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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昌寧曺氏 全國靑年聯合會 원문보기 글쓴이: 曺石鉉
昌寧曺氏始祖와 始祖配位에 關한 硏究 學術委員 曺 命 根 Ⅰ. 序論 本稿는 昌寧曺氏始祖는 어떤 분이며 始祖配位는 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그 硏究 目的이 있다. 이 論題는 昌寧曺氏에게 있어서 가장 基本的인 것으로서 모두의 關心事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氏族史 硏究에도 一助가 될 수 있는 것이므로 꼭 遂行되어야 할 課題이다. 本課題의 達成을 爲한 硏究方法으로 文獻的硏究 卽 族譜 ․ 金石文 ․ 其他文獻의 調査를 通하여 始祖는 어떤 분이며 始祖의 配位가 누구인가를 밝히고자 한다. 俗傳1) 이와 같은 狀況에서 昌寧曺氏始祖와 關聯된 記錄은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그의 後孫에 관한 記錄은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몇몇 곳에 극히 斷片的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므로 本稿에서는 一千數百年을 건너뛰는 史料의 貧弱性을 있는 그대로 認定하고 昌寧曺氏의 私譜 및 族譜에 記錄된 始祖 및 始祖配位의 事實과 金石文 그리고 其他文獻에서의 關聯된 記錄을 蒐集하여 調査 ․ 檢討하고 아울러 始祖配位에 대한 새로운 意見 提起에 따른 妥當性 有無를 究明하여 定論을 내리고자 한다. Ⅱ. 昌寧曺氏 得姓經緯와 始祖位相檢證 1. 昌寧曺氏族譜分析 昌寧曺氏族譜에 대한 記錄은 荷江公 曺錫輿(18131889)가 쓰신 昌寧曺氏族譜 庚辰譜 序文에 具體的으로 言及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라고 하여, 朝鮮初期부터 丁亥譜發刊까지의 族譜를 九本으로 明示하였으며, 거기에다 丁亥譜 以後에 發刊된 庚辰譜 ․ 辛亥譜 ․ 甲子譜 3譜를 追加하면 모두 12本이다. 이 12本의 族譜를 中心으로 昌寧曺氏得姓經緯와 始祖位相을 檢證하려고 한다. 가. 族譜의 種類 (昌寧曺氏族譜의 根幹이 되는 私譜, 家譜, 族譜) ① 《舊譜》 (曺夏尹公, 曺震英公, 曺命基公, 莊胡公 曺潤孫, 曺敬承公의 私譜) ② 《判官譜》 (判官公 曺仲義의 家譜 (1400年代 中盤)) ③ 《梅溪譜》 (梅溪公 曺 偉(1454~1503)의 族譜) ④ 《南冥譜》 (南冥公 曺 植(1501~1572)의 族譜) ⑤ 《參判譜》 (參判公 曺 倬(1552~1621)의 族譜) ⑥ 《軍威譜》 (縣監公 曺實久(1591~1658)의 族譜) ⑦ 《晦谷譜》 (晦谷公 曺漢英(1608~1670)의 族譜) ⑧ 《癸酉譜》 (丁卯年(1687)에 潭陽公 曺殿周(1640~1696)가 淸道 地方官으로 나 가 上舍公 曺建(1641~1698)과 秉節校尉公 曺冕周(1632~1698)를 시켜 여러 本의 族 譜를 모아 戊辰年(1688)에 編輯을 마쳤으나 潭陽公의 遞職으로 미쳐 板刻하지 못한 것을 癸酉年(1693)에 海西兵馬節度使公 曺廷亮(1652~1693)에 依해 刊行) ⑨ 《丁亥譜》 (甲子年(1744)에 西州公 曺夏望(16821747)과 澹雲公 曺命敎 (1687~1753)가 編輯을 議決하고 또 通德郞公 曺命百(1717~1756)과 諮議公 曺霖 (1711~1790)에게 命하여 그 役事를 主管하게 하였는데, 中途에 잇달아 세상을 떠나 고 諮議公만 生存하여 다시 縣監公 曺命億(17201774) ․ 縣監公 曺允迪(1707~ 1772) ․ 監察公 曺晦振(1738~1799)과 함께 論議 監督하여 丁亥年(1767)에 刊行. 參 考로 編輯을 議決하고 譜役을 主管하며 監督하신 분의 家系를 살펴보면, 西州公은 澹雲公에게 生家로는 從叔父가 되고, 養家로는 再從叔父가 되시며, 通德郞公과 縣監 公 曺命億은 西州公의 子弟이시고, 諮議公은 梅溪公의 八世孫이시고, 縣監公 曺允迪 은 澹雲公의 從姪이 되시며, 監察公은 澹雲公의 孫子이시다.) ⑩ 《庚辰譜》 (甲戌年(1874)에 烟巖公 曺錫雨(1810~1878)가 八道의 宗中에 發議 하여 編輯을 推進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그의 仲氏인 荷江公 曺錫輿 가 繼承하여 庚辰年(1880)에 刊行) ⑪ 《辛亥譜》 (辛亥年(1911)에 觀察使公 曺始永(1843~1912)이 縣令公 曺斗煥 (1848~1915)과 心力을 合하고 曺斗永公을 시켜 各處의 宗族에게 通告하여 編輯 刊 行) ⑫ 《甲子譜》 (甲子年(1924)에 曺秉洙公이 諸族과 相議하여 曺錫河公 ․ 曺秉繕 公과 함께 編輯刊行) 나. 族譜에 記錄된 始祖의 出生과 得姓經緯 및 位相 分析 昌寧曺氏族譜의 根幹이 되는 族譜는 모두 12本이다. 이 가운데 始祖의 位相과 出生에 관한 記錄을 確認할 수 없는 本은 《舊譜》․《判官譜》․《參判譜》․《軍 威譜》․《晦谷譜》 等 5本이며, 記錄되어 있는 本은 《梅溪譜》․《南冥譜》․ 《癸酉譜》․《丁亥譜》․《庚辰譜》․《辛亥譜》․《甲子譜》 等 7本이다. 始祖 位相과 出生에 대한 族譜別 기록 內容을 살펴보면, ① 《梅溪譜》의 『事實』이란 題目 아래에, “鼻祖는 新羅駙馬이시고 昌城府院君으로 姓은 曺氏이고 諱는 繼龍이시며 官 職은 太師에 이르렀다4) 하였으며, 또 記錄하기를, “新羅 때 翰林學士 李光玉의 딸 諱 禮香이 靑龍疾을 얻어 火王山에 있는 龍潭에서 목욕을 하다가 龍子 玉玦과 만나 繼龍을 낳게 되었는데, 겨드랑이 밑에 曺자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고 하여 姓을 曺라고 하였다5) 하였고, 또 俗傳에, “曺氏始祖의 어머니 諱 禮香이 태어나면서부터 腹病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 이 말하기를 ‘火王山의 龍池가 매우 靈驗이 있으니 沐浴齋戒하고 정성껏 祈禱 하면 반드시 效驗을 볼 것이오.’ 하므로, 그의 말대로 吉日을 가려서 龍池로 올라가 목욕을 하고 祈禱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雲霧가 일어 대낮이 캄캄해 지면서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하였으나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었다. 이윽 고 雲霧가 걷히면서 저절로 못 가운데서 솟구쳐 나왔다. 이때부터 病은 낫고 胎氣가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꿈에 한 丈夫가 나타나서 이르기를, ‘그대는 이 아이의 아비를 아시오? 이름은 玉玦인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잘 養育하면 크게는 公侯가 될 것이고 적어도 卿相은 될 것이오. 그리고 子孫이 萬代로 蕃 昌할 것이오.’ 하였다. 그의 아버지 翰林學士 李光玉이 그 사실을 王에게 아뢰 니 王이 曺繼龍이란 姓名을 내리고 長成함에 이르러서는 眞平王의 사위가 되 고 昌城府院君에 封해졌으니 이 분이 사실 曺氏의 始祖이다. 傳해오는 말이 비록 正經과 大道에 벗어나기는 하지만 <周나라 始祖 后稷 은 그의 어머니> 姜嫄이 巨人의 발자국을 밟고 가다가 感應되어 誕生하였다 는 것과, <漢나라 高祖 劉邦은 그의 어머니> 劉媼이 천둥치고 비 내리는 큰 못가에서 蛟龍과 相交하여 誕生하였다는 것이며, 新羅 始祖 朴赫居世의 閼英 王妃가 閼英井邊에서 鷄龍의 左脇으로부터 誕生하였다는 이야기 등은 이런 理 致가 없지 않을 것이다. 世間에 傳해지는 것인즉 子孫된 자가 몰라서는 안 되 는 일이기에 들은 바를 간추려 적어서 後世 사람에게 알리는 것일 뿐 그 先系 를 神聖하게 하여 힘써 誇張하거나 아름답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6) 하였으며, ② 《南冥家牒》에는, “新羅 翰林學士 李光玉의 女婿인 玉玦은 바로 昌寧 火王山城의 大池 神龍의 아들이며, 그의 아들 曺繼龍은 眞平王의 女婿가 되었다7) 하였고, ③ 《癸酉譜》의 『事實』이란 題目 아래에는, “鼻祖는 新羅駙馬이시고 昌城府院君으로 姓은 曹氏이고 諱는 繼龍이시며 官 職은 太師에 이르렀다8) 하였으며, 또 記錄하기를, “曹梅溪家牒을 살펴보니 新羅 翰林學士 李光玉의 딸 禮香氏가 靑龍疾을 얻어 火王山 龍潭에서 목욕하다가 神龍子 玉玦과 서로 만나 繼龍을 낳았는 데, 겨드랑이 밑에 曹字가 있으므로 인해서 姓을 曹라 하였다.” 하였으며, 또 俗傳에, “始祖 어머니 禮香氏가 태어나면서 腹病이 있어 온갖 藥으로 治療하였으나 效果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火王山의 못은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불러와 오래전부터 神靈하고 特異함이 드러났으니 만약 그 못에 齋戒 목욕하 고 깨끗이 하여 祈禱하면 응당 효험을 볼 것이오.’ 하므로, 그 말대로 날을 가 려 못에 올라가서 목욕하고 祈禱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雲霧가 끼어 캄캄해지 면서 始祖 어머니가 간 곳을 알지 못하여 左右의 사람들이 허둥대며 어쩔 줄 을 몰랐었다. 얼마 안 되어 雲霧가 개이자 저절로 못 가운데서 솟구쳐 나왔다. 이 뒤로 病은 낫고 배가 불러오는 것이 姙娠한 조짐이더니 마침내 남자를 낳 았다. 꿈에 한 丈夫가 와서 告하기를, ‘그대는 이 아이의 아비를 아시오? 이름 은 玉玦이고 그가 바로 나요. 잘 보호하고 양육하면 크게는 公侯가 될 것이고 적어도 卿相은 잃지 않을 것이며, 子孫이 萬代로 쇠퇴하지 않을 것이오.’ 하였 다. 아버지 翰林學士 李光玉이 그 연유를 王에게 알려 曹라는 姓과 繼龍이라 는 이름을 下賜 받았다. 長成함에 이르러 眞平王의 女婿가 되고 昌城府院君에 封해졌으니 이분이 실제로 始祖가 된다. 