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초청입니다, (마11:28)
무조건적인 초청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세상 잔치에는 반드시 초청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격조있는 잔치일수록 초청 대상은 엄격히 제한됩니다. 그런데 지상의 그 어떤 격조있는 잔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천국 잔치에 대한 초청인 복음은 대상을 정하지 않고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어떤 사회에서든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하는 천민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계급에 상관 없더라도 현실의 삶의 무게에 억눌리고 찌든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세상 사람 중에 누가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겠습니까? 그런데 복음은 사람에게 차별을 두지 않고 초청한다는 것입니다(마22:9).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지금도 인종과 계층, 출신에 따른 보이지 않는 높은 장벽이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냉엄한 현실이지만 분명한 것은 복음은 지금도 차별없이 조건 없이 우리를 초청한다는 것입니다.
짐을 벗겨 주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신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의 진수를 맛볼 수 있습니다. 복음은 율법과도 다르며 세상 사람의 초청과도 다릅니다.
마23:4에서 예수께서는 "모세의 자리"에 앉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이것이 바로 율법의 특성입니다. 율법은 의무의 짐을 자꾸 얹어 놓습니다. 또 죄의 짐을 얹습니다. 사람들 역시 무겁고 수고해야 하는 짐을 남에게 얹어 놓기를 좋아합니다. 가능한 한 수고스러운 짐, 책임의 짐은 남에게 떠넘기려 합니다. 그 결과 우리 모두의 절규는 무엇입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 왜일까요? 주님이 우리의 짐을 대신 져주셨기 때문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이것이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