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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란
고광식
ARCADE 0023∣2025년 12월 25일 발간∣정가 30,000원∣A5(138×210㎜)∣371쪽
ISBN 979-11-94799-22-1 03810∣(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시는 원본 없이 존재하는 삶의 에피파니이다
[착란]은 고광식 시인・평론가의 첫 번째 평론집으로, 「시와 비평의 관계에 대한 질문―2020년대 시의 좌표계」 「문학장 안에서의 헤게모니 투쟁―지금 여기의 한국 시단을 중심으로」 「ChatGPT, 시인으로서의 (불)가능성―한국의 명시 7선과 ChatGPT의 명시 7선을 중심으로」 등 23편의 비평이 실려 있다.
고광식 시인・평론가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를 졸업했고, 1990년 [민족과 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시집 [외계 행성 사과밭], 평론집 [착란]을 썼다. 청구문화제 시 부문 대상을 수상했고, 아르코 발간 지원, 아르코 발표 지원, 인천문화재단 발간 지원을 수혜했다.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시 창작 연습, 현대시 강독, 문학과 신화, 시 창작과 퇴고 등을 강의했다. 현재 시와 비평 전문지 [포엠피플] 편집인이다.
•― 책머리에
문학은 세계에 던지는 질문이며 그것에 스스로 답하는 것이다. 나는 시로 감성적 질문을 던지고, 평론으로 이성적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던진 질문에 스스로 시와 평론으로 답한다. 내가 시인의 길을 선택한 동기는 고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읽은 후이다. 프로스트의 시는 가야 할 길을 비추어 주는 창공의 별처럼 빛났다. 나는 두 갈래의 길 중 “사람이 적게 간 길”인 시인을 택했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은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준 시가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었다. 그리고 내가 평론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 동기는 윌슨의 [통섭]을 읽은 후이다. 윌슨은 자신의 저서에서 “일급의 비평은 다루고 있는 작품만큼이나 영감에 따라 창조된 독특한 개성의 소산일 수 있다.”고 놀라운 발언을 한다. 사회생물학자인 윌슨이 나를 문학평론가가 되게 했다. 나는 지금도 시와 평론으로 세계에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는 중이다.
특별했던 2024년이 지나고 평론 등단 12년 만인 2025년에 첫 평론집을 낸다. 제1부에서는 문학장 안을 톺아보는 글들로 묶었다. 문학장 안에서 시와 비평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2020년대 시의 좌표계를 나름대로 내놓았다. 그리고 다양한 경로로 등단한 시인들의 헤게모니 투쟁과 신춘문예 제도의 문제점도 살펴보았다. 특히 「ChatGPT, 시인으로서의 (불)가능성」에서 한국의 명시 7선을 ChatGPT에서 써 보게 했고, 둘을 비교 분석했다. 시의적절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제2부에서는 고립의 사회학적 상상을 다룬 글을 묶었다. 페미와 퀴어의 문제에 대해 사회에 질문을 던진 글들이다. 페미는 아직 양성평등이 실현되지 못한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었으며, 퀴어는 성숙하지 못한 인권의 문제로 귀착됐다.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3부에서는 원본 없는 시간들에, 제4부에서는 서로 다른 파편화된 고백의 글들을 묶었다. 제3부와 제4부의 공통점은 우리 사회 현대성의 특징인 고립과 파편화, 우울 등에 대해 각기 다른 시각으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제라도 자본주의 현상 안쪽에 굳게 닫혀 있는 아포리아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제5부에서는 영화가 던지는 상처적 질문의 글들을 묶었다. 「춤으로 통하다」는 단평의 영화 평론이고, 나머지 두 편은 긴 호흡으로 「무뢰한」과 「마돈나」를 분석했다. 「무뢰한」에서는 페르소나의 자의식 문제를, 「마돈나」에서는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보았다.
