 말이에요. 그것이.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언약이라는 건, 위로 솟은 기둥으로 설명되기도 했어요. 그 기둥이라는 단어가 ‘스타우로스’ 인데 그 단어를 십자가로 번역한 거예요. 그 십자가는 언약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기둥이에요. 열 십자로 된 십자가라는 의미는 성경에 안 나와요. 기둥 ‘스타우로스’ 십자가 언약이라는 말만 나온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26:23. 하나님을 머리로 한 한 몸으로서의 하늘 존재를 완성해 내실 것이다. 가 계명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입에 문 상태에서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이 주신 문자를 읽게 되면 반드시 그 내용을 곡해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인간의 눈으로 보고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며 인간의 행위로 열매를 맺으려고 해요. 그게 율법이잖아요. 그래서 간음하다. ‘나하프’라는 단어가 아래에서 이해되어지는 하나님의 입, 즉 아래의 성전, 옛 성전 이렇게 표현되는 거예요. 그게 간음이에요.
‘나하프’에요. 예수께서 옛 성전에 앉으셔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소재로 해서 그 여인을 향해 돌을 들었던 유대주의 모두를 간음한 자로 폭로해내신 것을 기억하시면 이해가 쉬우실 거예요. 하나님 말씀을 목숨 걸고 지키려했던 유대인들이 기실은 간음하는 자들이었다. 라는 걸 폭로하신 거예요. 그게 간음이라는 거예요. 그게 옛 성전이잖아요. 율법이잖아요. 그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현행범을 앞에 놓고 니들 중에 나는 이 여자와 다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그랬던 거예요.
아무도 못 들었죠? 그 말은 뭐에요? 니들이 바로 간음하는 자들이다. 라고 하나님이 그냥 폭로시켜버린 거란 말이에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 문자 수준에서 이해를 했고 그 수준에서 행동에 옮겼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간음이다. 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들의 손에 이웃을 살해할 돌이 들려 있었죠? 그게 뭘 의미하겠습니까? 간음이 곧 살인이라는 걸 간단한 그림으로 보여 준거예요.
간음하는 자들을 항상 이웃을 살해할 돌을 들고 있는 위험한 자들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따라서 성경이 살인하지 마. 라고 했을 때 그럼 이제 앞으로는 절대 사람 죽이지 말아야지. 라고 결단하는 게 곧 살인인 거예요. 이걸 잘 이해하셔야 되요. 말씀드렸다시피 성경의 명령은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선악 체계 속에서의 의무사항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십자가)로 읽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한예로, 이전에 저도 잠깐 귀를 기울려었던 적이 있지만, 진리의 십자가를 외치는 교회가 있었는데 그래도 너무 다행스러운 것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록이라고 전하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본질의 뜻이 애모모호한 것. 그 해석들을 전부 로고스로 해석해대고 또 필요시엔 전부 짝을 맞추어 즉, 그 짝도 그냥 문자로 보이는 성경을(본래의 의미인 하나님의 히브리원어를 해석해놓지 못함이기에), 문자대로 영적인 해석을 해 놓거나 혹은 서로 짝을 맞추어 풀어놓고는 최고의 진리라고 선언하곤 하는데,
그에서 또한 본인들이 문자는 영으로 푼다고 짝을 맞추면서도 또 필요시엔 숫자는 그대로 성경에 기록된 숫자로 풀어 인간의 끝날인 종말이 언제언제라고 계산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데 본래 히브리어에서도 성경안에서의 숫자는 영의 문자를 셈법으로 도식화여 기록한 문자인 것으로 즉 그 안에는 다 영적인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를 보이는 숫자로 보면 율법마저도 아닌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교리가 되어 버리는 것이예요.
본래의 인간의 숫자 계개념으로는 하늘의 시간은 오직 하루 뿐입니다. 즉 영적으로 빛이 함께 하는 날을 하루(욤, 정오, 한영)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기록하는 셋, 여섯, 열둘, 천 등을 표현하는 숫자들도 모두 하루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에 따라 구분하여 놓은 숫자개념일 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했듯이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는 말은 성경에서 천이란 숫자는 인간의 수 개념으로 가장 큰 개념을 표현하여 놓은 것이기에 모든 수를 대변하는 용도로 그를 표현하여 하루라고 했던 것이듯이 즉 인간의 모든 수가 영적인 하루로 표현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그럼에도 성경의 기록된 숫자들을 그대로 사용한다고거나 숫자의 표기를 그대로 육신의 숫자로 사용하여 영의 시간을 계산해내는 것은 간음을 범하는 것이죠.
성경에 기록된 숫자를 잘 구분하고 영적인 해석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성경의 숫자하고 육적인 시공의 숫자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거죠.
히브리 사람들의 숫자 개념에 대해서 이전에도 자주 언급을 해드렸는데, 히브리 사람들은 1을 하나님의 숫자로 사용하고, 왜? 하나님은 늘 진리는 늘 하나로 통합하는 그런 본능을 갖고 있어요.
2를 사람의 숫자로 사용한다고 그랬죠?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항상 둘로 나누는 그런 본능을 갖고 있으니까. 그리고 3을 하늘의 숫자로 쓰고 4를 땅의 숫자로 써요. 그래서 하늘을 삼층 천으로 묘사를 하는 거고,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의 그 구원의 처소, 하늘의 모형이죠? 그 노아의 방주를 삼층으로 만든 거죠. 창세기를 보면요 맨 아래 층을 칸탄이라고 그러는데 그 말이 가장 저급한 하늘, 가장 저급한 것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율법과 성전으로 주어진 하늘이 일층 천이라고 그랬잖아요. 그 하늘은 가장 저급한 하늘의 묘사 방식이다. 라는 의미에요. 뿐만 아니라 성전도 세 부분, 제단도 삼층, 성전의 기단도 삼층, 집을 지을 때 계단도 삼층, 이렇게 3은 하늘의 숫자에요.
반면에 땅은 전부 4로 되어 있죠? 계시록에 보면 땅을 항상 네 바람, 네 모퉁이 이렇게 이제 이야기를 하는데 고대 때에는 땅이 네모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바다 멀리 나가면 그 네모의 끝에 도달해서 뚝 떨어진다고 가지 말라고 그랬단 말이에요. 콜롬보스 이런 사람들은 용감한 거죠. 동서남북, 춘하추동, 상하좌우 하여튼 땅의 숫자에요. 넷. 그런데 재미있는 건요 하늘을 모형 하는 그 성전, 3의 성전이 3의 하늘이 이 땅에서 완성이 되면 정사각형이 되요. 사각형이 됩니다. 땅에서 그게 완성이 되면. 지성소도 정사각형, 성전도 전체가 정사각형이에요. 요한도 그 완성된 하늘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계시록 21장 16절 보세요.
16 그 성은(거룩한 성)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이게 완성된 하늘의 새 예루살렘이거든요. 이게 하늘이에요. 물론 우리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하늘이 네모반듯하다. 고 그래요. 3의 하늘이 4의 하늘이 된 거예요. 원래 3의 하늘에 하나가 끼어들어서 4가 된 형국이란 말이에요. 이것이요. 그 네모반듯한 하늘이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래요. 12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아들의 숫자라고 그랬어요. 야곱의 열 두 아들, 그래서 베냐민 오른 손의 아들, 아들의 완성으로 그 열둘이 끝나버리는 거죠. 그 천은 일과 같은 숫자에요. 히브리어 알렙이 일이고 천이에요. 그리고 사람이고 하나님이에요. 단어 자체가. 그러니까 천은 일이에요.
그건 나중에 이 뒤에 가면은 이 천이 나오는데 거기서 자세하게 설명해 드릴 거거든요. 아무튼 완성된 아들, 하나로 와성된 아들, 그리고 진짜 완성된 천의 아들, 이게 일만 이천이에요. 그러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에요. 그게. 그리고 그게 신부라고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이 이야기한단 말이죠. 그걸 하늘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3의 하늘이 자 3의 하늘이 땅에서 4로 완성이 되면 그것을 완전, 안식 등으로 불러요. 그래서 그 둘을 합한 수인 7이 완전수로 쓰이는 거예요. 4라는 땅이 3이라는 하늘을 수용해서 하늘과 땅이 하나로 연합하면 7이 되어 안식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 둘이 이제 자칼과 네케바 신랑과 신부로 합쳐지는 형국이에요. 그런데 삼각형이 사각형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늘이 이 삼각형의 꼭지점을 중심으로 해서 이 옆변이 갈라져야, 찢어져야 되요. 그래야 이 하나가 에스카톨로스코드란테스로 마지막 하나로 척 갖다 붙어서 성전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3의 성전이 땅에서 4로 완성이 되는 거예요. 어떻게? 진리의 말씀으로요. 그래서 그게 연합이 되면 7이 되는 거거든요. 그게 십자가죠. 하늘이 찢어지는 거, 휘장이 찢어져 버리는 거,
그렇게 찢어져서 4로 완성이 돼야 이 피조물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갖다가 너희가 호리라도 갚지 아니하면 옥에서 못나온다. 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호리라도가 에스카톨로스코드란테스 라고 그랬잖아요. 그게 넷의 마지막 하나, 그게 완성 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옥에서 나올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어떻게 넷이 되죠?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산상수훈에서 너희가 에스카톨로스코드란테스 마지막 하나로 채워지지 않으면 너희는 절대로 옥에서 못 나온다. 라고 해 놓고 네 개를 준단 말이에요.
뭐 뭐를 줘요? 살인하지 마. 이건 희생 제사 드리지 마에요. 원래. 살인하지 마. 간음하지 마. 거짓 증거 하지 마. 사랑해. 이렇게 네 개를 주죠. 그러니까 이거를 세 개를 이게 확실히 무엇인지를 알아서 이것을 갖다가 아 이게 그 말이었구나. 라고 내가 알아 겉옷으로 입어, 이것을 다른 이에게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래요. 라고 흘려주면 그걸 사랑(이웃)이라고 그래요. 이웃을 사랑해. 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어요. 왜냐면 그분은 보이지도 않는데 그 보이지 않는 무한의 하나님을 유한의 사람이 어떻게 사랑하느냐고요. 그래서 그 위에 십계명의 위에 하나님 사랑에 대한 거는 예수님이 말씀 안 하시는 거예요.
