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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이탈리아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려고 에티오피아를 침략했습니다. 유럽의 신무기로 무장한 이탈리아 군대를 도저히 당하지 못해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제네바의 국제연맹에서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집단안보를 주장하면서 에티오피아를 도와달라고 호소했습니다. 1936년 4월 12일 국제연맹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에게 ‘국제연맹은 에티오피아를 도와줄 수 없다’는 최후의 통첩을 보냈습니다. 약육강식의 시대에 약한 나라의 억울한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인접국가인 수단으로 와서 에티오피아 젊은이들을 불러내어 군사훈련을 시켜서 오직 자기들의 힘으로 1941년 이탈리아를 몰아내었습니다.
그 후 유엔이 설립되는 과정에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에티오피아가 당했던 약자의 서러움을 가슴 깊이 새기며 “앞으로는 이러지 말자!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게 억울하게 침략당하면 우리 모두가 도와주자!” 라고 하는 ‘강력한 집단안보’를 주장했습니다.
연약한 여인이 조폭에게 억울하게 폭행 당하면 모든 시민들이 일어나자는 것이었습니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약한 나라도 생존할 수 있도록 마련한 이 '집단안보'는 '약육강식'시대를 종식시키고 세계평화를 향한 크나큰 진보였습니다. 애매모호하고 추상적인 집단안보가 아니라 ‘육군, 해군, 공군’이라는 구체적이고도 강력한 집단안보를 유엔헌장 42조에 성문화시켰습니다.
그 후 첫 번째로 일어난 전쟁이 바로 6.25였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하일레 세라시에 황제는 어떤 나라보다 가장 먼저 10만 달러를 즉각 원조하였고, 그 후 미국의 트루먼대통령은 유엔헌장 42조에 의하여 유엔군을 파병했습니다. 16개국이 전투 병력을 파견했는데 만일 일주일만 늦었더라도 우리는 지금 시청 앞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대를 이어 충성하자! 김정은 장군 만세!” 라고 외치고 있을 것입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자기의 근위병들을 부추겼습니다. 다른 15개국에서는 가기 싫어하는 군인들을 강제로 보내기도 했으나 오직 한 나라, 에디오피아에서는 100% 모두가 지원자였습니다. 그 이유는 약자의 서러움을 철저히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70년 전, 1951년 4월 12일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의 ‘잔메다’광장에서는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지원병으로 똘똘 뭉친 에티오피아 최강의 ‘강뉴 부대’를 한국으로 파병하기위한 출정식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다음과 같이 절규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이탈리아가 우리를 침략했을 때 국제연맹에 지원을 호소했으나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국제사회의 도움 없이 외로이 싸웠노라.”
“우리는 ‘약자의 서러움’을 철저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어떤 나라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세계평화를 위한 집단안보’를 주장했었노라. 그러나 이제는 집단안보가 유엔헌장에 성문화 되어 유엔의 기본 원칙이 되었으므로 아무리 작고 약한 나라도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
“제군들은 유엔의 집단안보 원칙에 따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집단안보를 실천하기위해 오늘 장도에 오르는 것이다. 가서 영웅적인 행동으로 침략군을 격파하고 집단안보를 완수하라.”
우리나라가 월남에 파병할 때 구호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살아서 돌아오라”였습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강뉴부대의 구호는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 이기든지 죽든지 하나만 선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이와 같이 절규하면서 출정식을 한 그날은 국제연맹이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에게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했으나 국제연맹은 에티오피아를 조금도 도와줄 수가 없다”고 최후의 통첩을 보낸 15년 전 ‘4월 12일’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국제연맹은 에티오피아를 도와줄 수 없다’고 최후의 통첩을 보낸 날이 1936년 '4월 12일'이었고, 15년 후, 1951년 '4월 12일'은 에티오피아가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출정식을 한 날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 불세출의 영웅,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세계평화를 위한 역사적인 연설을 하고 있을 때 ‘데스다’와 ‘메코논’ 형제는 다른 강뉴부대원들과 함께 ‘침략자를 응징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결심했습니다.