비유하자면 작가들은 차안대를 쓰고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경주마와 같았다. 그들은 문학장 안에서 형성된 아비투스를 딛고 경주마처럼 작품만 보고 달렸다. 내가 본 작가들은 오직 문학적 열정을 안고 자신을 송두리째 갈아 넣는 수행자들이었다. 자본주의 척도로 보면 문학은 무용하다. 무용한 문학을 대아로 놓고 보는 그들과 함께하는 이 길이 좋다. 하지만, 문학은 무용한 것이 아니라 세계화 시대 제조업 상품의 부가가치와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나는 아직 세계에 던져야 할 질문이 많이 남아 있다. 시로 감성적 질문을 던지길 좋아하지만, 평론으로 이성적 질문도 서슴없이 던질 것이다. 세상엔 던져야 할 질문이 많고, 아직 답을 구해야 할 것도 많다. 내 문학의 시작은 세계에 대한 질문이고, 끝도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일 것이다. 암울했던 고교 시절 낡고 작은 책상 위, 한용운, 윤동주, 이육사, 이상, 괴테, 프로스트의 시가 가야 할 길을 환한 빛으로 비춰 주었다. 국어 시간만 되면 평소와는 다르게 심장이 크게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학업보다는 시 쓰는 데 열중했다. 프로스트의 시처럼 나는 “사람이 적게 간” 문학의 길을 택했고,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당시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 저자 소개
고광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 [민족과 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시집 [외계 행성 사과밭], 평론집 [착란]을 썼다. 청구문화제 시 부문 대상을 수상했고, 아르코 발간 지원, 아르코 발표 지원, 인천문화재단 발간 지원을 수혜했다.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시 창작 연습, 현대시 강독, 문학과 신화, 시 창작과 퇴고 등을 강의했다. 현재 시와 비평 전문지 [포엠피플] 편집인이다.
•― 차례
책머리에 질문들 ‒ 5
제1부 문학장 안 톺아보기
시와 비평의 관계에 대한 질문―2020년대 시의 좌표계 ‒ 15
문학장 안에서의 헤게모니 투쟁―지금 여기의 한국 시단을 중심으로 ‒ 29
ChatGPT, 시인으로서의 (불)가능성―한국의 명시 7선과 ChatGPT의 명시 7선을 중심으로 ‒ 50
신춘문예, 개혁을 허(許)하라 ‒ 73
제2부 고립의 사회학적 상상
타자를 소유하는 두 가지 방식―김선우와 강정의 시 ‒ 93
낯설고 불편한 묵시록―김희업과 김성규의 시 ‒ 111
감정, 부조화와 조화의 시간―구현우와 김기형의 시 ‒ 128
페미, 회복을 위한 아카이브―이소호와 권박의 시 ‒ 146
파편화와 고립의 시간―정영효와 박연준의 시 ‒ 162
퀴어, 무지개 깃발을 흔들다―김현의 시 ‒ 182
제3부 원본 없는 시간들
폭력성에 관한 붉고 긴 질문―한강의 시 ‒ 201
시뮬라시옹하는 원본 없는 시간들―김행숙의 시 ‒ 219
이성 너머의 조각난 사유들―최하연의 시 ‒ 234
현상을 치유하는 착란의 순간들―조연호의 시 ‒ 250
원초적 공간을 걷는 감각적 주체―안희연의 시 ‒ 265
아포리즘 푸른 그늘 아래서―박찬일의 시 ‒ 282
제4부 서로 다른 파편화된 고백
파편화(fragmentation)된 주체의 고백―하린의 시 ‒ 303
비선형적 질서에 관한 메타 시선―안미옥의 시 ‒ 311
서로 다른 합목적성―임승유의 시 ‒ 321
제5부 영화가 던지는 상처적 질문
춤으로 통(通)하다―이준익 감독 「사도」 ‒ 339
페르소나(persona)의 자의식 혹은 균열―오승욱 감독의 「무뢰한」 ‒ 342
레퀴엠(requiem), ‘소수자’라는 분열증적 상처―신수원 감독의 「마돈나」 ‒ 357
•― 책 속으로
이러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시의 본질적 속성은 새로운 물결을 타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시란 창작이기 때문에 발상 단계부터 전통의 기시감을 뜯어낼 필요가 있다. 전통적 서정시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 때 그 위에 교훈과 의미를 얻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현대시는 무교훈적 이미지를 만든다. 시 속에 내재된 교훈과 의미를 지우기 위해 젊은 시인들은 전통과 단절해야 했다. 이제 시인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을 들여다본다. 시 쓰기는 우리가 모르는 우주의 영역에 발을 딛는 것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전위시를 쓰는 시인들은 선과 색과 구성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추상화를 닮으려 노력한다. 이러한 자의식에서 출발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시 쓰기는 2010년대를 넘어 2020년대까지 시단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2020년대의 시는 더욱더 실험적이다. 시인들은 전통적 서정시의 문법보다는 새로운 서정시의 문법을 만들어 내는 데 여념이 없다. 시는 2010년대보다 더 길어지고 실험의 영역은 넓어졌다. 심지어 전통적 서정시가 강세였던 신춘문예에서도 2020년부터 새로운 문법으로 창작된 시들이 자주 당선된다. 시의 경향이 분화되고 파편화되는데 비평은 본질적 분석을 하지 않는 추세이다. 당혹스러운 작품에 대해선 이론의 틀에 맞추어 재단한다.