비록 正經에 벗어나는 말이지만 <周나라 始祖 后稷은 그의 어머니> 姜嫄이 巨人의 발자국을 밟고 가다가 感應되어 誕生하였다는 것과, <漢나라 高祖 劉 邦은 그의 어머니> 劉媼이 천둥치고 비 내리는 큰 못가에서 蛟龍과 相交하여 誕生하였다는 것이며, 麗祖9)10)舊譜에서 나왔다. 하였다.《梅溪譜》의 『事實』을 본래의 趣旨를 毁損하지 않는 範圍內에서 상 당 부분 潤色이 加해진 것을 原文 對照를 통하여 確認할 수 있으며, 《南冥 家牒》에 記載된 내용을 그대로 옮겨 기록하였다. 그리고 《癸酉譜》 本文 序頭 에, “曺繼龍 新羅 眞平王 女婿이며 昌城府院君에 封해지고 官職은 太師에 이르 렀다11) 하였으며, ④ 《丁亥譜》에는 《癸酉譜》의 事實을 그대로 옮겨 記錄하면서 俗傳은 《梅溪 譜》의 내용을 옮겨 기록하였다. 그리고 昌寧曺氏族譜 卷之一에, “始祖 曺繼龍 新羅 眞平王의 女婿이다. ○《癸酉譜》에 府院君에 封해지고 官職이 太師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新羅의 官制를 상고하면 太師 等의 官 職 이름이 없으니 지금 考察할 수 없다. ○和順에 살고 있는 後孫 善行의 私 譜에 ‘<始祖의> 墓所가 慶州 草堤 辛坐의 터에 있다.’ 하였는데, 英祖 戊辰年 (1748)에 과연 찾았다. 慶州府의 북쪽 50리 쯤 되는 草堤에 上下葬이 있었음 으로 封築을 고쳤는데 坐向과 地名이 꼭 들어맞았고 土人들도 지금까지 曺氏 의 墳山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끝내 文字가 적힌 證票를 찾지 못하였으 니 다시 參考하는 것이 妥當하다12) 하였고, ⑤ 《庚辰譜》에는 《癸酉譜》事實을 그대로 옮겨 記錄하였으며 昌寧 曺氏族譜 首編 卷之一上 先系에, “始祖 曺繼龍 新羅 眞平王 女婿이다. 癸酉譜에 ‘府院君에 封해지고 官職이 太師이다.’ 하였는데, 新羅 官制를 살펴보면 太師가 없으니 지금 상고할 수 없 다. 和順의 後孫 善行의 私譜에 ‘墓所가 慶州 辛坐 터에 있다.’ 하였는데, 英宗 戊辰年에 慶州府의 북쪽 50리 쯤 되는 草堤에 上下葬이 있는 것을 처음으로 찾아 封域을 改修하였으나, 墓誌나 墓碣의 徵驗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별 도로 壇을 쌓고 碑石을 세웠는데, 大提學 洪良浩가 碑銘을 짓고, 後孫 判書 允 大가 글씨를 썼다13) 하여, 昌寧曺氏始祖墓壇碑文의 글씨를 東浦公 曺允大(1748~1813)가 쓰셨다고 記錄하였으며, ⑥ 《辛亥譜》에는 《庚辰譜》 事實과 昌寧曺氏族譜 首篇 卷之一上 先系內容을 그대로 옮겨다 記錄하였고, ⑦ 《甲子譜》에는 《庚辰譜》의 事實과 昌寧曺氏族譜 首篇 卷之一上 先系內容 을 그대로 옮겼는데, 단지 昌寧曺氏族譜 卷之天 始祖 曺繼龍 <註> 끝에, “별도로 壇을 쌓고 碑石을 세웠는데, 大提學 洪良浩가 碑銘을 짓고 後孫 判 書 鳳振이 글씨를 썼다14) 하여, 始祖墓壇碑의 글씨는 愼庵公 曺鳳振(1777~1838)이 쓰셨다고 記錄되어 있는데, 碑石에는 愼庵公이 쓰신 것으로 새겨져 있으며, 愼庵公은 東浦公의 長子 이시다.
2. 始祖墓所를 찾게 된 經緯 始祖墓所는 오랜 歲月동안 失傳되어 오다가 朝鮮 英祖20년 甲子年(1744)에 澹雲公 曺命敎의 現夢을 契機로 宗人 가운데 僧侶가 된 분을 시켜 多方面으로 찾아보게 하면서 永川의 恥齋公 曺善迪(1697~1756)의 편지15) “甲子年(1744) 12월 1일[戊午] <澹雲公의> 꿈에 어느 神廟에 到着하니 사람의 말 이 들리기를 ‘碑石을 세울 곳에 세우라,’ 하므로, 茫然히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지금 가는 길이 前代의 陵寢을 지나는데 세워야 할 碑石을 指示 하는 것인가 하고, 마침내 한 언덕을 넘으니 왼쪽으로 王陵 階段의 돌이 보이기에 그 길을 버리고 한 곳에 이르니, 山의 形勢가 宏大하고 雄壯하여 멈출 수 없을 듯 하였다. 그리고 산 아래쪽 뭉쳐진 곳에 옛 무덤이 있고 그 무덤 앞에 表石이 있는 데 위쪽은 어두워서 분변할 수 없고 아래쪽에 「曺繼龍」세 글자가 있었다. 그것이 始祖의 墓所임을 알고 북받치는 기쁨을 깨닫지 못하고 곧장 그 앞으로 나아가니 左 右에서 부축해주어도 가팔라서 올라갈 수 없었고 죽은 아우 校理16) 꿈에서 깨어 매우 異常하게 여기고 이 꿈을 記錄하는데 해묵은 종이쪽지를 찾아 嶺南 宗人 편지에서의 流傳되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 或者는 말하기를, ‘始祖의 墓 所가 慶州에 있지 않고 昌寧에 있다.’ 하므로, 宗人 가운데 僧侶가 된 사람을 시켜 여러 方面으로 찾아보게 하였더니 과연 慶州 草堤里에서 찾았다. 산 아래 居住하는 本土人들이 數百年 가까이 살았다고 하며 모두들 이곳이 曺氏始祖墓이고 八平章 九 少監이 다 그 子孫이라고 하였다. 아래 위의 무덤 形態가 宛然한데 옛날에는 夫婦 合葬을 아래위로 하는 境遇가 많다고 한다. 또 和順宗人 善就의 譜牒을 얻어 보니 ‘始祖의 墓所가 慶州府 북쪽 40里 紫玉山 동쪽 草堤面 庚兌龍 辛坐乙向의 터17)18) 하였다. 3. 金石文(墓壇碑銘 ․ 靈蹟碑文 等) 分析 가. 金石文의 信賴性 文獻으로 傳해지는 것은 曖昧한 부분도 있고 眞實性이 疑心스러운 境遇도 적지 않지만 金石文은 當時 사람의 손에 依하여 直接 이루어진 것이므로 가장 正確하고 진실한 歷史的 資料가 된다고 評價한다. 朝鮮時代의 墓道文字는 儒學을 崇尙함에 따라 先祖와 父母에 대한 孝誠의 하나로 墳墓를 보기 좋게 築造하고 身分에 맞게 碑石을 세우고 石物을 갖추는 일이 盛行하였다. 그래서 當代에 가장 名望이 있고 文章에 能한 學者로부터 碑文을 받고 가장 有名한 書家로부터 글씨를 받아서 碑를 세우는 것이 子孫으로서 道理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왔다. 墓道文字는 곧 그 무덤 主人의 傳記가 된다. 그러므로 撰述者는 歷史家의 立場에서 公正한 敍述과 批判을 加하는 것이 原則이다. 그러나 碑文을 請託하는 사람이나 撰述하는 사람이 무덤 주인의 人格 ․ 學識 ․ 業績 등을 美化하거나 誇張하는 事例가 없지 않아 이 墓道文字가 죽은 이의 傳記資料로 가장 正確함은 認定할 수 있지만, 그 敍述하는 내용의 公正性에는 多少 問題가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客觀的인 資料라 는 側面에서 그 信賴度에 무게를 더 두어야 할 것이다. 나. 墓碑銘分析 ① 昌寧曺氏始祖墓壇碑銘 昌寧曺氏始祖의 墓壇碑銘은 澹雲公의 孫子인 監察公 曺晦振의 請囑에 依하여 1798년(정조22년)에 大提學을 지낸 耳溪 洪良浩(1724~1802)가 지었다. 그 내용 을 보면, “처음에 曺氏 始祖의 무덤이 世代가 멀어 失傳되었다. 그런데 澹雲公 曺命敎 가 한번은 이런 꿈을 꾸었다. 어느 神廟에 들어가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어 찌 碑를 세우지 않느냐?’ 하는 것 같으므로, 쳐다보니 산 아래 옛날 무덤이 있 는데 위에는 풀이 무성하고 그 아래의 土色은 모두 붉었으며 앞에 있는 돌에 「曺繼龍」이란 세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그것이 始祖의 무덤임을 알고 悚懼스런 마음으로 올라가 南向하여 두 번 절을 하였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마 음으로 이를 異常하게 여겼었는데 마침 永川에 사는 宗人 曺善迪이 편지를 보 내왔는데 ‘始祖 무덤이 慶州 草堤里에 있으며 예로부터 曺氏始祖의 무덤이라 고 일컬어지고 있다. 여러 차례 兵火를 겪었지만 밭가는 쟁기가 들어가지 않았 고 간혹 <무덤 區域을> 侵犯하는 자가 있으면 곧 異變이 있었으므로 오늘날까 지 境域 안에 다른 무덤이 없다.’ 하였고, 그 뒤에 또 和順에 사는 宗人 曺善行 의 舊譜를 얻어다 보니 거기에 始祖의 무덤이 慶州府의 북쪽 40里 紫玉山 아래 草堤里 辛坐乙向의 터에 있다.‘ 하였다. 曺善迪의 편지 내용의 말은 그 地方 사람들의 流傳에서 얻은 것이고, 曺善行의 譜牒은 先世의 기록에서 나온 것인 데 두 가지가 符合하여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嶺南의 宗人을 그곳에 보내어 살펴보도록 하였더니 地形과 土色 그리고 무덤 境內의 坐向과 背景이 一切 꿈에서 본 바와 같았다. 이에 封墳을 改修하고 나무하고 소먹이는 것을 禁止하게하고서 傳疑19)하였다20) 하였으며, 또 “當時에 澹雲公이 늙어서 미쳐 省墓를 하지 못하였고 世上을 떠나 무덤의 도래솔 또한 한 움큼이나 될 정도로 歲月이 오래 되었다. 지금 그의 孫子 曺 晦振이 祖父의 遺志를 받들어 千里 길을 가서 同道의 여러 後孫을 불러 祖父 의 꿈을 質正하고 嶺南宗人의 편지와 湖南宗人의 譜牒으로 證明하여 듣고 본 바를 參考해서 보니 모두 徵驗이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무덤에 절하고 掃除 한 다음 祭祀를 지내고 國中의 여러 後孫과 議論하여 壇을 모우고 碑石을 세 우니 澹雲公이 여기에서 孫子다운 孫子를 두었다고 하겠다21) 하였고, 始祖配位에 대해서는 昌寧曺氏世譜의 內容을 引用하여, “李光玉이 그 일을 王에게 아뢰니 眞平王이 그를 불러서 보았는데 狀貌가 特 異하고 겨드랑이 밑에 「曺」자와 같은 무늬가 있으므로 姓과 이름을 下賜하였 다. 長成하게 되자 公主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22) 하였으며, 또 “倭人이 언젠가 東萊를 侵犯하므로 王이 公에게 命하여 軍士를 거느리고 防 禦하게 하였다. 이에 <公이> 單騎로 倭陣에 나아가서 말고삐를 잡고 徐徐히 타이르니 倭人들이 줄을 지어 서서 절을 하며 말하기를, ‘公은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이다.’ 하고, 곧 軍士를 撤收하여 돌아갔다23) 하였는데, 이 記事는 進士 李德齊(1656~1706)가 어릴 적부터 들어온 그 지방의 流傳하는 이야기를 恥齋公 曺善迪에게 말하였는데 恥齋公이 듣고 記錄한 것에 근 거하였다. 