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나이! 거저 살림만 잘하라우
한 솔 아
명절이 돌아오니까 이북 평양에 고향을 두고 이산의 아픔을 안고 외롭게 살다가신 어머니가 그립다.
어머니는 8.15 해방 때 연애한 아버지의 고향 청주로 시집을 오게 되었고, 6.25전쟁 이후 늘 북에 둔 형제에 대한 그리움이 깊었다.
"느이 이몬 볼때기래 보름달같이 훤해서~ 고거이 인민배우가 되었갔지, 고거이 음색이 낭낭하니 간드러져 인민카수가 되었을고라우...큰오라비 왜정때 고급학생이니끼 당간부 되었을끼고.."
삶은 콩을 절구에 쿡쿡 찧고나서 땀방울을 닦으며 메주틀에 콩을 퍼 담고 발로 꾹꾹 밟으면서도 질끈질끈, 청국장이 잘 떴나 주걱으로 뒤적거릴때도, 처마밑에 말린 메주덩어리에 곰팡이가 잘 피었나 들여다 볼때에도 어머니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얼굴엔 말 못하는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어머니는 별로 말씀이 없으신 분으로 왠간해선 잔소리를 안하시는데 일찍이 나에게 살림법을 혹독하게 가리키셨다.
“에미나이는 거저 서방을 잘 만나야 팔자 피는 거이라우. 공부해서 머이에나 써먹가써~ 머리 지지는 기술이나 털실 짜는 기술 배우라우~”
어머니는 처녀 때 너무 공부가 하고 싶어 버선발로 눈길을 밟아 야학 다니셨다는데 아버지와 결혼해 살면서 워낙 고생이 질려 그러신가보다 생각했다.
설거지가 맘에 들면 일본말로 머라뭐라 하셨는데, 수틀리면 “이거이 에미나이 깨깨이 하지않고 칠칠맞게 머이 하는 짓거리노! 거 거 정신 못차리누만.” 윗방에서 몰래 소설책을 읽는 내게 벼락같이 소릴 질러 부엌으로 끌어내셨다.
”
난 떼를 써도 안보내준다는 중학교를 집안일 잘하기로 다짐한 후 들어갔고, 공부는 살림 뒷전이어서 눈치껏 해야 했기에 늘 지각대장이었다.
어머니가 군불을 지펴놓고 새벽장에 나가시고 나면, 나는 졸음을 비비고 부뚜막에 나와 무쇠솥에 밥을 안치고 누릉지까지 긁어 물을 붓고 밥알 한알갱이 없이 바가지로 숭늉물을 퍼낸 후, 솥솔로 싹싹 안을 닦아내고 펌프질 뿜어 가득 불을 붓고나서 솥뚜껑을 마른 행주에 기름을 묻혀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나도록 닦아 미지근한 그 위에 하얗게 비벼 빨은 행주를 쭉 펴 올려놓고 학교 등교를 해야만 했다. 만약 그렇게 안하고 학교로 내빼면 영락없이 저녁에 혼줄이 났다
방과후면 쏜살같이 가방을 던져 놓고 펌프 옆에 가마니를 깔고 고운 재를 퍼다 지푸라기에 묻혀 동그란군인 세수비누를 비벼 알미늄 밥그릇을 벅벅 닦곤했다. 그렇게 닦은 사발을 나란히 엎어 놓으면 얼굴이 비춰 반짝반짝 빛나는 게 참 좋아 나도 모르게 그 일을 즐거이 했다. 거울같이 닦여진 밥그릇을 나무 선반 위의 그릇을 떠들어 어머니는 흐믓한 모습으로 강낭콩 감자 보리밥을 듬뿍 퍼 담아 주셨다. 그게 좋아 열심히 그릇을 닦고 더위에 바짝 마른 마당에 물을 뿌렸다가 흙이 잦아들면 티끌 하나 없이 싸악싸악 싸리비질을 한 바닥에 쇠꼬쟁이로 예쁜 얼굴을 그렸다.
