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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현존
-생각 속에서 머물기(창세기 3주간)
1~5장3 -말씀을
붙잡기(머무르기)
지금은 그야말로 말씀을 붙잡고 주님의 손길을 기다리면 됩니다.
실제로 묵상을 해보면, 말씀을 읽고 추리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어떤 땐 읽는 데만 한달이 걸리기도 하고)
그중에서 하나의 말씀을 선택해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일주일은 기본으로 걸립니다. 묵상이든 관상이든 우리가 기도로 생각을 찾아서 나가면 이렇게 우리 마음이 열릴 때까지 생각을 찾아나서는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충분한 기도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이 숙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는 자기가
아는 것에서 결론을 찾게 될 것입니다.
깨어나는 기도는 기도가 깊이 들어갈 때까지는,
이 생각이 깨어나는 과정을 살펴서 가게 하고, 기도가 깊어져서 생각이 잦아들고 마음에
머물러지면 그 때부터는 마음이 깨어나서 주님께 머무르게 되는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지금까지 배움과 기도를 통하여 제가 만난 하느님이 어떤 하느님인지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묵상 중에 문득, 하느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여지기를 원하시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묵상은 하느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제게 보여지기를 원하는지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기도중에 제 마음이 찬찬히 어떤 책을 주르륵 훑는 기분이 들더니,
잠시 후에 제가 마음 안에서 구약의 책장들을 주르륵 훑어가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더니 저도 모르게 성경 안의 사람들의 모습들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다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 -착하지 못하고, 살인에, 욕심에, 거짓말에, 실망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이 그 사람들 속을 헤집고 있는데, 갑자기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이라고,
마치 표어를 본 것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이어서 강렬한 어떤 깨달음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그러면서, ‘아! 맞다!’ 하고 제 자신도 거기에 수긍이 들면서 하느님의 모습이 마치 퍼즐이 맞춰지듯이 정렬되면서,
‘정말! 나는 너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깨달아집니다.
그러면서 순간 빠르게 제 마음이 신약의 책장을 넘기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훑어나가면서,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해서 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준다’고 깨달아지면서 신구약의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나와 하느님,
예수님으로 맥을 가지고 하나로 쭈욱 연결이 되면서 그 많은 이야기들이 순식간에 그 맥 안으로 흐르는 혈관이 되고,
줄기가 되고 가지가 되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기도가 끝나고나서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저를 두고 말하기를, “자매님은 언제나 일을 이룰 때까지 포기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 포기하지 않음이 늘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아요” 합니다.
제 아버지가 저렇게 포기를 모르니 자식인 저도 포기를 모르는거 당연한게 아닐까
싶어서, 이 묵상 이후에 제가 하는 말들을 생각하면서 종종
혼자서 웃습니다.
“끝까지 지치지 말고 하느님과 꼭 대면하겠다는 간절함을 가지고 기도하세요.
거기에 주님께서 감동하시면 우리의 뜻이라도 이루실거고, 만일에 그것이 정녕 주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다면, 그때에는 주님께서 직접 우리를 설득하십니다.
기도의 길을 먼저 간 사람들은 늘 우리에게 결과만을 이야기해주면서 뭐든지 내려놓으라고
조언하는데,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과의 치열한
기도를 먼저 해야 합니다. 내려놓음도 자신과의 치열함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가야만이 진정으로 놓아지지,
우리가 주님 뜻을 안다고 해서 놓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기도하기도 전에 내려놓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은,
먼저 우리 자신이 기도를 이룰 간절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기도를 이룰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제가 했었던 이런 말들을 기억하고 있노라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모습이 마치 저에게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않았듯이, 너도 네가 돌보아야 하는 사람들을 포기하지 말아라’ 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제 마음으로 깊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 묵상을 여기에 옮겨 쓰면서 이상하게도 '내가 너를 그렇게 포기하지 않았듯이, 너도 어떤 상황에서든지 나에게 오는 것을 절대로 포기하기
말아라!’ 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