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예수님은 그분의 역사속 행함으로 예수로, 메시아로 인정받은 게 아니라 그분의 존재 자체가 메시야이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무엇을 해서 메시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예수되심은 행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행동을 하셔도 예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 비판과 정죄를 당했던 창녀와 포도주를 마셔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존재자체가 예수님이시기 대문에 doing(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being(존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 또한 그의 존재가 이미 하늘 백성의 시민권자로서 신분을 갖고 그가 하늘에 다스림(통치)과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하늘 백성의 시민권자로서의 삶을 지향해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 조선 시대 때 노비가 양반이 되기 위해서는 양반 문서가 반드시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노비가 양반이 되기 위해서 양반문서를 자기의 전 재산을 주고 샀습니다. 그리고 이제 노비가 양반문서라는 신분 세탁을 통해서 어찌 됐든 신분상 양반이 됐으니까 그 신분에 걸맞게 양반 된 삶을 그냥 살아갈 뿐이지, 거들먹거리며 양반행세를 하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행세한다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세를 한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 차이를 두고 차별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교만이고 악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가난한 사람이 갑자기 부자가 되면 부자행세를 하여 갑질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 졸부라고 하는 것처럼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서도 자기 행세를 하여 나타난 그 행함을 통해 자기 선함을 드러내고 자기자랑 거리로 삼아 다른 이들과 차별을 요구하는 상급 차등론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 안경으로 예수님을 이해하게 하면 우리는 열심히 노력해서 예수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로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의 행함은 온유의 수준으로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에 도덕과 윤리의 눈으로 예수님을 판단하면 그분은 바리새인들보다 못 된 분입니다. 그래서 때려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온 후의 신자는 인간의 행함에서 벗어나서 예수그리스도의 행하심만을 바라보는 자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에게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실천을 해야 믿음이 있다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의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신자가 어떤 실천이 있든 상관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하는 것이고 죄인 된 자리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하신 예수님의 의의 행하심만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함에 메이지 않는 신자입니다. 즉 행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행함도 매이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근거로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의 행함은 결코 믿음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함을 보인다 해도 그것을 기준으로 내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고 율법에 매인 자이고 믿음이 오기전의 믿음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명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믿음이 온 후의 삶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구원받은 이후의 삶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능력이기 때문에 그 믿음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그 믿음으로 인해서 반드시 신자의 신앙생활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야 하는 결과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그 신자의 삶에 나타나는 것이 없다면 그 믿음은 야고보서의 말대로 죽은 믿음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대개 신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 믿음의 삶은 도덕과 윤리적 의미에서의 선행이며 또는 종교적 활동으로도 나타나는 삶으로 생각하여 믿음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믿음으로 인해 나타나야 할 삶이라면, 신자들은 날마다 선행을 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야 하고, 고아원이나 복지관을 찾아가서 봉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예수님의 길을 가도록 했고, 또한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간 그 길에 동일 선상에 서게 하셨기 때문에 믿음의 삶은 그냥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 바울처럼 영원히 저주에 갇혀야 할 자신이 예수님의 의의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 받게 된 것만으로도 자신은 넉넉한 자임을 깨닫고 주어진 삶에 감사하고 주를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삶은 세상의 그 어떤 일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항상 그 마음이 주를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주의 은혜가 감사할 따름이라고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믿음이 온 후에 나타나는 신자의 변화이며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참 감람나무에 붙어 겨우 생명을 얻은 돌 감람나무들이 자신들이 맺은 열매를 업적으로 내어 놓으면서 자신을 자랑하고 있다면 그것처럼 우스꽝스런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당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이렇게 일갈을 하셨습니다.
요15:4-6절 보세요?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
이 구절들은 자칫 오해를 하면 열매를 맺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모두 중도에 탈락시키신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보시면 이 구절들은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있는 진짜 가지들은 자연스럽게 열매가 맺혀지게 된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열매라는 것을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행위로 이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열매를 맺게 하신 주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열매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떠나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에게 붙어있는 자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것도 자신들이 맺는 것이 아니라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가 맺는 열매를 거저 전가 받아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라는 나무에 가지로 붙어 있어야 예수가 내 안에서 생명으로 열매로 맺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걸 아는 이들의 삶 속에서 진심으로 나 이외에 다른 이를 섬겨주고 사랑해주고 하는 그러한 행위들과 지향성이 조금씩 보여 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넘어지기도 하고 그러나 그들은 그럴 때마다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특히 총신대학원 신약학교수(정훈택)는 우리 한국교회가 믿음과 행위에 관해서 잘 못 된 가르침으로 오해를 해서 신자의 삶의 중요성을 너무 가볍게 취급해 왔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길다란 논문을 책으로 출간하여 교계에 많은 이슈를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믿음과 행위와 관계를 통속적 개념으로 보고 믿음을 관념적 차원에서 삶의 전 영역을 지배하는 인격적 차원의 개념으로 끌어올리는 것과
그리고 행위를 인간의 자의적인 노력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선물의 열매라는 전인적 삶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는 믿음과 행위는 삶의 영역에서 하나로 결합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그 섭리와 지도하에 온갖 세상적 역경을 해쳐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적 현장에 재현되는 것이므로 복음서가 보여주는 믿음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 그리고 실제 삶을 통하여 한 개인과 교회의 실체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훈택교수는 계속해서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믿음은 단지 지적인 동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 신뢰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은 곧 지, 정, 의를 포함한 전인적인 것으로 그의 내면의 태도로서 그 자체가 행위를 배태하고 있어서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다고 그 원리를 제시해 주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믿음의 관계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종속되어 주종의 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그러한 종속관계를 인정하고 그 주도권을 쥔 대상에게 마땅히 취해야할 태도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믿음임으로 그 종속관계가 유발하는 의존의 태도로 하나님의 아들과 그의 백성의 관계에서 필수적인 요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결론적으로 정훈택교수는 말하기를 믿음은 그 자체 안에 행위를 배태하고 있어서 죽은 믿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행위(열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행위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더 나아가 그 둘은 서로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믿음은 언제나 열매로 드러나게 되어 있기에 그러하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열매로 알리라는 저자는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여 이원적으로 파악하지 말고 그 둘은 하나라는 긴밀한 관계 하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해주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신자의 삶 속에서 믿음과 열매로서의 생활이 분리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신앙과 열매로서의 생활(행위)은 결코 분리되지 않고 삶 가운데서 연합되어 나타날 것이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위를 배태하고 있는 그 믿음을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저도 저자(정훈택교수)의 글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문장의 글이 문제가 됩니다.
한 번 봅시다. 끝으로 정훈택교수는 마지막으로 그의 책에서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은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받았지만 그 믿음에 따라 행하여 열매 맺는 것은 인간의 몫에 해당한다고 주장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가 앞에서 계속 설명해 드렸던 것처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인간의 자격과 조건, 노력, 착함 등의 공로로는 자기 의를 드러내는 지향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하나님께 전혀 보탬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롬10:2-3절)
그리고 이어서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행위를 배태하고 있는 믿음을 거저 받았다고 하더라도 저절로 선한 행위가 나타나는 것은 결코 아니며 그 이유에 대하여 인간은 은혜로 받은 믿음으로 인해 노력하면 은혜를 따라 열매를 맺게 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은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동시에 우리 인간은 노력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결론적으로 믿음과 행함을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로 이야기하면서도 그 행함에 있어서는 결국은 인간의 실천을 강조 하는 행함을 그 초점에 맞추고 그 열매 또한 인간 측에서의 노력과 열심으로 이루어지는 열매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정훈택교수의 논문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성경의 맥의 흐름의 일관된 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열매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이 역사 속에서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도바울이나 야고보 선생 또한 아브라함을 그 예로 들어 열매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지금까지 서신서들을 통해 쭉 설명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맺어지는 열매는 우리 인간의 자격과 조건과 노력과 열심에 의해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일하심의 열심의 역사로 성취되어지는 열매라는 점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성도에게서 맺어지는 열매가 무엇이냐? 는 물음입니다.
성도에게서 맺어지는 열매는 자기가 부정되고, 자기가 부인이 되고(마16:24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나의 옛 사람적 육적자아의 본성이 갖고 있는 세상에 대한 가치, 즉 자기존재가치 챙기기, 자기위상, 자기명예, 자기영광 챙기기, 나만을 위한 자기애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던 자가 자리이타적인 삶의 자리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하나님의 은혜만 오롯이 바라보는 자리에서 또 다른 형제를 주님의 심장을 갖고 내 몸과 같이 한 지체로 바라보는 자리로 서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처럼 얼마든지 마음에도 없는 바른 삶과 종교적인 열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없었고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사도바울도 그의 서신서 로마서 10:2-3절에서 “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인본주의, 율법주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주님은 비록 지금은 다른 이들보다 화려한 행위들을 내어놓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에 간섭하셔서 그 자신을 부인시키시고 결국에는 그 안에 사시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고야 마는 그런 열매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주어지니까 그 믿음이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모리아산에서 자기아들 이삭을 바치는 자리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믿음의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이 인생과 역사를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부인이 되지 않고 여전히 자기가 살아서 자기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성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걸 확증하는 것이 할례인 것이고 그게 세례인 것입니다.