이거는 너희가 안 되는 건데, 네가 그 밑에 것을 네들이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다. 라고 말씀해 주시는 건데, 그 아래 것을 네 개로 말씀해 주신단 말이에요. 이게 이웃사랑이야. 라고 하면서 살인하지 마. 간음하지 마. 거짓 증거 하지 마. 다. 말에 관한 거잖아요. 우리는 이제 배웠으니까 알잖아요. 그걸 알아서 배워서 이걸 흘려주는 거. 이게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전달해 주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니까 그 뜻이 되어드리는 나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것이. 그렇게 넷이 되는 거예요.
즉 저도 과거에 성경에서 보이는 숫자대로 풀어서 시간도 계산하곤 했었는데 그것은 율법이나 그리스도 초보 때에 이해하는 수준일 뿐인 부끄럽던 시절도 있었지만 또한 문자에 대해서도 어떤 이들은 성경을 보이는 문자로 풀면 안되고 그를 영으로 풀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종말이라는 부분에서는 문자나 숫자를 그래로 해석하여 육의 끝날이 어떻고를 말하고 있지요. 성경은 육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표현하면서도 말입니다. 그 종말도 육의 종말이 아니라 영적인 내 내면의 종말 즉 십자가 죽음 전후를 말함이예요. 내가 십자가에 죽었을 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임하시기에 그것이 새하늘 새 땅이 열리는 것이고 그게 구원이고 천국이잖아요.
어떻게 영적인 해석을 표방하는 단체가 육적인 해석으로 우리가 죽어, 승천하여 성전을 완성으로 이루어내고 천국간다는 말을 한단말입니까. 믿는자에겐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오직 이 땅에서 육이 살아있을 때 십자가에 죽음으로 천국을 이루어야 그 육신의 옷을 벗었을 때도 그 영혼이 천국 자체이기에 그게 천국간다는 것이지 내 면에 천국도 못 이룬 성도들이 죽으면 천국간다고요? 물론 우리가 육을 벗으면 천국가는 것은 맞지만 그 천국도 육이 살아있을 때 천국을 이루어 놓은 자들이(그리스도가 임한자) 천국에 임한다는 것이지 죽어서 휴거하여 천국간다는 말은 오직 육신의 표현일 뿐이지요. 그 육신의 법은 영적인 그림자일 뿐이지 살체가 아니라고 히브리 기자는 말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죽을 때 자기 자기의 뜻과 의지인 소유를 팔아야 하기에 마음의 요동쳐 지진이 나는 것이고 계시록 사건, 마24장 눅13장의 종말장이 탄생하게 되는 것으로 바로 그 상태를 글로 표현해 놓은 것일 뿐이예요. 실제로 십자가 앞에 선 우리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표현해 놓은 것이예요. 바리새인을 포함 제자들도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가고 예수님도 바로 십자가 앞에서 번민하시는 모습으로 보이듯이 그것이 육신을 가진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요동치는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표현한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구를 멸망시키시면 율법을 범하는 것으로 즉 그 지구는 영의 그림자로 영이 영존하는한 그냥 계속 공히 존해할 뿐으로
앞으로도 천만년을 보세요.
결코 지구가 없어질리가 없는 것이지예요. 옛 하늘과(나의 심천) 옛 땅이(심지) 내가 십자가 죽음으로 그리스도가 임하시니 새하늘(그리스도의 심천) 새 땅(그리스도의 심지)이 임하는 것이고 그 십자가는 육으로 죽는 십자가가 아나라 믿음으로 죽는 영의 십자가인데 어찌 또 다시 육신의 법으로 돌아가 육신이 죽고 새로운 새 땅과 해새하늘이 열린다고 하나요. 그래서 그 하늘이 열리기 전에 그 십자가로 내려놓아야 하는 내 심령이 고난을 받는 것이고 그 탐심과 세상을 버려야 하는 그 고난이 나의심령 안에서 계시록에서의 지진이 되어 요동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면 요동을 친다는 이유가 자기가 가장 아끼고 애지중지 키워온 자기의 의와 육적인 본능을 팔아야 하기에 그런 것인데 또한 그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자기 내면의 육신의 것들인 공중의 권세 잡은 세력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고 그들과 십자를 놓고 싸우기 시작하는 것이고 그럼에서 버리고 싶지 않은 그의 내면의 종말이 가까워 왔음을 알게 되기에 그렇게 요동을 치는 것입니다. 실지로 그 십자가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동안은 우리들은 반드시 처리되기커녕 지배당하고 종속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창세기에서도 둘째 날 비로소 영과 육, 에고의 고집과 하나님의 정신이 둘로 나뉘어 보이는 것이듯이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죠. 공중의 용이 그 기운을 잃을 날이 멀지 않았기 때이예요. 육신의 생각은 영의 생각과 공존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생각을 잡아먹고 영의 세계를 성숙시키라는 데에 있는 것이듯이요.
그리고 어떤이는 스스로 내가 예수네 성령이네 멜기세댁이네 라고 하곤 하는데 물론 영적으론 그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으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니깐요. 그러나 오직 연안에서 한몸으로써의 표현인 것이지 개인별로 육신 안에서도 내가 그노라고 하면 불법인 것이지요. 즉 말씀이 십자가로 완성되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 사망(율법)을 완성하였으면 다시 육을 입고 오셔 율법을 다시 완성할 필요가 없기에 이 땅엔 성령이신 진리의 영으로 오실 뿐인데 거꾸로 육신을 입고 자기들의 이 땅에 다시 예수로 왔다고하면 예수를 다시 땅으로 끌어내려 그리스도를 다시 생산해내야하는 즉 예수를 두번 죽이는 것이지요.
이에서 십자가를 또한 잘못 알고 지고 있다는 것으로 예수께서 십자가를 단번에 사망(율법)을 이겼다는 것은(십자가 죽음) 율법의 행함을 복음으로 깨닫게 하여 죽게(다시 율법의 행위를 하지 않게)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도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려면 우리가 스스로 육의 죄를 씻어내고 율법을 행하려고(불법을 행하는 자임) 하는 그 나의 의에 의한 행위들을 하지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말하여 자기 소유를 파는 것으로 이것이 십자가 죽음이기에 우린 바울이 말한대로 날마다 죽는다고 즉 날마다 내가 하려는 나의 율법의 행위를 내려놓는다고 하는 것이 안식에 거하는 것이요,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기에 바울이 그런 말을 한 것인데 어느 단체에선
바울이 날마다 십자가를 자랑하고 죽는다는 말을 내 안에 있는 죄(실지는 그 죄는 율법을 행하는 것이 사망인 죄임)가 나올 때마다 "나는 죽었다"라고 하는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런 모순이 어디있겠나요.
즉 바울은 이미 율법으로 온전한 자였다는 것은 이미 육신으로 짓는 죄(십계)는 이미 짓지 않던 자였다는 것이고 또 영적인 죄도 예수앞에(진리) 왔다면 그 죄(예수를 모르던 죄)에서 벗어났기에 그는 우리가 죄라고 정의하는 영육간의 보여지는 죄 때문에 매일 죽는다는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자기는 스스로의 표현대로 율법으로는 온전한 자였기에 이제 복음안에 왔는데도 아직도 율법을 이루어 스스로 해내려는 그 사망의 법인 율법으로 가려는 죄,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이 주여, 주여 하면서 모든 형제들을 향하여 주의 일을 했는데도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라고 하신 것처럼 그런 율법의 행위가 불법인 사망안에서 행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그 율법의 행위를 제하기 위하여 복음을 통하여 이제 그 율법은 그림자이니 마음의 법으로 하는 것이야! 라고 그 율법을 온전케 하신 사망을 멸한다는 것이 십자가인 것인데 그러니 너희도 그 십자가를 지고 다신 그 율법으로 행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나를 따르라고 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들도 우리가 육신의 죄를 지었기에 그 죄를 십자가에 죽인다는 말이 아니라 오직 사망의 법인 육의 법이 아닌 나의 소유(율법) 내려놓기만 하면 은혜의 법인 복음으로 나를 완성시키겠다는 것으로,
그래서 그 율법은 죄라는 것을 증명해낸다고 하는 것으로 스스로 내가 하려는 그 율법을 내려놓는 것이라는 것이 십자가인 것인데 어느 종은 종말 때가 되면 본인이 그 십자가에 다시 죽어야 한다는 논리는 엉터리인 것. 그 십자가가 율법의 행위를 내려놓을 뿐이라는 것을 그 진정한 십자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미 율법을 내려놓고 간다는 스스로가 다시 율법을 버리는 십자가에 죽어야 모두가 천국에 같이 갈 수 있고 영원한 천국을 이룬다고 하는 이중말을 하는 것은 거짓인 것이지요. 그러면서 자기 본인이 하나님이라고 자꾸 하는데,
우리 피조물들은 그 누구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본체가 될 수 없는 것. 오직 그 본체의 빛을 받아 아저지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일뿐으로 그래서 내가 아버지의 일을(이름으로) 하고 있기에 우리는 아버지라고도 예수라고도 하는 것일 뿐으로 그를 그림자인 육의 법으로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해는 하나일 뿐인데 그 해가 소멸되고 다시 새로운 해로 만들어질까요? 그리고 그 해는 달(증인, 종)과 다릅니다. 그 달은 오직 해를 반사해 낼 뿐이지 스스로는 절대 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이를 영적으로 표현하면 사랑을(해) 이루어 내려면 믿음(달)을 통하여 이루어 가는 것이지 그 믿음 자체가 사랑이라는 말은 아닌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들은 아들이요, 인자요, 독생자라는 말로는 표현되지만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모델로하여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과정을 호칭으로 기록하기 위하여 예수님 자체를 명명하여 지나가신 것일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아들이요 인자라는 것은 아닌 것으로 오직 본래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라는 것이지요. 헌데 어떤 단체의 권세잡은 분들은 스스로를 하남님의 본체라고 표현하고 또 그들이 해석한 말씀이 유일무이한 온전한 진리라고 말하며 오직 그 말씀만으로 구원이 천국이 임한다고 하곤 하는데 그것은 천국의 질서를 잘 모르시고 하는 말들이예요.
