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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일을 구하라!(시27:1~6) 수요예배(20.10.14)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그 내용이 아주 심플하고 핵심만 콕 찍어서 가르치셨습니다. (마6:9~13 찾아 설명)
1)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임을 고백하라!(요1:12)
2)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고, 실제로 거룩하시니 거룩하다고 고백하라!
3) 먹고 마시고 입고 쓰는 것을 일절 주시는 하나님이시다.(광야의 유대백성)
4) 용서하라!(마18:22‘일곱번을 일흔번까지’) 그리고 용서를 구하라!
5) 살면서 시험에 자주 빠질 수 있다.(신앙생활보다 생활신앙을 훈련하라!)
6) 다만 즉, 딱 하나 구하는 청원은 ‘악에서 구하옵소서’이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구해달라 딱 하나 구합니다.
인간은 말장난
지금 다윗도 딱 하나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그런데 한가지 일속에 세부분으로 나눠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1)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고라 자손의 시가 다윗의 마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시84:2~4"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시84:10”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다윗의 이 고백은 예루살렘 건물 성전 안에서만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모하고, 경외하고, 앙모하는 신앙 안에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다윗의 ‘신앙의 기본’을 알아보자!
첫째, 하나님은 '빛과 구원의 실체'이시다! (1절)
다윗은 ‘여호와는 나에게 빛을 주신다!’가 아니라 ‘나의 빛이시라’고 고백하고,
‘여호와는 나에게 구원을 주신다!’가 아니라 ‘나의 구원이시라’고 했습니다.
즉, 다윗에게는 여호와 하나님 그 자체가 빛이시고, 하나님 자체가 구원이시라는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생명 자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유대인의 하나님이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하나님이지 자기들과는 상관이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도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들이고, 이 땅에 태어난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었기에 이 세상에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영적으로 막혀서 모를 뿐입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 믿는 백성들 조차도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갖다주는 존재로, 하나님은 빛을 주시는 존재로, 하나님은 구원을 갖다주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생각은 정말 하나님을 모르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축복을, 빛을, 구원을 날라다 주는 중간역할을 하는 택배기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복은 어디에 있는 것을 갖다주는 것이며, 어디에 있는 빛을 갖다주는 것이며, 어디에 있는 구원을 갖다주는 것입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성도들이 범하기 쉬운 신앙생활, 착각신앙은 예배를 보는 신앙입니다. 예배를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구경하는 것입니다. 찬양은 감정으로 부르고 대충 따라서 부르는 것입니다.
특히 기도는 어떤 일이 있을 때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사라지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마치 광산에 있는 금을 캐오듯이 다른 곳에 있는 응답을 캐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산 속의 금이 아니라 광산 자체가 금이듯이, 하나님이 바로 응답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것 자체가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있는 것 자체가 사실은 응답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하신 것 자체가 응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 자체가 예배요 응답입니다. 그러니까 2~3절의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시27:2~3"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하나님 자체가 승리이고, 하나님 자체가 힘이요 능력이시니까 태연한 것입니다.
둘째, 질서를 아는 사람이었다. (다윗의 기본 신앙)
본문은 다윗이 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인가?(행13:22)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삼상13장에 보면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어서 불레셋과 첫 전투를 치릅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먼저 번제를 드리고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제사장 사무엘이 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늦어지자 조급해진 사울왕이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습니다. 자기가 번제를 드려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해 놓은 제사장의 역할을 자기가 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 바로 ‘질서를 무너트리는 일’입니다.
우상이 무엇인가? 영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간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성의 질서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거짓말이 무엇이냐? 언어의 질서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예배의 질서, 예전의 질서, 영적 질서가 있습니다. 자기에게 허락하신 직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사’도 ‘서리’가 붙은 집사가 있습니다. 얼마나 중요하면 1년간 실험해보고 집사 직분을 주겠는가?
딤전3:10“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이 질서가 무너지면 교회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셋째,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 (3절 설명)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여전히 태연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다윗이 목자로 아버지 양을 칠 때부터 사자나 곰과의 싸움이나 골리앗과의 싸움, 사울에게 10여년 동안 쫓겨 다니면서 경험했던 것, 수많은 전쟁에서의 전투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셨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셨는가를 경험하였습니다. 거기서 얻은 결론은?
하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어떤 대적들보다도 강하시고, 능하시고, 도움이 되신다는 것을 알고,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하는데서 나오는 태도요 고백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함께하는 성도들에게는 캄캄한 미래가 아니라 안개가 낀 것처럼 희미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찬란하고 분명한 영광의 승리의 현장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나는 여전히 태연하다’(보테아흐)는 ‘안전함을 믿고 확신한다’, ‘자신만만하다’는 의미입니다. 그 고백이 어디서 나오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믿는 구석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구석인가? 다윗의 고백은?
