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살 때 만난 원석이와
두 살 생일 축하를 여름 캠프에서 받은 수아와
이제 학교에서 선생이 된 현주와 최 선생 아들 성동,
나를 살린 가정의 최 선생 따님 서연,
동갑내기 한 씨 세 자매와 니최, 홍니,
그리고 착한 두 신랑..
손가락 꼽아 헤아리니 이 열두 사람이 내가 사는 곳 문밖에 서 있다.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들,
나는 이렇게 사랑받으며 여든여섯 해를 보낸다.
몇 밤을 자고 나니 느지막이 고운 마음이 담긴 아우님들의 사연 담은 기쁨 카드들이 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만남을 허락해 주신 분께 깊이 감사한다.
아무런 재주를 부리지 않고도 멀리 울산, 부산, 강릉 사는 아우님들도
바로 눈앞에서 표정까지 읽을 수 있는 듯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요술을 부린다.
기적이 따로 없다.
ㅁㅇㅎ의 홀로 여든 해 역사를 더듬다.
여든 해전 <억지 일본>에서 놓여났을 때 나는 갓 여섯 살이었다.
일본 말을 전혀 쓰지 않았던 우리 집과 교회와 유치원, 그리고 북 간도 땅 용정 이웃 틈에서 자랐기에, 실은 해방의 느낌이 내겐 새삼 각별할 것이 없었다. 늘 마음 편하게 사랑받으며 아무 욕심 없이 느긋하게 자랐다. 나는 '느림보'였지만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해방의 날, 나보다 열여덟 나이 위인 둘째 오빠가 커다란 나팔을 불며 여러 악기를 부는 밴드 무리 속에서 큰길을 행진하는 걸 본 것이 유난스러웠을 뿐이다. 아버지가 원산에 있는 일제 감옥에 갇혀 계실 때, 아무 말도 못 하고 뻘쭘이 혼자 들어가 면회했던 장면은 눈에 선하고.
늘 사랑의 눈으로 봐 주셨던 아버지의 긴 수염을 어찌 잊을까! 이젠 해방되었으니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걸 흥분해 기대할 나이도 못 되었고, 그렇게 영리하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그 뒤로도 다시 러시아 공산당에 잡혀 감옥에 가셨고, 북쪽 사람 감옥살이도 하셨으니, 내게는 별다른 것 없는 해방의 날이었다. 그 뒤로 용정에서 소학교에 입학했으나 그곳에서 학교 다닌 기억은 전혀 없다. 한 번쯤 학교에 간 것 같기도 하지만….
공산 치하에서 견딜 수 없다 판단하신 부모님의 보호 받으며 출애급 하듯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출애급의 목적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려는 것이었듯이...철없이 어린 나는 아무런 걱정 없이 재미있는 여행하듯 내려왔다. 명사십리로 유명한 원산에 들려 바닷가에서 놀기도 했고,
아버지 등에 엎혀 깜깜한 밤에 임진강을 건널 때 조용히 가자고 속삭이듯 하신 말씀에도 어머니 등에 엎혀 잠 오기를 기다리는 때 같이 편히 여겼다
동자동 김 재준 목사님 댁 방 한 칸에서 온 가족이 함께 지낸 날이 얼마나 길었던지도 나는 모른다. 용정 목사 사택 한 울타리에서 함께 지낸 정 대위 목사님 댁이 건너편에 있어 놀러 다니면서, 정 재면 목사님이 노환으로 자리보전하고 계신 것도 뵈었다. 미소 띤 평화스런, 그러나 위엄 지닌 모습이었다. 이제 내가 노인이 되어 몸이 편하지 못하니 그런 평화스런 표정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통증을 잘 참고 살아야 할 뿐임을 익히려 할 뿐이다. 먼저 남하한 교인들의 안내받아 전차도 타보고 서울 구경을 했다. 용정에서 주일 학교 선생이셨던 박 창해 선생님이 문교부에 계셔서 중앙청 건물 안내도 받았다. 아주 대단히 큰 건물이라 시골뜨기에게는 놀라웠다. 김천 황금동 교회에서 시무하시게 되기까지 아버지는 철로 가에서 노동하셨다. 밥해 먹을 쌀이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제일 어린 나에게 "은희야, 굶는다고 곧 죽지는 않는다"고 안심시켜 주셨다.