즉 예수 그리스도께선 다시는 육을 입고 오시지 않을 뿐더로 또 오직 하나인 해의 상징인 예수 그리스도는 한분으로 그러나 달은 12달이 있듯이 그 말씀(해)을 비추는 종들은 12사도를 이루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도 12제자 또 그리스도인 성령으로 다시 오셨을 때도 12사도를 양육하시듯이 우리 성도들은 예수그리스도 한분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깨달음을 받으신 12명의 종들에게 배우는 것을 12(온전수)사도로 표현한 것이지요. 그런데 어떤 단체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이 직접 다 풀어주신 온전한 진리라고 하곤 하는데 그게 아니라 12명의 사도들이 있다니깐요.
그림자인 세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수많은 선생들이 필요하듯이 또 우리들의 배움의 터전인 학교를 보시면 압니다. 인간 지식의 한계라고 하는 아인쉬타인이 처음부터 온전한 지식을 받아 처음부터 이루어냈겠나요. 그가 그 경지에 올라가기 까지는 수많은 선생들과 지식들이 동원되어 그를 만들어 갔을 뿐이고 그 위에서 그가 개척하여 간 것일 뿐이지요. 이제 막 십자가 앞에 온 자들에게 온전한 진리를 주면 그들이 깨닫거나 곡식의 양식을 바로 받아 먹을 수나 있겠나요? 육신으로 표현되는 야곱의 지렁이가 아스팔트 위에서 강한 햇볕을 받으면 어찌 되겠나요. 바로 죽어 버릴거예요.
본래 말씀이신 하나님외에는 진리말씀을 누구 하나에게 일방적으로 다 몰아 주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면 그가 육을 버리고 영으로 못 이룬 부분이 있다면 그에게서는 그 말씀이 새가 먹어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자 모든 믿는 성도들에게 각자가 자기 소유를 팔고 내려놓은만큼 깨달음의 진리를 허용하는 것입니다. 못이루었으면서도 깊은 진리말씀을 갖을수가 있을수 있다라고 말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런 분에겐 하나님께서 깊은 말쓰믈 깨닫게도 안하실 뿐더러 혹 어디어 배워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물론 잠깐은 가르쳐낼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스스로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언젠가는 그를 포기하게되어 있습니다.
또 예를들어서 십자가에 자기 소유를 팔아라고 할 때 그 소유가 무엇인지의 의미를 정확히 알게되는 말씀을 갖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가르칩니다. 여러분의 소유를 내려놓으세요. 하는데 정작 가르치는 본인이 못 내려놓고 있으면서 가르친다고 성도들도 본인도 알게 된다면 그 종은 다시는 그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예요. 즉 스스로 생명이 된 열매를 갖고 있지 못하기에 그 열매를 보일 수가 없기에 그 말씀 전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들에게 십자가 도를 전하다보면 무엇을 그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칠 때는 제가 못 내려놓은 부분은 깨달은 말씀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적당히 돌려서 타협하며 가르칩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그 진리를 오염이 되어져 버리는 것이지요. 또한 여러 목회자들에게도 가르쳐보면 그럽니다. 나 이 말씀을 가르치면 교회운영 못해 그리고 교회에서 쫒겨나. 그럽니다. 왜일까요. 예를들어서 십일조에 대하여 가르친다고 봅시다.
그 십에 일조는 우리가 월급타서 내는 십분의 일이 아니라 그것은 그림자이고 오직 생명된 내 심령 즉, 열매인 예수그리스도를 바치는 것이 십일조인데 그것을 가르치고 나면 성도들은 그 다음부터는 원급타서 십일조를 하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산상수훈도 육적인 복이 아니라 내 내면의 복을 말한다고 하면, 모든 기도도 육적인 기도가 아닌 영적인 구원에 대한 기도만 하라하고 헌금을 바치면서도 육적 복을 위해 하지말고 영혼의 복을 위하여 하라하면 다음부터는 헌금도 봉사도 안하려고 할 것이예요.
그러면 어떻게 교회가 운영되고 목사가 어떻게 교회를 이끌어 가겠나요. 원래 십일조라는 것은 내 것이 아닌 아들인 그리스도 자체를 말하기에 내가 하나님을 향해 제사나 율법을 행하려하고, 내가 율법대로 이루어 보려고 하는 나의 모든 의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것이 내가 안식에 거하는 것이고 그것이 야보보서 2장에서 말하신 행함인 것이고 그 안식에 거하게 될 때 나는 없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 계시기에 그 때 올려지는 모든 것이 십일 조인 것이기에 이미 나를(내것을) 포기한 나 자신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올릴 때는,
아 이 모든 것은 내것이 아닌 아들인 하나님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그를 다시 바친다는 그런 마음을 바치는 것이 십일조이기에 그런 십일조는 바치는 자들은 자기 의나 복받으려고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들을 바치기에 더 감사하고 하나님의 의로 더 풍성히 바칠 수가 있기에 교회안에서도 더욱 풍성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해내려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는 자유함을 받는 것이 안식인 것이기에 이미 십자가에 죽은 자들은 모든 수고를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기에 내가 144000이 되어 증인이 되겠다. 내가 300명안에 들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지겠다 라는 자기의 수고는 모두 헛된 것이고 그게 바로 아직도 율법 안에 거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이예요.
어찌 이미 십자가로 자기 것을 벗고 저 천국에 임하여 천국을 이룬(천국, 성전, 그리스도가 임하였기에 자기들도 이미 성전이라고 하면서도) 자가 거꾸로 다시 어느 때 종말 때가 되면 시온산에(자기가 영적인 시온산인데 육신의 시온산을 찾는 것은 율법, 예수를 다시 땅으로 끌어 내리는 것임) 임하여 휴거를하고(저 하늘로 올라간다는 생각 자체가 육의 법임) 천국에 가고 하는 엉뚱한 종말론을 내세우는 자들이 있는데 그 모두가 육의 법인 것. 즉 이미 십자가 죽음으로 그리스도가 임하여 성전이 된 자들은 이미 천국이 임한 것이고 성령이 나를 이끌어 가는 천국인 것이지요.
그런 자들은 이미 나의 일을 쉬는 안식에 거하는 것이고 나는 모든 것에서 자유함을 얻은 자들이기에 다시 내가 열심을 다해 증인이 되고 144,000이(12의 숫자가 충만한 수일 뿐이다) 되어 300(3의 충만한 숫자, 300이라 보면 율법임)명이 되어 어찌어찌 한다는 모든 것이 아직 율법(심판 안에, 지옥에 거함)안에 잇다는 것으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것처럼 내가 천국간다는 생각,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 겠다는, 내가 증인이 되겠다는, 내가 봉사 헌금하겠다고 하는 모든 것들이 아직 자유함을 받지 못한 성전이 아니라는 것으로 저 하늘에 가겠다는 것 자체처럼 육의 법 안에 있는 율법안에 거하는 것이지요. 그런 자들은 천국의 실체인 증인도 아들도 아니라는 증거인 것이예요.
베드로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함을 포기하고 오직 내가 주를 사랑할 수 없음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자신의 것을 포기할 때 네가 이제 나의 영을 먹이라고 하듯이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임하여(성전임) 아가페를 이루어 내는 것이기에 그런 것으로 그 때야 내가 아들이 되어 사도(증인)가 되는 것이지요. 그 때부터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아들인 그리스도가 영생을 완성해가는 것이고. 우리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내가 천국이 아루어져 있지 않을 때 아버지를 표현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복음을 전하실 때 하나님이란 말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오직 십자가 앞에서(육이 죽어야할 때)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두는 내 안에 아버지라고 하는 것인데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데 너희는 왜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고 하는 것처럼 그러면 그 아버지는(천국) 뭐냐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는 바로 복음의 씨를 주기 시작 하실 때는 그 자신이 아버지인 것이지요. 즉 씨를 통하여 자녀인 생명을 낳을 수 있기에 아버지의 자리에 가 있기에 나를 보고 왜 아버지를 찾느냐고 하듯이 우리 역시도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로 아들로 있을 때는 그냥 생명으로 자라갈 때를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나를 온전히 버리고 살려주는 영 안에서 안식에 거할 때 내가 씨(그리스도)를 갖고 있기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씨를 전해주면 바로 내가 아버지가 되어 있는 것. 즉 내가 그 아버지인 예수요, 그리스도요, 천국인 것이지요. 즉 십자가에 죽은 자들은 내 안에 그 아버지인 그리스도가 임하셨기에 또 그분의 씨로 내가 살려주는 영이 되어 아버지의 일을 하기에 내가 아버지가 되어 지는 것이기에 그 때부터는 저 하늘의 하나님, 저 천국, 휴거, 종말이라 하는 모든 것들은 다시 율법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
즉 십자가는 율법의 예수에서 복음의 그리스도로 넘어가는 복음인 것이기에 그 십자가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생명의 여정에 거하지 않고 그냥 율법 안에 계속 있는 것을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죄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율법 안에서(행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죄라는 것으로 그래서 어느 단체처럼 내가 육신의 죄(그 죄가 아님에도 죄라고 생각함)를 지었을 때마다 그 죄를 십자가에 스스로 내려놓고나는 죽었다고 생각한다는 것 또한 율법인 것으로 십자가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써가 아닌 내가 스스로 하려는 것의 나의 소유를 파는 것 자체가 십자가 죽음이라는 것인 것으로,
그래서 아, 나는, 나의 힘으로는 그 무엇도 할 수도 이를 수도 없이 안되는구나! 오직 그리스도 생명만이 이것을 완성할 수 있구나! 라고 생각하여 그분의 은혜와 긍휼만을 바라보는 그 자체가 내 소유를 팔고 은혜만을 구하고 있는 십자가 죽음이요, 부활인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모르니 날마다 육신의 죄지을 때마다 십자가로 죽으려하니 거꾸로 율법 안으로 계속 들어가려 하기에 거기엔 심판의 사단이 임하고 있는 교회가 되는 것으로 그 안에서는 천년을 십자가에 죽고 주님 다시 오시기를 기다려도 결코 임하지 않는 것. 오직 그 자체도 다 내려놓고
즉 나 죽었다고 하는 것이 성전이고 천국에 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야야 할 것이겠지요. 그 십자가도 모르면서
또한 영적으로 말씀을 전한 다는 사람들이 자기가 아버지, 예수라고 자꾸 표현하면서도 그 이유가 왜 스스로가 하나님인지도 모르고 하는 말일 뿐이지만 그런데 아직 율법 안에 있는 자들이 찾는 하나님, 저 천국을 휴거를 통하여 시온산을 통하여 간다는 말을 하는 것은 문자인 성경을 영으로 풀어낸다하여 스스로 진리의 영의 법 안에 거한다고 하는 자들이 거꾸로 육의 법으로 가서 천국을 찾는 형국인 것이지요. 내 안에 아들의 씨가 없기에 내 안에 아버지가 없기에 천국심령이 아닌 율법의 천국 하늘을 찾고 있는 모순인 것이지요.
