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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 金 法
인류를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우주법계 대 자연법으로 보면 지구는 인류 전체를 위한 수행의 도장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인연 따라 각자의 역할이 주어져 있고, 인연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연기(緣起)의 법칙으로 정확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너와 내가 따로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구촌 전체의 인류가 공동체 운명이라 합니다. 공동체 운명이라는 것을 매번 강조하는 것은 후천 인용시대에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전 세계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할 주역이자 미래불(未來佛)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마지막 구원을 말하는 재림예수나 불가에서 일체중생을 성불케 한다는 미륵불(彌勒佛)은 같은 의미입니다. 미륵불(彌勒佛)이 바로 미래불(未來佛)이고 미래불(未來佛)은 다른 차원의 존재가 아닌 미래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후천 인용시대는 사람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시대이며 자성을 밝힌 사람이 곧 신(神)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은 단군이래로부터 수천 년을 윤회 하면서 성장해온 저력 있는 민족입니다. 옛 동이족이 지구 안에서 땅의 기운과 하늘의 기운이 조화롭게 형성되어 명당이라 모인 곳이 삼천리금수강산 지금의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입니다. 또한 불교사상의 정법. 정맥이 이어져 대승불교의 꽃을 피운 곳이 바로 해동 대한민국입니다.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몇 가지 말씀드리자면, 다양한 종교와 철학이 이 땅에 들어와 널리 수용해 꽃을 피워 왔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도 가장 독창적인 한글을 만들어 사용해 왔고, 한글은 어떤 말이든 여러 가지 감정과 상태를 적절히 표현해 낼 수 있는 최고의 문자입니다. 나라 살림이 어려울 때에는 새마을 운동으로 전쟁 후 낙후된 환경을 급속도로 성장, 발전시켰으며, IMF당시 금모으기 운동으로 국민들이 애국심을 발휘했습니다. 근래에는 2002년 월드컵 때 전 국민이 붉은 물결로 하나가 되어 세계가 놀랄만한 국민의 단결과 응원의 힘을 과시 했으며, 더 나아가 촛불 혁명이라는 민주적인 평화 시위로 나라의 정치역사를 바꾸는데 우리 국민들의 뛰어난 시민의식에 전 세계가 감탄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련의 예시만 보아도 우리 민족의 독창성과 단합의 정신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그 빛을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해 나갔습니다. 특히 20세기의 지도 국가들에 대해 우리는 흔히 미국놈, 독일놈, 영국놈, 소련놈, 중국놈, 프랑스놈, 일본놈 등 강대국에겐 ‘놈’이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써 왔으나, 약소국에 대해서는 ‘놈’이라 칭하지 않고 필리핀사람, 베트남사람... 등등 ‘사람’으로 칭했습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이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강대국에 밀리지 않는 우수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며, 약자를 존중하는 선근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전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라는 개인을 강조한 표현 보다는 항상 ‘우리’라는 표현을 자연스레 많이 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우리가족’, ‘우리엄마’...등등. 그만큼 전통적으로 개인주의가 아닌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더불어 함께하는 민족임을 자연스레 사용하는 언어에서부터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시들이 모두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를 가르치는 지도국이 된다는 자연스러운 증거입니다.
