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년 세월 서울대 화학공학과 교수를 지낸 이현구 박사. 그는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화학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동 대학 조교수를 거쳐 1973년 서울대 교수에 임용된 이후 2004년까지 한눈팔지 않고 학자의 길을 걸었다. 반평생을 학자로서 업적을 쌓은 뒤, 그 내력을 학계와 사회를 위해 ‘재능기부’한 이현구 박사. 그의 삶에는 어떠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호적상으로는 경기도 시흥시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어요. 아버님과 어머니께서 그곳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하셔서 제가 시흥에서 태어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인천으로 이사를 가면서 쭉 인천에서 자랐습니다. 저희는 6형제에요. 6형제 모두 튀지 않는 성격을 가진,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한 꽤 모범적인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5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와서 남대문초등학교를 다니다가 6.25를 겪으며 고향으로 피난을 가게 됐죠. 살고 있던 집 앞마당에 폭탄이 떨어져서 사람이 죽는 것도 목격했어요. 그 시절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아픈 기억이죠.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시골 분교에서 한 학기 공부를 했는데, 그때만 해도 국가시험을 봐서 시험 성적으로 중학교에 진학을 할 때예요. 그때 제가 시흥군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성적을 받았어요. 그래서 아주 수월하게 인천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됐어요.
전국 중학생 학술경시대회에서 주요과목은 모두 1등을 할 정도로 학업 성적에 뛰어났던 이현구 선생. 학교에서도 모범생임을 인정 받을 정도로 뛰어난 성적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사회에서 소금의 역할을 하라’고 강조했던 교장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중앙에 서 있는 남학생이 이현구 선생.
중학교 때 교장선생님이요. 길영희 선생님이라고 대단한 교육자셨어요. 이분이 저희를 가르치실 때 ‘땀을 흘리며 나라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고, 학생들에게 항상 ‘사회에 나가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어요. 그런 한 마디 한 마디에 굉장히 감명을 받았고, 실제로 제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자신감을 갖고 학업에 열중할 수 있게 된 것에는 선생님들의 역할이 컸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전국 중학생 학술경시대회’라는 게 있었어요. 각 시·도에서 대표를 선발하여 중앙에 모여서 시험을 보는 대회였는데, 중학교2학년 때 제가 1등을 했어요. 선생님들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죠.
고등학교는 서울로 와서 서울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서울고등학교 교장선생님도 잊을 수가 없어요. 김원규 교장선생님이셨는데 어린 학생인 제가 보기에도 참 훌륭한 교육자셨어요. ‘깨끗하자, 부지런하자, 책임을 지키자’라는 것을 강조하셨는데, 그것을 솔선수범하며 삶으로 보여주셨던 분이죠.
그리고, ‘언제, 어느 자리에 가 있든지 그 자리에 없어선 안 될 사람이 되라’고 강조하셨는데 그 말씀이 제 삶의 모토가 되었어요. 항상 그 말씀을 되새기며 생활을 했는데, 그 때의 영향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지 않았나 싶어요.
제가 학창시절을 보낼 때만 하더라도 중고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이 지금처럼 학교를 자주 옮기진 않았어요. 한 학교에 오랫동안 근무를 하셨죠. 그런 분들의 영향이 컸고, 다른 과목도 마찬가지지만 수학과 과학 선생님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수학과 과학 분야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가르쳐주셨죠. 그래서 성적도 좋았어요. 워낙 흥미를 느끼고, 성적도 잘 나오니까 주변에서 ‘과학을 공부해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라는 분위기를 암암리에 풍겨 주셨어요.
고등학교에 올라간 뒤로 대학 진학에 대해서 고민을 할 때 어느 과를 지원해야할지 고민을 했죠.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갈 때가 58년이에요. 얼마나 어려운 때였습니까. 자유당 말기에, 경제적으로도 북한보다 우리나라가 훨씬 못 살 때였거든요.
그래서 ‘이과를 진학하면 학문으로서 공부하기는 좋겠지만, 국가를 생각했을 때 경제를 일으킬 수 있는 건 결국 공학 분야가 아니겠는가’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공과대학을 가겠다고 마음을 정하게 됐죠. 제 스스로 정한 진로였어요.