그러니 혹 어느누가 깨달은 깊다는 말씀을 배워서 가르치고 있더라도 배운 말씀대로 전하지 못하고 자기 단체, 교회유지를 위하여 성도와 세상과 타협하고 교리를 적용하여 가르치고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으로, 기복신앙으로 인하여 그래도 조금이라도 영적으로 깨달아 간다는 단체들마저도 스스로 종주가 되어가고 오히려 그들이 사단이 그 위에 임하여 다스리게 하는 회당이 되게 하는 그러므로 모든 종교가 더욱 그러하게 되어지니 이 세상이, 종교가 이토록 빛 한점이 허용되지 않는 흑암에 거하게 된 원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온전히 안식에 이르게 하는 십자가 진리는 특별한 어느단체도 일반 교회나 목회자 안에서는 존재할 수도 없는 말씀인 것입니다.
실제로 십자가란 우리의 육신의 죄가 어떻고 하는 초보적인 문제가 아닌 그의 모든 육신의 문제는 근본인 육의 법인 그 율법에서 시작하는 것이기에 그 율법과 십자가인 그 후의 복음의 문제인 것으로 그 율법이 죽고 복음을 취하게 되는 것이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인 아들의 복음으로 부활한다는 것으로 그에서 십자가의 진리를 깨달아보면, 그 십자가(요나의 표적)에 죽어보변 성경이 보이기(예수로, 성전으로) 시작합니다(눅24:45). 그래서 누가 성경풀이는 해 놓았도라도 스스로 그 해석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구분하여 가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 십자가를 깨달았더라도 그에서 부터 다시 새하늘과 새땅까지 안에 엄청난 진리가 질서있게 존재하는 것이지요만요. 그래서 남의 해석을 보면서 배우고 자기가 스스로 깨달아 가면서 정리하여 자기의 깨달아진 말씀이 탄생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가 누구라도 내가 처음부터 온전히 깨닫고 받아낸 것이 아니라 즉 모세가 율법을 갖고 내려오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지 못하고 애굽의 세상의 법으로 가서 우상을 섬기니 그 돌판을 깨버리듯,
그를 이루지 못한자가 받으면 바로 자기 안에서 소멸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버려 버리는 것이라는 것. 오직 누구든지 서서히 십자가 앞에서 죽어가면서 깨달아서 내 안의 장성한 그리스도로 지어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편한편의 드라마가 탄생되어 가는 것. 어찌 그 누가 성경학교, 일반교회나 수많은 직임들을 거치지 않고 바로 목사가 된 사람이 어디있겠나요. 그래서 한 성도에게는 수많은 성령으로 깨달은 선생들이 내게 필요한 것이고 그것을 표현하여 12사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헌데 어떤 종들은 자기가 혼자 골방에서 돌이라 나무 아래서 전부를 진리를 깨어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논리라면 예수께서 한명의 제자만 선택하여 사도로 만들고 가야할 것입니다. 오직 자기 소유를 내려놓고 십자가에 죽은 만큼 내 안에 그리스도 영이 임하시기에 그만큼 영의 깨달음을 얻는 것인데 그래서 성도하나가 하나님의 경지에 온전히 임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각자가 스스로의 육의 소유를 팔아 깨달은 말씀을 12명에게(십자가진 자 전부) 주시는 것입니다. 내안에 그리스도가 임한다는 것이 바로 그 진리말씀이 내 안에서 깨달음으로 보인다는 뜻인 것으로
자기만의 진리를 담아 놓은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진실로 진리가 들어 있지만 온전한 진리가 다 들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그 안에서 예수가 있고 십자가가 있으면 그게 진리인 것이지요만 그안에서도 진리의 깊이의 차이는 천국계단만큼이나 깊고 낮음이 있는 것이예요. 그래서 우리도 성경을 보면서 그를 찾아 가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면 그 안에 십자가가 보이고 예수가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깊이를 덩하여 점차 장성함에 이르러 가게 되는 것으로 그래서 바울이 날마다 십자가만 자랑하고 그 십자가만 지노 죽는다고 하는 것으로 그래서 자기만의 깨달음을 정리하여 가는 것이지요.
그것을 갖고 자기가 깨달은 말씀이 온전하다고 말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자기가 아무리 배우고 깨달아 이루어 놓았더라도 다른 12의 진리가 있다는 것을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비유하여 시대마다 수많은 종들이 백성들을 이끌고 갑니다. 그것은 성경이 나 개인(예수와 합한자)을 두고 한 말씀이듯이 우리가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수많은 선생들이 필요하듯이 내 안에서도 나의 내면의 완성해갈 때도 아담부터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창세기부터 게시록을 이르기 까지 내안에서 수많은 사도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예요.
헌데 난 인간에게 배우지도 않고 모두 하나님께로 직접 온전한 진리를 받았다라고 자기만 유일한 대리자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그 표면적인 말은 틀리는 말은 아니지만 자기것은 모두 먼저 이미 하나님을 통하여 깨달음으로 간 사람들에 의하여 배우고 깨달아 이룩되어 지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의미를 잘 모르면 그 그림자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대로 그 육의 법을 알 수 있듯이 어느 누가 초등학교에 막 들어가서 등급별로 선생도 없이 대학교 교수에게 배웠다고 다 이루어지겠나요.
어느 종들은 하나님이 갑자기 자기에게 온전한 진리의 말씀을 내려 주시고 가르쳐 주셨다고 거짓을 말하여 사람들을 모으는 경우가 비일비재인데 만약 그들에게 온전한 말씀을 주어 버렸다면 그것은 바로 새가 가져가 버리는 것이지요. 즉 그들의 마음은 아직 십자가에 온전히 죽지 못한 돌짝밭이기 때문입니다. 즉 만물은 진리의 그림자이기에 그 그림자를 보면 진리가 보인다듯이 초등학생에게 어느 선생이 미적분법을 주었다면 그는 깨닫지도 못할 뿐 아니라 바로 사장시켜 버릴 뿐이라는 것이지요.
오직 단계별로 배워서 깨달은 선생들이 이끌어 가야듯이 우리도 성령을 통하여 각각 깨달음을 주셔 놓았기에 내가 그들을 찾아가 배우고 깨우처 이루어 나가야 온전함에까지 이를 수가 있는 것이예요. 그러나 그게 아닌 분들은 스스로 절대자가 되고싶고 왕이요 군주가 되기 위하여 스스로를 어둠에 머물게 하는 거짓 표현일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둠의 세상과 짝한 간음이요 살인이요, 거짓말을 하는 증거자인 것이지요.
또한 어느 종말론 자들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오셨다고 하면서도 그분이 다시 오신다고 하셨던 마가 다락방에 오셨던(우리가 십자가에 죽어있는 다락방심령, 교회) 성령이신 재림예수인데 또 다시 언제쯤 날짜를 정해놓고 오실 재림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촌극을 벌리는 것이이죠. 그러면 자기 안에 성령이시고 그리스도 영인 재림 그리스도이신 분이 그들에게는 초림이라는 말이겠나요. 말도 안되는 말인 것이지요. 선택받은 아들들이 내면의 천국을 이루었다고 해놓고는 다시 육신의 종말 때가 되니 다시 천국에 이르려고 휴거하고 천국가겠나요? 오직 믿음의 영의 법인 것인데 육신의 법으로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면 어찌 하나님나라가 바로 서겠나요.
그러기에 그런 해석 역시도 살인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 라고 할 때.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그 단어자체가 인자로 오신 예수를 역사 속에서 계속하여 반복하여 도륙, 제물로 드리는 식이기에 그렇듯이 다시 인자를 죽이지 말라는 뜻이라고 그랬잖아요. 또한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영단한번에, 단회성과 완료성을 무시하고 자꾸 자기가 뭔가를 풀어보려고 맞추어 보려고 또 그 언약대로 해보려고 나서는 게 인자를 계속 살해하는 거잖아요. 여러분 자꾸 뭐 회개한다(십자가를 진다). 회개한다. 하는데 회개를 할 때마다 필요한 게 뭔지를 아세요. 제물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아들의 것만 받으시기에 오직 하늘에서 오신 예수밖에 없어요.