우리나라의 미래상
앞으로 미래의 대한민국은 인공지능 의사 로봇을 만들어 내 인류의 건강과 수명에 영향을 주어 또 한 번 우수민족으로서 세계를 놀라게 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국민들은 더 이상 물질문명에 노예가 되지 마시고,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정신문명을 이어받아 이 땅에 태어 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셔야 합니다. 세계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정신적 지도자로서 마음가짐을 가지고, 인류의 빛나는 미래를 위한 자신의 역할을 찾아, 늘 스스로를 성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인류를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것은 세계가 알아주는 스타나 정치적 거물로 부상하여 거창하게 이름을 알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인연법에 충실하여 자신의 역할을 다 하며 살아가되, 지구촌 인류가 서로 다르지 않는 시절인연으로 유기적 공동체라는 점을 알고 살아가시란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살면, 즉 깨달아 살면, 이기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하며 베푸는 공(空)덕행을 실천하면, 작은 빛으로 시작해서 거대한 밝은 빛으로 지구전체가 빛나게 될 것이며, 이것이 곧 미래불(未來佛)이고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인용시대에는 현금이 없어지고 부정부패가 사라져 투명한 사회가 되므로, 공(空)덕행을 실천하여 빛이 나는 삶을 살아가야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투명한 사회가 형성되어 그 안에서 빛나는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자연히 퇴보하게 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큰 변화들은 앞으로 14년 안에 급속도로 변화 발전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변화에는 늘 진통이 따르는 법입니다. 자연법이 바로 펴 질 때에는 엄청난 재앙 수준의 현상이 따르겠지만, 정법인 자연법의 이념을 가지고 빛나는 삶을 살아가려 노력한 자들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 차원 업그레이드 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인류를 위해 ‘참 나’를 찾는 길
인류를 위해 공(空)덕행을 실천하는 지도자가 되려면, 좋은 뜻과 생각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먼저 달라져야 합니다. 수행을 통해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상식을 뛰어넘는 차원 높은 영적 수준을 갖추어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보살도를 실천하는 삶으로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저의 법 스승 되시는 월공대조사께서는 생전에 ‘석가모니 부처님도 다 못 마쳤다’라는 법문을 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다생의 수행을 마치고 한 바 없이 해탈하셨다고 알고 있는 것이 일반적 견해인데, 그 법문을 들은 많은 제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의 파장이었으며, 대체 이것이 무슨 황당한 말씀인가 하셨을 겁니다. 옛 조주선사에게 학승이 찾아와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무(無)라고 하신 것에 학승은 ‘부처님 말씀에는 만물에 불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찌 스님은 없다고 했을까’ 하는 의심이 생겨 무(無)자 화두가 생겨난 것으로 이 의문을 타파하게 되면 견성한다고 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업식(業識)의 성품이 머물러 있기 때문에 불성이 있으되 없는 것과 같다고 한 것으로 수행자를 견성(見性)케 하기 위한 하나의 화두(話頭)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마지막 법문에 나는 ‘아무것도 설 한 바 없다’라고 하셨지만 그동안 인류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듣고, 마음의 양식을 쌓아 그것이 각을 이루는 하나의 종교가 되어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 분의 가르침으로 인류에게 뿌려진 씨앗은 성장 시기를 거쳐 빛나는 꽃을 피워 결실을 맺어야 대우주의 적멸우주라 일컫는 시작과 끝이 하나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석가모니 부처님도 다 못 마쳤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월공대조사께서는 ‘소백산이 거꾸로 서서 간다’라는 화두(話頭)도 남기셨는데, 화두(話頭)란 반드시 부처님 경전에 있는 말과 글로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상식을 깨고 나가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공부가 되면 석가도 부수고 관음도 깨어야 하듯 이러한 상식을 깨는 화두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수행자들이 한 허물을 벗고 깨우쳐 견성할 수 있었습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서 흔히 육조 혜능스님의 돈오돈수(頓悟頓修),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가지고 갑론을박하는 견해들이 무성합니다. 대체적으로 보면 돈오돈수(頓悟頓修)는 학문적 지식을 갖추지 않은 수행자들이 주장해 왔고, 돈오점수(頓悟漸修)는 학문적으로 지식을 많이 쌓은 수행자들이 주장 합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이 두 가지는 같은 의미이며, 결론은 돈오(頓悟)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견성하게 되면 선신(善神)이 접신 됩니다. 그러면 접신 되어 아는 것을 돈오(頓悟)한 것으로 많이들 착각하시는데, 견성(見性)은 수행자의 가장 기본이 되는 마음자리를 갖춘 것으로, 갖춘 후에는 인연법에 충실하여 보임(保任)하고, 운수행각하며 닦아가야 하므로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구별은 의미가 없고 오직 돈오(頓悟)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6통신을 겸비한 부처이지만 수억 생(生)을 돌면서 무명혹겁의 업이 덮여서 그 부처를 보지 못할 뿐입니다."