―「시와 비평의 관계에 대한 질문―2020년대 시의 좌표계」
아비투스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만든 용어로 한 인간의 행위와 인식을 결정하는 틀이다. 인간은 사회화 과정을 통하여 자신이 속한 집단의 규범을 배우고 가치에 동화되어 간다. 각자 처한 계층에 따라 가치 체계는 다르게 형성된다.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자기 삶의 규범을 내면화한다. 현재 우리나라 시단의 시인들도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 자장 안에서 활동한다. 전통과 권위가 있는 문예지나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들은 부르디외가 말한 사회 자본과 상징 자본을 갖고 자신들만의 에토스를 만든다. 반면에 권위지나 신춘문예가 아닌 매체로 등단한 시인들은 그들과 다른 에토스를 만든다. 시단은 어느 매체로 등단했느냐에 따라 등급을 정한다. 이러한 문단의 실재적인 상황은 시인의 의식과 행위를 결정한다. 권위지로 등단한 시인들은 선민의식을 갖고 자신들만의 카르텔로 결집한다. 문단의 중심부로 진입하지 못한 비권위지 출신 시인들은 실력이 있는 경우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소외되고 파편화되어 고립된다. 이 두 집단은 문학장 안에서 헤게모니 투쟁을 한다. 그리고 제3지대의 등단 장사꾼들과 출신들도 그들만의 독특한 에토스를 만들어 문학장 안으로 들어온다.
―「문학장 안에서의 헤게모니 투쟁―지금 여기의 한국 시단을 중심으로」
자크 랑시에르는 자신의 저서 [감성의 분할]에서 “기계 예술들은 ‘기계’ 예술들로서 결국 예술 패러다임의 변화, 그리고 예술과 그 주제들의 새로운 관계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확신에 차서 말한다. 랑시에르가 대화형 인공지능인 ChatGPT를 예견한 듯한 발언이다. ChatGPT가 출시되고 우리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특히 예술가 세계에선 ‘AI가 예술가를 대체할 것이다’라는 우려가 크다. ChatGPT가 시를 쓴다. 요구하는 대로 방대한 정보를 가지고 시를 쓴다. 어떤 주제의 시이든 물어보면 한 편의 시를 순식간에 만들어 낸다. 이제 문학작품집의 판매가 급감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주제와 키워드를 입력값으로 ChatGPT가 생성한 작품을 감상하면 되기 때문이다. 즉,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창작자인 동시에 독자인 이들은 위축된 예술계를 더욱더 벼랑 끝으로 몰아갈 수 있다. ChatGPT는 매년 학습 규모와 속도가 개선된 버전이 개발되어 출시된다. 따라서 개선될 때마다 예술 작품 창작 수준도 높아질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상위 4% 안에 들지 못하는 예술가들은 기계 예술의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대부분의 창작자들은 ChatGPT를 도구로 활용하여 창작하는 기계 예술의 시대를 거리낌 없이 즐길 것이다. 다윈이 주장한 적자생존의 원리가 적용되는 시대를 예술가들은 맞이했다.
―「ChatGPT, 시인으로서의 (불)가능성―한국의 명시 7선과 ChatGPT의 명시 7선을 중심으로」
표절은 남의 작품을 전부 또는 일부를 베껴 자기 작품처럼 발표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자기 것처럼 작품화시키는 것도 포함된다. 이 때문에 남의 글을 인용할 때는 출처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논문에서는 6단어 이상 연쇄 표현이 일치할 때 표절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것은 논문의 경우이다. 짧은 시에는 더 엄격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 시에서 표절하는 경우는 좋은 작품을 쓰고자 하는 열망은 강한데 아이디어가 부재할 때 나타난다. 특히 등단에 대한 욕망이 크다 보면 가이드라인을 넘게 된다. 시인 지망생들에게 신춘문예는 화려한 등용문이다. 신춘문예에서 표절 사건은 시 부문이 많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신문사마다 신춘문예 당선작을 발표하면 문인 지망생들은 당선작을 읽고, 표절작인지를 검증한다. 특히 신춘문예공모나라 같은 카페에서 활동하는 문인 지망생들의 활약이 크다. 이 카페는 회원 수만 7,500명이 넘는다. 이들은 카페를 무대로 집단지성을 발휘한다. 당선작이 표절임이 드러나면 해당 신문사에 제보하는 등의 행동으로 잘못을 바로잡는다.