김천에 가서는 안정되게 지내면서 초등학교 1, 2학년을 다녔다. 한글을 익힌 건 어머니가 가르쳐주셨으니 학교를 많이 빠진 것 아닌가 지금 생각하지만 늘 어려움 없이 학교 공부를 한 것 같다. 3학년부터 서울 돈암 국민학교에 다녔는데 그것도 학년 시작부터 다닌 건 아니었다. 빈자리에 앉으라고 하신 선생님이 내가 키가 크다며 나중에 뒷자리로 정해주겠다 하신 것이 생각나니 말이다. 그렇게 5학년이 된 때 전쟁이 났다. 전쟁 나고도 학교에 한두 번 간 듯하지만 북쪽 노래만 배우고 왔지 제대로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이 박사 목소리로 길을 누비며 차로 다니면 "서울 시민은 안도하시고 있으라"는 말을 믿고 서울을 떠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9월 28일 인천 상륙작전까지 석 달을 돈암동 골목에서 잘 놀며 지냈다. 시골에 잠깐 피신하러 땡볕에 걸어간 긴 더위 길을 요즘 더위에 기억해 본다. 허긴 다섯 살 이었던 조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미국 유학 중이었던 큰 오빠는 전쟁을 피했지만, 언니와 둘째 오빠는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9.28 되자 가족들 생사가 걱정되어 오빠만 빨리 돌아왔다. 골목에서 놀던 내가 언제나 반가운 사람들을 제일 먼저 만나는 기쁨을 누렸었다. 이 경우도 그랬다. "오빠!"하고 달려가 품에 안기니 "살아 있었구나!" 안심의 소리를 냈다. 다시 전세가 험해지면서 모두 피난 길에 올랐다. 인천에서 큰 배를 타고 가는 것도 설렜다. 부두에서 식구 수 대로 옥수수를 사서 나누시다 하나 남은 것을 아신 어머니 덕에 잃어버릴 뻔한 큰 조카를 찾은 기막힌 역사도 있었다. 배에서 성탄 축하 예배도 보고, 아기 낳은 엄마도 있었다. 부산에 이미 피난민이 너무 많아 부두에서 뱃머리를 돌려야 했고, 우린 제주도에서 살게 되었다. 제주 읍 교회 별관에서 목회자 여러 가족이 옹기종기 사이좋게 살았다. 또 다른 섬 거제도 옥포에서 교회 맡게 되신 아버지를 따라 거제도 장승포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국가시험 보고 부산 영도에 피난 온 학교 천막 교실에서 공부하다가 2학년 여름 휴전 협정되어 서울 본교로 돌아와 정동에서 고등학교를 순조롭게 마치게 되었다.
고3 여름방학 어느 주일, 예배를 보면서 의사가 없는 시골에 가서 아픈 이들을 돕는 의사가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요즘 악명 높은 의과 대학생 처지와는 생판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님이 주신 생각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늘 쉽게 학교에 다니며 성적이 나쁘지 않아 무시험 제도로 학생을 뽑았던 대학에 입시 공부하지 않고도 평소 성적으로 입학했다. 선교사가 세운 학교이고 노천강당에서 예배 보는 것이 아주 좋았다.
늘 그랬지만 학교와 교회 생활이 늘 평안했고, 막내였지만 7살 때 조카가 태어나 두 살 터울로 세 조카와 같이 자랐고, 전쟁 통에 사정상 나이 차이가 좀 있는 조카 성근이를 귀여워하며 우리 대가족 안에서 평화롭게 살았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니 모두 평안할지라!"는 시구는 나의 삶이었다. 본과 2학년이 되어 마음이 흔들렸다. 그 전해 한 해 동안 기초학인 생리학과 생화학을 하면서 학생끼리 서로 피를 빼서 실험해야 하는데 한 번도 주삿바늘을 찌를 수 없었다. 이런 내가 의사가 될 수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마침, 그때 J.J.루소의 에밀을 읽게 되었고, 몸의 아픔만 아니라 마음의 아픔에 생각이 기울게 되어 교육학과로 두 해 공부 손해 보며 전과했다.