공부를 할 때는 내 마음을 관조해서 일념을 유지하는 정신, 외경을 살피지 않고 내경을 살피는 것이 정법입니다. 외경이란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지 않는지를 살펴 바깥으로 향하는 마음을 말하고, 내경은 내 마음 자리를 찾아서 가는 것인데 그 자리를 찾지 못하니 방편으로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시심마 즉, ‘이것이 무엇인가?’ ‘내가 전생에 무엇이었나?’,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껍데기는 부모가 만들어 줬지만 지금 내말을 듣는 고개를 끄덕이는 이것이 무엇인가?’등 숨이 떨어지면 사라지는데 대체 살아있다는 자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화두’입니다. 화두는 마음을 내어서 일념으로 붙들어 묶어야지 다른 생각이 들어오면 번뇌 망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실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 일체가 외도입니다. 정법은 오로지 한마음을 묶고 깨달았을 때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다가 보면 접신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접신된 신은 아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귀신도 습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장군신이 붙으면 싸움에만 능통하고, 선비귀신은 글에만 능통하니 신이 덮어 쓰여도 자기가 아는 것 이외에는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무속인이 남의 것은 알아도 자기 자신의 일은 잘모르는 것과 같이 신통력은 외도(外道)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수행 중에 신통력을 가진 한 스님은 남의 주머니에 든 동전이 얼마인지 알았지만 그 이상을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반면에 정법의 부처를 이루는 것은 우주 법계를 하나로 꿰뚫어 보는 것으로, 깨닫고 보면 우리는 이미 6통신을 내적인 면에서 다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주법계를 하나로 뭉쳐서 나갈 수 있는 큰 신통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외도(外道)를 보고, 듣고, 혹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고도로 정신을 차리지 않고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 공부를 하면 죽은 공부를 하는 것이고, 혹은 지극한 바람으로 할 때에 접신이 됩니다.
그렇다면 접신은 왜 좋지 않은가? 마음자리가 수행되지 않는 중생은 재주가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써먹게 되어있는데 그 업이 아주 지중하여 외도로 휘어지면 갈 곳이 없어집니다. 무속인은 접신되어 신통력을 얻지만 중생의 마음이므로 결국은 돈과 연결되고 탐심, '나'라는 생각 때문에 업을 짓다보면 그 업이 지중하여 대를 물려 이어받게 됩니다. 지구가 마르고 닳도록 고통을 받아도 다시는 구제받을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완전히 모르는 자리가 적멸의 자리인데 우리는 수 억겁을 돌면서 나쁜 습을 익혀 왔고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른 수행법입니다. 부처님 법을 배우려는 사람이 다른 것을 알려고 하고 배우려고 하는 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쉽게 비유하면 감자는 땅속에 묻으면 한 달 이내로 지수화풍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도자기는 땅속에 묻어놓으면 수백 년이 지나도 잘 썩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쁜 습에 길들여진 것으로 지구가 마르고 닳도록 긴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6통신을 겸비했다는 것은 내 것은 내 것이 아니고, 내 자리가 곧 전체의 자리, 너와 내가 없는 자리이며 어떠한 법을 써도 진리에 어긋나지 않고 깨어진 그릇에 물을 담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으며 삼세인과를 한눈에 내다봐서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이 안 된 마음자리로 신통력을 얻는다면 어린아이에게 면도칼을 쥐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주면 손을 베게 되듯이 바른길로 쓰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통력은 부처님 법으로 자성을 깨쳐서 6통신을 겸비한 것에 비한다면 빙산의 일각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법의 처소를 바로 알고, 수행하는 정신과 마음으로 임하면 공부할 수 있는 근기와 정신이 잡히게 됩니다. 도(道)의 세계는 우주법계 전체를 꿰뚫어 보고 만능을 자유자재할 힘이 있는 것입니다.
‘도(道)의 세계에서는 한 사람의 견성자(見性子)가 무량광수를 구제합니다.’