―「신춘문예, 개혁을 허(許)하라」
우리는 서로에게 밥이어야 한다. 식물은 동물의 밥이 되고, 동물은 결국 식물의 밥이 된다. 이왕 밥이 되어야 한다면, 멜랑콜리(melancholy)한 감정이나 연민을 벗어 버리고 따뜻한 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때로는 환각제를 복용했을 때처럼 ‘그대’와 ‘나’ 동시에 입을 벌릴 수 있지만, 타자라는 밥상 앞에서 ‘나’는 ‘내’ 몸속의 부드러움이나 딱딱함을 점검해야 한다. ‘내’ 몸속에서 ‘그대’가 아주 편안히 누워 있을 것에 대한 걱정이다. ‘내’ 몸속은 아주 아늑하고 부드럽다. 타자와 하나 되기 위해 준비된 몸이다. 그래서인가 ‘내’ 몸속에 받아야 할 타자가 이 별에는 끊임없이 태어나고, ‘나’는 그들이 소름 끼치게 그립다. ‘나’는 아, 대상과의 합일을 위해 입을 벌리고, 사뭇 괴로운 시늉만 한다. 그러므로 김선우에게 있어서 소유 행위는 타자와 하나 되는 호모루덴스적인 동일시의 몸짓이다.
―「타자를 소유하는 두 가지 방식―김선우와 강정의 시」
처절하게 파멸로 가기를 원하는 「우는 심장」은 세상의 중압감에 시달려 망가진 영혼을 표현한다. 시적 화자는 “심장은 나에게 묻지/왜 아직 살아 있는 거지”라고 특별한 질문을 건넨다. 현재 화자가 떠맡은 삶의 무게가 “나를 죽이고 김이 나는 심장을 꺼내 가”라는 진술에 농축되어 있다. 현재를 무효화시키고 싶은 열망은 스스로 자아를 소유하기를 거부한다. 자아가 상실되는 지점에서 그는 정신적 그림을 그리고 있다. 시적 화자는 자기가 세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며, 자신을 몰락하는 자로 정립한다. 왜냐하면, 세계 안에서 자신이 떠맡고 지향해야 할 것들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적 층위에서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본질적 환멸 속에서 몰락하고자 하는 존재로 처절하게 무르익는다. 그러므로 김성규의 시적 화자는 깨진 거울을 들고 뜨거운 자기애로 존재론적 기능을 펼쳐 보인다.
―「낯설고 불편한 묵시록―김희업과 김성규의 시」
낯선 감정의 발견은 감정의 투영 때문에 가능해진다. 감정은 부조화로 혼돈을 겪다가 대조조화나 조화로 질서를 잡는다. 조화는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정동으로 자리 잡고 있다. 감정의 투영은 살고자 하는 의지를 이끄는 동력이다. 이 때문에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사물과 타자에게 감정을 투영하는 것은 필요하다. 구현우와 김기형 시인은 조화의 정동이 발현될 때마다 가깝고 먼 곳에 감정을 투영한다. 이러한 행위로 두 시인의 시 세계는 스스로 통합적 원리를 찾아 낯설어진다.
