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침례교 파송 선교사로 1835년에 태국에 온 윌리암 딘은 태국과 중국에서 거의 50년을 사역하였다. 태국내에 최초로 조직 교회를 세웠고 건강이 약했고 가정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태국과 중국에서 수많은 사역을 감당하였던 선교사. 단 비치 브레들리와 함께 태국에 7번째로 들어온 선교사이다.
6. 윌리암 딘(1835.7-1884)
태국에 와서 존 테일러 존스와 함께 최초의 중국인 교회인 마이뜨릿찟교회를 설립하는 등 태국내의 중국인 사역을 위해 헌신했던 윌리암 딘은 1807년 6월 21일에 뉴욕의 모르시빌에서 태어났다. 그는 해밀턴 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고향인 뉴욕의 모르시빌에서 마틸다 C. 맨양과 결혼하였고 1834년 6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침례교 선교사로 허입되었고 1834년 7월 3일에 뉴욕항을 출발하여 8개월만인 1835년 3월에 싱가폴에 도착하였다. 만삭이던 윌리암 딘의 아내 마틸다 딘은 아기를 출산하고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3월 5일이었다. 같이 동행했던 브레들리의 아내 역시 아기를 출산했으나 아기가 죽었다. 슬픔을 뒤로 하고 그들이 태국에 도착한 것은 넉달 후인 1835년 7월 18일이었다.
딘은 당시 방콕에서 사역하고 있던 존 테일러 존스와 같이 사역하기 위하여 방콕으로 왔던 것이었다. 그는 방콕에 있는 중국인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방콕에 있는 중국인들에게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오는 기간 동안 배 안에서 중국어를 선원들에게서 배우기도 하였지만 1835년 8월말에는 30명의 중국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설교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윌리암 딘은 스와토 방언을 배웠고 후에 알란손 리드가 1836년 7월에 조인하였으나 그는 다음해인 1837년 8월에 갑작스레 이질에 걸려 죽었다. 딘은 1837년 7월에 방콕에서 태국 최초의 교회이며 중국인 교회인 마이뜨리찌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아시아에서 최초의 중국인 개신교회였다. 윌리암 딘은 1837년 9월에는 홍콩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데오도시아 앤과 결혼하고 태국으로 돌아와서 1838년부터 1942년까지 중국인 신자들에게 신학교 과정을 개설하여 교육하였다.
윌리암 딘은 선교사로 사역하는 동안 특이한 경험을 하였다. 말씀이 선포되었고 시시로 회심자들이 일어났다. 때로는 많은 병자들에 의해서 사역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그들이 회복되고 그런 다음 다시 재개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태국에 있는 중국인 부서도 매년 진전을 이루고 있었다. 1842년 2월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태국을 떠나야 했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홍콩으로 갔다.
중국이 선교사들에게 문이 열렸을 때 그는 1842년 10월에 홍콩으로 두명의 신학생인 탕뚜이와 코백을 데리고 이주하였다. 딘은 홍콩에 선교부를 조직하였고 선교사들인 로버트와 슈크와 함께 홍콩 스와토 침례 교회와 청차우 침례교회를 설립하였다. 그의 두번째 부인인 데오도시아는 1843년 3월 29일에 천연두를 앓다가 홍콩에서 죽었다.
1845년 10월에 그는 미국으로 갔다. 그는 홍콩으로 1847년에 돌아와 1854년까지 홍콩에서 사역하였다. 윌리암 딘은 코다드어를 포함하여 성경을 번역하는 그룹의 핵심 멤버로 성경 번역 선교사였는데 북부 침례교 선교부의 후원으로 마시멘의 역본을 개정하였다. 그는 신약 성경을 1853년에 출판하였으며 구약 성경은 다음해인 1854년 후반기에 출간되었다.
윌리암 딘은 홍콩에 거주하는 스와토 방언을 하는 중국인들에게 사역을 집중하였는데 스와토인들은 텐진 조약을 통하여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고 1860년에 선교사들은 그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곧이어 그 지역에 지교회가 설립되었다. 스와토 선교부는 주변 지역에서 스와토어와 하카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전진 기지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였으며 1863년에는 윌리암 에쉬모어가 스와토에 도착하여 사역을 잘 감당하였다.
딘이 미국에서 안식년을 하는 동안 태국에서 여성 사역의 대부이며 학교 사역을 감당하였던 마리아 스토퍼(남편인 코로돈 스랍터가 1839년에 태국에서 사역하다가 41년 4월에 이질로 죽어서 1843년 11월에 철수하여 미국에서 사역하고 있었다.)를 만나 결혼한 후 1864년 12월에 방콕으로 이주하였으며 거의 20년을 사역하였다. 이때 그의 딸인 아구스타 고다드 딘이 태국에 와서 1870년 8월까지 태국에서 사역하였다.