내가 죽는 고통이나 남이 죽는 고통은 같습니다. 그러나 심신이 약한 사람들은 환절기 감기에도 간 손상을 입어 쉽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고도로 발달한 물질문명에 이끌려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시대의 노약자나 다름없습니다. 사람냄새 나지 않고 인간성 상실된 삶들은 이 시대 물질문명의 노예입니다.
예를 들면 핸드폰의 편리한 사용으로 핸드폰 없이는 한시도 불안해서 살지 못하는 기술 문명의 노예, 돈의 절대적인 힘으로 죄를 지어도 벌 받지 않는 돈의 노예들은 돈과 권력의 쟁취를 위해서는 자기 목숨마저 내 거는 현상들이 비일비재 합니다. 이런 어두운 기운들은 곧 지구 전체를 몸살 앓게 하는 감기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인간성의 상실은 곧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좀비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즉 인간이 아닌 괴물인 것이지요. 이것은 비단 칼부림하는 범죄자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 마약, 돈, 알콜등 모든 유혹에 중독될 수 있고 전염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좀비가 되는 것입니다. 악성바이러스에는 예방주사가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의 인간성 상실을 예방할 수 있는 예방주사가 바로 부처님의 정법(자연법)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 미래가 있는 죽음이냐 없는 죽음이냐가 문제입니다. 부처가 되어가는 길 해탈의 길이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알고 죽으면 미소 짓고 죽을 것이요 모르고 죽는 다면 후회와 두려움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정법 즉 '사상적 백신'은 어떤 것에서도 저항력이 생겨서 물들지 않습니다. 백신의 형성방법은 바로 '자기 성찰'입니다. 그러면 일념의 에너지가 모여 추녀 끝에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형성 되는 것입니다. 그 효과는 낳은 자식까지도 좋은 유전자로 바뀌어 질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선'의 효과입니다. 죽어서도 죽는 자리가 아니요 공부 수행만이 밝은 미래가 되어줄 것 입니다. 고정관념 잘못된 습관 또한 악성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그것은 종교를 부정하고 자기를 성찰할 기회를 갖지 않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올바른 사상과 이념이 중요 합니다. 고도로 문명이 발달 할수록 인간성은 상실되고 있는데 옛 도선국사는 '말세에 백리 길을 가야 사람 한 번 본다'라고 하셨습니다. 참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면 보살도를 행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바로 배려하는 마음이지요. 내가 중요하면 남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 진 것입니다. 인종과 문화는 다르지만 희노애락(僖怒愛樂)과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틀 안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지구촌 인류 전체의 공통분모이며, 결국은 같은 목적지를 향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물(萬物)이 도(道)인 것처럼 인류는 각자의 방법으로 도(道)를 닦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타 종교라 해서 배척하지 말고 서로 존중하십시오.
내가 수행하는 것만이 진정한 미래가 있고, 무너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고, 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체내에 면역이 생기면 팔만대장경은 휴지조각에 불과합니다. 말로 글로 공부하는 것이 수행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를 야단치면 왜 야단맞는지 모르듯 진정한 도(道)를 구하는 것은 어려움이 따르고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고(苦)가 높다는 것은 인생의 파도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 급수가 높아집니다. 경계가 달라집니다. 기운이 모이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습니다. 즉, 어려움은 깨달음의 스승입니다. 모든 불자 여러분 지금부터 여러 가지 유혹이 많고 중독되기 쉬운 이 시대에 진정 참 나를 찾는 수행을 하시어 영적 백신을 형성해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삶을 살아 가시 길 바랍니다. 물들지 않는 정신으로 자신을 갖춘 후에 인류공존을 위해 보살도를 실천하면 대 우주의 밝은 빛으로 자연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눈을 뜨십시오.
금강사 - 찬란한 해맞이
*종단과 종파를 초월해서 정법(자연법)의 이념에 공감 하시고 법황청의 일을 같이 하실 뜻있는 지도자들께서는 소백산 금강사로 인연 맺어 주시길 바랍니다.
-소백산인 寂圓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