내용은, “李進士德齊는 晦齋先生의 玄孫이다. 文行과 重望이 있었는데 그가 어릴 적 부터 傳해들은 이야기를 전하기를, ‘曺太師가 태어나자마자 特異함이 있었으므 로 李學士가 眞平王에게 아뢰었더니 王이 불러다 보았는데 狀貌가 特異하므로 宮中에서 기르도록 하였다 8세가 되자 成人이 되었으므로 마침내 公主를 아내 로 삼아 주었다. 倭人이 언젠가 많은 軍士를 動員하여 東萊를 侵犯하므로 王이 公에게 軍士를 거느리고 가서 防禦하도록 命하였는데 公이 單騎로 倭陣에 가 서 말고삐를 잡고 타이르니 倭人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줄을 지어 엎드려 절을 하며 말하기를「公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다.」하고, 軍隊를 撤收하여 돌아갔 다. <公이> 卒함에 이르러 草堤에 葬事지냈는데 塋域을 犯하는 者가 있으면 번 번이 異變이 생기는 일이 金庾信의 墓域과 같았으므로 지금까지 마을 사람들이 그 形局 안에는 葬禮를 치르지 못했으며 八平章 九少監은 모두 그의 後孫으로 東俗에 曺氏始祖墓라고 일컫는다.’고 한다24) 하였다. ② 昌寧縣 火旺山龍池 曺氏靈蹟碑文 昌寧縣 火旺山龍池 曺氏靈蹟碑文은 1892년(고종29)에 東谷公 曺寅承(1842~1895) 의 請囑에 依하여 寧齋 李建昌(1852~1898)이 지었다. 그 碑文 가운데 昌寧曺氏 始祖의 位相에 對한 記述을 살펴보면, “新羅의 眞平王이 이 사실을 듣고 ‘姓은「曺」, 이름은「繼龍」이라고 내 렸으며 長成함에 이르러서는 眞平王의 女婿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대체로 曺 氏家牒의 記錄이 이와 같다25) 하였다.
4. 其他文獻(增補文獻備考․典故大方)의 昌寧曺氏始祖關聯內容分析 增補文獻備考는 1769년(英祖45)에서 1908년(隆熙2)에 이르기까지 前後 1백 39년에 걸쳐 完成된 巨帙의 官撰本 책자이며, 한국 制度文物史의 集大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增補文獻備考는 韓國文化를 硏究하는 境遇 그 入門에서 거쳐야 할 案內書 내 지는 引導者格인 役割을 하는 책이라고 評價되고 있다. 가. 增補文獻備考 補帝系考의 王女條에, “新羅 眞平王 長女 善德女王 女 昌城府院君 曺繼龍에게 시집갔음26) 하였고, 增補文獻備考 帝系考 附氏族篇에, “昌寧曺氏始祖 繼龍 (總敍에 보인다. 겨드랑이 밑에 曺자의 무늬가 있었기 때문 에 그대로 姓을 曺氏라 하고 長成함에 이르러 眞平王의 사위가 되었으며 昌寧府院 君에 封해졌다)27) 하였다. 나. 典故大方 典故大方은 1924년 當時 學者였던 痴堂 姜斅錫이 우리나라 古代로부터 近世에 이 르는 各種의 參考資料를 蒐集하여 編纂 刊行한 冊이며, 知識人들이 책상머리에 常置 해 놓고 國史知識 乃至 人物常識을 넓히며 궁금한 項目을 찾아보던 책이다. 典故大方의 萬姓 始祖篇에, “昌寧曺氏始祖 曺繼龍 : 겨드랑이 밑에 曺字가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姓을 曺氏 라 하고 長成함에 이르러 眞平王의 사위가 되고 昌寧府院君에 封해졌다28) 하였다. 5. 綜合 昌寧曺氏族譜를 通하여 曺氏始祖의 出生과 得姓經緯 및 位相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始祖의 出生과 得姓經緯 및 位相이 最初로 기록된 文獻은 梅溪譜이고, 아울러 俗傳 으로만 알려져 왔던 事實이 最初로 定立이 된 것도 梅溪譜이며, 그 以後에 刊行된 族譜는 그 記事를 그대로 移載하여 編輯하였음을 確認할 수 있다. 始祖墓所는 澹雲公의 現夢을 契機로 永川의 恥齋公 曺善迪의 편지와 和順의 曺善就 公의 譜牒을 參考하여 1748년(영조24)에 墓所를 찾게 되고 이어서 尋墓告由29)를 行 하였으며, 1796년(정조20)에 設壇하고 그해 3월 11일에 設壇告由30) 그리고 金石文에서의 昌寧曺氏始祖墓壇碑文은 昌寧曺氏始祖에 대한 從來의 모든 資 料를 收集하여 綜合한 根據에 依하여 撰述되었다. 특히 昌寧曺氏始祖의 墓所를 찾게 된 經緯를 詳述하면서『封墳을 改修하고 나무하고 소먹이는 것을 禁止하게하고서 傳 疑하였다.』고 하였는데, 傳疑는 앞서 말한 대로 歷史的인 事實을 記錄함에 있어 의 심스러운 사실은 의심스러운 대로 傳해야 한다는 意味이다. 洪 耳溪는 그런 意味를 昌寧曺氏始祖의 墓壇碑文을 쓰면서 引用함으로서 隱然中에 設壇한 사실과의 關聯을 지었으며, 設壇하게 된 動機에 대해서는 前述한 昌寧曺氏族譜篇에서 明示되어 있다. 그리고 昌寧曺氏始祖의 配位에 대해서는 「長成하게 되자 公主를 아내로 삼게 하였 다.」라고만 記述함으로서, 眞平王의 몇째 公主라고 내세운 主張을 一蹴하고 從前 昌 寧曺氏世譜의 기록을 再確認시킴과 同時에 그 기록을 定論으로 採擇하였음을 代辯하 고 있다. 그리고 특히 西州公이 著述하신 遺事의 「肇世記異」가 昌寧曺氏始祖墓壇碑文 撰述 의 資料로 提示되었음은 必然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資料의 取捨選擇은 執筆者의 固有領域인 만큼 그의 이와 같은 記事는 綿密한 檢討에서 얻어진 正確한 判斷이라고 하겠다. 昌寧縣火旺山31) 그리고 其他文獻 즉 增補文獻備考와 典故大方에서는 昌寧曺氏始祖의 配位가 眞平王 의 둘째 사위, 또는 眞平王 女婿로만 記錄되어 있다는 것을 確認할 수 있다. Ⅲ. 昌寧曺氏始祖配位 1. 始祖配位에 關한 主張 가. 族譜 《梅溪譜》을 비롯한 《癸酉譜》와 그 以後에 發刊된 《丁亥譜》 ․ 《庚辰譜》 ․ 《辛亥譜》 ․ 《甲子譜》에 단지 「新羅眞平王女婿」 라고만 記錄되었을 뿐 眞平王의 몇째 公主가 昌寧曺氏始祖의 配位라는 記錄은 찾아볼 수 없다. 나. 《西州集》 《西州集》은 1854년에 刊行된 西州公 曺夏望의 文集이다. 이 文集 卷之八의 遺事란 題目下에 「肇世記異」란 小題目이 있으니, 곧 昌寧曺氏始祖의 遺事인 것이다. 이 「肇世記異」 外에도 麗末鮮初의 遠祖인 西州公의 十二代祖인 左政丞 襄平公遺事, 十代祖인 副提學 丹皐先生遺事와 七代祖 左贊成公遺事, 六代祖 戶曹判書 昌陽君遺事 等이 收錄되어 있다. 이 「肇世記異」의 내용을 살펴보면, “鼻祖 諱 繼龍은 新羅 太師 駙馬都尉 昌寧府院君이다. 舊譜에 이르기를, ‘新羅 眞 平王朝에 翰林學士 李光玉이 昌寧縣 鼓巖村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 禮香이란 딸이 있었고 시집갈 나이에 偶然히 靑龍疾을 얻어 藥으로 治療했으나 效驗이 없어 學 士가 한창 시름에 잠겨 있는데, 忽然히 乞齋僧이 앞에 나타나거늘 學士가 말하기를, 「집안에 근심이 있어 시주할 겨를이 없소.」하였더니, 중이 말하기를,「감히 어떤 樣相의 症勢며 病患인지 알기를 請願합니다.」하므로, 學士가 말하기를,「스님은 醫 術處方에 밝소.」하자, 중이 말하기를, 「밝지 않습니다. 그러나 혹시 回復시킬 수도 있습니다.」하기에, 學士가 이상하게 여기며 試驗 삼아 病名을 말하였더니 중이 말 하기를,「이것은 매우 쉬우니 급히 火旺山城에 달려가서 火池에 목욕을 하면 금방 差度가 있을 것이오.」하고는, 하직하고 떠나버렸다. 學士가 즉시 侍者에게 命하여 뒤따라 가보게 하였으나 門을 나서보니 문득 그 중은 보이지 않았다. 學士가 그 중 이 神僧인줄 알고 그의 말대로 試驗 삼아 딸에게 가서 목욕하게 하였다. 鼓巖에서 화왕산성 北門까지는 겨우 十里 쯤 되며, 城 안에는 세 개의 못이 있는데 그 둘레 는 모두 매우 크지 않지만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었다. 바야흐로 목욕하려고 하는 데 갑자기 雲霧가 일어나 캄캄해지며 그 女가 있는 곳을 잃어버렸다. 대체로 그 女 가 막 목욕을 하려고 하는데 어떤 物體가 못 바닥으로 끌어들이는 듯 하더니 갑자기 구슬로 된 冠에다 玉을 찬 少年이 나타나 交語하기를, 「나는 東海 神龍子 玉玦이며 그대와는 前世의 묵은 夤緣이 있었으니 오늘의 만남은 偶然이 아니오.」 하였다. 조금 있다가 雲霧가 개이고 저절로 솟구쳐 못 가로 나왔는데 해묵은 病은 깨끗이 없어지고 돌아와서는 姙娠이 되었다. 少年이 또 꿈에 告하기를, 「나의 아이 는 男子이니 모름지기 잘 保護하면 크게는 公侯가 될 것이고, 적어도 卿相은 잃지 않을 것이며 子孫이 萬代토록 衰退하지 않을 것이오.’」하였는데, 태어남에 이르러 크게 奇異한 表象이 特殊하였고 왼쪽 겨드랑이 밑에 붉은 글씨의 「曺」字가 있었 다. 學士가 그 일을 王에게 아뢰니 眞平王이 매우 이상하게 여기고 「曺」라는 姓 을 下賜하고 因해서 昌寧을 本貫으로 삼도록 하였으며, 이름을 「繼龍」이라 하게 하였다. 長成함에 이르러 眞平王이 그의 長女 德曼으로 配匹을 삼게 하였으니 바로 善德女王이다. 史記에 일컫기를 「眞平王이 薨하고 後嗣가 없자 나라 사람이 德曼 을 세워 王으로 삼았는데 性品이 너그럽고 어질며 明哲하고 敏捷하여 16년 동안 王 位에 있으면서 나라 안이 잘 다스려졌다. 그리고 金庾信 等을 拔擢하여 三韓을 統 合할 計劃을 하였으니 대체로 女王 가운데 聖德이다. 世上에 傳하기를 善德이 세 가지 일을 미리 알았으니 牧丹의 그림을 보고 〈이 꽃은 틀림없이 香氣가 없을 것 이오.〉하자,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나비를 그리지 않았으므로 알았다.〉 하였고, 일찍이 玉門池의 개구리가 싸우는 것을 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반드시 이 웃 나라의 軍士가 쳐들어올 것이다.〉하였는데, 정말로 쳐들어왔으며, 이미 늙어서 는 죽을 날짜를 미리 말하였는데 어긋나지 않았다.」하였다. 지금 新羅歷史를 살펴 보니 唐太宗이 善德에게 詔書를 내려 夫公과 함께 國事를 處理하게 하였는데 夫公 의 姓名은 記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32) 하였다. 