출정식이 있기 전에 두 형제는 한국전 참전을 결심하고서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심정에서 1950년 아디스아바바에서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형 ‘데스다’가 그 사진 뒤에 친필로 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형제는 약자의 서러움을 가슴 깊이 새기며 집단안보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굳은 의지를 그 서명에 불어넣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지만 그 나라가 지금 위기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국 에티오피아가 위기에 처했을 때를 생각하며 인류평화를 위해 스스로 지원하였던 것입니다. 집단안보를 실천하기위해 황실근위병이라는 멋진 직장도 버리고 만류하는 가족을 뒤에 두고 죽음이 기다리는 한반도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열악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생전 처음 겪는 ‘눈’이라는 물체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신기하기도하였으나 무척이나 고통스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치열한 전투에서 형 ‘데스다’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가족의 만류도 뿌리치고 한반도로 향하였던 ‘데스다’라는 젊은이는 영원히 가족 곁을 떠났습니다.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침략자에게 항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황제의 명령대로 ‘죽을지언정 항복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던 형은 포탄에 온몸은 걸레조각처럼 찢어지고 피범벅이 된 채로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1년이 지나 2차 강뉴부대가 도착하자 1차 강뉴부대는 에티오피아로 돌아갔습니다. 동생 ‘메코논’은 자기만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동생 ‘메코논’이 에티오피아에 도착하자, 형의 아내는 앞날이 막막하여 어린 자식 ‘데레제 데스다’를 버리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형의 가정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나서 공중분해가 되었고 조카 ‘데레제 데스다’는 고아가 되었습니다.
동생 ‘메코논’은 혼자 돌아온 것이 너무나 마음 아파서 4차 강뉴부대로 다시 지원하였습니다. 형의 뒤를 따르겠노라고 지원하였으나 막상 다시 와 보니 휴전 상태가 되어 형의 뒤를 따를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귀국하자 이제는 가뭄이 7년간 계속되어서 목축으로 살아가던 에티오피아에서는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70$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에티오피아의 국민소득은 3000$이 넘었으나, 이제는 에티오피아의 국민소득이 60$이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어떤 해에는 100만 명이 굶어죽었습니다. 그러자 맹게스투라는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에티오피아는 공산국가가 되었습니다.
에티오피아가 공산국가가 되자 가장 기뻐했던 사람은 북한의 김일성이었습니다. 김일성의 철천지원수는 바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와 강뉴부대였습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앞장서서 집단안보를 주장하여 유엔헌장 42조에 집단안보를 성문화시켜서 한국전에 유엔군을 파병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파병했던 강뉴부대는 253전 253승 무패의 전설적인 부대였습니다. 그리하여 김일성의 평생소원인 적화통일을 방해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와 강뉴부대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철천지원수였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에티오피아 공산정권과 외교관계를 맺고 아디스아바바에 공산주의 기념탑을 세워주었습니다. 이것은 적화통일을 방해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와 강뉴부대에 대한 소리 없는 응징이었습니다. 멩게스투 공산정권은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는 이유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죽여 화장실에 매장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신을 똥통에 넣고 묻어버렸습니다. 세계평화를 위해,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에디오피아 불세출의 영웅,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그렇게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싸우겠다고 스스로 지원했던 강뉴부대 용사들은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산을 몰수당하고 직장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주었던 6.25 참전용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에티오피아, 그 에티오피아에서도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진 핍박을 견디다 못해 참전용사들은 길거리 노숙자가 되기도 하고, 6.25참전 사실을 숨기고 이름도 성도 고치고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공산정권이 무너진 지 30년이 지났건만 지금도 그분들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침략자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신 그 분들은 자기들을 파송한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았고 도움을 받은 우리도 그 분들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식들에게도 원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공산정권의 핍박과 배고픔과 '반동분자'라고 비웃는 이웃의 조롱 속에서 삼촌 ‘메코논’과 조카 ‘데레제 데스다’는 죽지 못해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이나 흘렀습니다. 그때 막 태어났던 저에게도 머리에 온통 하얀 서리가 내릴 정도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2009년 교직에서 은퇴하고 2010년부터 매년 인도양을 건너 지구 저편 에티오피아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으로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는 저는 죄송함과 감사의 절을 하러 참전용사들의 각 가정을 방문하였습니다. 공산주의를 반대한 ‘반동분자’라고 조롱하던 이웃들과 원망을 퍼붓던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감사의 절을 올리고 그분들의 외로운 희생을 생각하며 그분들을 붙들고 울었습니다.
비록 가난에 찌들고 늙고 초라한 노인이지만 그분들은 한반도 평화의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그분들은 우리나라 역사의 변곡점에서 온몸으로 우리를 보호해주셨던 분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뀌려는 변곡점에서 그분들은 피를 흘려 막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와주셨다는 이유 하나로 평생을 짓밟히며 살아오신 우리의 은인이십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최고의 예를 갖추기 위해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도 써보지 못한 갓을 쓰고,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는 두루마기를 입고 우리의 은인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동생 ‘메코논’씨를 만났습니다.
