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성불하게 해주실 아내 관음보살
이강옥(영남대 교수)
남자가 여자와 어떻게 만나 어떤 관계를 꾸려 가는가는 동서고금을 넘어서는 호기심과 고민의 대상이 되어 왔다. 부부생활을 하면서 수행을 하는 남자들에게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여자와의 사랑 경험을 통하여 남자가 정신적으로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 불가 이야기에서는 이 상황에 관음보살이 가끔 개입한다. 관음보살은 남자의 득도나 성불을 도와주기 위하여 사랑을 활용한다. 남자는 관음보살의 가피로 어떤 여자와의 사랑을 이루게 되고, 마침내 그 힘으로 득도하거나 성불하는 것이다.
이같이 관음보살은 만남과 사랑을 주선하는 역할을 하지만, 직접 여인의 몸으로 나투시어 남자와 관계를 맺기도 한다. 가장 두드러진 경우가 삼국유사의 <남백월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 이야기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친구로서 서로의 수행과 성불을 위해 도울 것을 약속하고 각각 자기의 암자로 들어가 수행 정진한다. 어느 날 밤 한 여인이 먼저 달달박박을 찾아와서는 하룻밤 재워줄 것을 간청한다.
깊은 산속 암자에서 여인과 단둘이 한밤을 보내게 된다는 것이 달달박박에게는 큰 부담으로 여겨졌다. “암자는 정결을 지켜야 하니 당신이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이곳에 머물지 말고 빨리 떠나가시오.” 이렇게 말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달달박박은 계율과 원칙에 철저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절박한 여인의 호소를 외면했다. 계율에 집착하는 계금취(戒禁取)에 가까워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했다.
달달박박으로부터 외면받은 여인은 노힐부득의 암자로 갔다.
“이곳은 부녀자들이 더럽힐 곳이 아니라오. 그러나 중생의 소원을 따라주는 것도 보살행의 하나겠지요. 하물며 깊은 골 밤이 깊었으니 어찌 홀대할 수 있겠오?”
노힐부득도 계율과 보살행 사이에서 다소 갈등을 하였지만 중생의 소원을 더 중시하는 보살행을 생각하여 여인을 받아들인다. 노힐부득과 여인은 매우 은밀한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노힐부득이 내내 청심(淸心)을 가다듬으려고 염불을 그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내면이 약간 흔들렸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힐부득은 여전히 완벽하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성불의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다고 하겠다. 그런 노힐부득이기에 여인의 도움이 더 절실했다.
그 단계에서 여인의 말은 뜻밖의 것이다. 자기가 곧 출산을 하게 된다고 했다. 출산이란 남녀간 육체 관계가 이루어지고서 열 달 이후에야 나타나는 현상이다. 관계도 맺기 전에 아이를 낳는 이런 설정은 무얼 암시하는 것일까? 여인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이런 통속적 질문은 부질없는 것이다.
노힐부득은 계율과 보살행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먼저 보여주고는, 계율보다 보살행을 선택했다. 여인을 연민하게 된 노힐부득은 여인을 받아주었고, 산기를 느낀 여인이 거적자리를 펴서 출산을 도와 달라 하자 기꺼이 응했다. 여인이 남자 앞에서 출산한다는 것은 남자에게 여인의 나신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해산을 한 여인이 목욕시켜줄 것을 간청하자 노힐부득은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기도 했다. 벗은 몸을 보는 것이 부끄럽게 했을 것이고 앞으로 어떤 지경에 이를 것인지 몰라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보다 더 강렬했던 것은 연민의 정이었다.
그때 이적이 일어났다. 여인이 몸을 담군 목욕통에 향기가 퍼지고 목욕물은 금빛으로 변한다. 놀라고 있는 부득에게 함께 목욕을 하자며 들어오라 한다. 부득이 목욕물에 몸을 적시는 순간 정신이 맑아지고 자기 몸도 금색으로 변했다. 옆을 보니 연대(蓮臺)가 만들어져 있었다. 여인이 거기 앉으라 했다. 그리고는,
“나는 관음보살이로다. 대사가 대보리를 이루도록 도와주러 왔도다.”
는 말을 남기고 모습을 감추었다.
노힐부득은 연민과 자비의 마음으로 여인에 대한 보살행을 실천하였다. 물론 그것은 여인으로 현신한 관음보살의 배려와 인도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관음보살은 노힐부득을 여인의 출산과 출산 후 목욕의 장으로 인도하였다. 그것은 남자에게 전혀 예기치 못했던 두려움과 감동을 주었다. 그 느낌은 목욕물이 찬란한 금빛으로 변하는 기적을 불러왔다. 노힐부득의 성불은 여인의 출산과 출산한 여성과의 목욕 덕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목욕통 물이 금빛으로 변했다는 것은, 출산 과정에서 여인이 흘리는 피가 금과 같이 위대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기를 낳고 금빛 피를 흘리는 여성상. 그 금빛 피로써 한 남자를 성불시키는 여성상. 여기서 우리 문화가 만들어낸 찬란한 관음보살상을 발견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이렇게 고귀한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보았으니 놀랍다.
관음보살은 이 세상 어떤 남자보다도 높고 더 느긋한 자리에서 남자를 넉넉하게 이끌어주는 여성의 완전한 우위를 보여준다. 궁지에 몰린 초라한 여인이 위대한 불보살이었음을 보여줌으로써 마침내는 남녀나 계급 관계에 대한 세속적 분별심을 극복하고 평등한 삶을 꾸려갈 혜안을 제시해준다.
가장 비근하게는, 우리 주위의 초라한 여성들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선을 달라지게 할 수 있다. 원효가 만난 여인들을 떠올려 보라. 원효 앞에서 월경대를 빨거나 벼를 베던 미천한 여성들은 모두 관음보살이지 않았던가. 비천한 모습으로 현신하신 관음보살은 이렇게 가르친다. 남자들이여 이 세상 모든 여성을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보라. 그리고 더 넓은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나아가 여자든 남자든, 젊었든 늙었든, 부자든 거지든, 모두가 보살이며 부처이다. 우주 만물 중 부처 아닌 것이 없으니 이 세상에서의 우리 한평생은 ‘날마다 좋은 날’이 아닌가?
다시 부부생활을 하는 남자들에게 아내라는 여인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또 가져야 할까 생각해본다. 바가지 긁어 남편에게 경각심을 주는 아내, 살림을 잘 꾸려가는 아내, 자식 교육을 전담하는 아내 등은 우리 시대 남자들에게 참으로 소중한 아내의 형상이다. 그 덕에 우리 남편들이 세속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소중한 아내상이 있고 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남편의 수행을 권장하고 도와주는 아내라면 어떨까? 관음보살처럼 해탈의 결정적 계기까지 제공해주도록 원하는 것은 과욕일까? 아니 지금 당장 그것이 어찌 어려울까? 내 옆에 누워계신 이 분이 관음보살이시니.
(동화, 동화사, 200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