遺事는 世上을 떠난 사람의 生前事蹟을 記錄한 글이며, 특히 子孫이 쓴 祖上의 遺事는 어디까지나 主觀的인 立場에서 記述됨을 認識해야 한다. 그리고「肇世記異」의 내용을 檢討하면 앞부분 즉 出生部分은 《梅溪譜》「事實」의 「俗傳」을 좀더 具體化 내지 潤色하여 再構成하였음을 原文 對照를 通하여 알 수 있는데, 무엇을 根據로 약 二百 三十餘年 뒤에 이와 같은 再構成이 可能하며, 또한 이와 같은 再構成의 必要性이 切實하였는지는 앞으로 풀어야할 課題라고 본다. 뒷부분은 旣刊 族譜에 記載된 子孫錄을 轉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肇世記異」의 出處를 漠然하게 舊譜라고 적고 있어 確實한 根據提示에 限界를 드러내었다. 또 始祖配位에 對한 새로운 言及 卽 眞平王의 女婿에서 眞平王 長女 德曼으로 從前의 定論과는 다른 內容을 記錄하고 있다. 그러나 「公主」에서 갑자기 「德曼」이란 具體的인 이름으로 바뀌게 된 典據에 대한 疏明資料는 전혀 없으므로, 後孫으로서 先系를 美化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至極히 主觀的인 記述로 볼 수밖에 없다. 다. 《昌寧曺氏知先錄》 1801년(순조1)에 鶴軒公 曺錫中(1761~1816)에 依하여 編纂된 《昌寧曺氏知先錄》卷之二 世乘一의 「遺事」내용을 살펴보면, “始祖 어머니[鼻母]의 諱는 禮香이니 新羅 翰林學士 李光玉의 딸이다. 學士가 昌 寧縣 鼓巖村에 살았다. 딸이 시집갈 때가 되어 偶然히 腹疾을 얻어 藥으로 治療하 였으나 효험이 없었다. 學士가 시름에 잠겨 앉았는데 忽然히 乞齋僧이 문 앞에 이 르거늘 學士가 말하기를, ‘집안에 걱정이 있어 겨를이 없소.’ 하였더니, 중이 말하 기를, ‘어떤 증세입니까?’ 하므로, 學士가 말하기를, ‘醫術의 處方을 압니까?’ 하니, 중이 말하기를,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기 에, 學士가 이상하게 여겨 시험 삼아 病名을 말하였더니, 중이 말하기를, ‘이는 매 우 쉽습니다. 급히 火旺山城으로 달려가서 화왕산 못에 목욕하면 금방 차도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서, 하직하고 떠나버렸다. 學士가 즉시 시중드는 자에게 명하여 뒤 좇아보게 하였으나 문득 보이지 않았다. 學士가 그를 神僧으로 알고 試驗 삼아 그 의 말과 같이 하였다. 鼓巖에서 화왕산성 北門까지의 거리는 10리쯤이고, 山城 안에 는 세 개의 못이 있는데 그 둘레는 모두 매우 크지 않지만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 었다. 바야흐로 목욕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雲霧가 일어 캄캄해져 그 女가 있는 곳 을 잃어 버렸다. 대체로 그 女가 막 목욕하려고 할 때 어떤 物體에 이끌려 못 밑으 로 들어가는 듯하더니 忽然히 한 少年이 珠冠과 玉佩 차림으로 나타나 함께 이야기 하기를, ‘나는 東海 神龍의 아들 玉玦이오. 그대와는 前世에 묵은 夤緣이 있었으니 오늘의 만남은 偶然이 아니오.’ 하였다. 조금 있다가 雲霧가 개이고 그 女가 저절로 못가로 솟구쳐 나왔는데 묵은 病은 쾌하게 없어졌다. 집으로 돌아옴에 이르러 姙娠 을 하였는데 少年이 또 꿈에 告하기를, ‘나의 아이는 남자이니 모름지기 잘 保護하 여 養育하면 크게는 公侯가 될 것이고 적어도 卿相은 잃지 않을 것이며 子孫이 萬 代로 衰退하지 않을 것이오.’ 하였는데, 태어남에 특수한 모습과 非凡한 거동이 있 었다. 學士가 그 일을 新羅王에게 알렸더니 王이 公의 겨드랑이 밑에 붉게 「曺」 字가 쓰여져 있다고 하여 姓은 「曺」이름은「繼龍」으로 내렸다. 長成함에 이르러 眞平王이 그의 長女로 配匹을 삼게 하였으니 바로 善德女主이다. 東史를 살펴보건 대 唐太宗이 善德에게 夫公과 함께 國事를 다스리라는 詔書를 내렸는데, 그 詔書에 夫公의 姓名을 言及하지 않았으니 歎息스럽다.”33) (家乘) 하였다. 全體 內容을 檢討하면 《西州集》遺事「肇世記異」 內容의 字句를 修正하여 그대로 移載한 것을 原文 對照를 통하여 確認할 수 있다. 그 중에 特記할 部分은 「肇世記異」에서는 『鼻祖 諱 繼龍』으로 始作하였는가 하면, 《昌寧曺氏知先錄》의「遺事」에서는 『鼻母 諱 禮香』이라고 하였고, 또 《梅溪譜》 事實에는 玉玦의 正體를 『火王山城 龍潭의 龍子』라고 하였고, 《南冥譜》에는 『火王山城 大池의 神龍子』라고 하였으며, 「肇世記異」에는 『東海 神龍子』라고 하였는데, 昌寧曺氏始祖墓壇碑銘과 昌寧縣火旺山龍池曺氏靈蹟碑文에는 「肇世記異」의 記載內容을 引用하여 『東海 神龍子』라고 記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肇世記異」의 末尾에 ‘夫公 姓名을 記錄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遺事」에서는 ‘夫公의 姓名을 言及하지 않았으니 恨스럽다.’고 하여, 眞實 與否에 대한 不確實性을 分明하게 남겨 두었다.
2.《三國遺事》 王曆篇檢討 《三國遺事》 王曆篇에 대한 硏究는 學界에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金相鉉은 《三國遺事》 王曆篇 檢討에서, “《三國遺事》 王曆의 記事와 奇異篇 以下 諸篇의 記錄을 對照 檢討해 보면 內 容이 서로 다른 境遇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서로 다른 內容의 範圍는 新羅, 百濟, 駕洛國 等의 諸王曆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데 王名이나 王의 在位年數, 諡號 가 처음으로 使用된 時期 등 매우 重要한 記事에 이르기까지 서로 어긋나는 境遇 가 있다.” 고 前提하고 끝에, “王曆이 一然에 依해 쓰여 진 것이 아닐 것임과 ≪三國遺事≫ 體制上의 王曆이 附錄的인 것이라는 점을 밝힌다34) 하였다. 특히 本稿와 直接 關聯이 있는 善德女王의 卽位年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注目해야 한다. 王曆에는 「甲午年(634)에 卽位하였는데 治世는 14년이다.」고 한 내 용에 반하여 紀異篇의 善德王知幾三事에는 「貞觀六年 壬辰年(632)에 卽位하여 16년 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였다. 참고로 ≪三國史記≫ 年表에는 紀異篇과 같이 壬辰 年에 卽位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相異點이 많다는 사실은 결코 偶然한 錯誤로 돌리기에는 問題가 있음을 指摘하면서 王曆의 本文대로 檢討하려고 한다. 王曆의 善德女王條에, “제27대 善德女王 (이름은 德曼 아버지는 眞平王이며 어머니는 麻耶夫人 金氏이 다. 聖骨의 男子가 다하였기 때문에 女王이 卽位하였다. 女王의 配匹은 飮葛文王 仁平 甲午年에 卽位하여 14년간 다스렸다35) 하였다. 이 記錄을 보면 善德女王에게는 飮葛文王인 남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부에서 昌寧曺氏始祖인 曺繼龍이 飮葛文王이라고 主張한 바 있으므로 그 主張이 明確한 根據에 依한 것인가를 分析하여 밝히고, 아울러 仁平을 年號가 아닌 人名으로 보는 見解가 往古에 있었으므로 그 見解를 肯定的으로 받아들이는 立場을 밝히려 한다. 3. 葛文王 葛文王은 王과 一定한 關係를 가진 新羅 最高 姓氏集團의 氏族長, 혹은 家系의 長 에게 준 稱號이다. 葛文王에 對한 硏究는 朝鮮朝 星湖 李瀷, 頤齋 黃胤錫에서부터 日 本의 今西龍, 葛城末治, 그리고 韓國의 梁柱東, 金庠基, 李基白 等의 學者로 이어졌 다. 이 學者들의 硏究結果를 土臺로 葛文王과 王과의 關係를 檢討해 보려고 한다. 먼 저 頤齋 黃胤錫은 葛文王에 대하여, “新羅에서 追封王은 모두 葛文王이라고 일컬었다36) 하였으며, 今西龍은「新羅葛文王考」에서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서 나타난 葛文王 17명에 대하여, “王의 父가 8명, 王의 外舅가 7명, 王의 外祖父가 8명, 女王의 配匹이 1명, 不明이 1명으로 分類하고 以上의 어느 것도 王의 最近親으로서 말하자면 準王이라고 말하 여도 支障이 없는 사람들이다37) 하여, 葛文王은 王의 最近親으로 準王의 性格을 띠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 金庠基는 「葛文王考」에서, “新羅의 骨品과 葛文王과의 關係를 살펴보면 葛文王은 王의 近親․外戚에게서 많 이 볼 수 있는 稱號이며, 또 葛文王에는 朴․昔․金 以外의 氏姓이 붙여진 例가 없 으니 이것은 明白히 新羅 王族을 構成한 所謂 朴․昔․金 三姓이 享有하던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所謂 聖骨은 이 세 氏族으로 構成된 新羅 王族을 가리 킨다. 그리고 《新唐書》 新羅傳에 보이는 『王族은 第一骨이고 妻도 그 王族이며 子息을 낳으면 모두 第一骨이 되고 第二骨에게는 장가들지 않는다[王族第一骨 妻亦 其族 生子皆爲第一骨 不娶第二骨]』라는 記事를 미루어 보면 葛文王은 聖骨에 限한 稱號였음을 推察할 수가 있는 것이다38) 하여, 葛文王은 新羅時代 朴․昔․金 三姓 以外의 姓氏에 붙여진 事例가 全無하며, 따라서 葛文王은 聖骨인 朴․昔․金 三姓의 專有物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 李基白은 「新羅時代의 葛文王」에서, “結局 葛文王이 된 것이 王의 父, 王母의 父, 王妃의 父, 王의 同母弟, 女王의 配 匹이라는 것으로 整理되게 되었다39) 하여, 葛文王이 왕의 最近親이었음을 再確認하게 되었다. 그리고 金龍善은 「蔚州 川前里書石 銘文의 硏究」에서, “家臣的 集團을 거느린 葛文王도 王에 準하는 地位와 權力을 所有하여 어쩌면 신라 中古時代의 王權에도 影響力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存在라는 것 等을 알게 되었다40) 하여, 葛文王은 王에 準하는 地位와 權力을 所有하여 王權에도 상당한 影響力을 行事한 것을 示唆하고 있다. 