할례는 육적 몸을 벗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육적 아담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자격과 조건, 열심과 노력, 힘과 지혜가 다 전부 배설물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육적자아의 죽음입니다. 그게 육적 몸을 벗는 것입니다. 그게 할례입니다. 그리고 그 빈 그릇위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뜻이 덮이는 것이 할례입니다.
내가 아무런 능력과 자격이 없어서 나 대신에 누군가가 희생이 되어서 내가 살았다는 표식을 내 몸에 가지는 것을 할례입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그것은 생식기가 잘린 것이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례라는 말은 자르다는 말입니다. 언약이라는 말과 똑 같은 말입니다.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가 안 죽고 너 대신에 자격 있는 어떤 존재가 죽었어! 그래서 너는 살아난 거야! 라는 그 흔적을 갖고 있는 것이 할례입니다. 그게 육적자아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육적, 옛 사람적 몸을 벗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시고 나를 품어 안아 주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여호수아 5:8-9절에서도 할례를 행함으로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는 것은 애굽에(세상에) 살면서 힘의 원리의 상징인 애굽이 그 애굽화가 되어버린 이스라엘 그게 육적자아입니다. 그것을 잘라내는 것이 할례이고 그래서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이 세상에서 치러내야 하는 영적전쟁은 “나”라는 존재의 육적자아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자아실현과 자아성취, 자아발전과 자기계발등의 육적 자아를 향한 모든 시도들을 부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은 그 옛 사람적 육적 몸을 벗고 영적인 새 몸, 즉 예수그리스도와 연합 된 새로운 은혜의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인 성도는 마른 뼈와 같은 마른 막대기에 불과한 그런 아브라함의 자격이나 노력이나 됨됨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전적인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이다!를 보여주는 새 창조의 주체적인 그림이 아브라함의 육적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이 없으면 영원히 없음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요15:1-2절 보세요?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다? 그러십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참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음에도 과실을 맺지 못하는 자는 제해 버리신다고 하십니다. 이게 잘 못 된 번역입니다. 그 어구가 아주 오해가 많은 부분인데 여기에서 ‘제하여 버리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아이로’는 ‘들어 올리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들려 올려 졌을 때에 쓰던 그 단어입니다. “아이로”?
그러니까 과실을 맺지 못하는 그 가지는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양지바른 곳으로 들어 올려서 과실을 맺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열매 맺음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번역을 하면, 예수님에게 접붙임을 당한 자들이 열매를 맺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그 가지를 양지 바른 곳으로 들어 올리셔서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지의 삶에서 열매를 맺으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들이 마치 선하고 착한 열매를 맺어서 세상의 사랑을 받고 신의 사랑을 받아 낼 수 있는 존재라고 착각을 하는 것? 이게 바로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그게 죄의 본질입니다.
렘 2:21-23절 보세요? 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22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23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히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을 좇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으셨는데 그 포도나무가 이방의 악한 포도나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밑에 악한 포도나무의 정체가 그려지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들이 스스로 잿물로 씻고 수다한 비누로 막 씻으면서? ‘나는 더럽지 않다’ 라고 말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게 악한 포도나무라는 것입니다. 그게 들포도 열매인 것입니다.
자기가 열심히 자기를 씻으면서 나 깨끗하죠? 나 사랑해 주세요? 라고 하는 이러한 행위가 악한 포도나무라는 것입니다. (이게 극단적 성화론주의자들이고, 이게 알미니안 주의입니다.) 물론 성도에게 있어서 성화(성숙)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에서 모범생으로 변화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자로 바뀌어 밀려 내려가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면은 절대 존재할 수도 없고 깨끗해 질 수도 없어요? 가 바로 피조물의 제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으로 자신의 행위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자기인식과 올바른 하나님 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진짜 성도의 행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기서 많은 오해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극단적 개혁주의 성화론이 여기에서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깨끗이 씻어야지? 잿물로 비누로 열심히 씻어야지! 다른 종교인들 보기에 쪽 팔리지도 않나! 우리가 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더 착하게 살자! 이게 건강한 설교자의 건강한 외침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2:21절에서 그런 그들의 악함을 확인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21절에서처럼 “ 2: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은혜로 심겨진 자들이고,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에 의해 깨끗해 질 수 있는 자들인데, 그들이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자신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생하게 된 것이고, 스스로의 힘으로 깨끗해 질 수 있다고 우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악한 가지이며 이게 바로 유대주의,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신들의 티끌 됨과 더러운 죄인 됨을 올바로 직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걸해야 산 자가 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잿물과 비누로 스스로를 씻으면서 ‘우리도 이 정도면 깨끗하지? 하고, 열심히 우리끼리 바벨탑을 쌓아 올라가 볼테니까? 기달리세요? 이렇게 너스레를 떠는 자들이 바로 악한 포도나무라는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가지는 ‘나는 예수라는 진짜 포도나무에 의해서 은혜의 접붙임을 받아서 비로소 산 자가 된 사람이야’라는 겸손한 고백을 하는 자로 지향되어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했던 바울의 이 접붙임의 원리는 돌 감람나무에 불과했던 우리가 참 감람나무에 의해 접붙임을 받아서 참 감람나무의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가지를 향해서 절대 자긍할 처지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독 인간에게만 어미가 젖을 물리는 것입니다. 인간 이외의 모든 포유류는 다 태어나자마자 새끼가 자기 다리로 일어나서 어미젖으로 달려가 자기 힘으로 젖을 빱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 미숙아로 태어나서 어미가 안아서 젖을 물리지 않으면 굶어 죽도록 태어납니다. 엄마가 젖을 물리지 않으면 그 자는 죽습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랑의 젖으로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와 반면에 짐승은 자기 스스로 일어나서 젖을 빨겠다고 가는 것이 짐승입니다. 결국 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짐승처럼 자기발로 일어나서 젖 먹는 꼴이랑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그 착한 일에 주체가 하나님이시라고 하면서 그 착한 일을 하시는 이가 우리 안에서 새 창조 즉 구원의 일을 시작하시는데 그 일은 예수그리스도의 날에 반드시 완료 될 것이며 그러나 그 착한 일은 우리가 행하는 어떤 일이기에 앞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신 그 착한일의 행함의 주체인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증상, 흔적이 있는데 그걸 가리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또한 그 믿음을 가리켜 보이지 않는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믿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도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반복되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선한 행함과 믿음은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어찌 있을 수 있느냐? 라고 했던 것입니다. 야!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착한 일 안하면 니네들 다 가짜다! 이런 말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이 같은 이야기인데 너희들은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엉뚱한 행함을 이야기하고 있구나! 이것이 바울 당시 유대주의에 대한 일갈이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인간이 생각하는 자신의 자격과 조건, 됨됨이, 열심과 노력 등의 종교행위가 그 보상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선한 일, 착한 일을 왜 안하니? 이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행하심을 의존하는 믿음 즉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 그것이 성도가 행해야 하는 선인데 그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자기가 부인되고, 그 자기부인의 과정 속에서 격발이 되는 믿음의 행위는 하나님이 기쁘시게 보신다는 그런 말입니다.
선을 행하라에서의 선은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일하지 말라는 것은 내가 보상의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행하는 그 일 자체를 갖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하여 과연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가? 아니면 나를 자랑하는가? 그걸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물며 상을 걸어놓고 권선징악이나 상선벌악의 그런 인과응보의 방법으로 경쟁시키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동양사상의 영향을 받은 왜곡 된 기독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그런 인과응보로 일을 하셨으면 우리는 지금 다 죽어야 됩니다.