공과대학을 가기로 마음 먹었으니 그 다음에는 ‘어느 과를 지원하느냐’에 대해 고민을 했죠. 그때만 해도 대학을 다니는 친척이 드물었어요. 그래서 실제로 공과대학에 가서 무엇을 공부하는지에 대해 조언을 얻을 길이 마땅치 않았죠. 그런데, 아마 당시 우리의 산업구조 탓일 겁니다만, 기반산업으로서 화학 산업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어디서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전국에서 실력 있다는 학생들이 다 몰리는 그런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성적이 좋으면 그 과를 가야 된다는 것을 담임 선생님부터 시작해서 진학 지도 선생님들까지 말씀을 하셨죠. 그래서 별 다른 고민 없이 화학공학과를 선택하게 되었어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를 합격 했는데, 대학에 들어가서 보니까 과연 서울을 비롯해서 대구, 부산, 광주, 전주, 대전 등 그 당시 일류 고등학교의 이과 수석졸업생들은 거기에 다 와 있더라고요. ‘이거 참 한 번 해볼 만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죠. 고등학교 1, 2학년이면 학생들이 진로에 대해 굉장히 고민할 때예요. 요즘은 그보다 더 일찍 고민들을 하기도 하죠. 그런데, 학생들이 그렇게 고민할 때 수학이나 과학 선생님과 같이 기초과학에 대한 지식이 있는 선생님들이 적절하게 지도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봐요. 예를 들어, 농대를 진학하면 바이오테크놀로지라는 대단히 중요한 학문을 할 수 있는데, 이런 현실을 충실히 알려주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요.
그래서 이공계 석·박사들을 고교 교사로 보낼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중·고교 교사자격의 벽이 보통 높은 게 아닙니다. 결국 학생들은 진로 선택에 있어 부모들의 의견을 많이 듣게 되고, 그러다 보면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기준에 따르기 쉽고 선택이 편향될 가능성이 높죠.
공부는 학생이 스스로 해야 해요. 선생님이나 부모는 등대 역할만 해주면 됩니다. 스스로 책을 읽고 생각하고 고민을 해야지 부모가 그걸 대신해줘서는 안 되죠. 사실 지금 사회 지도층에 있는 분들을 보면 모두 스스로 자신의 진로를 개척한 분들이에요.
부모들이 지나칠 정도로 간섭을 하면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창의력이 계발되지 않고, 창의력이 없으면 인재가 될 수 없어요. 너무 빡빡한 일정으로 학생들을 몰아가지 말고, 운동도 하고 독서도 하고 가끔은 하늘을 볼 수 있도록 여유를 줘야 해요. 그래야 자신의 적성과 능력을 발견하고 창의력도 계발될 수 있습니다.
화학 산업이 발전해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일찌감치 한 이현구 선생. 그는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 진학을 선택했다. 22살,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 단위조작실험실에서 동급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서있는 첫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현구 선생이다.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4.19혁명이 나고, 5.16이 일어났어요. 그 전에는 자유당 말기였으니 데모가 심할 때라 휴교가 잦았어요. 그래도 공과대학은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는 분위기가 조성됐어요. 당시 미국 정부에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농과대학, 의과대학에 교육지원사업을 벌였어요. 그래서 실습 장비를 미국에서 직접 구매해서 보내주고, 교수요원 양성 차원에서 현직 교수는 물론이고 졸업생 중에서 선발해 유학의 길을 주곤 했죠. 유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한 교수님들에게서 미국의 일류수준의 전공교육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때는 취업의 길이 한정되어 있을 때라 성적이 좋은 사람은 으레 유학을 가는 길을 선택했죠. 유학을 가려면 군 생활을 마쳐야해서 저는 졸업과 동시에 자원해서 육군으로 갔어요. 훈련소에서 아이큐 테스트를 하는데, 제가 만점을 받아서 병과를 분류하는데, 점수가 아깝지만 공대출신이니까 공병학교로 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김해 공병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았는데, 군 생활을 마치고 유학을 가려면 서울에 있어야 수속을 밟기가 수월했거든요.
그때 충원이 필요한 부대가 있으면 성적이 좋은 사람은 선택해서 갈 수 있었어요. 그래서 서울로 가기 위해 내무반 생활도 더 열심히 했죠. 그 결과 서울 수색에 있었던 305작업대대의 중대요원으로 가게 됐어요. 그곳에서 군 사병들 막사를 새로 짓는 공사를 중대 작전계인 제가 맡아서 병력 배치도 하고, 자재를 나눠주고 하는 일을 맡았어요. 중대장과 선임하사도 있었지만 제가 직접 다 챙기다시피 하며 막사를 짓는 일을 총 책임지는 역할을 했어요. 저녁에 병력을 이끌고 횃불을 들고 공사를 진행하기도 했고, 사람 배치에서부터 예산, 기술 공사 진행 등을 사병이 지시를 하는데도 다들 저의 말을 잘 따라주어서 원활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어요.
