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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원리 원칙의 원리가 살아있는 사회를 향한 신념.
이회창! 그의 삶은 '법과 원칙'이 정치권력앞에서 무력해지는 한국사회의 오래된 병폐에 맞서온 '도전의 삶'이었다.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거쳐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이후 대선후보에서 야당총재가 되기까지.... 결고 순탄치도 쉽지도 않은 길이었지만 그에겐 새로운 위치로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일어설 때마다 항상 되뇌이는 변하지 않는 신념과 원칙이 있다. '법의 원리, 원칙의 원리대로 운영되는 정상적인 국가'를 향한 포부와 신념을 관철해 가겠다는...
낯선 곳에서의 도전.
이회창총재는 1935년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다. 원래 고향은 충남예산이지만 검사인 아버지를 따라 어린시절 그는 잦은 이사와 전학으로 전국을 돌아다녀야 했다. 유년 시절은 전남 장흥에서, 초등학교는 광주에서, 중학교는 충북 청주에서 그리고 서울로.... 이렇게 그의 어린시절은 낯선 곳, 낯선 사람들에게 적응해 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 것은 새로운 환경속에서 '자기'를 슬기롭게 만들어가는 수련의 과정이기도 했다.
원칙에 투철한 소신있는 법조인으로.
강직하고 청빈한 법조인이었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그는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다. 대학 3년때 고시에 합격한 이후, 81년 45세의 나이로 최연소 대법관이 된다. 대법관 5년 재임기간 동안 그는 법조계에 '대쪽 이회창'이라는 이미지를 선후배의 머리에 심었다.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는 원칙에 투철했던 그는 어둡고 음울했던 권위주의 정권시절 법원의 양식이 아직 완전히 말라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 을 증명하듯 기억할만한 판결들을 많이 내놓았다. 그 때문에 권력의 견제를 받았고, 대법관 재임용에서 탈락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법과 원칙에 근거한 거침없는 결단력을가진 행정인으로
그의 굽히지 않는 소신은 88년 대법관 복귀후 중앙선관위원장을 맡게되면서도 유감 없이 발휘됐다. 그는 "당선되면 그만"이라는 당시의 선거풍토에 고발로 맞섰다. 동해시 와 영등포 재선거 때 당선자 등 후보 거의 전원을 선거법위반혐의로 고발했다. 당시 그는 노태우대통령의 총재서한을 문제삼았는가 하면, 김영삼 민주당총재에게 친필경고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노대통령의 서한이 여권내에서 문제가 되자 89년 10월 1년3개 월만에 사표를 던지고 스스로 자리를 물러났다. 지난 93년 2월 문민정부의 감사원장으로 임명된 이후에도 그의 기조는 일관됐다. 개혁과 사정의 최선봉에 서서 개혁을 위한 감사의 칼날을 들이대었다. "청와대, 안기부, 기무사 등 어느 기관이든 법규정에 따라 감사하겠다", "현정권에 관련된 정치적 비리라 하더라도 성역을 인정치 않고 엄정한 감사활동을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청와대비서실, 국방부, 안기부 등 권부의 핵심부서가 모두 감사원의 감사 도마 위에 올랐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도 예외일 수 없었다. 평화의 댐, 율곡 감사를 하면서 전직대통령 에 대한 서면조사를 추진했고, 당시 5-6공세력과 기득권층의 엄청난 저항을 견뎌냈다. 93년 12월 국무총리에 임명되면서 헌법으로 위임된 총리의 권한을 행사하는 새로운 총리상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 공무원들이 마음놓고 소신껏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여건 조성에 힘썼다. 그러나, 결국 현실적 한계에 부딪혀 4개월만에 물러나고 만다. 우리의 권력구조나 생리상 법에 근거한 총리로서의 충분한 역할수행은 어려운 도전이었다. 독자적인 색깔을 갖기 어려운 '관료'라는 직책의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언제 나 '법과 원칙'이라는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소신과 자신감이 거침없는 결단과 일처리를 할 수 있는 동인이었고, 그에게 대중적 지지와 신뢰가 쏟아졌던 원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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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존경합니다.
보고싶습니다 ㅜ
내년에 는 당선 되면 좋겠다
대통령 으로
이회창 총재님 길은 잃은 우리나라 살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