비록 초라한 노인이지만 그 분의 눈물 속에 우리의 과거가 있었고, 그 분의 과거 속에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려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저는 ‘메코논’씨를 붙들고 울었습니다. ‘메코논’씨도 울었습니다. ‘메코논’씨의 아들도 울었습니다. 사진을 찍던 신봉섭 선교사님도 울었습니다. 가이드로 저를 인도하던 에프렘과 아크릴루도 울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눈물 속에서 한평생을 보내고 이제 죽음을 기다리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한국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보내준 감사의 성금에 이제야 위로를 받고 눈물을 글썽입니다.
며칠 후 고아로 자라난 ‘데레제 데스다’씨를 만났습니다. 너무나도 죄송하고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는 ‘데레제 데스다’씨를 붙들고 울었습니다. 우리 때문에 가정이 풍지박살이 나고 고아가 되어 평생을 짓밟히며 살아온 ‘데레제 데스다’씨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계도를 보여주셨습니다. 고아로 자라난 그에게 아들, 딸을 넷을 두었더군요. 비록 자신은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기는 자식들을 버리지 않고 곱게 키웠더군요.
‘대한민국’이라면 소름이 끼치고 치를 떨던 ‘데레제 데스다’씨는 지나간 아픔과 눈물을 이기고 삼촌과 함께 한국 사람인 저의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6.25 전사자들의 자녀들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 분들은 직접 우리를 위해 싸우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우리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 분들 앞에서 큰 절을 올렸습니다. 나이를 떠나서 집단안보의 혜택을 가장 많이 입은 저는 집단안보의 최대의 희생자들 앞에서 죄송함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자 맨 앞에 계시던 ‘에타페로우’ 여사도 고개를 숙여 절하였습니다.
모두가 우리 때문에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으신 분들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You've got too much pain from The Korean War. But I can give you only painkiller.”
“여러분은 한국 전쟁 때문에 너무나 많은 고통(pain)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진통제(painkiller)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진통제 몇 알씩 나눠드렸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서 달라고 요청하자 아버지의 비석을 찾느라고 야단이었습니다. 저는 어리둥절하다가 급히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습니다.
왜 아버지 비석의 위치도 모를까요?
'절대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을 버리고 간 아버지도 밉지만 처자식을 버리고 한국을 위해 죽었다고 해서 자기들을 찾아주는 한국 사람도 없었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비석을 보고 싶지도 않았고 위치를 알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영웅들의 비석이 그 자녀들에게는 단지 꼴도 보기 싫은 돌조각일 뿐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들의 아버지는 인류평화의 영웅이 아니라, 자식들을 버리고 개죽음을 당한 바보천치요, 수치스러운 '반동분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데레제 데스다씨는 그토록 원망스럽던 아버지를 용서하고 버림받았던 아버지의 흔적을 이제야 찾았습니다. 서러움과 원망과 고통의 과거를 떨치고 이제야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섰습니다.
게타츄 아세파우(Getachew Assfaw)씨도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섰습니다.
아브라함 데스다(Abreham Desta)씨도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섰습니다.
테겐 물랴투(Tegegn Mulatu)씨도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섰습니다.
신킨니쉬 우베트(Sinkinesh Wubete) 여사도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섰습니다.
마미트 훈드(Mamite Hunde) 여사도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섰습니다.
비르투칸 레마(Birtukan Lemma) 여사도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섰습니다.
에타페로우 타미랕(Etaferaw Tamirat) 여사도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섰습니다.
저는 70년 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출정식을 하던 잔메다 광장을 가 보았습니다. 이분들에게는 슬픔과 고통의 시작이요, 우리에게는 구원의 시작이 되었던 곳이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잔메다 광장에는 대한민국 역사의 변곡점을 지켜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와 253전 253승 무패의 강뉴부대 용사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분들의 희생의 댓가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아온 제가 감히 그곳에 섰습니다.
이곳 잔메다 광장에서 출정식을 하면서 “침략자에게 항복이란 있을 수 없다”면서 “이기든지 죽든지 하나만 선택하라”고 외치던 세계평화의 영웅,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떠난 자리에는 누더기를 입은 꼬마들이 축구공을 차면서 놀고 있었고 하늘에는 무심한 구름만 떠다니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