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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 6:11, 개정)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딤전 6:12, 개정)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우리는 최근 몇 주 동안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떤 말씀을 들었느냐보다 지금 그 중요한 말씀을 실행하고 있느냐일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으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기 위해 방언으로 기도하며 주님의 임재 속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필요성에 대하여 해긴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어떻게 성령님의 음성을 알 수 있는지 말해 주세요.”
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저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스스로 배우셔야만 하고, 또 당신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안에 살고 계시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주님의 임재 가운데 그분의 음성 듣는 법을 배우는 시간을 갖지 않으신다면, 저나 다른 그 누구든 당신에게 가르쳐준다 해도 다 소용없을 겁니다.”
“하지만 정말 성령님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게 맞는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죠?”
이 사람이 내게 이런 질문을 한다는 사실은, 그가 자기 안에 사시는 분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는 그분의 음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은 우선 하나님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충분히 오래 머무른다면, 성령님의 음성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물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시간을 보내기를 거부한다면, 그에게 내가 아는 모든 방법을 말해준다 하더라도 전혀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들을 여전히 놓치며 살 것입니다!
(케네스 해긴 『방언:오순절 다락방 경험을 넘어』 김진호 옮김. 믿음의 말씀사, 2012. pp. 310-311.)
위의 글에서 해긴 목사님은 기다림과 하나님의 임재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매일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시간을 보내기를 거부한다면, 그에게 내가 아는 모든 방법을 말해준다 하더라도 전혀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 라는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알고 계십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안다고 하기도 할 것이고 잘 모르겠다고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며 그 임재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하여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인데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방언으로 기도하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부를 수 있을까요?
첫째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생각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제 마음에 오늘은 이렇게 설교하라고 말씀을 주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전까지는 기름부음도 느낄 수 없었는데 성령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에 따라(감동이 아니라) 그냥 순종하여 본문을 정하고 말씀을 전하기 시작할 때 기름부음이 임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경험으로 볼 때, 하나님의 임재를 부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 무엇보다 먼저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부를 수 있을까요?
둘째로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마음으로 간절히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상징되었던 “영광”이란 히브리어는 ‘카보드’(kabod)입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무거움’ 내지 ‘무거운(견디기 어려운) 빛’을 의미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임재를 부르는 것입니다.
(시 107:9, 개정)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또한 하나님은 굶주리고 목마른 영혼을 찾으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 55:1, 개정)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마 5:6, 개정)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이처럼 우리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목이 말라야 합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목마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목마름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는 있었습니다.
(출 33:14, 개정)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출 33:15, 개정)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출 33:16, 개정)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출 33:17, 개정)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출 33:18, 개정)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하심에도 모세의 관심은 하나님 자신인 하나님의 영광에 묶여있음을 주목해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토미 테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 다윗의 장막』이란 책에서 기름부음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은 기름부음을 경계하라
교회에서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임재’에 최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기까지 예배하기보다는 오히려 설교하려고 든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 한 마디만 하신다면, 그것은 어떤 최고의 설교와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언제부턴가 회중도 탁월한 지도자들이나 탁월한 집회에서 흘러나오는 기름 부음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기름 부음만을 사모한 나머지 정작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도 전에 탈진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런 기름 부음에만 집착하는 설교자들에게서 은사들과 기름 부음을 거둬 가지 않으시는가?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롬 11:29). 설교자가 선을 넘어서서 기름 부음에만 집착한다해도 하나님은 그의 은사를 제거하심으로 ‘거둬 가지’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신다. 하나님은 재능보다 인격에 더 마음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토미 테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 다윗의 장막』 이상준 옮김. 서울: 도서출판 토기장이, 2014. pp. 172-173.)
우리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관심이 하나님의 영광, 카보드(kabod) 즉 묵직한 하나님의 영광에 머물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향하는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야 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찰스 캡스 목사님의 간증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974년 6월에 나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히코리에서 ‘믿음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택한 본문은 마가복음 11장 23절이었습니다. 내가 이 말씀을 가르치고 있을 때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을 주셨는데, 내가 이제까지 들은 말씀 중 가장 심오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말씀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어찌나 단순한 말씀인지 어리석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말씀이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당신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면 당신의 삶도 변화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문맥 속에서 그것을 설명해 봅시다. 마가복음 11장 23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말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내가 이 본문을 가지고 가르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백성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구나.”
(찰스 캡스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 오태용 옮김. 서울: 베다니출판사, 2006. pp. 18-19.)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나는 내 백성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구나.”
말하는 것이 이토록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하루를 그냥 보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말의 중요성에 대하여 밥 존스 목사님의 사모님인 바니 존스 사모님께서 그의 책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글로리아 코플랜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 스스로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삶의 예언자입니다.”