윌리암 딘은 방콕의 기독교인들이나 일반 백성들에 의해서 매우 존경을 받았다. 그가 방콕에서 사역을 마쳤을 때인 1876년의 그의 기록에 의하면 6개의 중국인교회가 모이고 있었고 4개의 중국인 예배당 건물이 건축중에 있었고, 3명의 중국인이 목사로 안수를 받았고, 두명은 목회자 훈련을 받고 있었다. 339명의 중국인 제자들이 침례를 받았고 그들중의 12명은 복음전도자가 되었다. 1876년 4월에 윌리암 딘은 방콕을 떠나 그의 고향인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그곳에서 6개월을 머문 후 11월에 태국의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후 그는 태국과 중국에서 44년을 헌신적으로 사역하였다. 그는 사역하는 동안 현지인들로부터 그보다 더 존경과 사랑을 받은 선교사는 없었다.
1882년에는 사역이 확장되어 6개의 중국인 교회, 7곳의 선교부와 한 곳의 학교를 포함하여 500명의 침례받은 중국인 성도들이 있었다. 그들이 방콕에 있는 동안 마리아는 한 명의 딸을 낳았으며 그녀는 먼저 1881년에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녀의 아내가 1884년에 죽자 윌리암 딘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윌리암 딘의 49년간의 사역 기간 동안에 딘은 중국 선교를 확산하였으며 태국의 최초의 개종자를 포 함하여 많은 현지인 목회자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을 훈련시켰다. 그는 중국어로 된 여러권의 주석을 저술하였으며 중국 교회가 견고한 신학적 토대를 구축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사역의 말기에 딘은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의 공동체인 도옌의 대표가 되었으며 중국인 저술가들은 그를 일컬어“중국에 거주하는 시니어 선교사”라고 하였다. 그는 1895년에 미국 켈리포니아에서 죽었다. <끝>
윌리암 딘 목사 부부는 침례교가 파송한 선교사였고, 목사이자 의료선교사였던 단 비치 브레들리 부부는 초교파 선교단체인 미국 해외선교회가 파송한 선교사였다. 이들은 비록 교파는 달랐지만 태국에서 평생 동역자로 지근 거리에서 함께하는 동역자가 되었는데 그들에게는 태국으로 오는 배 안에서 일어난 일로 인하여 평생 떼어놓을 수 없는 동역자가 되기에 충분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윌리암 딘 목사 부부와 단 비치 브레들리 목사 부부는 결혼한 직후 싱가폴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태국 선교를 위해 싱가폴을 거처 중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딘 부인은 몸이 허약하여 배를 타고 오는 내내 구토와 설사로 앓아 누워야 했다. 임신한 딘 부인은 배를 타고 오는 7-8개월 동안 거의 기진 맥진하여 거의 몸을 가누기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역시 갓 결혼하여 임신한 브레들리 부인은 배를 타고 오는 동안 병약한 딘 부인을 간호하느라 자신 역시 기진 맥진 하였다. 7-8개월의 항해 끝에 싱가폴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은 만삭의 몸이 되어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딘 부인이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을때 의사인 단 비치 브레들리는 수술을 하여 아기를 낳게 되었으나 배에서 오랫동안 시달린 딘 부인은 끝내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기는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딘의 슬픔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선교지에 가보지도 못하고 아내는 싱가폴에 시신을 묻어야 했다. 같이 동행하며 수술하여 아기를 출산을 도왔던 브레들리가 딘의 아내였던 마틸다의 모든 장례절차를 주관해야 했다.
한편 산달이 찬 브레들리 부인 역시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배를 타고 오는 동안 딘 부인을 간호하느라 심신이 지처 아기를 출산하였을 때 그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죽었다. 부부는 자신의 첫번째 아이를 잃은 아픔을 슬퍼할 틈도 없었다. 브레들리 부인은 딘 부인의 아기를 맡아 양육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미를 잃고 울고 있는 동역자인 윌리암 딘 선교사의 첫번째 아이를 돌봐야 했다. 아기가 크기까지 거의 2년간 자신의 모유를 먹이며 아이를 양육하여야 했다.
두 사람은 이후 태국에서 지근 거리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며 좋은 동역자로 친구로 사역하였다. 브레들리는 내내 태국에서 사역하였지만 윌리암 딘은 태국과 중국(홍콩을 포함하여)을 오가며 사역하였다. 비록 그들은 같은 선교부는 아니었지만 좋은 동역자로 태국 선교의 선구자로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족적을 남기었다.
그들에게 두번째의 기이한 운명이 찾아온 것은 태국에서 사역한지 10년이 되던 해인 1845년 8월이었다. 브레들리의 첫번째 아내인 에밀리 로이스가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4명의 어린 자녀들을 남겨놓은 채 소천한 것이었다. 윌리암 딘 자신도 이미 두번의 아내를 잃은 경험이 있는터라 누구보다도 그 아픔을 잘 알고 있었다. 윌리암 딘은 딸의 양육자이며 마음을 나누는 동역자인 에밀리 로이스 브레들리의 모든 장례식을 주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