이처럼 인과응보의 논리는 힘의 원리로 돌아가는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은 어떠한 결과에 대해서 반드시 원인을 근거로 요구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은혜로 값없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값을 매길 수가 없어서 그냥 줄 수밖에 없어서 값없이 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 무엇으로도 보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거저 선물로 주어져야 그걸 구원이라고 그러고 그게 은혜입니다. 그걸 가리켜 기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하나님의 역할을 맡은 호세아와 하나님의 백성의 역할을 맡은 창녀 고멜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한 남편을 떠나 창녀로 일평생을 살았지만 고멜을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고 결국은 창녀로 살다가 노예시장에 팔려가 있는 그 타락한 고멜을 은 열 다섯냥과 보리 한 호멜반(=은 삼십냥)의 값을 주고 다시 사서 자신의 신부를 받아들인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우리에게 상징적인 의미로 예시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가 전부 인간 존재의 가치와 위상을 높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해서 인간의 성숙, 인간의 행복, 인간의 유토피아, 인간의 구원 등등에서처럼 모든 종교의 주인공은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자신의 주체성과 존재성을 스스로 챙겨보려고 하는 그 시도와 추구가 바로 타락이며, 그리고 또한 존재가 자기의 처음자리를 망각하고 자율성을 발휘하게 될 때에 그걸 죄라고 그럽니다.
그렇게 인간 자체의 가치와 존재성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 하에서는 인간 행위의 가치 또한 대단한 것으로 여김을 받아서 그러한 인간 행위의 다소와 경중에 따라서 인간존재의 가치가 평가됩니다. 그러한 행위를 얼마나 많이 내어 놓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얼마나 못 내 놓았느냐에 따라서 인간존재의 가치가 평가되어지기 때문에 그 평가에 따라 판단이 나오고 심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반면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완전히 박살을 내 버리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죽어라! 그럽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라고 그러십니다. 너희는 이 역사 속에서 죽은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옛 자아의 죽음이 없이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을 어떻게 믿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자신의 욕망과 신념 사이에서 사투를 벌이면서 점점 자기 자신에게“난 죽어 마땅한 자”라는 사형선고를 스스로 내리는 그 과정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이고 자기십자가를 지는 삶인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서 격발되어 나오는 모든 행위를 선을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에 기여하는 행함, 이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 삶을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의 성숙이라고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그게 육적자아의 죽음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행함, 즉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방향으로 지향되지 않는 모든 행함은 다 저주의 대상임을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로 채워지는 형국으로 자신의 독립적 존재 영역을 삭제 당하고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며 하늘의 하나 됨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그 사랑을 알고 다른 이들을 향해 자긍하지 아니하고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멸망당해야 할 자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생수를 함께 받아 누리는 자가 되었는데, 그것을 믿는 신자라면 다른 형제의 못남을 바라보면서 자긍하고 무시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을 믿는 믿음에서는 형제에 대한 자긍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외모로 사람을 취할 수 없음을 약 2:13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약 2:13절 보세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결론은 바울이나 야고보는 같은 믿음을 얘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함과 믿음은 두 수레바퀴가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행함이 곧 믿음이고 믿음이 곧 행함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믿음과 행함을 손으로 한 번 비유해 보면 이렇습니다. 손은 손바닥(믿음)과 손등(행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은혜로 값없이 선물로 주신 구원을 손바닥(믿음)으로 받아 쥘 수 있지만 손등(행함)으로 쥘 수는 없습니다.
손등(행함)은 어떠한 물체도 거머쥘 수 없으며 단지 손바닥(믿음)을 보호하고 보존할 따름입니다.
또 손바닥(믿음)만으로도 구원을 쥘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손등(행함)이 없는 손바닥(믿음)만 존재하는 '손'은 없으니까요. 손등(행함)은 손바닥(믿음)이 거머쥔 구원을 보호하며 보존하는 보조적 역할이므로 손바닥(믿음)과 손등(행함)은 나뉠 수 없습니다. 손은 거머쥘 때 손바닥과 손등이 함께 일합니다.
이렇듯 손은 바닥과 등을 한 세트로 지칭하는 것으로 믿음과 행함은 나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9-10)
바울은 손바닥으로 손을 말하였고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17, 22, 24) 이처럼 야고보는 손등으로 손을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손의 비유를 통해 믿음과 행함의 불가분리의 관계성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자체 속에 자율적 순종의 의미를 함의한 행함을 은혜의 특성상 처음부터 내포함으로 이 둘의 관계는 본질상 통합적이고 복합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성경은 진술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결국 믿음과 행함의 상관관계도 being(존재)의 문제이지? doing(행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 한국의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율법주의와 기복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동인은 이런 식으로 통합된 의미의 믿음과 행함의 일치된 나눌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원화시켜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첩경으로, 행함은 복과 상급의 근거가 된다는 식으로 곡해해 가르쳐 온 자업자득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도바울이 롬 4:4-5절에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믿음과 행함의 관계 속에서 믿음과 행함의 문제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믿음이 무엇인가?'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는 것을 인간의 일로 여겨버린다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이 행함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는 인간의 행함에 의가 되는 행동과 의가 되지 못하는 행동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사도 바울은 롬 3:20절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했고, 롬 3:2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인간의 행함이 의가 된다는 선언이 없으며 또는 의가 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롬3:26절에서도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행함이 의가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오해하기를 믿는 자가 의롭다고 하니까 믿음도 인간의 행함으로 오해를 하고 의가 되는 행함이 있다고 고집을 부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엡 2:8절을 보시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믿음은 분명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의를 얻은 자가 된 것인데, 이 믿음을 어떻게 인간의 행함으로 주장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때문에 의롭다는 칭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바울도 그의 서신서 롬 4:4-8절에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삶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라면 감히 그 의를 자랑하고자 하겠습니까? 우리가 의를 위해서 한 것이 뭐가 있다고 자랑을 합니까? 자랑한다면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자랑할 뿐입니다.
그래서 고전 1:31절에서는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롬 3:21-31절에서도 사도 바울이 믿음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인데 거기서 벌써 새로운 의? 또 다른 의가 증거되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인 구약성경이 전부 예수 믿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맥락에서 사도바울도 그의 서신서 로마서 1:18절로부터 3:20절까지에서 아주 길다랗게 인간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과 추악함을 폭로해 내고 있습니다.
그 주된 핵심의 논리는 인간은 선을 행할 수가 없다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지적입니다.
인간들은 율법으로도, 양심으로도, 심지어 말씀을 가지고도 죄만 생산해 내는 추악한 시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며, 그 발은 피 흘리는 데에 아주 빠른 좀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우리에게서도 그러한 좀비와 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인간들은 다 죽은 흙이고 없음이고 죽은 시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 지옥에 가야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대 반전의 현실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 죽어야 마땅하지만 그 중에 어떤 자들을(택한 자들 =제한 속죄) 위해 대안을 마련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롬 3:21절에 잘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 성경에서 이미 증거 되어 있던‘하나님의 한 의’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한 의는 ‘율법 외에’ 것의 다른 차원의 의입니다. 율법을 부정해 버리고 나타난 하나님의 다른 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완전히 폐기가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예수라는 목적지로 향하게 만들어 주는 몽학선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갈 3:23-25절에서처럼 몽학선생은 어린 아이를 돌보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는 어린아이의 가정교사로 초등학문을 가르치며 의복, 식사, 행동을 돌봐주고 학교에도 데리고 다니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예는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스승이며 후견인의 역할을 했고 반면에 가르침을 받은 이 아이는 비록 신분이 노예라고는 하지만 몽학선생으로서 그 스승에게 순종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인이 되면 이 몽학선생은 아이에 대해 더 이상 스승이나 후견인으로서의 어떤 권한도 갖지 못하고 이제 아이는 몽학선생에게 순종해야 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로마사회의 몽학선생의 관습을 이용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이러한 몽학선생으로 비유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믿음이 오기 전의 어리석은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 한 방편으로 율법을 몽학선생으로 등장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믿음이 오기 전의 어리석은 사람은 이제 갓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초신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행으로 믿음이 증거 되고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선행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믿음이 오기 전의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그의 서신서 골 2:20절 이하에서 율법을 초등학문으로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인간의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가르쳐주기 위한 몽학선생의 역할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긴 하지만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몽학선생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율법의 기능은 우리를 죄 아래 가두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내가 하나님의 자식임을 몰랐고 내가 바로 멸망의 자식임을 몰랐는데 율법을 받고 보니까 바로 내 자신이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전혀 어긋나 있는 멸망 받아 마땅할 자식이라는 것이 발각이 되고 폭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율법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신자가 실천하고 행해야 할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몽학선생으로서 인간의 무지와 쓸모없음과 의롭지 못함과 구원받지 못함을 지적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인간의 본성과 죄의 실체를 고발하는 용도로 주어진 것이지 그것 자체가 대단한 가치가 있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 율법을 잘 지켜서 산술적 횟수나 양으로 다른 이들과의 차이를 유발시켜서 자신의 훌륭함과 위대함을 자랑하는 자리로, 자기의 가치로 챙기는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죄에 갇힌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이 복음의 내용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십자가에 흘리신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의롭게 하셨다는 복음의 내용이야 말로 죄에 갇힌 우리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선행이나 율법 준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선포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신자가 의롭게 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로우신 예수님을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에 매이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의 의의 행하심을 믿는 자로 살아갈 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믿음이 온 후의 신자는 인간의 행함에서 벗어나서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만을 바라보는 자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에게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실천을 해야 믿음이 있다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실천을 하고 주변의 사람들이 칭찬하는 선을 행했다고 해도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의만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신자가 어떤 실천이 있든 없든 간에 상관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 죄인 된 자리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신 예수님의 의의 행하심만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행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행함에도 매이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함에 매이지 않는 신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율법을 통하여 배워야 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의 필연성이었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배워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인간들이 그 율법을 자기 치장의 도구로 역사 성숙의 도구로 끌어 당겨 버린 것입니다. 그걸 지켜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보여 줄께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걸 지켜서 자신의 명성과 자격과 평판과 가치를 챙겨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짜 그 율법의 원형이신 예수를 이 땅에 직접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나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들이 오해하고 있는 그 율법의 원형이 여기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로로 하여 그 대상에게 입혀지게 된다고 합니다.