以上 네 분의 硏究 結果를 綜合하면 新羅時代의 葛文王은 모두 朴․昔․金 三姓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고 아울러 그들만이 享有했으며 王權에도 相當한 影響力을 행사한 存在라는 結論을 얻게 된다. 따라서 善德女王의 配匹인 飮葛文王의 姓氏는 朴․昔․金에서 벗어날 수 없고, 《新唐書》 新羅傳의 내용을 代入하면 第一骨의 女子도 第二骨의 男子에게 下嫁할 리가 萬無하다는 論理가 成立되며, 또한 王權强化의 次元에서 族內婚 특히 近親婚이 盛行했던 當時 新羅王室의 狀況을 勘案41) 4. 飮葛文王 仁平問題 「仁平」이 善德女王의 年號라는 것은 一般的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仁平을 人名인 金仁平으로 보는 見解도 있다는 사실을 看過할 수 없으며 筆者도 人名으로 보는 見解를 肯定的으로 受容하는 立場이다. 그 理由를 든다면 三國遺事의 王曆을 通해서 新羅에서 年號를 使用한 王은 23대 法興王에서 28대 眞德女王까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여섯 王의 記事를 쓰는 가운데 年號를 쓴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惟獨 善德女王 記事의 이 部分에만 年號를 썼다는 것은 著者의 記述衡平에 어긋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注目해야 할 것은 善德女王의 卽位年은 壬辰年 (632)이고 仁平이라고 改元한 것은 甲午年(634)이라고 判明되어 있는데, 仁平 甲午年에 卽位했다고 하는 것은 納得이 되지 않는 事案으로 偶然한 錯誤라고만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러한 點들이 人名으로 볼 수 있는 端緖라고 하겠다. 그리고 또 鶴軒公 曺錫中이 三從叔인 監察公 曺晦振에게 보낸 書簡文에서, “일찍이 東史를 보니 간혹 葛文王 金仁平을 善德女王의 夫公이라고 일컬은 데가 있었습니다42) 하였으며, 崔南善이 編修한 ≪東京雜記≫에, “善德女王의 夫君은 葛文王 金仁平이며, 眞德女王의 夫君은 葛文王 金基安이다. 그리고 武烈王의 어머니는 바로 善德女王의 동생 天明夫人이다. 邑에 있는 世譜에 記錄된 것이 이와 같지만 다른 史記에는 모두 傳해지지 않으므로 이 사실을 卷外에 다 적어 傳疑43)하는 法을 模倣한다44) 하였고, 金鎔濟의 ≪慶州邑誌≫에, “《三國遺事》에 「唐帝가」三色의 꽃씨를 보낸 것은 대체로 新羅에 세 사람의 女王이 있을 것임을 알고서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唐帝에게 뛰어난 明哲함이 있 다는 사실은 良志師傳에 갖추어 記載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간혹 善德女王의 남편은 葛文王 金仁平이고, 眞德女王의 남편은 葛文王 金基安이라고 한다45) 하였다. 위와 같이 善德女王의 남편을 葛文王 金仁平이라고 記錄한 文獻이 있다는 사실에 注意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朝鮮後期에 刊行된 慶州金氏 ․ 金寧金氏 ․ 益和金氏 등 諸金氏의 族譜46) “선덕여왕의 남편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단서로 ‘음(飮)’ 이라는 한자를 들 수 있다. 그런데 한자의 음(飮)자는 반(飯)자와 아주 비슷하다. 따라서 목판을 찍어낼 때나 필사할 때 틀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때 ‘반’ 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이름 을 가진 사람이 선덕여왕의 남편 음갈문왕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당시 진평왕의 동생, 그러니까 선덕여왕의 삼촌 가운데 백반과 국반이 있었다. 따라 서 백반 아니면 국반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면 이 두 사람 가 운데 어느 쪽이 선덕여왕의 남편이었을까 하는 점이 남는다. 기록에 의하면 삼촌인 국반(진안갈문왕)은 선덕여왕의 뒤를 잇는 진덕여왕의 아버지이고 따라서 선덕여왕 과 진덕여왕은 사촌 간이다. 당연히 국반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반이 아니 라면 백반만이 남는다. 그런데 백반이 남편이라면 선덕여왕은 아버지의 동생인 삼 촌과 결혼한 것이다.” 고 하여, 飮葛文王은 善德女王의 삼촌 伯飯이라는 說을 提起하였다. 이 밖에도 ‘飮’을 ‘飯’으로 解釋하는 學者가 몇 분이 더 있다는 事實도 考慮해야 한다. 5. 知幾三事 ≪三國遺事≫에 記載되어 있는 善德王知幾三事를 要約하면, 첫째는 唐太宗이 보낸 花圖를 보고 그 꽃에 香氣가 없을 것임을 알았고, 둘째는 겨울에 개구리가 모여서 우는 것을 보고 이웃 나라의 軍士가 侵入한 것을 알았으며, 셋째는 自身이 죽을 날짜를 안 것이다. 이러한 一連의 事件들은 女王으로서의 懦弱한 印象을 拂拭시키고 女王에게도 聖智가 있음을 보여 줌으로서 王權强化의 效果를 노린 背景에서 出現된 說話라고 보여진다47) “이것은 唐太宗이 寡人에게 配匹이 없음을 戱弄한 것이다48) 하였는데, 金鉉龍은 “이러한 記述로 보아 善德女王이 임금 자리에 오른 뒤의 일로 確實하게 해놓은 셈이다49) 하여, 善德女王 卽位後의 일이라고 보는 筆者의 見解와 같다고 하겠다. 그리고 여기서 配匹이 없다는 原因을 첫째 婚姻을 하지 않은 處女인 狀態와, 둘째 婚姻한 뒤 男便이 죽어 寡婦로 있는 狀態의 두 가지 類型으로 區分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展開되는 개구리가 모여서 울어댄 事件을 分析하면 男女間의 交媾原理를 極大化한 것으로 즉 男根이 女根에 들어가면 반드시 敗하게 된다는 論理를 펴고 있다. 그러나 男根이 女根에 들어가면 반드시 敗한다는 理論은 바로 體驗을 通해서만이 攄得이 可能하며 處女로서는 理解가 不可能하다고 본다. 이런 論理를 群臣들 앞에서 거침없이 펼 수 있었다는 점을 推理해보면 配匹이 없는 類型에서의 둘째 번에 該當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檢討 結果를 王曆篇의「善德女王의 配匹은 飮葛文王 仁平이다.」는 記錄과 聯關을 지을 수 있으며, 善德女王이 卽位하기 전에 飮葛文王 金仁平이 죽었으므로 없게 된 것이라는 推測을 可能하게하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善德女王이 自身의 죽을 날짜를 알려 주면서 忉利天中에 묻으라고 하므로 王이 죽자 그곳에서 葬事지냈다고 적고 있다. 慶州市誌를 보면, “善德王陵下의 慶州蔚山線 國道邊 에 四天王寺址가 있으며 陵域內에 飮墓라고 불 리우는 古墳이 있는데 이 무덤이 飮葛文王의 무덤이라고 傳한다50) 고 記錄하고 있다. 善德王知幾三事의 分析과 慶州市誌의 記錄을 綜合하면 善德女王이 結婚하여 王이 되기 前에 남편과 死別했을 것이라고 본다. 6. 善德女王 가. 女王의 來歷 (花郞世紀分析) 《花郞世紀》는 新羅時代의 學者 金大問이 지은 新羅 歷代花郞의 世系를 傳記體로 記述한 冊이다. 이 책이 筆寫本으로 傳해지다가 1989년에 公開되었는데, 公開와 同時에 그것이 眞本이다 僞作이다 하는 뜨거운 論爭이 繼續되었다. 그러나 最近에는 이 책이 原本을 筆寫한 책일 것이라는 肯定的 評價를 내리는 쪽으로 大勢가 기울고 있는 實情이다. 이 책 가운데 13世 花郞이었던 龍春에 대한 記事가 실려 있으며 善德公主와의 관계가 詳細하게 記載되어 있는데 다른 史料에서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을 發見하게 된다. 13世 龍春에 대한 記錄은 다음과 같다. 龍春은 金輪王[진지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智道太后이니 龍樹 葛文王의 동생이다. 金輪王이 酒色에 빠져 淫亂함으로써 廢位되어 幽宮에 있은 지 3년 만에 別世했을 때 公은 아직 어려서 그 얼굴을 記憶하지 못하였다. 智道太后가 太上太后의 命令으로써 다시 새 임금[眞平王]을 모시게 되자, 公은 새 임금을 아버지라 부르니 이 때문에 王이 불쌍히 여겨 사랑과 待遇가 特別하였다. 長成함에 이르러 奮發하여 文弩의 門下에 들어가 秘寶郞을 섬기면서 兄으로 삼았고 庶弟 鼻荊郞과 함께 郎徒들에게 喜捨하기를 힘쓰니 이런 까닭으로 大衆들이 붙따라서 三派가 모두 推戴하기를 願하였다. 이 때문에 舒玄郞이 風月主 자리를 讓步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13세 風月主가 되고 虎林公을 補佐로 삼았다. 公은 곧 郎徒들의 묵은 風習을 革新하여 한결같이 人物을 拔擢하고 骨品에 拘碍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骨品이란 것은 王의 地位와 臣下의 地位의 區別이니 郎徒를 어찌 骨品으로 쓰 겠는가? 功績이 있는 사람에게 賞을 주는 것은 떳떳한 法인데 어찌 派를 따지겠는 가?” 하니, 무리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文弩 때의 다스림이 다시 밝아질 수 있으리라.” 하였다. 이때 大王이 嫡子가 없어 公의 兄 龍樹殿君을 사위로 삼아 王位를 傳하고자 하므로 龍樹殿君이 公에게 물으니 公이 말하기를, “大王의 春秋가 아직 旺盛한데 혹시 後嗣를 둔다면 아마 不幸해질 것입니다.” 하여, 龍樹殿君이 辭讓하였으나 摩耶皇后가 들어주지 않고 마침내 龍樹殿君을 사위로 삼았는데 바로 天明公主의 남편이다. 