그 교회에서 또 그럽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나는 십자가에 죽었다 라고 날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외워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십자가에 죽으려하고 죽음을 말하고 있는 율법적 행함일 뿐이라는 것이예요. 위에서 하나님 말씀을 목숨 걸고 지키려했던 유대인들이 기실은 간음하는 자들이었다고 말해 드렸듯이 십자가란, 오직 우리가 유대인들처럼 스스로 말씀을 이루어내려는 것을 내려놓고(소유, 자기부정) 오직 나 자신으로는 내 안의 어둠의 소유들을 벗어내고 장사해낼 수가 없으니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맡겨 드리는 믿음이 예수와 함께 죽는(말씀과) 십자가라고 그랬는데 그분들은 스스들이 십자가에 죽음을 상상하며 십자가를, 말씀 그대로를 지키려 하고 있는 것으로 그것을 말하여 문자인 육의 법의 율법의 행함요, 살인이요, 간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은혜로 정하신 어느 누구에겐가는 정점의 진리말씀이 존재하고 있겠지만 우리가 모두 전부 가장 깊은 진리만 찾는다고 내가 받아 이루거나 소유해낼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늘 아래서만(율법) 자란 노란 새싹은 햇빛을 바로 쪼이면 바로 시들어 버립니다. 그러듯이 자기가 받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단계의 말씀을 따라 먹고 이루어가야지 초등학생이 고등학생 공부를 해 낼 수 없듯이 누구나 무조건 어디 진짜 하나님말씀인 깊은 진리가 없나 하면서 찾아 다니지만 그런 분들은 자기 옆에 진리를 놓여있어도 몰라보고 떠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본 말씀역시도 수많은 사람들이 접하고 갔겠지만 거의가 처음엔 깊은 말씀이로다라고 감탄하거나 은혜에 차 있지만 어느 때가 되면 대개는 다 떠납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내 살(십자가)을 먹으라고 하니 다 떠나버리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아직 본 십자가를 말씀을 받을 수 있는 단계가 되어 있지 못하기에 처음에는 은혜안에 거하다가 결국은 소유를 장사하지 못하고 지식으로 먹다보니 사단이 절대로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 것이지요. 교리로, 육신의 것으로 속삭여 결국은 시험을 받게하거나 자기 안에 기존 들어있던 교리들이 진리의 길을 막아버리기에 곧 떠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본 말씀이 엉터리야 라고 하지 마시고 아직 내가 때가 안되어있는가보다 라고 판단하시어 본 말씀보다 좀 더 어린 말씀을 찾아가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젖을 먹지 곡식을 먹으면 생명이 위험하듯이 본 말씀을 접하시던분이 시험받아 잘못되면 다시 세상 교리로 갈 수 있으니 다시 찾고 구하고 두드리면 하나님께서 본인에게 합당한 수준의 말씀을 보내 주실 것이예요. 그러나 본 말씀을 붙들고 끝까지 가실 수 있는 분들은 실제로 본 말씀이 상당한 수준의 진리말씀인데 본인들께서 이미 본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의 말씀의 지식과 믿음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기에 감사할 뿐이겠지요.
그리고 어떤 단체들은 우리 말씀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라고 외쳐서 성도들을 끌어 모으는 수단으로 삼는데 물론 그 말씀이 진리에 근접한 말씀이라면 당연히 그 말씀이 구원에 이르는 말씀일 것이지만 그러나 구원이란 어느 단체의 교리처럼 한번 구원은 영우너한 구원이라고 하지만 그 한번 구원으로 완성되는 단어가 아닌 것이예요. 구원은 점차 이르어 가는 것으로 즉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교리, 세상신 섬기다가) 떠나는 것이 구원이고 홍해를 건너는 것이 출애급으로 구원이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입성하는 것이 구원이고 가나안을 완성하는 것도 역시 구원인 것이예요. 즉 우리가 십자가에 온전히 소유를 팔아 죽게 될 때 그 구원은 완성이 되는 것으로 그 때를 표현하여 큰 구원이라고(히2:3) 하는 것인 것이죠. 그래서 어느단계의 말씀들도 다 단계적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역시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나는 회개합니다(나는 십자가에 죽습니다). 회개합니다. 할 때마다 예수가 죽는 거죠. 성경은 그렇게 계속 예수를 죽이지 말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어느파가 이야기하는 나는 이젠 구원받았으니 죄인 아니니까 의인이이니까 죄 짓는다고 하는 것 자체가 악이다. 이런 말은 아닙니다. 그 사람들하고 이렇게 혼돈하지 마세요. 그 회개라는 건 ‘메타노이아’ 회개라는 건 기특한 일이 아니라 예수 잡아 죽이는 행위인 거예요. 그럼에도 말씀을 번번이 문자 그대로인 법으로만 이해를 해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냐? 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그게 바로 예수의 십자가라는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라는 거예요.
나무는 하나밖에 없어요. 십자가. 그러면 열매마다 나무가 있죠?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열리고 배는 배나무에서 열려요. 그러면 여러분은 맺으시는 성령의 열매는 어떤 나무에서 열려요? 십자가라는 나무에서 열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십자가와 관계없는 여기저기서 끌어 모아 놓은 그런 열매는 하나님이 절대 안 받는다니까요. 그건 그냥 나무일 뿐이에요. 살아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생명과 관계없는 거란 말이에요. 십자가의 붙어 있지 않은 예수에게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그 상태는 죽음의 상태이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의 장소, 불타는 흙들의 감옥, 지옥으로 던져지게 된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사람들이 성령을 법으로만 이해를 해서 엉뚱한 운동이나 시위를 하고 있는 거죠. 사형도 살인이니까 사형 제도를 폐지하자고 데모를 하고 기독교인이. 군대 가서 총을 잡는 건 살인에 참여하는 것임으로 군대를 안 간다 하는 집단이 있죠? 총 절대 안 잡습니다.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도 절대 적군을 향해 총을 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건 신앙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문자를 따랐기 때문이겠지요. 만일 정말 우리 육신을 죽이는 살인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가나안에 들어가서 애들까지 싹 다 죽이라고 명령하신 하나님만 머쓱해지는 거예요.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만도 못한 일을 행한 하나님이 되는 거란 말입니다. 어떨 때는 이렇게 어떨 때는 저렇게 말하고 그러니까 성경을 레마로 듣는 게 아니라 로고스의 수준으로만 듣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에만 관심이 있어요. 그러니까 적용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걸 얘기해줘~ 여기에만 관심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감동받는 종들의 설교는 다 적용으로 끝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면 전부 눈물 흘리고 주먹 불끈 쥐고 나간다니까요.
간음을 해도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이혼을 해야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여기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자들이 바로 그 아담안의 선악과족이라는 족속들인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이해를 하여 법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초라한 인자, 그 초라한 예수님, 율법주의자들이 보기에 부정하고 참담하기 그지없는 예수가 어떻게 보이겠어요. 율법주의자의 눈에 그렇게 초라하고 창녀들하고 걸핏하면 포도주나 마시는 그 예수가 어떻게 보이겠어요? 음녀로 보여요. 그래서 죽인 거예요. 네가 무슨 메시아냐 하면서 말입니다.
계시록 17장 1절 다시 보겠습니다.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지난 번에 그 율법, 세상의 힘, 바벨론, 앗수르 그 율법이라는 짐승 위에 탄 여자가 바로 음녀로서의 나자신이라고 그랬죠? 그런데 결국 율법에게 맞아 죽게 되는 거죠. 내가. 그러나 또한 그렇게 해서 사는 거예요. 그걸 양육이라고 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광야에 여자가 짐승을 타고 있는 거예요. 그거는 그 앞에서 뭐였어요? 철장을 든 예수, 아들을 낳은 여자가 간 곳이 광야였으니까 그리고 거기에서 양육이라는 단어가 나왔잖아요. 성경은 비 진리의 세상에는 아무 관심이 없어요.
성경은 마귀의 세상에 실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묘사해서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거나 권고를 하는 그런 책이 아니에요. 성경은 예수에 대해서만 기록을 해요. 그런데 우리가 그 예수와 함께 죽고 그 예수와 함께 사는 예수와 동행하는 하나님과의 동행의 존재, 벗이잖아요. 우리가. 따라서 성경은 예수의 관해 이야기를 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 예수 안에 누구 있다? 나 있다는, 내 이야기란 말이에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란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고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햇듯이 그 아들을(십자가) 본받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그 말씀들은 적용되는 것이지요. 내가 길이요 진리이고 생명인 것이고 성경은 나를 두고 나를 만들기 위하여 기록한 말인 것이에요.
지난 번에는 우리가 이 대목을 율법과 인본이라는 짐승 위에 타고 있는 그 성도의 관점으로 보았으니까 그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자이고 그 예수가 성도가 살아갈 길을 그대로 모형으로 보여주고 가신 거죠? 그러니까 이번에는 교회라는 짐승을 타고 앉은 예수의 관점으로 이해를 해보자는 말이에요. 예수가 바로 죄인중의 괴수인 내가 되셔서 죽은 거니까 내 이야기, 예수의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란 말이에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기둥에 매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을 때 뭐 타고 오셨어요? 붉은 나귀에요.
나귀 새끼는 이스라엘의 왕 즉위식 때 사용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솔로몬 평강의 왕, 평강이라는 이름의 그 솔로몬도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던 거예요. 그러나 그 새끼 나귀를 탄 이스라엘의 왕은 나귀 새끼를 타고 십자가로 향하실 예수님을 모형 하는 거였지, 그 자체로 의미를 갖고 있던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타신 붉은 짐승, 나귀는 바로 아무것도 없음의 자리에서 마귀의 행사를 여전히 하고 있는 아담들이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타고 들어가시는 거예요. 정말 보잘 것 없는 거예요. 나귀 새끼는. 생각해 보세요. 어른이 그 조그만 나귀 새끼를 타고 가면 발이 땅에 닿는다니까요.
그리고 어정쩡하게 같이 걸어가는 모습을 생각해 보시라고요. 왜 하필 그걸 타냐고. 조랑말이라도 타시지.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 무용한 것. 바로 그 없음의 자리에서 마귀의 행사를 여전히 하고 있는 아담들, 나에요. 그가 짐승이 위에 타고 있는 여자, 짐승들은 예수를 보면 아들로 안 보고 반드시 여자 로고스로 보게 되요. 그 여자를 죽이고 결국 살아나는 이야기. 짐승들이 보기에 하나님의 아들, 교회의 신랑, 예수가 어떻게 보이겠어요? 음녀로 보여요. 그게 율법주의가 보는 예수관이란 말이에요. 선악체계 속에 그 짐승들. 전도서, 잠언에도 나오잖아요.