난 그렇게 살림을 배워가며 30분이나 늦게 교실문을 드르륵 열어야 했고 창피한 것도 모르고 또박또박 걸어 들어가 내 앞자리로 떳떳이 앉곤 했다. 지능검사 받는 날도 그렇게 지각을 하여 내 아이큐는 특별치 않게 나온 걸로 알고 있다
동네 아저씨들이 막걸리 마시다 내가 지나가면, “저 한가네 애덜은 뇌덜이 좋아 어디가도 머릿감이여~ 저 말똥이(남동생 애칭) 좀 보라구~ 맨날 뜀박질 하고 놀아두 좀 잘 혀? 저 집 애덜은 뭐 특이하게 먹이는가벼! 이구..우리집 애새끼들은 하라하라 해도 지지리 공불 못해 소대가리를 삶아 발라줘도 못하니 원, 애미 애비 대가릴 닮아서 그런가~!”
3년동안 지각을 밥먹듯 하면서 학교를 다녔는데도 시골중학교를 반 일등으로 졸업을 했다. 오죽하면 담임선생님이 준법성이 ‘다’라서 학칙에 따라 우등상을 줄 수 없는 상황이 생길 거 같아 여름방학 때 살짝 가정방문을 오셨는데 그 날도 어김없이 아무도 없는 집안을 깔금히 해놓고 마루에 앉아 일기를 쓰고 있었다. 선생님이 갑자기 오셨어도 드릴 것이 없어 펌프물을 잦아 찬 냉수 한 사발을 드렸더니 아니..왠 그릇이 이리도 반짝거리냐며 기웃기웃 부엌을 들여다보시다가 방문을 열어보시고 집안을 요리조리 살피더니..슬며시 친엄마 맞냐고...싱긋이 고개를 내젓는 내게 “아 그랬구나 엄마가 계모인줄 알았는데 살림 가르치느라 엄격했구나. ”
그럼에도 난 고교 진학을 할 수 없었다. 왜냐면 강원고등학교를 전체수석으로 졸업한 오빠가 대학을 포기해야했고, KBS 공채에 수석합격으로 중앙방송국에 입사했는데 춘천으로 발령이 떨어져 밥해주러 나가야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산더미 같은 빚에 쪼들려 아버지가 지은 넓은 집을 팔아 빚잔치를 하고
춘천으로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평양에서 큰 절을 짓고 50여명의 승려를 섬겼던 외갓댁...어머니는 남존여비 사상에 깊이 길들여 있었고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 할적마다 툭탁하면 그래서 망했다 그래서 재수없다... 굿판을 벌일수록 빚만 지는 환경과 걸핏하면 저주니 뭐니 방울을 흔들며 무당이 어둠 속에서 두려움을 주는 비과학적 샤머니즘에서 진저리가 나 꼭 벗어나 살고 싶었고,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고자 믿음생활에 뛰었다.
그 때부터 나는 교회를 다니면 집안 망한다고 머리채를 끄들렸고 더 혹독한 살림법을 배워야했다. 중학교 라이벌이었던 친구는 매일같이 숙제를 껴안고와 춘천여고 자랑을 하면서 영어, 수학, 미술 숙제까지 해달라고 했고, 덕분에 난 귀찮긴 커녕 밤새워 그림도 그려주고 음악교과서를 빌려 뒷산 솔숲에 가서 노래도 부르고 대입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내가 어질러진 방을 안치운다거나 설거지통에 그릇을 담가 놓고,,빨래를 안한 채 도서관을 갔다 온다던지 책을 읽고 있으면 가차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에미나이가 얼어죽을 무슨 공부야! 그래갖고 어케 시집 갈라 그러나! 깨깨이 치우지 못하고...안되갔어 퍼떡 치워놓구 이리 오라우. 내래 중요한거이 일러줘야겠으니 이 너른 방으로 건너 오라우.”
“ 자아..오늘은 이불 만들기 알켜 주갔어. 잘 보라우...”