―「감정, 부조화와 조화의 시간―구현우와 김기형의 시」
오래된 젠더적 악몽을 극복하고자 천성적인 상태로의 회복을 노래하는 두 명의 시인이 있다. 거침없이 쏟아 내는 페미의 시적 전개에서 이소호와 권박은 특유의 풍경을 만든다. 새로운 기록을 하는 과정에서 이소호([캣콜링], 2018)의 시는 억압된 조형적 섹슈얼리티의 표정을 짓는다. 반면에 권박([이해할 차례이다], 2019)의 시는 ‘젠더’로 길든 육체에 대한 강박을 재현한다. 두 시인은 가장 최적화되어 있는 시로 성의 구분이 잘못된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밝히는 데 열중이다. 이소호는 2020년 이후 더욱더 첨예해지는 페미 논쟁을 예견하는 듯 억압된 섹슈얼리티의 표정들을 발화하고, 권박은 최근의 증폭되는 생존 논리를 뒷받침하는 듯 육체에 대한 심리적 상태를 자신의 시집에 담아냈다. 시가 가지고 있는 주술적 힘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음을 두 명의 시인은 증명한다. 이소호와 권박의 시가 발화하는 지점에서 두 줄기 강렬한 토네이도가 일기 시작한다. 젠더적 악몽에서 깨어나고자 강력한 시의 기둥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페미, 회복을 위한 아카이브―이소호와 권박의 시」
4차 산업은 기술의 융합으로 사회의 진화를 급속하게 이루어 냈다. 특히 인공지능과 로봇 공학은 세계와 상호작용을 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또한 산업화 이전의 공동체 속에 존재하던 자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제 다수의 현대인은 물질문화의 변화를 따르지 못해 문화 지체 현상을 겪는다. 이러한 물질과 비물질 간의 속도 차이로 현대인들은 파편화되고 고립되는 시간이 늘어난다. 현대인들의 다수는 주체가 탄생하는 것을 극히 꺼리고 자기 정립보다는 익명의 존재로 남기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의 자아는 기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과거 회귀적인 태도를 보인다. 따라서 공동체 속에서 전체와 함께했던 시절의 향수에 젖어 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공동체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익명의 존재였을 때가 없었다. 산업화 이전의 시대에 우리는 모두 자기 정립이 된 상태로 정체성이 분명했다. 하지만 산업화 시대에는 주체의 출현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주변으로 몰린 현대인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우리의 시간은 고립된 순간에만 오로지 자기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의 파편화와 고립은 확장을 거듭한다.
―「파편화와 고립의 시간―정영효와 박연준의 시」
이성애는 생물학적 성이 다른 사람에게 성적으로 매력을 느낀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성애자들이다 보니 성에 있어서 이성애를 진리인 것처럼 인식한다. 하지만, 이성애는 진리가 아니다. 퀴어들은 생물학적 성이 같은 사람에게 성적으로 끌리고 성적 행위를 갈망할 뿐이다. 이성애자들은 자신과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지고 있는 동성애자와 양성애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무성애자와 범성애자 그리고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증오하고 멸시한다. 이성애자들은 이성애 주의를 강화하여 이성애 이데올로기를 갖는다. 따라서 이들은 이성애를 벗어난 성적 지향을 일탈로 보고 심지어는 범죄자 취급한다. 이러한 증오는 일부 종교인들까지 합세하여 끊임없이 증폭되고 확장된다.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된 퀴어들은 협박과 살해 위협에 노출되기도 한다.
―「퀴어, 무지개 깃발을 흔들다―김현의 시」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인간은 모두가 미치광이이기 때문에, 미치지 않은 사람도 다른 형태의 광종으로 보아 미치광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말한다. 파스칼이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 본 이러한 아포리즘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한강은 광기로 촉발하는 폭력을 정면에서 응시한다. 폭력은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직접적인 희생자와 그 가족에게 폭력은 트라우마로 남아 평생 심리적 고통을 준다. 이들이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상처가 너무 넓고 깊기 때문이다. 폭력의 생존자와 그 가족에게는 지속적인 치유로 안정적인 삶을 살게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사실을 왜곡하며 끊임없이 2차 가해를 일삼는 일그러진 사람들이 존재한다. 특히 그것이 국가 폭력일 경우 가해자 편에 서서 생존자와 그 가족을 왜곡된 시각으로 보고 공격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분단으로 인한 전쟁과 반공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독재자 때문이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의무가 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는 국가가 무고한 국민을 학살한 사실이 존재한다. 그 피해가 너무 크고 끔찍해 마주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국가 폭력에 의한 상처의 치유는 지연되면 안 된다.
