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이 있고, 그 안에 5대궁(경복궁, 경희궁, 경운궁, 창덕궁, 창경궁)을 축조하였습니다.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정도전 등 신하들에게 새 도읍지를 알아보라고 명령합니다. 원래 태조가 처음 천도를 결심한 곳은 계룡산 지역이었는데요. 그러나 1393년 초부터 10개월 간 도성 공사를 진행하다가 그 해 말 하륜의 반대로 공사가 중단되었어요. 하륜은 계룡산의 위치가 국토의 남쪽에 치우쳐 수도로 적절치 않다며 반대했어요. 그 다음 신촌을 중심으로 한 무악이 논의되다가 정도전이 북악산을 중심으로 한 남경지역을 적극적으로 추천해 도읍을 결정하고 한양에 성곽축조를 결정합니다. 한양성곽을 어떻게 쌓아야 할 것인가는 정도전의 큰 고민거리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많은 눈이 내렸는데, 다른 곳은 눈이 다 녹았는데 특별히 눈이 녹지 않는 곳이 있어서 유심히 바라보니 바로 그것이 북악산, 인왕산을 이은 능선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곳을 따라 성곽을 쌓고,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만들었답니다.
4대문에 유교의 기본이념을 인(仁) : 어질고 착함. 흥인지문 의(義) : 의로움. 돈의문 예(禮) : 공손하고 예의바름. 숭례문 지(智) : 지혜로움. 숙정문 ※신(信) : 믿을 수 있는 신의. 보신각
4대문 - 남 : 숭례문, 동 : 흥인지문, 서 : 돈의문, 북 : 숙정문
◆ 숭례문 (국보 1호) 도성의 문의 현판은 모두 가로로 쓰여져 있으나, 숭례문은 세로로 쓰여져 있어요. 이것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 보이는 관악산이 불꽃모양을 한 화산(火山)의 형태이므로 경복궁에 화재가 나기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현판 글씨는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추사 김정희도 이 현판글씨를 보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 흥인지문 (보물 1호) 원래 이름은 흥인문입니다. 그런데 문의 이름에 갈지(之)자를 넣은 것은 동대문이 위치한 낙산의 지형이 낮아 갈지(之)자를 넣어 약한 기운을 보완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또 흥인지문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둘렀다고 하구요. 지금도 볼 수 있는 이 옹성은 적들을 효과적으로 막아 내기 위한 기능 이외에, 건축적으로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 돈의문 - 현재는 없는 문 돈의문은 시대에 따라 서전문, 신문, 새문으로 불리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서대문으로 불러왔어요. 조선시대 5백년 간 중국과 통하는 관문이었죠. 조선말에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친일정권을 형성하는 데 방해가 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킬 때, 바로 이 돈의문 앞에서 흥선대원군과 불량배들을 끌고 들어왔어요. 일제 침략기 때 시구역 개수계획이라는 명분으로 헐리고 말았죠. 일제는 돈의문의 목재와 기와를 경매하였는데 그 속에 불상과 보물이 많이 나와서 이 문을 샀던 사람은 큰 횡재를 하였다는 일화가 있죠.
◆ 숙정문 - 평상시에는 닫혀있던 문 원래 이 북쪽문은 지자를 빼고 청(淸)자를 넣어서 숙청문이라고 하였어요.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북쪽문은 지형이 험난하여 사실상 사람이 왕래할 수 없었으며 특별한 행사가 없으면 항상 닫혀 있어 굳이 지(智)자를 쓸 필요가 없었답니다.
◆ 동소문 1484년(성종 15)에 창경궁(昌慶宮)을 건축하고 그 동문을 홍화문이라 하였으며 1511년(중종 6)에 혜화문(惠化門)으로 개칭하였습니다. 그 뒤 1816년(순조 16)에는 중수(重修)하고 1869년(고종 6)에 보수하였으며, 1928년에는 문루를 헐고 석문만 남겨 두었는데 그 후 전차를 부설하면서 석문마저 철거하여 지금은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 수구문 1711년(숙종 37) 새로이 석문만 건축하고 9년 후인 1720년에는 문루를 지어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1975년 도성복원(都城復元) 공사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습니다. 광희문 이외에 1457년(세조 3) 지금의 장충동(奬忠洞)에서 한남동(漢南洞)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따로 남소문을 축조하였으나 1469년(예종 1)에 풍수지리설에 따라 폐쇄되었습니다.
◆ 서소문 1738년(영조 14)에 석문을 개축하고 1744년 문루를 건축한 뒤 소의문(昭義門)으로 개칭하였으나 1914년 도시계획 때 철거되었습니다.
◆ 창의문 1413년(태종 13)에 폐쇄되었으나, 1741년(영조 17) 성문을 다시 고쳐 짓고 인조반정 공신의 명단을 걸게 하였는데 지금도 남아 있으며 자하문이라고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