公은 이 때문에 더욱 朝廷에 重히 쓰이어 風月主 자리는 虎林公에게 讓步하고 宮中에 들어가 要職을 맡게 되었는데, 이런 緣由로 郎徒들로서 登用되는 사람이 더욱 많았다. 善德公主가 점차 長成하며 龍鳳같은 資質과 天日같은 儀表가 王位를 이을 만하여 大王이 뜻을 두었고 天明公主도 孝誠과 順從으로 讓步하니 大王이 곧 公에게 命하여 善德公主를 모시게 하였다. 公이 굳이 辭讓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 모시다가 아들을 두지 못하여 물러나기를 請하니, 大王이 곧 龍樹殿君에게 命하여 모시게 하였지만 역시 後嗣가 없었다. 公은 高句麗에 出征하여 큰 功을 세워 角干으로 昇進되었다. 龍樹殿君이 臨終 때 夫人과 아들을 公에게 付託하였는데, 아들이 곧 우리 太宗大王이다. 公主가 卽位하여 公을 남편으로 삼았으나 公이 後嗣를 얻지 못함으로써 스스로 물러나니, 여러 臣下들이 세 번 남편을 맞는 制度를 議論하였다. 公이 곧 天明公主를 아내로 삼고 太宗을 아들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公은 王命으로 昊明宮에 居處하면서 다섯 딸을 낳았으나 다른 嫡子가 없었으므로 太宗을 아들로 삼았던 것이다. 庶子 5명과 庶女 18명이 모두 貴하게 되어 世上에 드러났고, 太宗이 卽位함에 이르러 葛文王으로 追尊되었으니 참으로 盛大한 일이다. 聖스러운 德이 하늘과 같고 땅과도 같다. 贊을 짓노니, “葛文王의 德은 日月과 함께 밝았도다. 우리나라 業績이 이를 힘입어 크게 이 루어졌더라51) 하였다. 위의 內容을 살펴보면 당시 新羅王室에서의 王權强化를 위한 手段으로 族內婚 특히 近親婚이 極度로 盛行하고 있었음을 感知할 수 있다. 더구나 이 記事를 通하여 嫂婚制까지 이루어진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龍樹와 龍春은 兄弟 사이이며 善德公主 ․ 天明公主와 龍春과는 從叔姪 사이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新羅王室 특히 金姓系列의 亂婚에 관한 疏明 資料가 이와 같이 또렷이 存在하고 있었음을 勘案할 때 앞서 葛文王問題에서 言及한 善德女王의 配匹은 朴․昔․金 三姓中의 金氏였을 것이라고 斷定한 것을 뒷받침하는 資料이다. 그리고 昌寧曺氏始祖가 善德女王의 配匹이라고 直接 間接으로 主張하는 見解들이 說得力을 喪失함은 勿論 昌寧曺氏始祖와는 無關한 사이임을 立證하는 매우 緊要한 資料가 된다. 나. 女王에 對한 評價 高麗의 金富軾(1075~1151)은 《三國史記》에서 論評하기를, “論하건대 내가 듣기에는 옛날 女媧氏가 있었으나 이는 바로 天子가 아니고 伏羲 氏를 도와 九州를 다스렸을 따름이고, 呂雉․無曌와 같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幼弱 한 임금을 맞아 朝廷에 臨하여 政事를 統制한다 말하였으나 공공연하게 王이라 稱 하지는 아니하였고 다만 高皇后呂氏니, 則天皇后武氏니 하고 記錄한 것인데, 이를 天理로써 말하면 곧 陽은 剛하고 陰은 柔하며, 사람으로 말하면 곧 男子는 높고 女 子는 낮은 것이니, 어찌 姥嫗로서 閨房을 나와서 國家의 政事를 決斷할 수 있으랴? 新羅에서는 女子를 모셔다가 王位에 있게 하였으니, 이를 살펴보면 이는 정말로 亂 世의 일이며 나라가 亡하지 않은 것이 多幸이다. ≪書經≫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 벽을 알린다.’ 하고, ≪易經≫에 이르기를, ‘야윈 도야지가 깡충거리며 뛰논다.’ 하였 으니, 그것을 警戒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52)?“ 하였다. 儒敎的인 陰陽論을 바탕으로 女王의 卽位와 統治를 正面으로 徹底히 非難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陽村 權近(1352~1409)은 ≪陽村集≫에서 論評하기를, “天道란 陽은 굳세고 陰은 부드러우며 人道는 男子가 높고 女子는 낮다. 男子는 밖에서 位를 바르게 하고 女子는 안에서 位을 바르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天地의 永久不變한 도[常經]이다. 임금이 뒤를 이을 사람이 없으면 마땅히 宗室의 어진 이 를 찾아서 世子를 定하는 것이 古今의 通義인데 眞平王이 아들이 없게 되자 그 딸 을 세우려 하매 群臣들은 大義로써 宗室의 어진 이를 擇하여 세우지 못하고 곧 先 君의 奸邪한 뜻을 엿보아 그 딸을 세웠으니 法度를 어지럽힘이 甚하였다. 진실로 밝은 天子가 위에 있으면 마땅히 그 名分을 바르게 하여 使臣을 보내어 책망하고 어진 임금을 擇하여 세우도록 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요, 만약 먼 나라에서 中國과 같이 하기가 어려웠다면 그대로 버려두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唐太 宗의 英明함으로도 이와 같이 하지 못하고, 곧 使臣을 보내어 命을 내려 여자를 冊 封하여 樂浪郡公新羅王으로 삼았었다. 대저 公과 王은 모두 나라의 主人이요 백성 의 임금이란 稱號이거늘 僭濫되게 陰柔한 몸에 더해 주었으니 이것은 尊卑의 分別 과 綱常의 莫重함을 唐太宗 스스로 털어버린 것이다. 얼마 안가서 드디어 武氏가 僭竊하는 災禍가 일어난 것은 실로 唐太宗의 이 일로부터 發端된 것이다53) 하였다. 典型的인 性理學者로서의 眞面目을 돋보이게 하는 强度 높은 銳利한 비판은 性理學의 根源이 되는 ≪易經≫의 陰陽과 天尊地卑의 論理에 입각한 評論임을 알 수 있으며, 麗末鮮初를 風靡한 大學者로서의 이와 같은 非難은 朝鮮朝의 여러 學者들에게 상당한 影響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朝鮮朝 佔畢齋 金宗直(1431~1492)은 그의 瞻星臺詩에서 新羅 眞平王이 長女 善德女王에게 王位를 물려준 데 대해서 酷評하기를, “반월성 주위에 산안개가 걷히니 半月城邊嵐霧開 우뚝한 석탑이 오는 사람 맞이하네 亭亭石塔迎人來 신라의 옛 유물은 산만이 있다 여겼더니 新羅舊物山獨在 뜻밖에 또 첨성대가 있구려 不意更有瞻星臺 선기옥형으로 칠정을 정리한 것은 순임금 우임금의 일이나 璣衡齊政舜禹事 제작하는 근거 없으니 어디다 쓸까 制作無稽安用哉 왕위를 감히 여자에게 넘겨주었으니 敢將神器付晨牝 진평왕은 천고에 재앙의 근원이 되었네 千古眞平爲禍胎.“ 하였으며, 또 그의 「過玉門谷 一名女根山 事在三國史」詩에서, “얕은 골짜기에 어찌 적병이 잠복할 수 있었으랴 淺谷何能伏敵兵 옥문곡이란 두고두고 부질없는 이름이 되었네 玉門千載謾爲名 주민들 <선덕여왕> 지기삼사 다투어 이야기하므로 居民爭說知幾事 공연히 장수들이 길 피해서 돌아가도록 하네 空使元戎枉道行.“ (百濟의 主將이 <이곳에서> 죽었다고 하여 後代에 將帥들이 作戰任務를 遂行 하면서 모두 꺼려하여 이 길을 경유하지 않았다고 함) 하였는데,「瞻星臺」詩에서 善德에서 비롯된 女王의 承繼가 眞德으로 이어지고 마 침내는 眞聖으로 이어짐으로서 政治와 紀綱이 紊亂해져 신라가 滅亡했음을 指摘하 고, 이러한 結果를 招來한 것은 眞平王이 그의 딸인 善德에게 王位를 물려 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였으며,「過玉門谷」詩에서는 善德王知幾三事가 별것이 아닌 虛構임 을 玉門谷을 지나면서 實感하고 있음을 읊고 있다. 그리고 梅月堂 金時習(1435~ 1493)은「善德王陵」 詩에서, “그대는 모르는가? 君不見 여씨가 한실을 능멸하던 때에 呂氏憑陵漢室時 한나라가 몹시 위태로웠던 것을 漢室岌岌嗟將危 또한 모르는가? 又不見 무씨가 당실에서 행악하자 武氏鴟張唐帝家 당나라 왕업이 마침내 어지러웠던 일을 唐室功業終紛拏 예로부터 명철한 아낙이 성을 무너뜨리고 由來哲婦必傾城 아낙이 말 잘하면 화단을 일으킨다네 婦有長舌厲非輕 신라 여주 선덕이라 이름하였지만 新羅女王名善德 좋은 정치 소문 없고 사특만 좋아했네 治則莫聞崇怪慝 일생의 호사로는 그를 당할 이 없으며 一生好事無與比 불교의 신기한 일 몹시도 좋아하여 大喜浮屠神異事 죽을 때도 마음 못 고쳐 도솔천에 묻혔으니 死猶不悛瘞兜率 낭산 남쪽이 넋 깃든 곳이라네 狼山之南神所室 이 버릇이 신라를 저절로 망하게 하였으니 脣齒新羅自滅亡 부처에게 지나치게 미혹되었기 때문이라네 只緣侫佛爲濫觴 이제껏 들판에 무덤이 남아 있어 而今原野有培塿 가시덤불에 싸여 여우 토끼 뛰어 다닌다네 萑葦叢中狐兎走 일평생 좋은 일도 이름만 남길 뿐인데 百年後事但留名 오명이나 방명 남김도 남들이 평가하는 것이네 遺臭遺芳人所評 공업만 이루어도 일생이 만족하니 但得功業一生足 섶에 싸여 들에 버려져도 나쁠 것은 없다네 衣薪棄野亦不惡.“ 하였는데, 이 詩에서 梅月堂은 漢나라의 呂后와 唐나라의 則天武后가 權力을 휘두 르며 나라를 어지럽혔던 故事를 引用하여 新羅의 善德女王은 이름만 좋았지 佛敎에 迷惑되어 汚名을 남겼다고 酷評하고 있다. 그리고 休翁 沈光世(1577~1624)는 海東樂 府에서, “한 女人의 작은 智慧가 마침 後日의 禍의 소지가 되었다.……백성들이 또 從妹 인 勝曼을 세우니 眞德女主이다. 그 후 백성들이 故事를 따라 또 眞聖女主를 세우 니 淫亂한 것으로 政治를 잘못하여 끝내 나라를 亡하게 하였다.”54) 하고, 이어서, “개구리가 노하여 울면 반드시 적이 있고 蛙怒鳴必有敵 꽃에 나비가 없으면 서로 농락하는 것이고 花無蝶相調謔 죽음은 미리 알 수 있는 것이지만 死固有預知 세 가지 합치되기 어려운 것인데 꼭 맞았으니 難合三如期 신라에서 여자가 대신 나라를 다스렸네 新羅代女治國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것인데 牝鷄晨家之索 대의에 어두워 보잘것없는 지혜를 귀하게 여겼도다 昧大義貴小慧 선덕이 죽자 진덕이 계승하였으니 善德沒眞德繼 상례에 얽매여 지각이 없었네 狃故常罔知覺 그러다가 진성여왕이 所以眞聖主 마침내 국가의 맥을 끓고 말았도다 終焉椓國脈.