―「폭력성에 관한 붉고 긴 질문―한강의 시」
시(詩)뮬라시옹하는 과정에서 김행숙의 시는 시적 대상을 촉발하는 감성으로 시의 공간을 끊임없이 확장한다. 상상력이 그려 내는 이미지가 특별한 감성으로 우리의 가슴에 달라붙기도 하고, 사물을 가공하는 몸짓으로 세계에 통일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시적 주체는 “구름의 창과 구름의 창이 그들의 지붕 위에서 부딪치고 있다. 구름의 창 같은 것이 아니라 구름의 창”(「구름 전쟁」)처럼 독자에게 구름의 이미지가 서로 포개진 가상적 실재를 경험하게 한다. 물자체를 촉발하는 감성이 강해 어느덧 서로 충돌하는 구름을 보며 ‘이미지’는 요동친다. 구름을 가공하여 구름의 창으로 만드는 과정이 매우 직관적이다. 감성의 촉발은 물자체에 대한 이해이며 허구이다. 때로 시(詩)뮬라시옹은 “천국에 의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른쪽과 왼쪽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천국에도 있는 것이 이 세계에도 있으면 좋은 것이라는 뜻으로 들렸다가”(「천사에게」)와 같이 사물을 감성적으로 가공한다. 따라서 시적 주체는 천국에 있는 의자인 가상 실재를 시뮬라시옹한다. 그래서 화자는 시적 진실이 지배하는 독자의 세계를 오랫동안 사랑한다. 우리는 화자가 물자체를 촉발했는지, 물자체가 화자의 직관을 촉발했는지 알 수 없는 가공의 세계에 착륙한다.
―「시뮬라시옹하는 원본 없는 시간들―김행숙의 시」
소리로 점화해도 기억이 반응하지 않는다. 기억이 조각나고 잘게 부서져 경험의 시공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험의 배경이 되었던 것들을 원래대로 복기했을 때, 과거는 현재 부름에 호응한다. 지금 여기에서 화자는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 건반을 책상 위에 그려 놓고, 가만 귀 기울이고” 있다. 과거의 ‘내’가 기억의 그물에 온전히 걸려 현재의 ‘내’가 되어야 한다. 당시 그곳의 배경이 되었던 것을 놓치지 않고 건져 올려야 한다. 그렇게 사라졌던 기억의 조각을 불러오면 “일생일대의 화음으로 나를 부활시키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내’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나’를 철저히 비껴갔던 기억의 조각이 하나의 형상으로 드러나야 한다. 과거의 조각을 맞춰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야 잃어버린 ‘나’를 찾아 성찰할 수 있다. 때로는 조각난 기억 때문에 고통이 증폭되어 행위를 멈추기도 한다. 그러나 행위 중지를 선언하면 “나는 나의 다음 페이지가 무조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해진다. 시적 화자는 건반을 두드리며 ‘당신’으로 가는 길을 연다. 그곳에 ‘당신’과 ‘나’는 기억으로 하나의 세계를 완성한다.
―「이성 너머의 조각난 사유들―최하연의 시」
이성적인 감각으로 볼 때 해가 지는 저녁 무렵은 붉은 노을로 아름답다. 서쪽 하늘에 꽃들이 만개하여 나부끼는 것 같기도 하고, 새들이 붉은 꽃밭을 날갯짓으로 흩트리며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이성적인 감각을 무너뜨린다. 시각을 착란시키자 “하늘이 녹물처럼 붉게”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착란의 상태는 “모든 기억이 한 개의 덩어리였어”라는 깨달음을 얻게 만든다. 이러한 진술은 증폭을 거듭하여 “벽지는 썩고 벽은 자꾸 물을 품고 달관한 듯 세상 쪽으로 기울었다”는 기이함을 드러낸다. 이제 이 집은 편히 쉴 수 없는 공간이 돼서 달력이 필요 없다. 따라서 화자는 벽에 “달력 대신 뭉크의 판화(죽음의 집)를” 걸어 놓았다. 그러자 실재하는 집은 죽음의 이미지로 꿈틀대기 시작한다. 집 안과 집 밖의 세계가 서로 맞물려 죽음을 연주한다. 실재하는 존재는 창을 통하여 “죽은 사람을 흰 천으로 덮어 놓고 여자가 손으로 입을” 가리는 허구의 존재와 마주한다. 이성과 착란이 맞물리자, 화자는 바다거북처럼 죽고 싶었다.