아! 그 율법이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었군요! 하면 끝입니다. 그게 롬 3:22절입니다.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성숙의 정도나 깊이 등에 상관없이 ‘차별이 없느니라’의 모습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숙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이 칭찬하는 강도가 달라지면 반드시 차별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하기에 그 사람의 자격이나 됨됨이나 업적이나 공로와 성숙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는 것, 즉 차별이 있게 주어지는 걸 상이라고 하고, 그와 반면에 그냥 차별 없이, 하나님이 값없이 그냥 선물로 주는 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그의 서신서 롬 3:23절부터 그 믿음의 내용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롬 3:23절과 24절 보세요?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존재도 될 수 없는 상태였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바른 삶의 지향성은 doing(행위)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being(존재 됨)에 의해 하늘의 것을 소망하고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 안이라는 완성된 복된 자리에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미 존재 된 자로서의 그의 삶의 자리는 내 열심과 노력을 기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하늘을 지향하는 삶으로 발휘되어지고 격발되어져 사는 것 뿐입니다.
이러하기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 이미 완성이라는 복된 자리에 들어와 있는 신자로서 그 완성을 누리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신자로서의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때론 열심을 부리기도 하고 때론 게으를 수도 있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그걸 좇아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을 장악하여 죄인으로 해석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포착 당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 말씀이 우리를 장악하여 해석하고 포착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인으로 해석해 내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말씀을 지켜서 산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하나님이 믿음으로 우리를 장악하여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시는 자기의 기뻐하신 뜻대로 끌고 가시면서 이끄시는 대로, 그냥( 이 세상 역사 속 )도화지의 그림처럼 잘 그려내는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의 인생이 맞다가 말씀으로 산다입니다. 말씀이신 예수가 당신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가실 때 자기의 의지와 뜻을 부인 당하며 말씀이 이끄는 대로 그 흔적을 삶으로 그려내는 것을 말씀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은 우리에게 장악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장악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해 육을 부정당하고, 십자가에 그 육을 매다신 것처럼, 우리에게 그 말씀이 완료로 침노해 들어오게 되면, 우리도 역시 십자가에 매달리는 삶으로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말씀을 내가 해석하고 포착하고 장악하여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이 우리를 해석하고 장악하여 말씀이 끌고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피조물인 우리와 다르게 무한 하신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말씀은 우리의 실체인 문둥병자인 모습을 확 비추어서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법, 즉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인본주의적인 인간들은 그 말씀을 지켜 행하여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고 자랑하고 드려내 보이려고 하는 자기애를 들키게 되지만,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악한 길과 불선한 행위와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인하여 스스로를 어리석게 보고, 자신들의 행위를 부끄럽게 생각하며, 자신의 처지, 즉 피조물 됨을 올바로 인식하여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 성령께서 깨닫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 말씀은 인간들의 처음자리를 확인케 하여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던 자기애를 하나님과 이웃에게로 돌려내는 역할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나를 향한 사랑과 신뢰에서, 자기애에서 조금씩 벗어날 때, 그 사랑이 하나님과 이웃에게로 점진적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뭐 하나님과 이웃을 대단하게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라,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그 자기애, 자기 사랑이 이제 조금씩 밖으로 돌려질 때에 그걸 가리켜 율법지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또 다른 말로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말씀 앞에서 드러난 자신의 실체를 똑똑히 보고 아! 주님만이 나를 깨끗케 할 수 있는 것이구나! 그게 아니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하고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내가 문둥병자요, 부정한 자이며,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이대로 죽어 지옥에 가게 된다는 절박한 자기 확인이 있는 이들에게만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아사 직전의 굶주린 사람에게 빵 한 조각은 생명입니다. 그것 없으면 죽으니까?
그러나 반면에 배부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지만, 복음은 나는 이제 이 물 한 방울 안 마시면 목이 셀로판지처럼 붙어서 죽습니다! 라고 하는 것처럼,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 내가 예수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라는 이 절박함이 있는 자? 나 문둥병자 맞습니다! 라는 이 고백이 있는 그들에게만 복음이 됩니다. 그들에게만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내어 놓을 것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생명처럼 붙들 수 있는 빈 그릇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지 못하는 자로 만들어 낼려고?
그래서 우리는 그 육의 자아라는 그 옛 사람적 광야 인생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통해서) 나는 정말 내가 사랑할 대상이 아니다 라는 걸 이 역사 속 현실속에서 처절하게 배우고 체험하며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지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지독한 자기애를 끊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나 사랑이 점점점점 식어지는, 소멸되는 쪽으로, 우리를 몰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일하심의 열심의 역사로만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만을 위해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 이거! 영 형편없는 인간이네! 이것 참!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정말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네! 라는 그러한 자기 자신을 직시하게 될 때에 비로소 자기애(자기사랑)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갈2:20절)
그렇다고 해서 뭐 하나님과 이웃을 대단하게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라, 대단하게 위하여 산다는 뜻이 아니라, 나를 향한 사랑과 신뢰에서 조금씩 벗어날 때 마다, 그 사랑이 하나님과 이웃에게로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그 사랑이 밖으로 조금씩 조금씩 돌려질 때에 그걸 가리켜 율법지킴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걸 다른 말로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또 다른 말로 ‘나’라는 존재 자체가 무력한(무능력한) 죽은 흙(티끌, 거름더미)이라는 것이 수긍이 되고, 더 이상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짜 성령을 받은 이들은 어떻게 나 같은 인간이 다 있냐? 라는 자각과 함께 자기부정, 자기부인의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이들에게 있어서 상대적으로 다른 이들이 전처럼 나와 비교대상이었던 우월함과 열등함의 판단 근거로써의 외모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나나, 너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다 쓰레기다! 라는 이 의식이 자리매김되면서부터 이웃을 외모로 보이지 않게 되는 그러한 지향성이 우리의 삶 전체를 이끌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복음에 의해 끌려가게 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걸 가리켜 복음에 참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지향성을 가진 신자는 다른 가치(땅)를 추구하며 사는 세상 사람들과는 절대로 똑 같이(같은 방향으로) 못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내주함이 있는 그는 하나님의 복음이, 믿음이 그를 장악하여 이끌기 때문에 그는 반드시 하늘의 것을 지향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복음에 의해 끌려가는 그런 와중에 불교인들도 추구하고 있는 착한 삶이 나올 수 있고, 성숙한 삶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안 나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너무 안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에 참예된 자들은 절대로 세상 사람들처럼 복음과 동떨어져서 게으르게 못 산다는 뜻입니다. 복음이 얼마나 극성맞게 우리를 끌고 가느냐 하면 경기장에서 일등하기 위해 달음박질하는 그 사람처럼 우리를 달달 볶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잠언서에서도 지혜(예수그리스도)가 끌고 가는 삶은 게으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지혜에 의해 끌려가는 삶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게으르게 살도록 그냥 놔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이렇게 자기부정, 자기부인의 지향성 안에서 십자가를 향해 아래로 아래로 다른 이를 섬기는 자리로 달려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잠언서에서 개미를 본 받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기 때문에(책망하기 때문에) 아! 나는 죄인 중에 괴수 맞네요! 그리고 예수님의 그 은혜가 없으면 우리가 노력해서 만들어낼 의는 조금만큼도 없네요! 그런 자기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와는 다르게 신자들을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자기 자신을 기특하게 여길만한 도덕과 윤리와 종교적인 활동들을 하도록 부추겨 줍니다. 그리고는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자기영광, 자기위상, 자기명예, 자기가치를 챙기도록 끝까지 붙들게 만드는 것이 마귀입니다. 이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었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도덕과 윤리를 지키라고, 율법과 제사를 행하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마귀는 신자에게 더럽고 추하게 살라고 유혹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깨끗하고 순결하게 살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우리의 자랑을, 의를 삼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마귀의 궤계인 것입니다.
