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노래, 읏따따따
한 솔 아
난 수없이 어머니의 노래를 듣고 자랐지만 아버지 노래는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에 정을 듬뿍 주신 아버지의 그리움을 안고 그 추억의 여행을 떠나볼까한다
어머니 보다는 아비의 정을 끈끈하게 느꼈던 순간들이 더 많았다.
왜냐면 여린 나를 지극히 돌봐주시면서 어디든 매달고 다니셨던 아버지......
먹고 사느라 숨 쉬기조차 힘든 세월에 열한남매를 낳고 다섯아이를 잃으신 어머니에게는 자식이 앓다가 죽는 것은 예삿일로 아픔을 돌아볼 겨를 없이 강인하고 모질게 살으셨다. 어머니를 고생시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가 언제부턴가 반항과 미움의 대상이 되어버렸지만 이제 생각하니 용서받지 못하는 홧병 속에 늘 머무르고 계셨던 아버지의 심정은 얼마나 더 힘드셨을까, 따스하게 싸매주지 못해 드림이 후회스럽다.
아버지는 비록 학교 문 앞에도 못가보셧지만 구두짓는 기술이 뛰어난 분으로 6.25 이후에 부산에서 큰 사업가였다. 전쟁이 터지자 자전거에 쌀을 싣고 떠나셨던 아버지와 가족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남쪽 피난길에서 눈보라 추위 속에 두아기 얼어죽고 언니둘을 데리고 부산에 정착한 어머니는 갖은 고생을 하시다가 우연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아버지를 발견한 언니로 인해 가족은 영도다리에서 삼년만에 재회를 맞이했단다.
부산에서 30명의 직공을 두고 큰 공장을 차린 아버지..어머니는 가죽원단을 나르며 구두짓는 사업을 도우셨는데 어찌하다가 아버지는 브러커에 속아 삼척탄광에 수천켤레의 구두를 지어 무자비로 바치고는 구둣값 수금을 다 떼인 후, 업친데 덮친격 공장은 또 불이 났고, 어머니 원망의 낯을 볼 수 없었던 아버지는 훌쩍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탄광촌 장성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날 낳았다.
"너를 낳고 먹을 것이 없어 목이 말라 모래가 올라오는 찬펌프물만 벌컥벌컥 들이켯지....."
모든 고통을 꼭꼭 가슴에 걸어 잠근 채 우상에 빠져 절터에 가 엎드리고, 툭탁하면 무당을 불러 굿을 했던 어머니. 아버지와의 가슴에 묻어둔 과거는 어머니가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새롭게 거듭나 내가 두 아이의 어미가 되었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이 우상 섬긴 어미 죄탓이었노라 고백을 털어놓으셨다.
오랜 세월 방황하다가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늘 사업의 제기를 버루었다.
" 기필코 내 손으로 백칸의 집을 지으리라 "
늘 그 마음을 품으셨던 아버지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구둣방을 열으셨던 것 같다.
내가 어린 시절에 본 나의 아버지는 늘씬하고 단아한 멋장이, 비록 구두쟁이였지만 연갈색 체크 남방에 올곧게 멘 넥타이가 항상 단정하셨다.
어린 나이에도 우리 아버지는 깔끔하시고 멋을 아시는구나..정도로 외모가 곱상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술을 안드시고 코에 돋보기를 걸치고 촉농을 입힌 실을 보듬어 날렵한 칼날로 가죽을 오린 후 튼튼히 가죽을 잡아 당기며 꿰매시던 그 차분함을 잊을 수가 없다.
워낙 손재주가 많으셔 손에만 닿으면 꼼꼼히 매만지던 구두...... 열심히 가죽을 오리고 늘여 멋진 작품를 완성하시면 누가 신을지 모를 구두를 쳐들어 이리저리 모양새를 보셨다.
학고방 진열대에는 발골조들이 크기대로 올려져 있었고 사이즈를 재는 창호지와 필요한 각가지 납작한 끌들과 두들대와 망치와 질긴 실과 찹쌀풀, 실못들과 꼬브라진 바늘이 통마다 가득했다. 아버지가 가죽을 송곳으로 뚫어 질끈 실을 감아 쥐어 끌어당기면 신기하게 조여지는 꿰맴새를 보며 아버지의 무릎 아래에서 이것저것 집어 드리며 잔일을 도왔다.
아버지는 수동적으로 가만히 앉아 구두를 짓는 일보다 더 큰 사업의 제기를 위해 새로운 일들을 벌이곤 하실 때마다 실패를 거듭하셨다. 산꼭대기 목장의 밭떼기 무우농사가 얼가리가 되어 그나마 폭우로 밭이 휩쓸려가질 않나, 트럭에 항아리를 잔뜩 싣고 오다 뒤집혀 산산조각 나는등. 칠전팔기의 도전도 아랑곳 없이 뭔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으셨다.