“ 하였는데, 여기서는 善德女王의 知幾三事를 하찮은 智慧로 보고 女王의 卽位가 先 例가 되어 결국 新羅를 亡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崧岳 林昌澤(1682~1723)은「牧丹圖」詩에서, “제녀 여와씨가 보석을 불린 것도 帝女鍊寶石 군자가 오히려 비난하였지 君子猶有譏 주공은 성왕을 보필하였고 周公負孺子 강모는 발을 드리우지 않았었네 姜母簾不垂 제나라 궁실의 백옥환도 齊宮白玉環 전국시대에 부서졌는데 擊碎戰國時 모란도를 보고 안 것을 그대는 성신하다 말게나 牧丹圖君莫稱聖神 암탉은 본래 새벽에 울지 않는 것이네 牝鷄本無晨.“ 하면서, 知幾三事中 牧丹에 대한 일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보고 신랄하게 非難하 는 내용이다. 그리고 順蓭 安鼎福은 ≪東史綱目≫에서, “살펴보건대, 眞平王이 薨하매 아들이 없었다. 이 때 王室 至親으로는 金春秋 父子가 있었고, 宗戚大臣으로 閼川의 무리가 있었는데 勳望이 모두 뛰어나서 나 라 사람들의 信服한 바 되었으니, 新羅의 여러 臣下들은 이때에 어진 이를 擇하 여 그를 세웠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先君의 사특한 뜻을 따라 그 딸을 세움으로써 陰陽의 理致를 背反하고 男女의 分義를 바꾸었으니 그 常道를 거스른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이러므로 人心이 服從하지 않으며, 毘曇 等이 그것을 틈타 亂을 일으킨 것이 異常하게 여길 것이 못된다. 當時의 事情이 歷史에 자세 하지 못하나 어찌 大臣中에 權勢를 탐내는 자가 있어서 國政을 마음대로 弄奸하 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오랑캐의 風俗이 잡되고 어지러워서 그 러한 것이 아닌가? 만약 名位가 이미 定해져서 廢立하기 어려웠다면 善德이 薨逝 하였을 때에 마땅히 宗室의 어진 이를 세웠어야 하는데 그릇된 잘못을 그대로 이 어 받아 또다시 眞德을 세워, 마치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을 떳떳한 道理인양 金 庾信 같은 무리도 一代의 人物로 呼稱을 받으면서 머리를 숙이고 귀를 기울여 女 主를 섬기되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무엇 때문이었을까?55)” 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眞平王이 善德에게 王位를 물려주려고 한 態度에서부터 金 庾信 같은 人物이 女王에게 굽실거리며 섬긴 態度에 이르기까지 具體的으로 非難을 加하고 있다. 그리고 洛下 李學逵(1770~?)는 ≪海東樂府≫에서, “세 가지 안 일이 일에 무슨 도움이 되랴 三事知於事竟何裨 모란에 나비가 없는 것으로 맞힌 것은 牧丹之無蝶 쥐똥을 넣은 간교한 속임을 발각한 것이고 鼠矢發姦欺 연못 속의 개구리가 눈 부릅뜬 것을 듣고 안 것은 池鼃之怒目 조객이 사냥 나가는 시기를 말한 것과 같다 趙客言獵期 또 죽을 때를 예고한 것은 死期之豫告 억측으로 자주 맞히는 것이다 臆測屢中之 아아! 한 가지 깨닫지 못한 일은 嗚呼一事有未覺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것이네 牝鷄之晨家之索.“ 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앞의 沈光世보다 더 具體的으로 中國의 故事를 引用하여 그 理由를 밝혔다고 하겠다. ≪海東樂府≫에서 「知幾三事」에 대한 記錄에서 제 1事에 대해서는 孫亮의 故事에 比肩하고, 제 2事에 대해서는 趙客의 故事에 比肩하여 「三 事」에 관한 問題를 별것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梅溪公 曺偉는「靈妙 寺」 詩와 「武烈王陵」詩에서 强度 높은 非難을 가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靈 妙寺」詩에서는, “사방의 벽에는 붉고 푸른 무늬인데 四壁絢靑紅 사람과 하늘의 뭇 형상을 그렸으며 人天繪象像 구슬로 꾸민 깃발과 일산에는 珠幢與寶蓋 어지러이 먼지가 끼었도다 漫漶集坌坱 그 가운데를 잠깐 엿보니 我暫窺其中 만든 구조 내려다보나 쳐다보매 혼란스러워 結構迷俯仰 인력으로 된 것 아니라고 여기고 謂非人力施 감탄하며 지난날을 상상하였도다 感歎起遐想 옛날 선덕왕은 암탉이 새벽에 운격인데 善德昔司晨 부처 섬기기에 너무 지나쳐 事佛過崇獎 절 짓는 재목 한 개에 백금을 허비하고 一木費百金 주춧돌 하나에도 만 꿰미의 돈을 버렸네 一礎捐萬鏹 경영한 일 겨우 이것뿐이고 經營乃止此 국고 모두 탕진함은 염려하지 않았었네 不恤傾帑藏 부처의 힘을 빌어다가 欲借迦維力 한 세상에 널리 펼치려 하였지만 普沾世界廣 원망하는 소리 어찌 없었으랴 豈無怨嗟聲 복리가 마침내 흐리멍덩해졌네 福利竟䁳矘.“ 하였고, 또「武烈王陵」詩에서는, “빗돌을 만지며 비문을 읽어 보았지만 摩挲讀碑文 귀퉁이가 떨어져나가 사실을 알기 어렵네 缺落難實究 아득한 세월을 지내면서 茫茫歲月荒 내버려진 채 수호하는 사람 없었네 委棄無人守 옛날 여자가 남자처럼 왕 노릇 한 것 생각하면 憶昔陰爲陽 선덕과 진덕은 진정한 임금이 아니었네 二曼非眞后 강한 이웃나라 함부로 번갈아 침략하여 强隣肆侵軼 사방의 국경에는 전투가 잦았었네 四境多兵鬪 무열왕이 왕통을 계승하여 惟王入繼統 뛰어나게 공덕이 융성하였네 卓焉功德茂 믿음직한 중신 김유신에게 위임했으니 爪牙委庾信 무략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었네 武略殆天授.“ 하였다. 梅溪의 이와 같은 積極的인 批判은 앞서 여러 學者들의 善德女王에 대한 否定的인 視覺과는 根本的으로 性格이 다르다는 것을 于先 밝히고자 한다. 그것은 梅溪가 太師公 曺繼龍의 後孫이라는 特殊關係 때문이다. 後孫의 立場에서 이렇게 徹底히 善德女王의 失政과 女王이 된 自體를 否定하는 내용인「眞正한 임금이 아니다〔非眞后〕」고까지 하면서, 酷評을 加할 수 있었던 것은 善德女王이 昌寧曺氏始祖와는 아무런 關聯이 없어야 可能하다는 結論을 導出하기에 充分하다. 7. 丁仲煥 論文의 虛實 丁仲煥이 東亞論叢에「毗曇 ․ 廉宗亂의 原因考」 ―新羅政治社會의 轉換期에 관한 一試考― 56) 첫째, 昌寧曺氏始祖 出生地에 대하여 그는 論文에서, “昌寧曺氏의 世譜에 의하면 曺氏의 始祖는 이름을 繼龍이라 하고 眞平王代에 新羅王都 慶州에서 出生하였다.” 하였다. 그러나 昌寧曺氏의 여러 諸族譜中 始祖와 關聯된 記錄에는 始祖의 出生地에 대한 言及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前述한 昌寧曺氏 族譜編을 參考하면 쉽게 確認할 수 있다. 그리고 《西州集》 卷之八 昌寧曺氏始祖遺事에, “學士가 昌寧縣 皷巖村에 살았다57) 고 記錄하고 있다. 여기서의 學士는 俗傳에 記錄된 曺氏始祖의 外祖父인 翰林學士 李光玉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記錄의 根據는 把握할 수 없지만 昌寧曺氏始祖의 出生과 得姓 그리고 貫鄕 등을 參考하면 이 記錄이 사실과 近接한 것으로 推定되기는 하지만 이것 또한 後代의 記錄이라는 점을 勘案할 때 速斷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狀況에서 昌寧曺氏始祖의 出生地가 新羅王都 慶州라고 任意로 記述한 것은 關係資料에 대한 檢討가 未洽했음을 반영하는 端緖이다. 둘째, 昌寧曺氏始祖의 出生 經緯를 說明하면서 註釋으로 陽村 權近 謹製로 全南靈岩居曺永晧氏所藏에 系한 原文中이라고 引用한 점이다. 그의 論文에, “光玉이 이 일을 眞平王에게 아뢰었다. 眞平王이 아이를 보니 그 狀貌가 異常 하고 脇下에 曺國이라 한 것 같은 文字무늬가 있으므로 姓名을 賜하고 자라매 公 主로써 配를 삼았다.” 하고, 註釋으로, “(6)陽村權近謹製로 全南 靈巖居曺永晧氏 所藏에 係한 原文中에는「脇下有 龍曺字 仍姓曺 名繼龍」이라 하였고 耳溪 洪良浩(英正代의 大學者)撰의 ”昌寧曺 氏始祖新羅太師駙馬都尉昌城府院君墓壇碑銘幷序“에서는「脇下有文 如曺國」 賜之 姓名 ‥‥」이라 하였다. ”國“字는 혹은 字의 泐字가 아닌가 한다.” 하였다. 陽村 權近謹製……原文中이라는 資料를 提示한 데 대하여 그것이 資料로서의 전혀 價値가 없음을 旣提示資料의 全文을 紹介하고 檢討 分析하려고 한다. 그 全文을 보면 한 장의 白紙에다「曺氏事蹟」이라는 題目下에 昌寧曺氏始祖 曺繼龍과 曺自奇, 曺益淸 세 분의 事蹟을 漢文文章으로 敍述하고 末尾에 「陽村權近製」라고 筆寫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問題는 末尾에 적힌 陽村 權近製라는 題字表示를 보고 이 세 部分으로 構成된 原文 內容의 全體를 陽村의 著述이라고 誤認한데서 資料로 採擇이 된 것에 根本的인 原因이 있다고 본다. [參考資料 別添 P32~1] 于先 이 原文을 調査해보면 네 글자의 誤字가 있음을 指摘할 수 있는데, 列擧하면 太師 昌城府院君 曺繼龍의 事蹟 둘째 行의 22字째인「龍」字는 쓰지 않아야 할 글자를 잘못 쓴 것으로, 점을 찍어 삭제해야할 것임을 표시하였고, 또 同一事蹟의 다섯째 行 여섯째 字인 「瘦」字는 「庾」字를 잘못 쓴 것이고, 다음은 左政丞 夏城府院君 諱 益淸의 事蹟 일곱째 行 13째 字인「特」字는「恃」字를 잘못 쓴 것임을 알 수 있는 바, 이러한 些少한 問題를 가지고도 筆寫者의 識見程度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提示된 資料가 分明히 陽村 權近의 著述이 아님을 判斷하는 根據는, 첫 번째 陽村 權近이 지었다고 證明할 만한 客觀的인 資料가 어디에도 없다는 점. 두 번째 陽村이 「曺氏事蹟」을 써야할 何等의 뚜렷한 理由가 없다는 점이며, 특히 「曺氏事蹟」에 明示된 「太師 昌城府院君 曺繼龍」의 「太師 昌城府院君」과 「門下侍郞平章事 諱 自奇」의 「門下侍郞平章事」라는 두 분의 職銜은 오직 昌寧曺氏族譜에만 記載된 主觀的인 內容인데, 一國의 大學者인 陽村이 客觀的인 證憑資料도 없이 쓴다는 것은 不可能하다는 점. 