그 행위가 나쁜 게 아니라, 그들은 그들이 한 일을 자기 것으로 끌어 당겨 상대적으로 다른 이들과의 차별의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차별성 있게 대우해 달라고 우기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급론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반면에 오히려 하나님은 죄를 그렇게 짓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교묘히 감추어 두고 있는 우리의 그 죄인 됨의 상태(죄 된 모습)를 젓가락으로 확하고, 휘저어서, 니가 어떤 존재인지 한 번 봐! 라고 폭로해 내시는 일을 하신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피조물로서의 객체인 자신을 붙들지 않고 우리 인생의 삶의 주체이신 예수를 붙들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짓게 만드신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감추고 있는 우리의 본래 모습을 들추어내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들추어낸다는 것은 들추어내어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워낙 내가 죄인인데, 논두렁의 고여 있는 흙탕물 속의 맑은 물처럼, 아닌척 하고, 도덕, 윤리, 종교적인 선행, 율법주의 왜곡 등으로 위장하고 포장하고 이렇게 있으니까? 그 껍데기를 벗겨내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미꾸라지가 휘젖고 다니면 금방 맑은 물이 뿌엿게 흐려지는 것처럼 언제든지 흙탕물이 될 수 있는 상태로 미끼를 던져준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장하고 포장하여 감추고 있던 그 자신의 정체를 폭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기자는 히브리서 4: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양날의 검으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할 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도 발가벗겨 그 실체를 드러낸다고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이 아무리 율법을 지킨답시고 위장을 해도 양심을 따라 살았다고 너스레를 떨어도 십자가 앞에 서면, 그 어떤 것도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라는 것 자체가 인간들의 모든 행위를 다 악으로 규정해 버리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런데도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인간들이 행하는 그 어떤 행위가 선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인간들은 율법 몇 개 지킨 것을 가지고 십자가 앞에 가지고 오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인간의 행위가 다 빛을 잃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행위만 오롯하고 선명하게 남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선한 일을 단 한 가지도 할 수 없네! 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의 삶에 접촉점을 형성하실 때에 그 때에 하늘의 선함이 우리 안에서 조금씩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걸 내 것으로 사유화하여 내 영광을 위해 나를 자랑하는데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신자는 자신의 현실을 올바로 자각하고 스스로는 고칠 수 없는 그 장애의 현실을 아버지가 다 보상해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감사하며 찬송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장애를 인정할 때만이 다른 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이기 때문에, 내가 제일 삐뚤어 걷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과 이웃에게로 관심과 심장을 돌려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이 자리로 밀려 내려가는 것이 성도입니다.
본래 성경에서 은혜라는 헬라어 단어 ‘카리스’라는 뜻은 받을 자격도 없고 갚을 능력도 없는 자에게 무상으로 거져 주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카리스라는 헬라어 단어의 뜻입니다. 그러나 값을 자격이나 값을 능력이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은 거래라고 그럽니다. 그걸 은혜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라는 단어 자체가? 그 수혜자(혜택을 받는 자)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확증해 버리는 단어인 것입니다. 반면에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을 세상의 가치로는 뭐라고 그럽니까? ‘상’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노력과 수고로 얻은 상?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구원과 영화까지 전부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영화까지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의 구원을 가리켜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거져 주어졌기 때문에, )
따라서 우리는 영화로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당도해서도 여전히 신랑의 은혜만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화까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엡2장)
그렇기 때문에 그 은혜만을 찬송한다는 것은 끝까지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수긍한다는 말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앞에서‘상’을 요구할 수 있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그것은 구원에서 영화까지의 그 과정에서 어떤 지점에서건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만한 자격을 획득했다는 자신감이 있는 사람만이 상을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진짜 은혜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은 죄가 무엇인지, 십자가 구속의 은혜가 무엇인지 지금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탁월해서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한 인간에게 일을 시작하여 주관적 믿음을 격발해 내는 가를 보여주는 아주 선명한 이야기의 실례가 되기 때문에 그가 믿음의 조상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 후사라는 뜻입니다. 후손이라는 것은 조상을 닮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닮았다는 것은 신체나 얼굴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믿음의 모습이 곧 우리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 진 믿음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말씀드린 것이고 그 아브라함에게서 나타난 믿음은 행위와는 상관없는 오직 언약하신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인 것이고, 이러한 믿음이 있는 자가 곧 아브라함의 후사이며 그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히브리서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라고 기술을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먼저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그냥 멍하니 우상 팔아먹으면서 호이호식하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믿음이? 아버지는 너 믿어? 너 모리아산에 분명히 세울 거야? 이 믿음이 당도해서 그를 갈대아 우리에서 그를 밀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주어는 다 믿음입니다. 믿음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누구의 믿음입니까? 아버지의 믿음입니다. 본토친척 집에 거하는 아브라함을 떠나게 하셨던 하나님의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창15: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멋모르고 혈통의 가족을 따라 우상을 만들어 팔며 바벨론, 즉 갈대아 우르에서 호의호식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지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을 당신의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에게 밀어내신 것입니다.
믿음은 그렇게 성도에게 들어가는 순간 그를 이리저리 몰아서 육의 죽음의 자리로 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좀 낮설어도 이내 적응이 되고 잘 죽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도 요 21:15절 이하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에 걸쳐서 사랑 확인의 질문을 물어보셨던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대제사장의 뜰에서 자기 스승인 예수님을 세 번 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자신의 부끄러운 사건을 상기시켜 줌으로 인해서 베드로가 선뜻 대답을 못하고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진 대답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제자들보다 가장 앞서서 말고의 귀도 자르고, 나는 목숨을 내 놓고서라도 난 당신을 사랑할 것이고 끝까지 좇아갈 것입니다! 라고 큰 소리쳤는데 그런데 여기서는 한풀 꺾은 대답으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시잖아요! 라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님께로 떠 넘겨버립니다. 나는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 사랑한다는 것이 이제 확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 측에서의 이 사랑의 격발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묵사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목숨까지 바칠 것처럼 자신이 있었는데 삶을 살다보니까 점점 점점 나는 안 되겠다! 나는 아니올시다! 나는 nothing 이구나! 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사랑이라는 게 자기 쪽에서 발휘되고 격발되고 생산되어 나오는 것이 아님을 그 시점에서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베드로를 통하여 폭로시켜버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줄곧 자신이 다른 제자들보다 우이에 있는 수석제자로서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는 것처럼 말해 왔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베드로의 특유의 자신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이 이어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시면서 ”네가 젊었을 때는(성령받기 이전= 인본주의 관점에서, 본질적으로 피조물인 자신이 하나님처럼의 자기인생의 주체 자가 된 상태를 말함) 네 맘대로 띠 띄우고 다녔지만 늙어서는( 오순절날 성령이 오심으로, 성령 받은 이후에는 이제 자기가 그 스스로의 자기 인생의 주체의 자리에서 본래의 피조물인 자기 자리인 그 객체의 자리로 밀려 내려가는 것을 말함 ) 남이 네 팔을 벌려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라고 했던 것입니다. 즉 자기 꿈, 자기비전, 자기야망, 자기주관대로 못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의 소원과 뜻과 비전과 야망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점점 소멸되어지고 비워지는 쪽으로 지향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상식에 기반을 둔 신자 안에 있던 세상의 가치는 점점 점점 소멸되면서 십자가 뒤로 숨겨지는 삶을 지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옛 사람적 육적 자아의 죽입니다. 이게 자기부정,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님에 의해 믿음이 가입되게 되면 그 믿음에 의해서 나의 옛 사람적 육적 자아의 죽음을 조금씩 조금씩 경험하면서 나만을 위해서 향했던 관심과 사랑이 외부로 조금 씩 조금 씩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늘 사랑이 무엇을 전제로 격발이 됩니까?