인생의 목적이 뭐에요? 니들이 짐승이라는 걸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러잖아요. 성경이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짐승이라니까요. 그 선악체계속의 짐승들 즉 겸손한 하는 척 새끼 나귀들에게 예수는 음녀로 보인다니까요. 자기들은 열심히 율법 지키며 선행을 행하며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어떤 이가 오더니 죄인들과 어울리고 안식일도 번번이 어기고 창녀들과 포도주를 나누고 성전을 무시하고 심지어 성전을 때려 부수기도 해요. 이게 뭐 음녀죠? 이건 당연히. 바리새인들에게 이거는 음녀라니까요. 창녀란 말이에요. 이거는요.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그 분의 역사 속, 행함으로 예수로 메시아로 인정받은 게 아니라 그 분의 존재 자체가 메시아이고 예수그리스도에요. 무얼 해서 메시아가 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의 예수되심은 행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의 문제란 말이에요. 예수님은 어떤 행동을 하셔도 예수님이에요. 그 분의 창녀와 포도주를 마셔도 예수님이고 존재가 예수이기 때문에 doing의 문제 아니라니까요. 이렇게 being의 문제라니까요. 안식일에 밀을 비벼먹어도 예수님이에요.
남의 장사 터에 가셔서 그 때려 엎어도 예수님이고 불쌍한 여자에게 차마 바리새인들은 못하는 너도 개야~ 그랬잖아요. 그 여자한테 너 개야 그랬잖아요. 그래도 예수님이라니까요. 그런데 율법주의 안경으로 예수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열심히 노력해서 예수와 같은 삶을 살아야하는 존재로 인식을 하게 되요. 기독교를. 그들의 눈에 예수의 행함은 온유의 수준으로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이 세상에 도덕과 윤리의 눈으로 예수님을 판단하면 그 분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못난 분이죠.
그래서 때려죽인 거예요. 그런데 중요한 건 그렇게 예수를 음녀로 여자로 보게 되는 마귀적 그 행사는요 성도의 삶에 필연적 과정으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바리새인 나쁜 놈들 로 가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바로 예수 죽인자입니다. 라는 고백 없이 묵시 속 교회로 회개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한사람도 없어요. 그러한 현실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2장 44절 보세요.
44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여러분 이게 무슨 말인지 진짜 아세요? 나를 믿는 건 나를 믿는 게 아니래요.)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레마, 내 말을 듣고 안 지켜도 심판 안한다고 예수님이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게 아니다. 그 말은 예수를 믿는다는 건 현상계의 나타난 육신의 예수를 믿는 게 아니다. 라는 뜻이에요. 예수는 본 받아야할 롤 모델도 아니라는 거고 아울러 십자가 이전의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오히려 파괴되어야 할 두 번째 성전인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라 라고 하신 거예요. 거기에서 사흘이라고 번역이 된 ‘투이신헤마라스’ 에서의 그 ‘헤메라’는 보좌에 앉다. 성전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그 어구는 세 번째(사흘) 성전으로 일으킬 것이다. 라고 번역을 해도 되는 거예요. 두 번째 성전으로,
내가 파괴될 거야~ 니들이 나를 파괴할 거야~ 그러나 나는 세 번째 성전으로 일으키리라. 그래서 사흘 만에 살아나셔야 되요. 예수님은. 십자가 이전의 성전이신 예수가 옛 성전이 되셔서 파괴되시고 성도를 품은 사흘 동안 세 번째 성전으로 완성이 된다. 라는 그런 말이에요. 우리가 바로 예수를 품은 성전이잖아요. 세 번째 성전. 내가 예수 안에, 예수가 내 안에 누가 밖이에요? 육신이 아닌 영적으로 보면 예수가 나고 내가 예수라는 얘기에요. 그 정도를 여러분을 대우해 주시는 게 구원이라니까요. 그게 창조란 말이에요. 따라서 성도는, 역사 속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 예수는 파괴되기 위해서 오신 예수란 말이에요. 그런데 보통의 성도들은 자신이 예수를 본받아 살겠다는 게 무슨 소리냐고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그리스도 예수여야지요 성경에도 나오잖아요. 그리스도라 하는 아들을 낳을 거다. 이름이 그리스도에요. 원래 예수님 이름은 그냥 예수일 뿐이예요. 예수 그리스도여서는 십자가 죽으신 후에 이름이지요.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 후에 붙는 이름이니깐요.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는 전부 그리스도의 예수라는 뜻이에요(롬8:1).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한 군데도 없어요. 그냥 우리가 개역성경에, 2백여년 전쯤에 중국으로 유학간 선교사들이 처음 한자로 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아람어나 히브리어를 잘 모르던 관계로(그래서 성경은 오역이 너무 많지만) 번역했던 관계로 예수,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를 자꾸 혼용해서 기록했었기에 그런것이지 원래는 히브리어 원어로 정확히 구분해 보면 전부 십자가 후에는 그리스도의 예수에요.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한 예수라는 뜻이에요. 그러니 역시 십자가 후에는 예수라는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이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게 아니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거예요. 그 예수 안에 진리로 담겨 있는 레마, 말씀 그 언약을 믿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보내신 일을 믿는 것. 이라고 말씀한 거예요. 그러면 나를 보내신 이가 뭐에요? 48절을 보면 예수님을 보내신 세상을 심판할 이가 등장하죠? 그런데 그게 뭐라고 그래요? 내 말이라고 그러잖아요. 내 말. 내 말이 세상을 심판한다.
그 말이 말씀이 예수를 보내셨다. 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예수를 믿는 건 그 말씀을 가진다. 그 말씀을 믿는다. 라는 뜻이란 말이에요. 성경에서 말씀을 지킨다. 라는 뜻은 말씀을 가지다. 라는 뜻이에요. 다 가지다. 그렇게 예수를 믿는다는 건 예수를 보내신 참 진리의 말씀을 믿는다는 말인데 47절을 보면 사람이 내 말을 듣고도 지키지 않는다고 할찌라도 내가 심판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시죠? 여기에서 로고스와(말씀을 문자로 받는 것) 레마가(말씀을 속 뜻인 진리로 받는 것) 정확하게 구별되어 쓰이고 있어요.
47절에 그 내 말은 레마에요. 진리의 말씀 그 자체. 그 레마를 듣고 진짜 아들로 들은 말씀으로 들은 사람은 그 말을 받아드려 그걸 어떤 행위로 내어 놓지 않아도 심판 안 당한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레마가 쓰인 거예요. 거기에요. 레마는 지키는 게 아니라 존재의 선언이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48절을 보면 내 말을 받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고 그러죠. 여기서 받다. 라고 번역이 된 이 람반어는 주어지다. 에요. 말씀을 던졌는데 야구글러브 같은 거로 이렇게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어지다. 내 말이에요.
레마가 하나님에 의해 이렇게 주어지지 그건 은혜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주어지지 않은 자들은 무슨 행위를 내어놓는다 할찌라도 심판이다. 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이 레마로 주어지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건데 그 심판을 누가 하냐면 내가 한 말이에요. 여기에서 말은 또 로고스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말, 레마가 주어지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예수가 로고스로만 이해되어져요. 법으로만 이해되어진다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그걸 행위로 어떻게든 내어 놓으려고 그래요. 왜? 불안하거든요. 레마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는 거예요.
이걸 레마를 내가 주지 않은 자들은 내가 한 그 말, 레마를 로고스로 담아 준 그 말을 근거로 하여 심판받게 된다. 라는 뜻이에요. 죽어라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선악과 입에 문 아담들의 행위로 그걸 갚으려고 할 거니까. 그래서 내 말이 너희를, 로고스가(문자로 본 그 말이, 법) 심판한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 때 그들이 표피적으로 이해한 그 로고스가 그릇이 그들을 심판하는 근거가 되는 거예요.
성경을 열심히 법으로 지켜서 나중에 그것으로 심판 받는다. 라는 그런 이야기에요. 그런데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로고스로 오셨다고 그러죠? 레마로 오셨다고 안 그래요. 똑같이 말씀인데, 하나님은 예수를 레마로 보지 못하는 자들 그러니까 하나님이 레마로 선물을 주지 않은 자들을 전부 심판해 버리기 위해 예수를 로고스로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대부분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성경을 로고스로만 봐요. 그러나 그들은 그 로고스에 의해 심판 받아요. 내 말에 의해 심판받는 거죠.
그러면 여러분 복음이라는 건 우리의 행위를 열매로 요구하지 않아요. 그러나 막 살라는 말 아니에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선해지기 위해 애를 쓰는 건 인간 보편이 모두 지향하는 거예요. 복음과 아무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도 그러한 인간 보편의 목적지를 선으로 정의하고 추구해요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낸 사람들에게 상도 주고 박수도 보내줘요.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땅에서 상 받은 자는 하늘의 상 안준다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인간 보편이 모두 인정하고 박수를 보내는 일은 인간이면 누구나 추구하게 되는 목적지인 반면에 인간보편이 이해할 수도 없고 추구할 수도 없는 그래서 칭찬하거나 박수를 보낼 수 없는 진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착한 행함이 있어요. 그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인간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의존하고 그분만을 높이는 신앙. 이게 하나님이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유일한 착한 일이에요.