이 말은 제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의 최대의 적이 우리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에는 큰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할 때 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말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난 정말 멍청해. 난 도대체 아무것도 기억하는 것이 없어. 우리 식구 중에는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 난 도저히 뭘 배울 수가 없어. 난 절대 돈을 벌지 못할 거야. 난 너무 아파서 죽을 거 같아.”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내뱉는 말은 재판에서 판결을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여러분 자신에 대해 현명하지 못한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자신의 삶에 대해 긍정적인 말로 예언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자기가 자신에게 하는 것보다 더,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하는 말을 해 줄 수 있는 적임자는 없습니다.
한때 저는 자신에 대해 덕을 세우는 말을 하는 것이 교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를 억압하려는 사단의 속임수였습니다. 이제 저는 제 자신을 사랑하고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님이 제안에서 살아계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저를 통해 예수님을 알기 원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해야 합니다. 저는 매일 하루의 시작을 저 자신과 우리 가족을 축복하는 일로 시작합니다. 저는 항상 하나님의 호의와 축복이 임할 것이라는 큰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저는 저 자신을 향하여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길 좋아합니다. 오랫동안 저는 하나님의 치유와 건강과 생명이 저에게 임하도록 저 자신을 향해 예언을 선포해 왔습니다. (중략)
몸이 별로 좋지 않다고 느껴질 때 저는 그냥 “어제보다 오늘이 더 좋고, 내일은 오늘보다 훨씬 더 좋을 거야!”라고 선포합니다. 저는 제 자신을 향해 생명과 치유를 말합니다. 우리는 말로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하고, 말씀을 전하고, 예언할 뿐 아니라 천국의 모든 좋은 것을 선포하도록 우리의 입술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대화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비추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바니 존스 『말의 권세』 큰믿음 출판부 옮김. 서울: 큰믿음 출판사, 2012. pp. 75-77.)
이처럼 우리들의 말은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의 축복을 위하여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 또한 우리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돌파해야 할 영역인 것입니다.
우리는 로버트 모리스가 쓴 말의 능력이란 책에서 자신이 경험한 생명의 말에 대한 간증을 이미 들었습니다. 제게는 이 간증이 참으로 저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더 들려드리기를 원합니다.
생명의 말에 대한 예화 1
"생명을 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책을 나오게 한 자료를 준비하면서 나는 주님께 이를 설명해 줄만한 예를 보여달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서 생명을 말함으로 그 상황이 급진적으로 변화된 것을 목격한 사람을 보여주십시오."
나는 주님께서 성경의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나, 아니면 교회사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 중에 한 분을 내게 가르쳐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실제로 그 사람을 내 마음에 떠오르게 하셨을 때에 나는 울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의 예는 나의 아내 데비였다.
수년 전에 내가 아직 이기적이고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교만했을 때에 그녀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로버트는 훌륭한 남편이다.”
“로버트는 착한 남자다.”
“로버트는 너무나 멋진 아빠다.”
“로버트는 훌륭한 가장이다.”
“로버트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한다.”
“로버트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아내는 언제나 위와 같은 말을 하곤 했다. 아내가 위와 같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에 그것들 가운데 내게 해당되는 말은 정말 거의 없었다. 실제로는 그것들과 정반대였다. 데비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실을 부인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지 끊임없이 나에게 생명을 반복해서 말했을 뿐이었다.
오늘날 위의 것들이 진실에 많이, 너무도 많이 가까워졌다. 나는 아직도 위의 내용에 도달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열심히 노력하며 진보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가!
성령님께서 이 빛나는 예를 나의 목전에서 보여주셨을 때에 내가 울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지금까지 25년 이상 나를 사랑해 주고 나에게 생명의 말을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
나는 이제 변화된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말이 지닌 능력이다. 그 능력이 바로 당신의 혀 끝에 있다.
(로버트 모리스 『말의 능력』 오태용·김광석 옮김. 서울: 베다니출판사, 2016. pp. 131-133.)
바니 존스 사모님이 인용한 글로리아 코플랜드의 말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 스스로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삶의 예언자입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우리들의 삶의 예언자인데 왜? 우리들 스스로 우리들의 삶에 대하여 함구하면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얼마든지 저와 여러분의 삶은 갱신 되어질 수 있습니다.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입술이 닫혀있다는 것은 마귀가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마인드로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이다.
나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나는 모세와 같이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삶을 살 것이다.
나는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충만할 것이다. 삶의 에너지와 활력이 넘쳐날 것이다.
나의 사업은 잘 되고 흥왕할 것이다.
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안에서 잘 되고 복을 받을 것이다.
나의 가정은 언제나 행복할 것이다.
이외에도 믿음의 말을 만들어서 스스로가 축복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서 잘되고 번성하며 복되고 승리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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