올바른 현실인식과 자기 존재 인식으로 인하여 성도의 육적 자아가 부인됨으로 말미암아 그 질그릇 같은 성도의 육적 자안 안에 들어와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선명하게 드러남으로 인해서 아! 나는 이런 존재이구나? 그리고 그러한 사유와 통찰과 고민에서 비롯된 육적자아의 그 망함? 아! 나는 이래서 하나님 앞에서 죽은 흙일 수밖에 없구나? 라는 이 자각? 이걸 망함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자기인식의 망함이 전제가 될 때, 바람이 불면 항상 흔적의 상이 생기듯이 그 사랑이라는 상이 맺어 자연스럽게 격발이 되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만 집중 되었던 것들이 나의 망함으로, 나의 옛 사람의 육적인 욕망이 망하자, 삭제되자, 소멸되자, 십자가 뒤로 함몰됨으로 인해 밖으로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만을 향했던 사랑과 관심과 신뢰가, 자기애가 점점 끊어져 가는 삶을 이 사망의 몸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진짜 성도의 신실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지혜나 자격이나 열심이나 노력이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하심과 이끄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기에 그것은 성령님의 이끄심에 의해서만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성령의 소욕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에게 그런 열심들을 발휘하게 만들고 격발시켜내게 되는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꾸 실패하는 것을 드러내고 자기가 자각하고 깨달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한 실패하는 내 모습을 감추기 위해 자꾸 다른 것으로 위장하고 포장하여 덕지덕지 감싸고 있기 때문에, 정작 본인이 본인에게도 속고, 다른 이들도 속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발전, 성숙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반면에 계속해서 내가 부정되고 낮아지고 자기부인의 자리에 서다보면, 당연히 다른 이들이 나보다 나아 보여 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참 사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베드로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사랑도 신뢰도 다 잃어버린 완전 파산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자기 측에서 격발되어 나온 모든 사랑이 다 가짜라는 것을 확인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빈 그물 그리고 숯불 앞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조반을 손수 준비해서 그에게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걸 안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계속 실패 했을지라도 저렇게 주님의 집요한 사랑이 나를 놓지 않는 이상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완성이 될 거고, 바로 지금이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중인 것이구나! 를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자신은 없지만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걸 주님이 아시잖아요? 주님이 날 끌고 가고 계시잖아요! 라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 사랑의 주도권은 주님께 있는 거니까요.
그 대답을 들으신 주님이 뭐라 그럽니까? 내 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고 그럽니다. 내양을 먹이라 내양을 치라는 것은? 너! 나 사랑하니? 네 사랑해요! 그러면 그 사랑으로 네 이웃을 사랑해라는 뜻입니다. 이게 이웃 사랑입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너 나 사랑하니!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처라! 이 이야기를 하시다가 이제는 그 전까지는 너가 너의 열심을 격발하여 너의 노력을 내놓아 나를 사랑 할려고 했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 할려고 했는데 지금 봐라 모두 빈 그물 아니니! 너 숯불 앞에 앉아 있지 않니? 그러면 너가 나를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내양을 먹이는)을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 삶 자체가 여태까지 니가 니 신발신고, 니가 원하는 곳으로 다니는 결과 아니냐?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 내가 너의 삶에 직접 개입해서 밖에서 띠 띠우고 너를 끌고 갈 것인데 어디로 끌고 간다고 그럽니까? 니가 원치 않은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 영생을 사는 자는 다들 어떻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까?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한 발자국도 못 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는 방향은 전부 자기존재가치인 내 위상, 내 명예, 내 영광만 챙기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나의 뜻을 내놓고 주님을 끌어 당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내가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길을 내가 너 안에 들어가서 끌고 갈텐데, 너 이제 나 따라 와야 돼 !!! 그럽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길, 그 자기부인의 길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놔두면 그 길을 누가 따라 가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이 띠를 띠우고 끌고 가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안 따라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부정당하고 해체당하고 부인 당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다른 데서 꺼내놓고 자랑하며 그랬던 일들이 이제는 교회에서 말도 할 수 없는 형편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잘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바울도 자신의 서신서 고전4:9절에서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표현해 주고 있느냐 하면? 바울 자신의 삶의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올바른 자아인식과 자기 처음 자리를 확인했을 때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 죽이려고 작정한 자 같이 포로로 잡혀온 그들 중에 맨 끄트머리인 미말에 두시고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개선행진을 하는 승전국에 왕의 맨 뒤에서 질질질질 끌려가면서 왕의 승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적국의 포로가 미말입니다. 예수님의 승리의 개선행진에 포로로 잡혀서 미말(맨 끄트머리)에 서서, 승리하시는 왕의 영광을 돋보이도록 부름을 받은 하늘의 제물들의 삶이 이 세상 속에서는 비참한 포로의 모습으로 그렇게 보여 진다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개선 행렬에 포로로 삼으셔서 질질 끌고 다니면서, 하나님이 이겼다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승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느냐하면? 하나님이 개선 행진해 가시고 우리는 뒤에서 질질질 끌려가면서 하나님이 진짜 이기셨네요! 하면서 신자 자신은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현실적 가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렇게 포로 된 모습처럼 살아가게 가게 된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 바울이 독자인 교회들에게 성도는 고난을 받아야 된다? 환난을 통과해야 된다? 시험을 통과해야 된다? 그렇게 이야기 했던 사람입니다. 그것을 알았던 사람인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나님이 마치 나를 죽이기로 작정한 분처럼 패더라는 것이 그게 포로입니다. 미말에 둔 것입니다.(고전4:9)
세상과 천사들에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만 그렇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다 정 주지 말라고? 한 눈 팔지 말라고? 고후2:14절에서 같은 말이 나옵니다.
“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 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신다고 그랬습니다.
바꿔 말하면 예수가 나를 이기는 것이 우리가 이기는 것이라고 그럽니다. 그것은 마귀의 힘에 의해 내가 지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기게 하시고 라고 번역이 되는 단어가 드리암뷰오 입니다. 드리암뷰오의 그 단어는 왕의 개선 행진에 참여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하기에 올바른 해석은 사도바울의 이야기에서 살펴 본 것처럼 왕은 개선해서 가시고 우리는 포로로 개선행진에 끌려가는 그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하면 바로 뒤에 나오는 냄새, 향기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 냄새는 개선행진에 피웠던 향냄새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왕이 적국과 전쟁을 하여 승리를 해서 개선행진을 할 때에 그렇게 포로들을 그리고 전리품들을 질질질 끌고 오면서 그 왕에 그 승리를 과시하는 그 때 사람들은 향을 태웁니다. 태워서 그 냄새로 왕의 승리를 또 축하해 주는 것입니다. 이겼네요! 이겼네요! 그래서 개선행진이라는 이 단어에 냄새라는 단어가 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냄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 신자는 왕이 이기셨다 라는 것을 축하하고 드러내는 자이지, 우리가 이긴 자로 그 행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 향냄새는 승리하는 왕이 기뻐하는 냄새입니다. 그 냄새가 바로 제사 때에 제물이 타는 향기로운 제물 냄새입니다.
그런데 그 제물이 일차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예수님? 예수님이 자기가 자기의 뜻을 다 버리고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항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더니,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서 하나님께 드려졌더니, 하나님이 그걸 기쁘게 흠향하셨잖아요? 그게 하나님이 승리하셨고,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자로? 항복하는 자로 그렇게 상징적인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우리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1절에 보면“ 너희들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라” ---그 제사라는 단어가 제물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제물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태워야 된다라는 뜻입니다. 태운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제물이 되어서, 포로가 되어서 그렇게 부인되고 부정되어 진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향기, 냄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냄새로, 향기로 예수님의 개선행렬에, 그 승전행렬에 참여한다는 것은, 나는 낮아지고 하나님이, 예수님의 승리가 흥하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역사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2:15절 보세요? “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
이처럼 개선행진에 끝의머리 미말에 서서 승리하시는 왕의 영광을 돋보이도록 부름을 받은 하늘에 제물들에 삶이 이 세상 속에서는(가시적으로 바라볼 때는) 비참한 포로의 모습으로 보여 진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걸 믿음이 없는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아이구! 예수 믿는다더니? 니꼴 좋다? 그래 예수 믿는 결과가 고작 그거야? 예수 믿고 망하고? 예수 믿고 자식새끼가 더 잘 안됐니? 나봐! 나 달마사 다니거든? 너보다 백배 더 잘 산다?
이게 뭡니까? 믿음 없는 자가 이 세상 현실을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그러한 포로 됨의 삶이 그들에게는 사망의 향기가 되는 것이고,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래! 인생이라는 것은 저런 것이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기서(사망이라는 이 땅에서) 자꾸 컴 아웃 나와라 라고 이야기 한 것이지?
그러니까 우리는 이 사망의 자리에 앉아 머물고 있는 그 자리에서,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돼! 그게 바로 생명의 향기라는 것입니다.
