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바로알기 자료.hwp
개청 100년 이야기 < 옛 군산세관 편>
작성자 최성식 / 군산세관장
나 군산세관이 탄생된(개청) 시기는 구한말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19세기 마지막해인 1899년(광무 3년) 5월1일이다. 기해년 돼지띠 인 셈이다
나 군산 세관을 탄생하도록 직접 결정한 것은 당시 대한제국 의정부(議政府)이고 나의소속은 생소한 이름의 도지부(度支部)라고 하여 현재 재경부란다. 나는 처음에는 군산해관(群山海關)이라고 작명되었다
해관(海關0이란 칭호는 청국이 득세하던 시기 청국제도에서 따온 것으로 이후 1907년 12월 세관 관제가 개정되어 나는 다시 군산세관지서로 개청되었다고 한다 나보다 먼저 태어나 가장 맏형 격은 23년 전인 1878년 부산해관의 전신인 두모진 해관(1883: 부산해관)이고 이후 인천 원산 진남포, 목포해관이 탄생되었으며. 마산해관은 같은해 같은날 태어났으니 동갑내기이다
따라서 1876년 병자수호조약으로 문호가 개방된 이래 나는 우리나라 세관 다섯 번째로 탄생ㅇ하여 이제 100수를 맞이하니 장수세관(長壽稅關)의 반열에 올라 당시를 회고해 본다만 스스로는 지각(知覺0이 없으니 기록에 의존하거나 주변상황으로 추정해 이야기할 수밖에없다
냐가 태어날 당시 구한말은 참으로 암울한 시기로 제국주의 열강들이 남의 나라에서 세력싸음을 하고 쇄국정책이 봉괴되어 대외통상의 물꼬가 트인 상태에서 개항장(개항장)이 생기고. 개항이 되니 무역을 위해 세관의 설치는 필수적으로 수반되었다
나 군산세관보다 2년 먼저 개항된 목포가 목화 수출 때문이었다면 군산항은 호남평야의 쌀 수출 전진기지로서 필요했기 때문에 일본이 의도적으로 개항을 요청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산항 개항이 일본의 압력이라기보다는 당시 대한제국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 의하면 오히려 지력에 의한 개항아라고 군산지역 학계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우선 정부는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있어서 개항장의 확대에 따른 관세 수입의 증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해관 총세무사인 영국인 J Mleavy brown은 러시아 세력의 저지 목표에서 개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독립신문은 개항으로 외국물건이 들어와도 강제로 파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고려하여 살 터이니 이익은 많고 해는 적다는 점 등 다섯가지 이유를 들어 개항장의 확대를 강하게 주장하였다고 한다
막상 개항이 결정되니까 목포주재 일본 영사가 목포가 개항된지 얼마 되지 않는데 가까운 거리의 군산이 개항되면 목포의 발전과 일본인 상인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잇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는 기록은 작은 이기심이라고 해야 할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시 으정부는 군산, 마산, 성진, 세 곳의 개항을 고종황제 칙령으로 공포하고 이를 외국 정붕에 통보함과 동시에 세관 이외의 경무서 항만업무를 관장하는 감리서, 재판소, 우체사, 그리고 목포영사관 군산분실을 설치하고서 뒤이어 일본 육군과 헌병까지 주둔시켰다.
나는 불행하게도 초대 주인장부터 이민족 일본인인 中林思考가 무녀 8년을 재직한 이래 해방 이전 17대까지 46년간 역대 주인장은 모두 일본인이 독차지하였으니 기구한 성장과정이 너무 길었다.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이 사실상 세력을 가진 상황에서 부산이나 인천세관 경우에도 개청초기에는 영국인 불란서인이, 친일세력이 득세한 1900년대 초기부터는 일본인이 줄줄이 세관장을 엮임한 것을 보면 외국인이 어떻게 남의나라 세관장이 될수 있었는지 쇠잔한 구한말 여사의 슬픔을 우리세관도 아련하게 느낄수 있다
당시 나의 가족인 세관관리들도 일본인이 많고 조선인은 하위직 일부에 불과 하였을 것이고 남의나라 일본인 때문에 한지붕 밑 사무실에서 얼마나 갈등과 스트레스을 많이 받았을까?
자료에 의하면, 당시 나 군산세관을 통한 무역은 수출이 1899년 8천1백58원, 1900년에는 7만4천8백12원. 1901년에 25만9천11원으로 매년 급증하였고, 품목은 쌀이 주종이고 한우, 어류 등이 있었으며, 수입은 1899년 3천 8백81원 1900년 1만9천3백15원, 1901SIUS 7만5천5백85원으로 공산품인 생활필수품들이었다고 한다
당시의해관 세칙에 의하면 일반상품에 종가 8~10%, 양주, 시계, 장식품, 보석류에는 종가 25~30%의 곤세를 부고하고, 수출품에도 종가 5% 수출세를 부과한 것은 재정수입확보에 목적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어렵게 징수한 관세 수입은 대부분 대외차관의 원리금 상환에 소모되었다하니 남좋은 일만한 셈인가, 군산개한으로 무엇보다도 조선쵝고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쌀의 대외수출이 심화되어 1899년 이후12년간 군산세관을 통한 쌀수출은 전체 수출의 80% 이상이었다고 한다.
쌀의 수출은 급격한 증가추세를 나타내 개항 이듬해인 1900년도를 기준으로 1903년은 15배, 1907년은 34배, 그리고 1910년에는 45배로 증가하였다. 이와같이 급격한 쌀의 대량 유출은 한국과 일본의 상당한 미가(米價) 차이로 인하여 미곡수출상에게 수출비용을 제하고도 엄청남 이윤을 안겨 주었다고 한다. 이 당시의 상황을「 群山開港史」에서는 다음과같이 표현하고 있다.