―「현상을 치유하는 착란의 순간들―조연호의 시」
역광의 세계는 금지된 것들로 가득하다. 흑과 백의 분명한 대비 때문에 버려져야 할 것들이 많다. 시적 화자는 어둠 속에 버려진 것들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검은색으로 칠해진 누추로 시달린다. 희망의 초월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역광의 세계에 있을 때이다. 그렇기에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 수 있다. 버려진 것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는 일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역광의 세계에 있어도 ‘나’는 ‘나’로 남아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역광 안의 ‘나’는 ‘나’를 유지하며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갈 수 있는 존재이다. 이 순간은 원초적 의미를 찾아 삶의 이면을 탐구하는 시간이다. 시적 화자는 중심이 되지 못한 주변의 삶에 촉수를 댄다. 그곳에 삶의 무게에 눌린 슬픔이 있다. 강렬한 햇볕 때문에 짙어진 어둠은 “언덕을 함께 오르는 마음”을 갖게 한다. 안희연은 시적 화자를 통해 사물에 부여된 의미를 지운다. 그러자 “불탄 나무 아래서 깜빡 낮잠을” 자는 여유가 생긴다. 금지된 것들 사이에 감각적 주체가 된 화자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이해하게” 되는 존재로 거듭 태어난다. 이렇듯 역광의 세계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곳이다.
―「원초적 공간을 걷는 감각적 주체―안희연의 시」
박찬일의 시적 발화는 일찍 노숙해진 시인들처럼 지적 자만심에 차 있지 않고, 그렇다고 겸손이 지나쳐 서정의 나약함에 빠져 있지도 않다. 지금 여기의 시각에서 본다면, 박찬일의 시는 2000년대 미래파 이후 나누어진 두 가지 경향 어디에도 서 있지 않다. 미래파를 중심으로 하는 시인들이 비선형적 세계로 치달았다면, 전형적 서정시를 중시하는 시인들은 선형적 세계를 붙잡았다. 선형적 길은 멀리까지 코스모스가 가꾸어져 있었고, 비선형적 길은 잡풀만 무성하였다. 박찬일의 발길은 두 갈래 길을 외면하고 제3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의 시는 미래파처럼 질서를 파괴하지도 않으며, 전통적 서정시처럼 질서의 프레임에 갇히지도 않는다. 그의 인식이 가닿는 곳에 독창적인 아포리즘이 높고 푸른 파도처럼 일렁인다. 시편마다 압축된 형식으로 발화된 아포리즘이 고유한 날개를 편다.
―「아포리즘 푸른 그늘 아래서―박찬일의 시」
가끔 세상이 싫어질 때, 우리는 자신을 은폐시키며 놀았던 숨바꼭질을 떠올린다. 그 놀이는 약자인 우리에게 세상의 폭력으로부터 어떻게 보호색을 띠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놀이가 갖는 의미 속에 세상의 잔인성이 내포되어 있다. 네 발로 걸었던 시절의 ‘내’가 그랬고, 직립 이후의 ‘나’ 또한 그랬다. 그리고 인본주의를 무참하게 짓밟던 근현대의 양대 이데올로기가 그랬다. 홀로코스트를 우리가 동의할 수 없듯이 우리는 동의할 수 없는 불길한 징조가 보이면 “겨울잠 자기에 가장 좋은 곳은 통조림 속이다”처럼 은폐를 은밀히 생각한다. 인간에게도 겨울잠 같은 게 필요하다. 만약 인간이 생득적으로 겨울잠을 자는 존재였다면 인간에 의해 저질러진 홀로코스트는 그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다.
―「파편화(fragmentation)된 주체의 고백―하린의 시」
안미옥 시인은 질서 잡힌 세계 밖에서 추방당한 현상을 바라보고 있다. 사물은 아직 누구도 범접하지 못한 순수성을 유지하며 스스로 변화한다. 존재의 고정성을 확립하는 것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다. 사물은 부단한 운동 과정으로 언제나 즉자적 위치를 벗어난다. 이 때문에 안미옥은 서정시의 전통적 문법이 가지고 있는 미학을 파괴하고 새로운 미학을 건설한다. 시적 화자가 ‘녹슨 거울’과 ‘아파트 놀이터’와 ‘사람’으로 비선형적 질서를 만든다. 착륙 직전이라고.