우린 그렇게 이 세상 속에서 은혜가 개입을 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여 예수님의 포로가 되어서 꽁꽁 묶여서 하나님나라로 끌려갑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자기를 부정하고 부인해야 되는 나라고, 하나님만 섬기는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부인되고 부정되어야 하나님과 연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상태를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온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는 어디로 끌고 가느냐하면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서 십자가 부정, 부인의 자리로 끌고 갑니다. 이처럼 은혜는 성도의 육적자아를 죽이는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한 몸으로 연합이 되어서 하늘 백성이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역사 속에서 점점 해체되고 흩어져 맥없이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신앙의 자신감이 드는 것이 아니라 소금친 푸성귀처럼 축 처지게 되어 있습니다. 힘이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괴수 맞네요! 왜냐하면 그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아는 것입니다. 할말이 점점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하나님께 함몰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점점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걸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적자아의 죽음?
그래서 점점 그렇게 자신감을 잃을 때에 세상이 힘과 가치로 추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점점 흥미를 잃게 되고, 세상이 이를 봤을 때에 우리보고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갈6: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래서 결국 내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하고 최후의 항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점점 이 세상의 가치를 놓은 자리로 밀려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죽은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반면에 이 세상에게는 성도가 죽은 자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흥하고, 우리는 쇠하는 삶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요3:30절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세례요한의 말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삶의 원리는 바로 이렇게 내가 죽어서 상대방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상대방에게 흡수되어 버리는 방법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는 이 세상 그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곳에 가야합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가 진짜 행복한 나라이고 풍요하고 안식이 있는 그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을 실제로 이 이성과 인격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알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 이 마귀의 나라가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되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그렇게 처절한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은 이 인생 속에서 저 끝에 보이는 작은 하얀 빛? 그 빛을 바라보면서 그래! 저 빛이 있는 곳에 당도하면 어둠은 다 사라지고 이제 빛만이 있는 나라가 열릴거야? 하면서 소망으로 그 빛만 바라보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게 한 곳 오직 예수만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인본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성도는 그런 사실에 대해 부정합니다. 예수 믿으면 잘 살아야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믿음이 어떤 대상에게 부어지게 되면 그 대상에게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밀려나온 것처럼 반드시 그 부어진 믿음에 의한 이끌림의 흔적이 나오게(생기게) 되는데 이걸 성경이 행함이라고 그럽니다. 야고보가 말한 행함이 그 행함인 것입니다.
착하게 잘 살아라? 거짓말 하지 마? 이게 아니라 믿음이 누군가에게 부어지게 되면 객관적 믿음이 그를 끌고 가는 흔적이 주관적 믿음으로 신자에게 생기게 되는데 이걸 행함이라고 그럽니다. 바람이 불면 잎 파리가 날리고,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는 것처럼 성령의 사람은 반드시 그의 삶의 자리에 그리스도의 흔적의 삶을 남기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리켜 죽은 믿음이라 했을 때 그 행함이 바로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격발이 되는 대상의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주관적 믿음은 관념적인 지식의 습득이나 고백 정도가 아니라 삶 전체를 장악당하여 끌려가는 자에게서 터져 나오는 그런 삶의 흔적 몸부림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거기서 터져 나오는 몸부림, 즉 몸짓인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그런 어떤 관념적인 지식의 습득이나 고백정도가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믿는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뜻과 계획을 두고 그를 당신에 희망 지점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먼저 나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사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 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내가 예수를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믿음이 있다? 없다? 누구 믿음이 크고 누구 믿음이 작고?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 옛 사람의 심장을 도려내는 일을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믿음의 모습을 조금씩이나마 보일 수 있는 것이지, 믿음조차도 우리에게 사유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건 묵시 속에서 완료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창15장 6절에서 뭘 어떻게 믿어서 그가 의롭다함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바로 그 뒤에서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아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때에도 사라와 함께 비웃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내 사라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또 다시 팔아먹는 그 때는 아내가 임신 했을 때입니다. 아주 파렴치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심지어 모리아 산에서의 그 위대한 경험을 하고도 또 첩들을 들여서 다른 자식들을 낳습니다.
그럼 그가 뭘 믿었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어떤 면을 보고 의롭다 여기셨다는 것입니까? 특히 창15:6절에서 ‘믿다’라는 동사가 ‘웨헤에민’으로 와우 계속형으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지속적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럼 도대체 아브라함이 언제 믿었습니까?
그런데도 성경은 그 와우 계속형을 써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을 지속적으로 장악하며 따라오고 있는 하나님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믿음이 아브라함을 지속적으로 장악하고 있기에 그는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의인으로‘여겨지는’것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여기시고”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이 “하샤브“ 라는 단어는 실제로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라(실제로 그러하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데 그렇게 쳐준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판정권자가 은혜로 그렇다고 여겨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게 히브리어 하샤브입니다.
그러니까 믿은 것도 아니고 의롭지도 않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쳐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믿음이 이미 그를 장악하고 있기에 그가 그 믿음의 길에 들어서서 그 믿음에 완료지점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그가 여호와를 믿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저와 여러분의 인생인 것입니다.
만약 그런 일은 없겠지만 하나님의 믿음이 빠지면 그 즉시 지옥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언제든지 지옥갈 수 있는 인간들이 내가 뭘 해 놓고 그걸 내 것으로 사유화해서 상을 달라고 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5장 6절의 아브라함을 의롭다 라고 여기게 된 믿음은 일차적으로 아브라함에게서 생산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장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셨던, 밀어내셨던 하나님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끌어내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정작 아브라함의 믿음은 모리아 산에서 그 때 자식의 심장에( 자기의 심장에) 칼을 꽂는 것으로 완료의 모형으로 한번 보여 진 것입니다. 그 전에는 아브라함이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이거기까지 끌고 간 것입니다. 이걸 잘 이해하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그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뜻대로 이끌어가시면서“나”만을 위해서 뛰던 심장을,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신 주님의 심장으로 점차 옮겨가는, 진짜 성숙을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이며 그게 옛 자아의 죽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십자가 지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심장의 요동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겨 버리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의 삶입니다. 그 길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걸 화목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5장에서 벌써, 미리서 아브라함이 믿었다라고 여겨주시면서 믿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냥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하샤브입니다. 그 하나님의 믿음이 어떻게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다른 말로 아브라함을 장악하고 있는 믿음을 근거로 모리아산의 믿음으로 가기까지 어떻게 격발해 내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으로 존재가 채워질 때 비로소 성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육신을 입고 있는 한 그것이 좋은 것으로만 체감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보내신 어떤 이가 와서 자기의 능력을(인간들의 힘과 지혜를 이용하여 하늘에 오르려고 하는) 하나도 발휘하지 못하고 빈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도움으로 신부 찾아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게 이게 역사이며 구속사의 실체입니다. 그것 알아먹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맥락에서 보면 사람의 이름은 이 역사 속에서 삭제되고 부정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내 이름이 삭제된다는 것은 나의 존재성이 하나님의 의해 차압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가 복이 있는 자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하늘백성으로의 회복은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 자기 이름을 내고 유명해지는 쪽으로 지향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쪽으로 지향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라는 옛 사람적 육적 존재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은 내 이름이 부수어지고 예수의 이름만이 오롯하게 드러나게 되는 그 죽음의 행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못 살도록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만 살도록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차압당하며 믿음에 의해 끌려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도록 만드시기 위해 자기백성을 찾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무한이신 하나님이 유한 한 인간 세상에 관입해 들어오신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 자신이 종이 된 신부를 구하기 위해 자신도 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의 영광이 드러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빌2:5-8)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다 마치시고도 그 모든 일의 공로를 하나님 아버지께 돌려야 하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대로만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아버지가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모든 일의 주체자임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시키시는 말만 하셨고, 시키시는 일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건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 자신이 철저하게 부인되고 부정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라는 존재는 다 비워지고, 그 안에 아버지의 뜻과 능력만이 가득 차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상태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반사적 영광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 존재들의 존재 양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분을 하늘 자녀들의 맏아들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구하러 오신 신랑이신 예수님도 자신의 업적과 공로를 스스로 하나도 챙겨 갖지 못하셨습니다. 그냥 죽었습니다. 하나님아버지가 살리시지 않으면 못 살아나는 그 자리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 예수님의 능력이 찬송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찬송을 받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오로지 아버지의 영광만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그분의 역할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진짜 무력한 자, 진짜 불가능한 자인 우리가 그 어떤 공로와 업적을 챙겨서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사망에서 구원해 내시기 위해 아들이신 예수의 심장까지도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의를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과 의 앞에서 자신의 옛 사람의 심장에 칼을 꽂는 자로 밀려 내려가면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야 예수가 주가 되는 것이고,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는 인간에게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쟁을 잘 보면? 다 그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일 때는 다 공격자들이 보잘 것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건져올 때에도 그런 무력한 모습이었지만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해 올 때에도 5개국 연합군을 쫓아가는 318명으로 집에서 호미 들고 작대기 들고 농사나 짓던 가솔 318명이 5개국 연합군을 좇아가서 어떻게 이깁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왜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의 모양새를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연출해 놓은 것입니까? 왜 그런 모습이 들어납니까? 이 전쟁은 그 전쟁을 치루는 인간에게 성패가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자랑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땅에 거하고 있는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하속 군사 318명을 거니리고 5개국 연합군과 싸워 승리하고 조카 롯을 구해 갖고 오는데 멜기세덱이라는 대제사장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뭐라고 하느냐하면? 미안하다 잘 했는데 그 전쟁은 다 하나님이 하신거야? 라고 초를 쳐 버린 것입니다. 그 전쟁은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것이라고 아브라함의 공로와 업적을 다 묵사발 내 버리십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 해 버린 것입니다.