“부근을 전망할 때 세관 옥상에도 해변(海邊)에도 도로에도 눈길이 가는곳에는 도처에 300가마.500가마, 1,000가마씩 산적되어 20만에 달하는 쌀가마니가 배열되어 정렬하였으니....(중략)...... 어 장하다 군산의쌀이여......(하략)”
쌀은 부선으로 운반되어 당시 몇천 톤급 철제 기선으로 실려 나갔다고 한다. 세관청사가 위치하고 있는 현재 장마동은 일견 장미꽃을 영상하기 쉽지만 한자가‘藏未洞 ’으로 쌀을보관한다는 의미로 이때 연유되었다는 말이 있다,
군산은 일찍 고려우왕 6년 (1380년) 여름에 해도 부원수인 최무선이 우리나라 최초로 자신이 만든 화포를 이용하여 왜선 500척을 섬멸하였다는 진포대첩 현장으로 태조실록에 기록되어있다, 군산에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조창(漕倉)이 설치되어 인근 각고을의 전세(田稅)를 거두어 보관하고 이듬해 봄에 경창(京倉)까지 조선(漕船)들이 운항 하였다고 한다.
또한 삼남 유일의 국내 상업 번창지인 강경의 문턱이었기에 금강을 통한 상선의 출입도 빈번하여 수로행상이 왕래하여 상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지금의 팔마산을 중심으로 4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경장시장(京場市場; 현 군산고등학교 입구부근 팔마산려)이 상거래의 주된 포구로서 서천방면으로 가는 도선장(渡船場)이 있었으며 시장인구는 약 500여명으로 번창 하였으나, 조선후기이래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조세의 금납화(金納化)로 점차 조운(漕運)의 기능은 쇠퇴 하였다고 한다.
일본인이 쓴 「群山府使」에 의하면 개항 직전의 군산은 4~5개의 작은 구릉 허리에 몇몇조선 누옥이 점제하고 일본인 거주자는 70여명에 불과하며, 평지에는 갈대와 마름풀만 무성하여 어둠이 짙어지면 어화(漁火)가 명멸하는 가운데 몇줄기 밥짓는 연기만 보이는 한어천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개항이 되자 모든 무역은 일본인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고 군산항는 증기기관선의 입충항이 빈번하여 고정 잔교도 늘리고 1913년에는 군산선 철도를 부설하고 뒤이어 수출입 화물의 유통을 원황히 하기위하여 항만까지 철도 연결하였다.
당시의 항만이 지금은 내항으로 불리워 아직도 개항 지정은 되어있지만 외항 선박은 보기 어렵고 여객선이나 어선이 정박하는 정도로 쇠락한데 부둣가 녹슨 철도레일은 무성한 풀잎 에 묻혀 지난 번성했던 시절의 잔영을 남기고 있다
군산은 개항이후 일본인이 도시계획에 따라 시가지를 조성하여 월명산자락 영화동은 당시 조차지로 할당받아 일본인이 거주 지금도 많은 일본식 가옥과 내항쪽바닷가에는 일본풍 함석지붕의건물이 더러 남아있다.
나군산세관은 군사니를 낮은 둔덕같은 산으로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월명산 끝 금강 넓은 하구와 건너편 장항을 마주하는 내항가 명당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신청사 뒤 창문으로 빤히 보이는 이 내항은 호수같이 육지로 들어온 만으로 금강 하구둑이 생기기 이전까지 바다 반 강 반 이었을 것이다.
내가 탄생한 당시의 터를 알수 없으나 1905년 군산항 축항시에 세관 용지의 일부로 강안을 매축하는 공사와 고정 잔교 한 개 설치하는 것. 그리고 육상설비 (아마 하치장인 듯)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축항공사가 있었으며. 1924년 축항 기공식은 세관 구내에서 거행 되었는데 이때 사이토 총독까지 참석하였다고 하니 군산항의 역할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중요 했던지를 보여 준다 .
그런 과정에서 마련된 2,400여평 넓은 세관 부지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개청이후 9년간 청사를 어떻게 마련하였는지 기록을 찾을 수 없고. 축항 때 마련된 부지에 성명미상의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적 벽돌을 수입하여, 1908년 6월20일에 준공한 구청사 본관은 지금 남아있다.
독특한 유럽풍의 건축양식으로 현존하는 서울역사와 한국은행 본점과 같은 양식이라고 한다 , 외벽은 지금도 색갈이 믿기지 않을 만큼 밝고 투명한 색체의 적벽돌 이지만 내부는 목조이고 지붕은 손바닥 만한 원형 스레트가 예쁘게 모자이크 되어있고. 지붕위에 3개의 바늘탑이 있는 정남향의 고풍스런 건물은 사료적 가치가 높아 전라북도 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어 건축과 학생들의 견학코스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1916년에 건축된 구별관 건물은 전통적인 일본양식으로 일제시대 배경의 영화나 TV 드라마 촬영에 나오기도 하였으나 1993년 현 본관 건물신축으로 철거되고 당시에 드넓게 지어진 세관 창고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지정 장치장으로 구실을 다하고 있다
이제 나는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 채광좋은 정원 자리를 목 백일홍 한 그루에 내어주고 또 다른 100을 자라게 하여 2099년 5월1일 개정 200년이 되는 그날 훌륭한 군산세관 후배들이 100년전 전 군산세관과 지난날 우리가족을 상기 시켜 주길 바라는 염원에서“TIME TREE"라고 이름 하여 대리석에 각인하고 목 백일홍 옆에 단단히 세워두었다....
첫댓글 군산세관도 2번구경갖다왔읍니다 감사 합니다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