군에서의 그런 경험이 저에게 리더십을 갖게 해주었고, 조직을 지휘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셈이죠. 그래서 저는 지금도 군 생활을 하는 것이 결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우고 경험하며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죠. 군에 있는 동안 유학 떠날 준비를 했어요. 하지만, 그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게 지금처럼 쉬울 때가 아니죠. 정부에서 100불을 바꿔주는데 그 외에는 달러를 가지고 나갈 수도 없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미국대학에서 조교로 대우를 받으면서 가게 되어 큰 걱정은 없었죠.
그때 마침 재미교포들이 처음으로 전세기를 가지고 우리나라에 왔다가 돌아가는 편이 있었는데, 자리가 있다고 한미재단에서 영어시험을 보라고 하더군요. 그 시험으로 유학생 비자를 주는 거예요. 시험을 치르고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데 하루는 저를 부르더니 그 비행기를 타고 떠나라고 하더군요. 영어시험 성적이 좋았다고요. 그래서 싼 값으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갈 수 있었죠. 캘리포니아에 먼저 유학을 가 있는 친구에게 들러서 100불을 빌려서 고속버스를 타고 미네소타 대학까지 갔어요. 아마 쉰 다섯 시간 동안 버스를 탔던 것으로 기억해요.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중간 중간 환승을 하니까 사람들이 계속해서 바뀌는 거예요. 언어도 다르고, 낯선 곳을 찾아가야 하니 불안했죠. 그래서 제 옆 자리 승객이 바뀔 때마다 ‘오마하를 가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하냐’고 영어로 물었어요. 그런데 다들 제 말을 못 알아 듣는 거예요. 세 사람 정도가 지나서야 ‘아, 오마하!’, 즉 '오'자에 액센트를 주어 말하더군요. 제 영어 발음의 액센트가 잘못됐던 거였어요. 그때 영어에서 액센트가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했죠. 비교적 일찍 그런 경험을 하게 되어서 유학생활을 하며 영어를 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교포 수는 적었고 대부분이 유학생이었어요. 그래서 유학생 중심으로 돌아갔죠. 저는 그래도 어렵게 유학을 왔는데, 대한민국을 알리고 국위선양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국유학생회를 만들어서 회장을 맡게 됐고, 나름대로 한국을 대표할만한 중요한 일들을 많이 하게 되었죠.
또, 국제학생회 모임에 나가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어요. 예를 들어, 미스인터내셔널 학생을 뽑는데 우리나라에서 유학 온 여학생을 내세워서 퀸을 만든 적도 있고, 미네소타 수상 축제를 하는데 한국 유학생들도 참석해서 한국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유학생과 교포를 총동원해서 행사에 참석했죠. 지역 신문에도 크게 보도가 되었어요.
유학생활 중 영국왕립학회지에 논문을 게재할 정도로 연구 생활에 몰두했던 이현구 선생. 미네소타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게 된 그는 풍족한 지원을 받으며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이후 후배들을 가르치고 모교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마음으로 한국행을 선택했다. 사진은 미네소타대학교 대학원 화학공학과에서 동문수학한 이들과 함께, 왼쪽부터 현재천 박사(현 고려대 명예교수), 이현구 선생, 박원훈 박사(전 KIST원장), 故 윤창구 박사(전 KIST화학공정 부장).
아무래도 영향을 받죠. 당시 저희 과에 학과장이신 지도 교수는 학문적으로나 대학경영에 있어서 아주 훌륭한 리더이셨고, 영국분인데 정말 천재이신 대단한 학자도 계셨고, 또 미국분인데 아주 철두철미하게 연구를 하게 하고, 강의를 한 시간 하더라도 아주 무섭게 원리 원칙대로 하는 분이 계셨어요. 다음날 강의가 있으면 새벽 3시까지 연구실에 남아 준비를 하셨고, 학생들을 굉장히 열정적으로 가르치시면서 도전적인 자세를 일깨워준 분이셨죠. 그곳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학생들은 많은 대학의 교수로 나가게 될 정도로요. 그런 부분에 굉장히 매료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유학생들 모임에 할애했던 시간을 많이 줄이고 학구적인 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했죠. 왜냐하면 좋은 논문을 발표해야 선배들처럼 교수가 될 수 있었거든요. ‘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은 마음에 모든 것을 다 끊고 도서관과 연구실만 오가며 학업에 완전히 몰입했어요.
연구 과제 중 쉬운 과제는 아니었고, 우리 지도교수께서도 누군가가 이 연구를 해줬으면 하던 과제가 있었는데, 제가 수학을 응용해서 완벽하게 문제를 풀어냈어요. 그래서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은 논물을 쓰게 됐는데, 그 논문이 영국왕립학회에서 발행하는 [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두 편으로 실렸죠. 지도교수와 앞에 말한 영국분 교수와 같이 공저였지만 그러한 경험이 제 미래를 개척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죠.