그건 세상사람 누구도 칭찬해(상) 주지 않죠? 예수를 모르는 이들은 예수 믿는 자들이 예수만 의존하여 살잖아요. 저거 저렇게 꿈도 없이 비전도 없이 저렇게 비리비리하게 살아~ 왜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게을러졌어? 불성실해졌어? 오히려 이러지. 절대 예수 믿는다고 칭찬 안 해 준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상하나 못 받고 간 그들에게 하늘에서 상주는 거예요.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심판할 수 있는 죄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 이 땅에서도 똑같이 인간들로부터 벌을 받으면 안 돼요.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뭐에요? 한번 기소된 건 또다시 기소가 안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보상을 받으면 하나님이 보상을 안 해주신다는 말씀과 똑같이 이 땅에서 인간들에게 판단 받고 정죄 받아서 체벌을 받거나 형을 살게 되면 하늘에서도 벌이 없어요. 앞뒤 잘라가지고 또 어디 가서 이것만 얘기하면 안 돼요. 그런데 살인하면 감옥 가죠? 도둑질하면 이슬람 나라에서는 손목을 잘라 버립니다.
거짓말 하다 들통 나면 사람들에게 욕먹죠? 이게 다 벌이에요. 체벌이에요. 이거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벌을 받지 않는 진짜 죄가 있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진짜 살인, 진짜 간음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가 삶과 역사의 주체가 되어서 인간이 중심이 된 아름다운 인간 세상, 아름다운 사회, 아름다운 나, 아름다운 아담 이거 구축하려고 하는 그러한 행위는 사람들에게 칭찬과 박수를 받아요. 신문에서도 대서특필하죠.
교회다운 교회가 나왔다. 목사다운 목사가 나왔다. 세상 부귀 다 뿌리치고 농촌에 가갔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섬기며 그렇게 목회를 하더라. 박사학위 다섯 개 버리고 아프리카에 가서 평생을 선교했다. 박수쳐 주죠. 여러분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데 그 칭찬 받기 위해 그가 한 일이 예수를 신앙하고 예수만 의존하는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이라면 그걸로 벌 받아요. 하늘에서요.
그들은 하늘에서만 벌 받지 이 세상에서 벌 안 받아요. 칭찬만 받아요. 일사부재리의 원칙이에요. 그것이요. 다른 사람들은 이 땅에서 경찰이나 검사나 판사나 여론이나 평가, 이웃, 마누라, 남편이 벌주잖아요. 그건 이 세상에서 해결되는 거라니까요. 하늘에서 해결할 게 아니에요. 하늘에서 해결할 죄는 그거랑 다른 거란 말입니다.
보통은 목사들이나 말씀을 전하는 분들이 이렇게 예수를 말씀을 인간의 선악구조 하에서 인위적으로 해석을 해서 인간보편의 의지와 자존심을 챙기려 하는데 그것들이 바로 인본주의이며 율법주의이에요.
그들의 눈에는 예수가 음녀로밖에 안 보여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가라사대 살리는 입이에요. 4장 4절에서 말한 것처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한 자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 여자를 직역하면 그 여자의 정욕을 향해 ‘프로스 프로스큐오네’의 그 ‘프로스’ 라는 전치사가 들어가 있거든요. 그 여자의 정욕을 향해 여자를 보는 모든 사람마다 간음한 자다지~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음흉한 마음을 품은 놈은 다 간음한 자다.
이런 정도의 수준의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여러분이 이 말씀을 읽고서 생물학적인 여자를 보고 음흉하게 침을 흘리는 남자를 떠올리신다면 그건 성경을 표면적 문자로만 읽는 거란 말입니다. 너무 억울하잖아. 지나가는 남자 보고 음흉 품는 여자 얘기는 왜 안 나오냐고요. 여기에 그런 얘기 아니에요. 여기에서 정욕이라고 번역이 되는 ‘에피뚜미아’ 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피 이건 강조죠? 에피와 두메오의 합성어에요. 이 두메오라는 단어는 희생제사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란 말이에요. 그 단어의 명사형이 뚜미아 희생제사에요.
거기에서 나온 단어가 두모스 탐심, 욕망입니다. 이러한 단어를 연계해 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음욕, ‘에피뚜미아’ 의 의미가 정리가 되겠죠? 자기의 힘으로 열심히 희생 제사를 반복하여 드리고자 하는 게 선악과 따 먹은 아담들의 탐심이요 욕망이라는 거예요. 그게 음욕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희생제사라는 단어를 끌어다가 그걸 표현하는 거예요. 그러한 여자의 욕망을 따라서 여자의 욕망을 향해 그 여자를 보는 자는 모두 간음한 자다.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그 여자는 나이기도 하고 음녀가 나니까. 예수이기도 해요.
율법주의의 눈으로 나를 평가하고 예수를 평가하는 자들이 바로 간음한 자들이다. 라는 이런 말이에요. 이건 단순히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의 지저분한 관계를 지적하는 내용이 아니란 말이에요. 이 시공의 역사 속의 인간들의 생리적 내재 본성인 그 하나님처럼 되기, 하나님처럼 살기, 나 우상 만들기. 라는 그 죄의 본질을 지적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거 하지 말아라. 라는 거예요.
예수를 그 여자가 가진 욕망, 그 희생제사 열심히 드려서 인간보편의 자존심 챙기겠다고 하는 율법주의, 인본주의로 예수를 보면 예수가 음녀로 보이고 그게 간음이라는 거예요. 그게 여자를 향하여(프로스), 여자의 욕망, 음욕을 향하여 음욕을 따라서 그 여자를 보는 자는 간음한 자다. 라는 그 어구의 진의란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경이 무슨 인터넷 포털 사이트도 아니고 지나가는 여자보고 음욕 품는 거 그거 간음하니까 너네 조심해 이런 얘기나 하겠냐고요. 그래서 주님은 율법을 열심히 지켜서 인간보편의 자존심의 향상을 꿈꾸었던 바리새인들에게 마귀 새끼, 음녀라고 욕을 하셨던 거고 자기의 죄를 스스로 책임지고 목매달았던 유다에게도 마귀라고 했던 거예요. 이놈 마귀다. 예수님이 그랬어요. 예수님이 대신 죽어야 그 자가 예수의 신부로 함몰되어 아들이 되는 건데, 죽지 마세요. 그랬다니까요.
심지어 내가 목숨 걸고 죽을지라도 나는 당신의 죽음을 막겠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어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랬다니까요. 예수가 죽고 교회로 세 번째 성전으로 탄생하는 게 복음이에요. 그가 자신의 열심으로 베드로처럼 주님의 죽음을 막아섰던 것은 간음이고 살인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음녀야 이렇게 부르는 거예요. 계시록에 가면 그 마귀가 음녀잖아요. 간음하는 자야 이렇게 부른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선악구조로 율법의 안경으로 아들이 되지 못한 그 여자의 정욕으로 그리스도의 씨를 받지 못하면 아직 여자란 말이에요. 그게 아들이 되지 못한 게 여자란 말이에요. 여자의 정욕으로 예수를 보게 되면 예수가 짐승을 타고 앉은 음녀로 보이게 된단 말이에요. 예수의 본질은 레마 인데 로고스의 그 껍질, 음녀의 모습만을 보고 근사하게 위장하고 있는 자신들의 그 실체를 드러내 이렇게 폭로시켜 버리는 그 예수를 죽여 버리는 거. 이게 율법주의란 말입니다.
사실 인간들이 자기 밖의 타자들에게서 어떤 실수나 오점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요. 목숨을 걸고 그걸 비판하고 정죄하는 이유는 자기는 마치 절대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런 일을 안 할 것처럼. 그렇게 어떤 것이 발견되었을 때 아주 그냥 온 힘을 다해 그걸 잡아 죽이려고 하는 건 자기 안에 그게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내가 갖고 있는 내가 감추어 두고 있는 어떤 것을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갖고 있으면 그걸 아주 잡아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자기들의 정욕대로 예수를 음녀로 보고 그 예수를 때려죽인 인본주의는 자기들의 눈에 비친 그 음녀의 모습이 바로 자신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죽여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네가 뭔데 근사한 회칠한 무덤으로 가리고 있는 나를 드러내~ 왜 내 안에 있는 시체 썩는 냄새, 물을 네가 왜 까발려~ 저거만 죽이면 되는 거예요. 마치 아프리카의 거울을 갖고 간 선교사님이 그 추장 와이프한테 거울을 줬더니 깜짝 놀래갖고 그 안에 웬 이상한 여자가 들어 있는 거예요.
그 동안에는 어렴풋이 봤는데 거울로 보니까 진짜 못 봐주겠는 거라. 그러니까 이것만 깨버리면 자기의 추악함이 감춰지는 줄 알고 그걸 박살을 내더래요. 그 앞에서. 자 그래서 내 안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그 바벨론이라는 짐승이 그 위에 타고 있는 그 여자, 율법주의의 관점에서 본 표면적 예수를 죽여 버리는 그림이 계시록 17장에 그려져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내가 예수를 음녀로 보아서 때려죽였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것이 그 율법, 짐승에 의해 법, 계명, 말씀에 의해, 짐승에 의해 맞아 죽어가는 여자의 모습인 거예요. 같은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성경을 이렇게 문자적으로 이해를 해서 법으로 보는 이들에게 있어서 성경이 뭐가 되는 겁니까? 신랑이신 예수님을 떠나서 간음을 하게 하는 책이 되는 거잖아요. 이 성경이 표면적으로만 보이게 되면 이건 내가 해야 할 바,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어떤 것, 도덕책으로만 보인단 말이에요. 행동강령으로만 보이게 되면 그게 예수를 의존하지 않고 예수라는 신랑을 떠나서 간음을 하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따라서 이걸 로고스로만 보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성경책이 뭐가 되냐고요. 이혼증서가 되는 거예요. 그게. 너는 확실하게 나랑 갈라섰구나. 이걸 증명하는 책이 된다니까요. 성경이.