어머니는 미리 틀어놓은 목화솜 한 채를 덥썩 내려놓더니 방바닥에 속싸개천을 쫘악 피셨다. 살살 솜 한 켜를 걷어내어 살푸시 천 위에 깔으신 후, 또 한 켜를 그 위에 또 한 켜를 그 위에 엇갈려 놓으시며 “같은 방향으로 얹히면 솜이 뭉쳐야...뭉치면 이불 망글었을때 둘둘거려 몸에 베겨 못잔다우”
켜켜이 여러겹을 얹혀 둥싯하게 만든 다음 “요거이 좀 두꺼워지 안그럼 얇아서 추워야~ 덥다보면 눌러지누만” 솜을 보듬어 안고 겉싸개로 고이 싸 굵고 긴 바늘로 듬성듬성 꿰매는 솜싸개 만드는 시범을 보이셨다.
“이번엔 진짜 이불 만들기 보여 주갔어. 따라 해보라우. 이거는 하루 종일 걸려야”
동대문에서 사온 누렇고 뻣뻣한 광목을 펼치더니 쭉쭉 갈라 양쪽을 맞붙여 꿰매더니 세 번 푹푹 삶아 빨아 말리운 천을 찬밥 으깬 물자루를 찰떡 치대듯이 문지르다 꾸욱 짜서 세 번 빨아 말리운 천에 풀을 매겨 널으셨다.
뒷곁에 햇볕이 쨍쨍 드는 빨랫줄에 널고 바짝 마르게 한 다음 종이장처럼 부시럭거리는 광목에 푸붑푸붑 입술로 물을 흩뿌리셧다. 축 젖은 천을 맞잡아 지그제그로 접어 보자기에 싸서 오래 오래 온 몸을 힘 주어 발로 밟은 후, 다듬이에 올려 놓고 두들기셨다. 다다다다다..두두두두 다다다다 4분의 4박자로 두들기다 팔이 늘어지게 아프면 2분의 1박으로...다시 반대로 접어 반복했다. 방망이질을 끝낸 것을 다시 잘 쬐는 볕에 말렸더니 홑청은 반들반들 윤이 나 바시락거렸다.
이것을 다시 바닥에 잘 펴서 솜싸개 이불을 깔았다. 네 귀퉁이 궤를 잘 맞춘 후, 미리 준비해둔 알록달록한 겉천을 얹고 가장자리를 잘 포개어 접은 후, 쏙쏙 바느질하기......결과적으로 이 일이 바느질이라는 걸 알았고 우리 여인네들이 해야하는 살림살이로구나 깨달았다. 휴...기억을 더듬어 어머니가 가르쳐준 이불을 글로 만들어 보았다
엄격한 어머니가 군에 간 오라버니 간청으로 예배당에 나가게 되었고 옛관습은 성경을 읽으면서 새로운 눈이 뜨여 온화한 분으로 변화되셨다. 그렇게 나를 들볶던 어머니가 성전에 가서 밤새워 기도할적마다 앞집 간호대학 나온 순녀처럼 쟤를 학교를 안보내고 살림만 시겼던 후회로 날마다 우셨다고 한다.
우리 형제는 11남매였다는데, 전쟁통에 이래저래 다섯명이나 죽은 이유로 나는 바로위 언니와 12살 터울이 난다. 개종한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형제들은 놀라운 축복들을 받아 물질적, 정신적으로 세상에서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는 삶들을 살고 있다.
18살 나이로 일찌감치 시집간 언니는 왈가닥이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마실 다니느라 가만 앉아 있질 못해 살림을 못가르쳤단다. 한번 보면 고대로 따라하는 침착한 기질의 나는 일복 많은 여인으로 살아야했지만, 알토랑같은 삶을 무섭게 가르쳐준 어머니께 정말로 감사 드린다.
무거운 세상 짐을 머리에 이고 이웃을 위해, 자식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하다 뇌출혈로 쓰러져 돌아가신 어머니....그 해 10월 28일, 운관 도중에 갑자기 함박눈이 하얗게 학곡리 산을 덮었다.
방 걸레질 하면서 흥얼거리던 어머니의 나직한 찬송소리가 유난히도 가슴에 맴도는 하루다
2011년 2월3일 명절날 오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