세 번째 文章構成自體가 子孫이 祖上의 事蹟을 記述하는 套로 一貫되어 있다는 점. 네 번째 門下侍郞平章事 諱 自奇의 事蹟을 記述하면서 引用된 文獻인 兵要․大東韻․輿地勝覽 ․ 東國史 等은 陽村이 卒한 뒤 50~70年 뒤에 刊行된 書籍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陽村 權近製라는 題者表示는 바로 曺益淸의 事蹟 8行 下段의『敎書曰 夏城府院君曺益淸 立志純誠 持身謹愼 力扶十年之潛德 式至今休 位副萬民之具瞻 恪遵前憲 赫赫邦家之碩輔 堂堂社稷之重臣 永誓著於丹書 豊烈褒於靑史』라고 한 句節 때문이다. 이 글은 高麗 32代 禑王이 卽位한 이듬해인 丙辰年(1376)에 敬孝大王(恭愍王)을 祔廟하고 다섯 분의 功臣을 配享하는 敎書中 夏城府院君 曺益淸에 關係되는 一部分이다. 陽村이 當時 知製敎로서 이 敎書를 王을 代身하여 製述했던 것으로 陽村 權近製라는 題者表記는 이 部分에만 該當되는 것이다. 그 以上의 글은 一般 敍述文이고 敎書가 아니므로 製라고 表記할 수 없는 글이다. 이러한 問題點들이 的示되어 있는데도 綿密한 檢討를 하지 않고 마치 陽村이 撰述한 것으로 誤認하고 資料로 採擇하였으므로 전혀 信憑性이 없다는 것이다. 셋째. 飮葛文王을 昌寧曺氏始祖와 聯關지은 것이다. 그의 論文에,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만 「王之匹 飮葛文王 仁平 甲午立 治十四年」이라고 하 여 配匹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飮葛文王이 곧 曺氏始祖라고 한다.” 하였다. 앞서 葛文王에 대한 硏究로 新羅의 葛文王은 朴․昔․金 三姓 外 餘他 姓氏에서는 占有할 수 없는 地位이다. 더더욱 昌寧曺氏始祖가 飮葛文王이라는 確實한 證據는 아무데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資料로 提示된 陽村 權近謹製의 曺氏事蹟은 敎書 부분을 除外한 나머지는 陽村 權近의 著述이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細密하게 分析한 바 있다. 8. 綜合 昌寧曺氏族譜에는 「眞平王女婿」라고만 記錄되어 있고, 몇째 사위라는 記錄은 아무데도 없으며 이것이 自然스런 定論이었다. 18세기 後半에 西州公이 始祖 配位에 대한 새로운 事實을 《西州集》에 실었고, 鶴軒公은 그 記錄을 《昌寧曺氏知先錄》에다 字句의 修正을 거쳐 그대로 移載하였다. 하지만 그 記錄이 確實한 根據에 依한 疏明資料가 全無하였기 때문에 그 以後에 이어지는 丁亥譜의 發刊과 始祖墓壇碑文撰述 그리고 火旺山龍池曺氏靈蹟碑文 作成에 그 內容이 전혀 反影되지 않았다는 점을 考慮하면 당시 記錄한 분의 主觀的인 見解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葛文王은 新羅時代 朴 ․ 昔 ․ 金 三姓의 專有物이기에 昌寧曺氏始祖가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과, 仁平은 善德女王의 年號이기도 하지만 人名으로도 쓰인 事例가 있다는 점을 認識해야 하고, 《花郞世紀》에서는 當時 新羅王室의 王權强化 手段으로 族內婚의 盛行을 낱낱이 證明하고 있으며 아울러 善德女王의 남편은 飮葛文王인 金氏임이 判明되고 있다. 그리고 善德女王에 대한 評價에서 특히 梅溪公의 强度 높은 貶評은 俗傳으로 전해오던 始祖의 出生 및 得姓 사실을 처음으로 記錄한 張本人으로서의 積極的인 批判으로 評價되며 曺氏始祖와 無關한 사이임을 再確認시키는 資料라 하겠다. 그리고 丁仲煥이 論文을 쓰면서 資料로서의 何等의 價値가 없는 資料를 活用하였다면 그 부분은 虛構이며 그 虛構 부분에 대한 適切한 措處가 따라야 할 것이다. Ⅳ. 結論 以上에서 昌寧曺氏始祖와 始祖配位에 대하여 關係 文獻을 中心으로 全般的인 考察을 하였다. 이를 簡略히 要約한다. 昌寧曺氏始祖는 「新羅 眞平王의 女婿로 벼슬은 太師」라는 共通點을 確認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통점의 最初定立時期를 追跡해보면 朝鮮朝 初期였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眞平王女婿」라는 사실 以上의 더 具體的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言及이 없었고 또한 있을 수 없는 性格이었다고 본다. 구태여 그 理由를 든다면 첫째 立證할 만한 文獻的 根據가 없다는 文獻의 限界性을 들 수 있고, 둘째 그 이상의 것을 追究해야 할 뚜렷한 目的이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昌寧曺氏始祖에 대해서는 이러한 共通點을 認識하는 線에서 朝鮮 前期를 거쳐 後期로 進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始祖配位에 대하여는 朝鮮後期에 접어들어 共通된 記錄과 相異한 기록이 出現하였다. 그것은 바로 ≪西州集≫의 遺事條 「肇世記異」에 記錄된 것을 《昌寧曺氏知先錄》에 移載한 「眞平王이 그의 長女를 配匹로 삼게 하였으니 바로 善德女王이다.」고 記錄한 부분이다. 從前과는 다르게 始祖의 配位가 그냥 公主가 아닌 長女로 摘示하여 記錄된 그 文獻上의 典據가 어디 있는지를 多角度로 檢證 ․ 檢討를 하였으나 昌寧曺氏始祖의 配位가 眞平王의 長女인 善德女王이라는 客觀的인 記錄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再確認하게 되었다. 다만 《西州集》의 遺事條 「肇世記異」에서의 出處를 漠然하게 舊譜라고만 적은 것으로 보아 子孫이 先代의 生前遺蹟을 記錄하는 遺事의 特性上 先系를 美化하고 優越示하려는 一念에서 그냥 公主가 아닌 長女 德曼으로 變改하였으리라는 推論을 可能하게 할 따름이다. 그 당시 新羅의 王室에서 王位承繼와 絶對的인 關係가 있는 善德女王의 남편으로서 갖추어야 할 與件을 旣硏究된 資料에 의하여 整理하면, 첫째는 聖骨身分이라야 한다는 점이며, 둘째는 葛文王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昌寧曺氏의 始祖는 이러한 必須的인 具備條件과는 거리가 멀고 더욱이 朴․昔․金氏가 아니기 때문에 葛文王이 될 수 없다. 따라서 王權强化를 위한 當時 族內婚 특히 徹底한 近親婚의 盛行事例로 보아 善德女王의 남편은 分明 金氏였을 것이라는 確信을 갖게 되고 그 사실은 ≪花郞世紀≫가 如實히 證明을 해주고 있다. 그리고 歷代 學者들의 善德女王에 대한 評價에서 梅溪公의 評價는 餘他 學者들과는 出身이 다른 立場임을 勘案할 때 善德女王이 昌寧曺氏始祖와는 無關함을 闡明하는 所重한 資料이다. 그리고 耳溪 洪良浩의 昌寧曺氏始祖墓壇碑文과 寧齋 李建昌의 昌寧縣火旺山龍池曺氏靈蹟碑文에서의 曺氏始祖에 대한 記述 역시 從來의 共通點 즉 「昌寧曺氏始祖는 新羅 眞平王의 女婿」라는 記錄이 正論임을 立證하는 빼놓을 수 없는 資料라고 본다. 따라서 昌寧曺氏始祖의 配位는 新羅 眞平王의 딸이지만 善德女王은 아닌 것으로 定論한다. 以上으로 昌寧曺氏始祖는 어떤 분이며 始祖配位가 누구인지를 究明하여 보았다. 이 硏究作業은 一千數百年을 거슬러 觀照해야 하는 時間的인 間隙에다 關聯文獻의 不足으로 資料引用이 完璧하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資料의 蒐集 ․ 發掘과 解釋의 客觀性 維持에 最善을 다하여 硏究하였음을 밝힌다. 參考文獻 1. 資料 《慶州市誌》, 慶州市, 1971, 《慶州邑誌》, 津津堂, 1923, 《高麗史》, 亞細亞文化社, 1983, 4, 《國朝人物考》, 서울大學校, 1978, 《大東韻府群玉》, 亞細亞文化社, 1975, 《東京雜記》, 朝鮮光文會, 1913, 《東國史》, 景仁文化社, 影印本, 1987, 《東國與地勝覽》, 民族文化推進會, 1971, 2, 《東史綱目》, 景仁文化社, 1970, 《三國史記》, 民族文化推進會, 1982, 9, 《三國遺事》, 民族文化推進會, 1977, 3, 《歷代兵要》, 奎章閣所藏本, 1461, 《典故大方》, 漢陽書院, 1927, 《增補文獻備考》, 明文堂, 1985, 《春秋穀梁傳》, 臺灣 藝文印書館印行, 權 近, 《陽村集》, 韓國文集叢刊, 7, 1976, 金大問, 《花郞世紀》, 圖書出版 民族文化, 1989, 金時習, 《梅月堂集》, 韓國文集叢刊, 13, 1989, 金宗直, 《佔畢齋集》, 韓國文集叢刊, 12, 1989, 沈光世, 《休翁集》, 筆寫本, 尹善道, 《孤山遺稿》, 韓國文集叢刊, 91 李學逵, 《洛下生集》, 韓國文集叢刊, 290, 2002, 林昌澤, 《崧岳集》, 1735, 曺德臣, 《遯庵集》, 1914, 曺凡煥, 《우리 역사의 여왕들》, 책세상, 2000, 7, 曺錫中, 《昌寧曺氏知先錄》, 曺善迪, 《恥齋集》, 1898, 曺 偉, 《梅溪集》, 韓國文集叢刊, 16, 1989, 曺夏望, 《西州集》, 1854, 曺采臣, 《一庵集》, 1911, 洪良浩, 《耳溪集》, 1843, 黃胤錫, 《頤齋遺藁》, 景仁文化社,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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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族譜 《慶州金氏璿源世譜》, 《慶州金氏世譜》, 《慶州金氏大同譜》, 《鷄林金氏璿源世譜》, 《金寧金氏大同譜》, 《益和金氏大同譜》, 《昌寧曺氏甲子譜》, 《昌寧曺氏庚辰譜》, 《昌寧曺氏癸酉譜》, 《昌寧曺氏南冥譜》, 《昌寧曺氏梅溪譜》, 《昌寧曺氏辛亥譜》, 《昌寧曺氏丁亥譜》,
4, 其他 《昌寧世乘》, 筆寫本, 《昌山家史》, 筆寫本, 조명근 . 學術委員 曺 命 根 (조명근 교수님과 통화후 이자료를 전국 카페에 배포하여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후에 카페에 게시를 합니다. 조석현) |
첫댓글 일가 분들께 좋은 자료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