다시 구두를 짓는 일에 몰두하시면서 반질반질하게 닳은 아버지 무릎바지에서 가죽 부스러기를 툭툭 털고 일어서면 나도 졸졸 따라나섰다. 동네의 허름한 집을 찾아가 늘상 그 집을 팔아라 마라 막걸리 한사발을 내시고 흥정을 하셨고 얼마 후면 그 집은 아버지의 손에 의해 허물어져 터가 닦여지고 네 귀퉁이 또는 육각 초석이 세워지는 것이었다. 가장 중심의 굵은 기둥은 항상 생나무 내음이 진하게 나는 굵은 몸통나무로 준비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구두를 한 켤레 다 짓고 나서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시듯 일곱칸방 한옥을 너끈히 지어놓으시고 한참을 바라보시던 아버지. 낡은 집을 뜯어 각목에서 못을 뽑아내어 재활용으로 사용할 나무를 가지고 놀다가 내 발바닥에는 걸핏하면 못이 박히기 일쑤였다.
아침마다 풀어헤친 머리를 들이대면 창호지를 바닥에 깔으시고 참빗질로 싹싹 이를 걸려낸 후 양갈래로 쫑쫑 땋아주시던 아버지.
한여름 연내골짜기 가재잡다가 소낙비를 만나 굴속에서 흰밥을 지어 빨갛게 익은 가재국 도 먹고, 봄비 내리는 날이면 꽃삽에 모종을 담아 오시어 울타리 아래 항상 꽃을 심으시거나. 나팔꽃 줄기 감아오른 싸리울에 더덕뿌랭이를 꽂으시면 쌉사레한 내음이 온 마당에 퍼졌고, 펌프물가에 다알리아, 백일홍, 금잔화 봉숭아 글라디올라스 등 알록달록 둥근 꽃밭을 풍성하게 일구시던 아버지.... 뉘집에서 색다른 싹이 돋아나면 기어이 꽃뿌리를 얻어 오셨다. 그래서 우리집 마당은 아버지가 봄비를 맞으며 일궈진 꽃들이 함박스레 피어났다. 마당에는 화덕불이 지펴지고 지금의 팬션주택에서 볼 수 있는 나무 식탁, 긴 의자에 앉아 강낭콩 감자 밥을 비벼 먹었다.
또 쫄래쫄래 아버지를 따라가 장작을 팰 때 쪼그리고 앉아 튀는 광솔을 주으면 불그죽죽한 나무조각 불쏘시개에 성냥불을 끄댕기는 것도.....아버지는 강아지를 좋아하셔서 누구네집 어미개가 새끼를 낳았다면 어김없이 눈도 못 뜬 강아지를 가슴에 끌어 안고 오셔 털등을 어루만지셨다. 일주일도 못되어 죽어버리곤 할 때마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호랑이띠라 집안에 동물이 살지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안고 와 보듬으셨기에 여린 정이 많아 끊임없이 사랑을 줄 줄 아는 분이었음을 다시금 실감한다.
여름이면 다리 허벅지에 심하게 종기를 앓아 고름이 질질 흐르는 나를 강으로 이끌곤 하셧는데 지프라기에 소금을 묻혀 박박 문지르진 후 잉크빛 소독약을 발라주시면 더 발그랗게 핏물에 물들어 떠내려가던 저녁 강물의 노을.....
퉁퉁 부어 걸음도 못걷는 여식을 살리기 위해 연병대 의무관을 모셔다 귓켠에 피고름도 뽑아 심지를 박고 엉덩짝에 페니실린 주사를 놓게 했던 아버지의 사랑. 심한 폐렴으로 학교를 한달간 빠져 앓다가 하늘이 노랗게 빙빙 돌 때에도 흰죽을 쑤어 숟가락에 멸치를 얹어 떠 먹여 주면 스케치북을 사줘야 먹는다며 떼쓰면서 죽숟갈을 놓을 때 "알았다 사줄테니 어서 먹어라" 하시며 자상하게 나를 벌떡 일으키셨던 아버지......
일평생 노래 한소절 못하시면서도 단한번으로 읏따따따!!!..아버지의 목울대 추임새.
술 많이 드시면 아무개야~~아무개야~~자꾸 우리 형제들 이름을 왜 그리 부르셨을꼬
왜 철없는 소녀시절에는 아버지의 답답함, 그걸 영 몰랐을까.
그렇게 혼자 속앓이 하시는게 싫어 구두 가죽처럼 뻣뻣하게 대했건만 화 한번 안내시고 홀연히 발길을 돌리시던 아버지,,,,,..
오랜 세월 가슴에 큰 돌이 낀 담석 수술의 날,
"야...너에게 비밀 얘기 해줄께 절대 아무에게도 얘기 하면 안된다. 이~~야..정말 천국이 있더라."
통증이 오기 전, 낮잠 속에서 천사의 부축을 받고 하늘로 올라가 깜깜한 공간에 내려졌단다. 갑자기 우르릉쾅광 천둥같은 음성이 들리면서 하나님이 호통을 치셨단다.
일평생 지은 죄를 몇시간 엎드려 통곡하면서 통회자복하고나니 저 멀리 한줄기 환한 빛줄기 속에서 인자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오셨다는 간증을 들려 주시고, 두 달 후 간암 발병으로 쓰러져 하늘나라로 가셧다.
지팡이를 짚고 떠나신 그 마지막 보슬비오는 날이 그립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버지 영혼의 노래 한소절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