창14:20절 보세요?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
그 대적을 누가 붙이셨다 그럽니까? 이 전쟁은 하나님이 붙인 것입니다. 그 멜기세덱을 히브리서에서는 예수그리스도라고 그럽니다. 그 대제사장, 하나님의 백성이 적에 포로에서 건져 나올 때는 항상 이렇게 하나님 혼자 전쟁하신 거야를 예수가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전리품을 십분의 일을 드립니다. 십일조? 십일조는 무엇이냐하면 내 모든 것은 다 당신 것이다라는 고백입니다. 나는 당신 것이라는 고백이 십일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치른 전쟁이 맞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리품 하나도 안 갖고 전부 제자리에 갖다 놓습니다. 그것은 승리의 전리품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전쟁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얻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어라고 싸웠는데 상을 하나도 못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유일하게 얻어먹은 것이 무엇입니까?
멜기세덱이 무엇을 갖고 왔습니까? 떡과 포도주? 이것은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십자가를 예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다음 장 창15:1절에서 아브라함아! 섭섭하니! 내가 니 상급이냐? 하고 하나님이 직접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신랑인 내가 니 것인데 니가 다른 것 무엇을 원해? 내가 니 상급이냐?
창15:1절 보세요?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 이니라---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상으로 주십니다. 그런데도 현대교회가 믿음을 말할 때 빼놓지 않고 강조하는 것은 상입니다. 이것은 믿음에 대한 왜곡 된 이해로 인한 것인데 믿음을 인간의 열심과 연결하여 생각하기 때문에 상에 대한 말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로 히 11:5-6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은 열심히 행한 자에게 상 주시는 분이므로 천국에 가서 상 받기 위해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교회마다 열심을 내라며 교인들을 다그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신자가 받는 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은 모든 자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동일한 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한 일에 따라 차등으로 주어지는 상이 아닌 것입니다. 천국에서 받는 상이 차등이 있다면 결국 상으로 말미암아 천국에서도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천국에 속성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사고방식에서는 상에 차등이 있어야 합니다. 신자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고하고 봉사하는 것이 모두 동일하지 않는데, 수고와 봉사에 따른 상에 차등이 없다면 분명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상에 차등이 없다면 누가 다른 사람보다 더 수고하려고 하겠습니까? 많이 일한 사람이 더 크고 좋은 상을 받아야 더욱 힘을 내서 봉사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천국은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의 사고방식은 사단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상이 주어진다고 해도 천국의 사람들은 전혀 불만을 가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천국입니다.
천국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 주신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고, 주님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이 곧 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봉사하면서, 주님으로 인해 고난을 받으면서 주안에서의 기쁨을 누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만 예수 그리스께 속한 사람 되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영광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은 오직 무익한 종일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자랑할 만한 자기 일도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일했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상의 차등을 말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수고롭게 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한 생각자체가 인본주의적인 생각이고 세상의 보편적인 상식이라는 틀 속에 갇힌 사고방식으로 계산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천국에는 상이 있다고 히브리서 11:6절에서도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상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상에 차등이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또한 자기의 공로로 받는 상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녹에게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가서 받는 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갔다는 것이 이미 그에게는 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녹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이었고 그 증거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간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갔다는 이 사실을 믿는다면 그것은 죽음과 상관없는 다른 세계가 있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죽음에 갇혀 살아가는 무덤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뭘 해도 죽음에 갇혔다는 본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온갖 영광과 명예를 누리며 살았다고 해도 그 본질은 죽음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육신이 세상을 벗어나면서 영원한 고통이 있는 멸망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죽음의 도시로 바라보는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힘으로 삼지 않음을 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힘이 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을 보지 않고도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신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기쁨을 위해 살아갈 자로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믿음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으로 부르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자신의 기쁨을 위한 상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믿음이 자신을 이끌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믿음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도, 상을 받을만한 공로도 없는 것이 신자입니다. 하지만 상급 차등론 은 내가 일했다는 사고방식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상급 차등론은 성경이 아니라 사단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상은 잘한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우리가 잘 한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예수님이 잘하신 것에 대한 보상인 것입니다. 즉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받는 상입니다. 그러므로 상이란 오히려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지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현대 교회는 상을 천국에서까지 다른 사람과 차별적 대우를 받는 것과 연관시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계 22:12절을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일한대로’라는 말은 우리가 수고하고 봉사한 분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수고하고 봉사한 일의 분량에 따라 상을 주신다는 뜻으로 이해를 해 버립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일은 교회에서의 수고와 봉사겠지만, 하나님께서 일로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요 6:22).
즉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서 자신의 악함을 알고 자신을 사망에서 건지실 예수님의 의를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생명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믿음이 주어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도 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상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그가 바로 하늘에 속한 신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 즉 그리스도와 우리가 꽁꽁 묶여서 연합되어 신랑과 신부로 영원히 사는 그 나라를 기다리는 것 그게 성도의 궁극적 목표지점입니다. 십자가 지고 죽으면 됩니다. 십자가에서만 성령의 열매가 맺습니다. 성령은 소유격이 아니라 주격으로 쓰인 단어입니다.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그 열매의 나무는 어떤 나무이겠습니까? 사과나무에서 열리는 것이 사과이고 배나무에서 열리는 것이 배입니다. 그리고 탱자나무에서 탱자가 열립니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나무도 십자가라는 나무입니다. 그 십자가라는 나무에서 열리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나무는 우리 옛 사람이 못 박힌 나무요, 예수님의 피만 빛나는 나무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는 자기부인의 나무요, 자기 부정의 나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에게서는 반드시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변화가 있습니다. 근데 성경이 그 열매를 무슨 열매라고 그럽니까? 성령의 열매라고 그럽니다.(갈 5:22-23) 거기에서 ‘나’를 돋보이려고 하는 마귀적인 일상(행사)이 줄어들 것이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열매가 그 방향성과 지향성으로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저와 여러분의 일상을 좇아서 저와 여러분의 자신을 챙기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아무 것도 못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의 길을 그 길을 따라 저와 여러분을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길 걸으라고? 그 때에 저와 여러분이 하늘의 묵시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때로는 참으로 이해할 수 밝힐 수 없는 그런 참 무력하고 추악한 그런 일들? 행실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때에 붙드는 한 마디? 그러나 이제는? 맞아? 그래서 예수가 오신거야?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나 걸어야 할 길을 이미 정해 놓으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예수의 길입니다. 예수는 그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의 삶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비우시고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 부정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당신의 심장을 빼앗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믿음이 저와 여러분을 그 예수가 가신 그길? 그 자기 것 하나도 쓰지 못하고 이 땅에서 온갖 모욕과 조롱과 멸시와 모함과 천대를 받으면서까지 결국 그것 다 받고 십자가에서 죽는 그 길을 반드시 좇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 길을 먼저 가게하고 내 백성 또한 그길 가게 하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그길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예수가 가신 그 길을 걸어야 진짜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마지막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업적과 공로로 우리를 치장하고 있다고 해도 마지막 날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창세전에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성에서의 결론은 being(존재 됨)이지 doing(행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믿음과 행함의 상관관계는 동전의 양면처럼, 두 기찻길의 레일처럼 서로 일치 된 불가분리의 관계이기 때문에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고 행함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올바로 인식하고 자각하고 이해한다면
사도바울이 주장했던 롬1:17절에서처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과 야고보사도가 주장했던 약2:22절에서처럼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것이 결국은 같은 맥락에서 믿음과 행함을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성 속에서 믿음은 그 자체 속에서 자율적 순종의 의미를 함의한 행함을 은혜의 특성상 처음부터 함의 하고 있기 때문에
이 둘의 상관관계는 본질상 통합적이고 복합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맥락으로 견지하며 진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존재 됨(being)이 그래서 참으로 중요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끄럽지 못하고 너무 길어 죄송합니다. 아울러 믿음과 행함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이제 조금이나마 이해하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