그 때 미국의 큰 석유회사에도 취업을 할 수 있었고, 또 다른 대학의 교수로 갈 기회가 있었는데, 마침 미네소타 대학에서 ‘여기에서 남아서 가르치고 연구도 계속 해봐라’는 제안을 했어요. 미국에서도 최상위권 학과이니 저는 당연히 남기로 했죠. 그곳에서 계속해서 연구를 했고 논문 계속 발표하며 상당한 실적을 쌓았어요.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만, 학사과정과 미국에서 대학원 과정의 학업을 닦아나가면서 화학공학에서 배우는 분야나 범위가 아주 넓으면서도 탄탄한 기초를 마련할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을 간파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사회에 진출하여 활동하는 범위가 넓을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분야의 흐름의 방향이 변화하더라도 쉽게 적응하여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점이 아주 좋았습니다.
1972년에 모교에서 “지금 교수자리가 하나 나왔는데 올 생각 있느냐?”고 연락이 왔어요. 그 때는 현직 교수가 퇴직하거나 다른 학교로 옮기지 않으면 교수 채용 자리가 난다는 것이 불가능해요. 새로 교수를 공개 채용 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울 때였죠.
그래서 성큼 가겠다고 대답했어요. 물론, 미국에서 계속 교수 생활을 하면 더 나은 여건에서 활동할 수 있었겠지만, 같은 교수라도 미국에서 하는 것과 한국에서 하는 건 특성이 다르거든요. 한국에서는 제자를 키운다는 보람이 있고, 그렇게 키운 제자는 평생 끈끈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개념이 있는 사회죠.
미국도 어느 정도는 그런 부분이 있지만 대개 교수는 교수고, 학생은 학생이라는 인식이 강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늘 ‘한국에서 학생들을 지도할 기회가 생기면 무조건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몇 달 만에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대학교수는 교육, 연구, 봉사의 3대 의무를 잘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이현구 선생. 그는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3가지 의무 중 교육이 제일임을 강조한다. 서울대학교 교수 정년식에서 퇴임인사를 하는 이현구 선생의 모습.
제가 미국에 교수로 머물며 배운 것이 교육에 대한 미국 교수들의 열정과 헌신이었어요. 그런 부분들을 보고 배웠기 때문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와서 제가 배우고 깨우친 부분을 그대로 하려고 노력했어요. 밤낮없이 강의를 준비했죠. 초기에는 한 학기에 4과목을 가르치기도 했어요. 과제물을 매주 내주고, 시험도 두세 번씩 보고 제가 직접 채점을 했어요. 학생들은 수업을 들으면 교수가 얼마나 준비된 수업을 했는지 칼 같이 알아요. 그걸 제 스스로 노력해서 느끼게 하는 거죠.
여러 과목을 가르치다보니 학생들이 2학년부터 4학년까지 제 과목을 쭉 듣게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학생의 이름을 외우는 것은 물론이고, 과제물을 친구 것을 베꼈는지 아닌지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죠. 그런 경우를 발견하면 베낀 학생을 혼내지 않고 보여준 학생을 불렀어요. “네가 원하면 과제물을 보여주지 말고 친구가 풀 수 있게 가르쳐 줘라.” 제 말에 놀라더군요.
중요한 과목 시험을 본 날이었어요. 저는 문제를 출제하고 동시에 모범 답안을 작성하거든요. 시험이 끝나고 학생들의 답안지를 받아서 채점하는데, 한 학생이 제가 생각한 답안보다 훨씬 간편하고 빠르게 정답을 얻는 답안을 작성했더라고요. 굉장히 놀랐어요. 우리의 학생들이 굉장히 우수하다는 것을 느꼈죠. 그런 학생들을 만나며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어요.
재직 중 교무부처장, 교무처장으로의 6년 8개월 동안 교무처의 일을 맡았는데, 1980년 초 졸업정원제가 시행되어 매학년 말에 일정수의 학생들을 강제로 탈락시켜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원만하게 넘겼던 일과, 1987년부터는 그 이전에 학생운동 등으로 제명된 학생들을 다시 특례로 복학시키는 과정의 어려움을 겪어 나가는 과정에서 서울대학교 구성원들의 성숙한 자세와 면모를 보게 됐어요.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무궁한 발전 가능성을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입니다.