마태복음 5장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이건 모세에게 이렇게 명령한 거죠? 하나님이. 여기에서 이혼증서라고 번역이 된 ‘세페르케르투드’는 이혼하는 책이에요. 이혼하는 책. 단순한 이혼 서류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이혼하는 책, 갈라서게 만드는 책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계명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일차적으로. 그리고 모세 오경, 더 나아가 성경 66권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게 갈라지게 하는 책, 이혼하게 하는 책,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간음하게 만드는 책. 그러나 그 이혼증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혼인 언약이 되는 증서이기도 해요. 그 혼인 증서는 생명책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로고스로만 읽혀지게 되면 인간들은 그것을 근거로 바벨탑이라는 인간 측에서의 열심을 내어 놓으면서 예수의 십자가라는 나무 몸통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니 그게 선악과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선악과로 먹어버리는 인간들이 있다니까요. 그 말씀이 레마로 아들로 진리로 오게 되면 그 신부를 아들 안으로 죽여서 함몰시켜 내는 혼인증서가 되는 거예요.
너는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쓰레기구나. 돌짝 밭의 흙이구나. dust 구나. 아파르 구나. 그래서 예수를 내가 보냈다. 이게 성경이니까. 그 성경은 나를 죽이는 책이라니까요. 그래서 그게 뱃속에 들어가면 쓰다고 그러는 거예요. 성경책에는 예수라는 이름만 명명되어 있다고 그랬죠?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살으심~만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예수 안에 나있잖아요. 그 성경의 이야기, 예수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읽혀지지 않는 사람이 생명책에 명명되지 못한 자에요. 이름이 뭐 쭉 적혀 있어 가지고 거기에 내 이름 있나 없나?
이게 생명책이 아니라 성경이 생명책이란 말이에요. 그걸 내 이야기로 읽는 자가 내 이름이 거기에 명명된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에게 일어난 그 죽음과 부활이 내 이야기가 아니라 그건 그냥 언제 한번 일어난 거고 나는 이제 성경에 적힌 수많은 계명을 지켜야하는 자로 이렇게 이해하는 거, 이게 성경을 잘 못 보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생명책의 명명되지 않은 자에요. 내 이야기가 아니거든. 그래서 야고보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예요. 32절 먼저 보고 가죠.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혼한 여자랑 결혼하면 안 된다는 얘기에요. 그러면 지옥 갑니까? 간음하게 한거라며요. 그리고 음행한 연고 없이 이혼한 사람들 큰일 난 거죠? 성경이 그 따위 이야기 하겠냐고요. 함무라비 법전에도 나오는 그런 얘기. 여기서 음행한 연고 없이. 라고 번역이 된 어구는 로고포르네이야스 에요. 로고는 로고스의 형용사에요. 여기에 로고스가 나온다니까요. 말이 나와요. 또. 포르네이야스는 간음과 근친상간을 포함한 매음을 가리키는 거예요. 포르네이야스 많이 들어봤죠? 포르노, 포르노그래피가 여기서 나온 거예요. 간음하게 하다. 매음하게 하다.
그렇게 행음케 하는 말을 제외하고 여기에 로고스가 등장하는 걸, 주의 깊게 보세요. 여자, 이게 ‘귀이네’ 라는 말을 쓰거든요. 이거는 히브리어 네케바에요. 이 네케바는 자칼이라는 단어와 창세기 1절 27절에 제일 처음에 나오는 말인데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는데 쎄렘, 그의 형상 안에서 자칼(남)과 네케바(여)를 만들어서 하나로 만들었다. 에서 자칼과 네케바에요. 그런데 이 네케바가 뭐냐면 남편의 아내란 뜻이에요. 그걸 헬라어로 옮기면 ‘귀이네’ 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지금 예수님의 아내로서의 어떤 자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간음하게 하다)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그러니까 음행한 연고 없이, 간음케 하는 그 말, 그걸 곡해하여 성경을 곡해하여 그걸 가지고 열심히 무언가를 이 땅에서 하는 게 간음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거를 전달하는 거 자체가 또 간음케 하는 거죠. 그 자들은 절대 신랑과 혼인 상태가 되지 않는다. 는 뜻이에요. 그래서 음행한 연고 외에는 나는 절대로 너희와 이혼하지 않아. 라는 말이에요. 이거는요. 그 말은 다른 말로 내 말을 로고스로 이 포르네이야스 포르노 내 말, 이렇게 더럽게 읽고 인간들의 행함으로 해석하는 자와는 이혼하겠다.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들에게 성경이 이혼증서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나가라 하는 거예요. 여러분에게는 성경이 이혼증서입니까? 혼인 언약 증서입니까? 자 행음하게 하는 말, 즉 말씀을 곡해하여 예수라는 레마가 아닌 인간 중심의 그 법이라는 로고스로만 이해해서 이리저리 날뛰는 것이 간음인데, 그러한 행음케 하는 말을 제외하고 남자, 자칼의 그 여자, 네케바는 절대 버려질 수 없다(용서된다). 라는 뜻이에요.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그 어떤 무서운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신랑이 여러분 안 버린다. 라는 뜻이에요. 예수만 올바로 이해한다면 그러니까 성경이 지적하고 있는 최고의 죄는 간음케 하는 말, 말씀의 곡해인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도 이렇게 말하는 거죠. 3장 2절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아나 운서들은 다 온전한 사람들이겠네요. 무슨 말이겠어요. 여기 로고스가 나와요. 또. 말에 실수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발 뿌리가 걸려 넘어지다. 에요. 그러니까 직역하면 로고스에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준 이 로고스에 대부분 걸려 넘어지는 데 이걸 실수라고 번역했어요. 거기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아들로 그걸 받는 자가 온전한 사람, 자칼과 연합된 네케바, 귀이네 성도라는 뜻이에요. 말 잘하라. 라는 말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의 자칼, 신랑께서 음행의 말 이외에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이렇게 약속을 해 놓으시고는 우리가 음행의 말에 넘어지는 과정을 겪게 하신다니까요. 왜요?
남편이 버린 상태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추구하는 게 고작 어떤 수준인지를 경험해 보래는 거예요. 고작 우리가 아들이라는 이 진리라는 성경을 갖고 불교인들이나 이스람교인들이나 아니 사탄교 걔네들도 착하게 살자. 에요. 하나님 도움 없이 착하게 살자. 그네들까지 주장하는 그런 거. 그런 걸로 이용해 버리는 너희들의 수준을 한번 경험해 보래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네들보다 잘 살지도 못하고 그네들이 더 착해. 그리고는 그렇게 버려진 자들에게 장가드는 것도 간음이다. 라는 말은 우리 신랑은 절대 간음할 수 없는 분이잖아요.
그런 자들하고는 절대 연합, 혼인 안 해 라는 뜻이에요. 산상수훈은 율법주의를 때려 부수는 거예요. 구약의 시내 산을 신약의 시온 산이 때려 부수는 거라니까요. 그런데 전부 이걸 간디나 법정처럼 읽어요. 법정 스님이나 간디도 매일매일 읽었어요. 산상수훈을. 뭘로? 로고스로. 우리가 열심히 지켜야 할 것으로. 간디보다 산상수훈을 행위로 더 잘 지켜낸 사람이 없어요. 뒤로는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행위로는. 예수를 알지 못하고 그렇게 로고스로 법으로 이해를 하여 그걸 열심히 행하는 걸 간음이라 한단 말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건 그렇게 신랑의 은혜 안에 자유롭게 머물면서 그 은혜를 누리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서 발출되어 나오는 행위로 근거로 해서 자신을 칭찬하거나 지나치게 체벌을 가하거나 하지 않아야 돼요. 어려운 일이에요. 물론. 오래 걸리는 거고. 그리고 다른 이들의 우매함이나 그 우매함에 의한 공격에 의연해질 수 있어요. 어차피 하나님의 로고스를 레마로 받을 수 있는 이들은 주님이 뭐라고 그랬죠? 거의 없다. 라고 그랬어요. a few 가 아니라 few 라고 그랬다니까요. 거의 없음.
그런데 그 거의 없음, 그 안에 들어 있는 이들이 모르고 설치는 걸 뭘 그렇게 대단하게. 그러니까 인터넷 까페 여기저기 논쟁하고 그런 거 하는 것 잘못된 거예요. 저도 지금 말씀을 전하면서도 이게 정말 진리에서 하나도 어긋나지 말아야할텐데 라며 불안하고 두려운데 뭘 그렇게 할 말들이 많은지. 얼마나 많이 아시길래 그러는지를 모르겠더라구요.
그 자존심 그 자부심이 먼저 깨져야 되요. 자기가 갖고 있는 말씀, 나에 대한 자부심, 자기 교회에 대한 자부심. 아 이 십자가 지고 부정당하고 죽어가는 게 신앙생활이라며 무슨 그게 자부심을 가질 일이냐고요. 부끄러워서 십자가 뒤로 자꾸 숨어야 될 일이지. 말이 많아지면 안 돼요.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로고스에 걸려 넘어져서 성화주의에 머물러 열심히 나의 열심과 간음하는 자로 살았을 거예요. 그냥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면서 침묵하면 되는 거예요. 내가 정말 그 레마, 진리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게 내 입에서 나오는 순간 로고스 되요. 대부분. 그래서 이런 말씀 전하는 것도 그렇게 싫어지는 거예요. 하나님 왜 나입니까? 라고 선지자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게 진리를 알면 알수록 내가 설명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보자 스스로 입을 지져버리는 거예요.
마음속으로. 아 말하기 싫어. 말하기 싫어. 내 입에서 나오는 건 다 로고스일 뿐이기에요. 그리고 혹시 진리인 레마를 담아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듣는 이들이 다 문자요, 지식인 로고스로 들으니까 대화 자체가 싫어지는 거예요. 점점. 어찌 보면 그렇게 신앙생활이라는 건 나하나 구원하고 가는 거예요. 뭘 누굴 가르쳐서 누굴 구원하냐고 나하나 구원받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길에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거라니까요. 그런데 뭘 할 말들이 그렇게 많으신지를 모르겠어요? 이사야가 왜 하나님을 만나고 숯으로 자기의 입을 지졌는지 왜 욥이 하나님을 보자 나 이제 입 닫겠습니다. 라고 말을 했는지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시란 말이에요.
그렇게 하나님 은혜 앞에서 우리는 잠잠해 져야 되요. 교회 자랑할 필요도 없고 더 더욱이 나 자랑할 거 하나도 없어요. 십자가만 자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