―「비선형적 질서에 관한 메타 시선―안미옥의 시」
시적 화자가 “어디에 있었어” 묻는다. 장소성을 묻는 이 물음은 구체적이고 독특한 곳을 지칭한다. 네가 있었던 그곳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소였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처럼 타자가 있는 곳을 살펴봄으로써 화자가 안주할 장소를 탐색한다. 질 높은 생존을 위해선 환경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화자는 “그전에는 베란다 한구석에서 겨울을 났지”라고 지리적 위치와 공간을 환기한다. 화자의 물음은 익명화되어 사라진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다. 언제든지 지금 여기는 정체성이 무너질 수도 있는 곳이다.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식은 “그전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색깔의 꽃을 피워 내던 화초가 심겨 있었고”처럼 간절하다. 고립된 화자의 순수자아는 세상 밖으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밝은 햇볕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는 언제나 집 안에 갇혀 있다. 스스로 숨죽이고 있는 모습이 물화의 세계에서 비인간화되어 있다. 화자가 “부엌 책장 위 하얀색 바구니에” 있다는 것은 존재의 은폐이다. 세계라는 무한 공간에 자신도 모르게 던져진 자의 슬픔이다.
―「서로 다른 합목적성―임승유의 시」
엔딩 시퀀스에서 왕이 추는 춤은 흥에 겨워 장단을 맞추는 율동이 아니다. 그것은 생사를 건 전쟁터에서 북소리에 맞추어 추는 춤도 아니고, 즐거운 잔칫날 흥을 돋우기 위해 추는 춤도 아니다. 왕의 춤은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 속에서 참혹하게 죽인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의 스토리텔링이다. 폈다가 접은 부채는 사도 세자의 말처럼 허공으로 날아간 화살의 떳떳함이다. 그러므로 왕의 춤은 아버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는 통(通)의 춤이며 내적 이해로 시작하는 성실한 대화이다.
―「춤으로 통(通)하다―이준익 감독 「사도」」
가면의 자의식에 있어서 오승욱의 「무뢰한」은 투사된 파토스(pathos)로 자아를 드러내기도 하고, 사회적 위치를 확인하고 타자와 동일시하는 아비투스(habitus) 속으로 잠입하기도 한다. 자본주의가 특수한 환경으로 주체를 밀어 넣을 때, 우리는 운명처럼 주어진 구조와 자신을 연결해 특별한 성향을 만들어 낸다. 오승욱의 영화 속 주체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적 위상에 맞는 기질로 형사 정재곤과 마담 김혜경처럼 가면을 쓰고 감정을 촉발하여 진짜 자아를 은폐시킨다. 그들은 가슴속에서 뭉게구름처럼 생성되는 연민을 억누른다. 그리고 가면은 자아를 끊임없이 확장할 수 있다는 환각에 빠져 주체를 사회적 요구에 충실히 따르게 한다. 형사 정재곤이 범인을 잡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도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칼 융이 언급한 ‘가면을 쓴 인격’인 페르소나는 영화 「무뢰한」에 성실하게 녹아든다.
―「페르소나(persona)의 자의식 혹은 균열―오승욱 감독의 「무뢰한」」
버스 안의 사건이 시차적으로 교차하는 끝부분의 시퀀스는 타자인 마돈나를 자신으로 동일시하는 의식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표상한다. 카메라는 마돈나가 버스 안에서 폭행당하는 장면을 담아내다가, 버스 밖에서 롱 테이크로 윤간당하는 장면을 잡는다. 그렇게 윤간당하고 개처럼 버려졌다는 마돈나 동료의 말에 해림은 버스 안에서 양수가 터졌던 자기 모습을 떠올리며 마돈나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갈대가 우거진 벌판에 혼자 누워서 아이를 출산할 때, 그 처절함을 알리는 사운드가 화면 밖으로 솟아오른다. 카메라는 마돈나가 희생당하는 버스를 촬영했던 기법처럼 벌판 한가운데 누워 있는 해림을 롱 테이크로 잡는다. 이와 같은 촬영 기법으로 감독은 상처의 결절점이 만나는 지점을 확실하게 미장센에 담아낸다. 신수원 감독은 아이를 넣은 가방을 강물에 던지고 해림이 숨죽여 통곡하는 순간에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아이를 죽인 것은 누구인가?” 묻는다. 이에 대한 우리의 답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래야 ‘자연 상태’라는 동굴의 우상을 깰 수 있다.
―「레퀴엠(requiem), ‘소수자’라는 분열증적 상처―신수원 감독의 「마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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