대학원에서 군 제대를 앞두고 학교로 돌아온 박 영신님을 만났고, 미국 유학가서 결혼하고 두 아이 엄마가 되어 지금까지 마음 건강을 위해 작은 힘을 쏟으며 살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은 예수 믿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기도 하고, 생각을 나누는 것을 열심히 하면서 함께 신앙생활을 두텁게 할 수 있어서 감사한다. 아가서 사랑을 이야기 읽으면서 우리 사이의 사랑이 영혼의 사랑,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내려 예순 해를 넘기고 있음을 감사한다. 모든 사람의 겉모습만 다른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다르니까 서로 사랑하는 삶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그렇게 살면서 바뀌고, 자라고, 영글어가는 것을 함께 하며 서로 부추기며 산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아침 마당에서 노래 자랑하는 걸 어쩌다 보게 되었다. 치매 걸린 남편을 돌보며 살고 있다가 자기도 암에 걸려 치료받고, 또 전이 되어, 또 치료받는다면서 한 여인이 구슬프게 노래한다. 다른 이는 더 힘든 삶을 풀어내고 노래한다. 나는 어떻게 여든 해를 살아왔을까? 용정 집 마당에서, 김천 승자네 집 뜰에서, 돈암동 골목에서 동무들과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면서 싸운 기억이 없다. 중고등 학교, 대학에 다니면서도 얼굴 붉히며 소리 높여 본 일이 없다. 어린 시절 내가 노는 모양을 보시던 어머니가 "은희는 착해!" 하셨던 걸 기억한다. 바보같이 양보한다고 하시지 않은 것이다. 굳은 뼈대 없는 아이였을까?
순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어렵지 않게 살아온 것일까? 방송에서 어렵게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상담실에서 만난 아우들, 하나도 똑같지 않은 이웃을 만나면서, 주님께서 아흔아홉 마리 양을 버려두고 찾아 나서신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우리가 아니었을까? 순조롭게 나를 봐주지 않고, 자기 뜻으로 아프게 대해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내 마음대로 내 길을 가고 있었구나!" "하나님 말씀보다 내 마음대로 생각한 하와의 후예였구나!" "목자 주님께서 그런 나를 또 찾아 나서셨구나!" 그리고 "기뻐 잔치를 벌이셨구나!" "이제는 정신 차리고 주님의 길을 떠나지 말아야지!" "이웃 양들과 같이 길을 잃지 말아야지!" "서로 길을 잃지 않게 보살펴야지!" "한눈파는 이웃을 서로 일깨우고, 주님의 잔치에 같이 참여해야지!"
그동안도 바깥세상의 문제에 열심히 참여해 왔다. 대학 3학년 때 4.19를 지냈다. 세브란스가 서울역 앞에 있을 때여서 데모 채비를 하고 나왔기에 실험하다가 가운을 입은 채 거리로 나셨다. 전날 고대에서 먼저 시작했기에 아침에 학교 가려 준비하는데 어머니께서 데모할 준비 하고 나가라 하셨었다. 그 뒤로도 군사 독재 정권도 겪고, 대통령 탄핵하라고 소리내기도 한 여러 세상 뒤집는 역사에 나름 열심히 참여해 왔다. 그런데 이번 계엄령과 헌법 재판을 보면서 당연히 처리해야 할 일을 하긴 했는데 왜 이렇게 우리는 큰 일 치르듯 똑같이 이 짓을 반복하기만 할까? 생각하게 되었다. 천황을 둔 이웃은 이렇게 해 내는 우리를 경이롭게 보고 있지만 말이다.
돌아가는 현실은 우리 모두 자기 가족, 자기편 중심으로만 움직인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며 예배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하듯이 우리가 모두 자기 욕심, 자기 패만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세상살이를 초월하는 높은 뜻을 따라 재 쓰고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야 했었던 것 아닐까. 그러지 않으니, 일본에서 독립해도, 독재가 물러나도, 부패하는 행세를 반복하는 문제가 민망하게도 반복해 일어난다.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말을 내 밭는 헌재 재판관의 표정이 왠지 어설퍼 보였다. 그분도 민망해하는 듯 보였다. 내 생각의 투사였을까? 우리 모두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에 따라 "이 땅에 하늘나라가 이뤄지이다" 기도해야지 자기 뜻, 자기 판단에 묶여있어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는 벗어나지 못한 것이니!
어려서부터 하나님 사랑을 평안하게 받아 누리는 믿음의 터에서 삶을 누려 온 것에 깊이 깊이 감사하면서, 내 딴에는 주님 뜻을 위해 주님의 연장으로 살 것을 마음에 두고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이리 늙어가면서 누가복음 15장 말씀, 선한 목자가 버려두지 않으신 "한 마리 길 잃은 양"일 뿐이라는 걸 깊이 깊이 감사한다. 어려서부터 191장 찬송을 좋아했던 것을 밝힌다. 아마도 가사보다 곡이 더 좋았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ㅁㅇ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