시31:2~3“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그러니까 다윗은 평생을 하나님의 집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2) 아름다움을 바라보기를 원하기에 하나님 집에 살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름다움이라는 것 자체가 맞는 말인가? 그러면 그 반대의 말인 ‘미움’ 정도일 것인데, 그럼 하나님에게도 미움이 있는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미움 자체가 없으니 아름다운 말도 그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한 것은? 인간의 차원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무엇을 아름답다고 하였는가?
첫째,이름이 아름답습니다.
시8:9“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름이 아름답다는 것은 그 이름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느껴지고, 이름 자체가 우리를 기쁘고, 즐겁고, 감사가 저절로 나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이름만 들어도 저절로 마음이 감동되는데,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감동이 없이 그냥 사람들이 말하는 신이라 부르는 여럿 중에 하나로만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부르지 못하고 ‘아도나이’라고 부릅니다. “죄인인 우리가 감히 어떻게 함부로 부르는가?” 그래서...
당시에 서기관들이 성경을 필사할 때,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붓을 바꿔서 새 붓으로 쓰고나서 금식하며 회개하고, 제물을 드려서 회개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 감동과 감사가 솟구치고, 사실 황홀해야 합니다.
EX) 지금까지 지나오는 동안에 제가 들었던 기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는 두 번 있었습니다. 한번은 신학대 학부적에 서울에서 산기도는 그냥 일상이었습니다. 북한산 자락의 능력봉이라는 산입니다. 서울 평창동 뒷산으로 정상까지는 1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산기도를 갔다가 어떤 여인의 방언기도를 들었는데 그만 ‘기도의 향음’을 맡았습니다. 그 방언기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제가 한동안 그 여성성도가 꼭 오는 날이 있었는데 마치 천사를 만나러 가는 것 같이, 어떤 일이 있어도 그날 기시간 만큼은 기어코 올라가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언 기도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방언 통변은사를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약 15년 만에 통변은사를 받았습니다.
두 번째, 지리산의 한 마을에 있는 동문 선배님의 교회를 선교갔습니다. 여름방학 때 그곳에 10여명의 전도사님들과 같이 가서 낮에는 전도하고, 저는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를 했고, 밤에는 부흥집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튼날 저녁때, 저는 성경학교를 마치고 마을에 전도를 나가신 전도사님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담임 목사님께서 저녁 집회를 위하여 미리 나오셔서 단에 올라가 기도하시는데, 그때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아름다운 하나님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한마디 기도였습니다. “아버지...”하시는데 그 이름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에게는 아주 어린 자녀가 3명이었고, 지리산 속이라 농사를 짓는 분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고, 성도들도 10여분이 되는데 그곳에서 가장 젊은 목사님이 그들의 농사를 돌봐주느라고 얼굴이 시커멓게 탓습니다. 그리고 한주간 나오는 성도들의 헌금이 불과 몇천원이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옷은 언제적 것인지 가에는 다 헤어졌고, 굵은 넥타이를 착용하시고 올라가셔서 하시는 한마디릐 기도 ‘아버지....’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 목사님이 부르는 그 이름은 그 목사님의 전부였습니다.
시135:3“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둘째는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아름답습니다.
시65:4“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왕궁이 아름다운 것은 왕의 집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듯이,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성전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출34장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금식을 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만났고, 십계명 증거판 2개를 들고 내려오는데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습니다.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히 모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니까 수건으로 얼굴을 가릴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였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고전3:16“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6:16“...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나님의 성전이 아름답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충성 된 종아!” 칭찬 들을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셋째는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사12:5“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왜 아름답습니까? 그것은 생명과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영원히 죽었던 우리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셔서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다윗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나를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시27:5~6“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일은 영혼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주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전도가 가장 아름다운 일인 것입니다. 나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부르신 뜻은 이렇게 아름다운 일에 동참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집에 살면 나타나는 결과, 되어지는 결과, 자동적으로 될 수 밖에 없는 결과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인생이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의 그 인생의 자체를 보여 주는 노래입니다.
다윗에게는 강력한 나라의 주권자, 수만은 은과 금, 부유를 주셨고, 부인과 자녀, 명예 등등을 주셨지만 ,다윗의 고백은 오로지 한 가지 만을 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늘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아름답게 사는 방법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부요를 언제나 누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았던 것입니다.
요셉, 끝까지 여호와의 집에 살기를 원했던 생활신앙인이었다. 애굽에 팔려가서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 안에서 살았기에 가정 총무로 일을 했고, 결국은 바로조차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보았기에 애굽에서 제1총리가 되어서 나라를 살리는 일, 사람을 살리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오벳에돔도(삼하6:10~11) 하나님의 법궤가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5절은 4절의 이유입니다. 4절 한가지만을 구했던 것의 결과가 5절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게 구하니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편이 중요합니다. <찾아 설명>
3) 성전을 사모하는 것
다윗은 얼마나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했는지...하나님이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까 성전 지을 모든 것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했다고 고백합니다.
대상29:3"성전을 위하여 준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내가 사유한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시84:2"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84:10"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