우리의 과학기술 수준이 국제 사회에서 그에 걸맞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현구 선생.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인들이 각자의 전공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받는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좋은 연구결과를 학술지에 발표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국제적인 학술대회에 참가하여 발표하고, 또한 외국의 대학이나 연구기관을 방문하여 세미나를 발표하는 기회를 만들어 자신의 연구 성과를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알리는 적극적인 활동을 당부한다. 제16회 과학의 날 기념행사에서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는 사진, 왼쪽이 이정오 (당시 과학기술부 장관),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현구 선생이다.
꽤 근접했다고 봅니다. 노벨상 수상의 핵심은 후보로 추천돼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추천자격이 있는 사람이 국내에는 극소수이고,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 사람이죠. 특히 유대인이 많아요. 노벨상 중 물리, 화학, 생리의학 등 세 가지를 과학상이라고 하는데 1980년대 이후 이 상을 받은 200여 명 중 110여 명이 미국인이고 그 절반이 유대인이에요.
노벨상을 추천하는 사람들과 활발하게 교류가 이뤄져야 한국 과학자들의 존재나 한국 과학자들의 연구성과에 대해 알게 되는데, 지금은 그게 잘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노벨상 수상에 유리하죠. 예를 들어, 2011년 컬럼비아대의 김필립 교수의 경우 간발의 차로 노벨상을 못 받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일단 한 번만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면 한국에 대한 평판이 높아지면서 계속해서 수상자가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노벨상 수상을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도 필요해요. 일본의 경우,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정부가 전폭적인 지원을 한다고 해요.
일본도 1917년에 순수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이화학연구소 리켄(RIKEN)을 설립했어요. 거기에서 노벨상 수상자도 나왔죠. 우리나라도 지난 해 처음으로 삼성에서 미래기술육성재단을 만들고 10년 간 5천억을 기초과학진흥회에 투자하는 일을 시작했어요. 바라기는, 다른 민간 기구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연구수준이 결코 떨어지지 않으니 정부는 정부대로, 연구자들은 연구자들대로 노력하면 몇 년 안으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참돼야 해요. 과학에도 유혹이 많습니다. 실험을 했는데 결과가 예상대로 나오지 않으면 살짝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들죠. 사실 그랬다가 사회적으로 뭇매를 맞은 분도 있습니다. 바르게 해야 합니다. 실제로 대학원생들과 연구를 해보면 인성이 좋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과학은 윤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현구 선생은 2004년 서울대 정년퇴임 후에도 연구를 멈추지 않고 해외저널에 수차례 논문을 게재하며 후배들이 조금 더 편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세계 무대를 다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독서량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인터넷을 통해 얻는 지식과 독서를 통해 얻는 지식은 본질이 달라요. 그 중에서도 고전문학이라든지 역사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 역사를 포함해서 동서양 역사를 꿰뚫는 것이 앞으로 어떤 커리어를 갖든지 굉장한 도움이 되거든요. 미국이나 유럽이나 기독교 문화를 빼고는 대화가 안 되죠. 자신의 신앙유무와 관계 없이 성경을 꼭 읽죠. 저는 그런 면에서 청소년들이 성경도 꼭 한 번은 읽어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세상을 멀리 내다보는 안목도 필요해요. 그런 비전을 가질 필요가 있는데, 과학공상소설을 읽는 것이 그런 면에서 상당한 도움이 될 거예요. 요즘 흥행하는 영화만 봐도 과학기술적인 측면을 암시하는 내용이 많아요. ‘그래비티’, ‘설국열차’ 등도 과학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 있어요. 그런 부분을 통해서라도 멀리 보고 자기 인생 항로를 간추려 나가는 식견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전문성을 가지고 본다면 평생 교수 생활을 한 사람. 교육, 연구, 봉사에 나름대로 균형 있게, 고르게 기여한 사람으로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저의 지도를 받고 배출된 졸업생들이 국내외 각 분야에서 국가를 이끌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앞에서 이끌어준 사람이라고 기억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죠.
[출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83&contents_id=57920
첫댓글 형당 교수님의 교육자로서, 연구자로서, 지도자로서의 삶을 유년기 시절부터 조망할 수 있는 기사를 읽으니 형당 교수님 밑에서 수학할 수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형당 교수님의 좋은 말씀을 읽고 배울 수 있게 된다면 더 좋은 나라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공학이 아니라 과학을 전공하셨으면 노벨상을 타실 수 있으셨을텐데 아쉽습니다. 물론 과학을 선택하셨다면 저희와의 만남도 없었겠지만 말입니다.... 기사 감사한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저도 감동적으로 읽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형당 선생님이 제자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이미 선생님께서는 공학의 노벨상을 타신 것으로 저는 믿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구본준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