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924 / 마침표가 느낌표로 (요한복음11:40-44)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면 나사로의 가정은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세 남매가 어렵게 살아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성장하여 겨우 살만한데 오라비의 몸에 병이 듭니다. 의원들이 고치지 못하였고, 예수님께 치료해 주시길 요청했지만 예수님마저도 찾아 주질 않으셨습니다. 결국 그렇게 투병하다가 나사로는 젊은 나이에 죽게 됩니다.
본문을 보며 우린 예수님에 대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보게 됩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을 지경에서 예수님의 기도라도 받고 싶어 급한 전갈을 보냈는데 주님은 어째서 다른 곳에서 시간을 다 보내시고 오시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정황만 놓고 보면 예수님은 마치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의구심이 맞았습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마침 마르다 마리아 자매가 늦게라도 오신 주님을 영접했기에 다행이지 시험에 들어 주님을 영영 등지고 떠났다면 주님의 그러한 태도는 영혼을 구하는 게 아니라 귀한 영혼을 둘씩이나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본문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나사로의 투병도, 누이들의 희망도, 사람들의 성원도, 그가 죽음으로 인하여 끝나버렸습니다. 나사로 사건에 마침표가 찍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표가 찍힌 것은 그들뿐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더 이상 손 써볼 수 없고, 주님도 도와주시지 않는 듯한 상황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다 끝났다는 의미에서 우리 인생에도 마침표가 찍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본문은 이렇게 마침표가 찍어진 상황에,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장면에서부터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만약 목사인 제가 그리했다면 성도들은 아마도 ‘이왕에 오실 거면 진즉에 오셨어야지요. 최소한 장례식엔 참석하셨어야지요. 다 끝난 뒤에 이미 마침표가 찍어진 상황에 오셔서 뭘 어찌 하자시는 건가요?’ 라며 냉랭하게 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목사는 사람인지라 혹 그럴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무책임하시거나 즉흥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비록 지금,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난 듯한 마침표 인생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예수님만 계시면 예수님은 아직 우리의 인생에서 마침표를 찍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는 그 때부터가 시작인 것입니다.
모두들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두들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마침표를 찍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죽어 무덤에 장사된 이후에도, 시간이 나흘이나 지났고, 무덤 문이 돌로 굳게 막혀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고집스레 마침표를 찍지 않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들은 나서서 안 된다고 하는데도 예수님은 끝내 마침표를 찍지 않으십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나사로 이야기는 나사로가 '살았느냐 죽었느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 사건의 교훈은 우리가 우리 인생에 '마침표를 찍을거냐 말거냐'를 묻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내 인생의 '마침표를 인정할거냐 말거냐'를 묻는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인생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하더라고 예수님이 마침표를 찍으시기 전까진 결코 여러분 스스로가 미리 앞서서 자신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지 말아야 합니다.
‘난 끝났어!’ 하는 순간이 끝난 것입니다. ‘다 틀렸어!’ 하는 순간부터 다 틀려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오라비의 죽음이라는 절대 사실과 이제 다 끝났다는 현실에서의 마침표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에게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어떤 상황에서건, 주님은 우리에게서 믿음을 기대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하나님이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은 일에 대해, 우리가 흔들림 없이 하나님만 신뢰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이 마침표를 찍지 않으시는 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기적이 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는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기적을 보고 믿으려 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기적을 보고, 누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현실에서 여러분에게 일어나고 되어지는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십니다. 몰라서 지체하시는 것이 아니고, 싫어서 외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결코 늦어서 기회를 놓치시는 법도 없습니다.
본문 앞부분을 보면 11절에서 주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시면서 베다니를 찾아 오셨습니다. 이 말 뜻을 제자들이 못 알아듣자 14절에서는 "나사로가 죽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음을 주님도 알고 계셨습니다.
게다가 주님이 알고 계셨던 중요한 사실이 또 하나 있습니다. 본문 42절을 보면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라고 하셧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은 것만 아신 것이 아니라 나사로 당시 사람들의 믿음이 죽어 있음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결국 주님이 깨우러 가시고, 다시 살리려고 하신 것은 죽은 나사로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죽은 믿음까지도 깨우시고 살리시는 것이 주님이 의도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이 시간 우린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만 합니다. “지금, 나의 믿음은 죽어있는가? 살아있는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믿음은 죽어있습니까? 살아있습니까?”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다면 우리의 현실에서 우린 어떠한 마침표도 찍지 말아야 합니다. 모두가 끝났다고 해도, 또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끝난 것 같을지라도,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린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아직 안 끝났다. 이제부터 시작이니라.”
본문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건 놀람입니다. 충격입니다. 도저히 믿지 못할 일입니다. 이걸 보면서 우리가 “아 주님께는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를 느낄 때 우리 안에서는 이제까지의 마침표가 느낌표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침표를 끌어안고 끝났다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기적과 은혜를 통해 느낌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다들 예수가 죽었다며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생에까지 마침표를 찍었지만,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마침표를 지우시고 온 세상에 느낌표를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느낌표는 이것입니다.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믿습니까?
모든 것이 끝난 자리, 실패와 아픔을 안고 마침표를 찍을 수밖에 없는 삶의 자리에 주님이 찾아오시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마침표를 찍었고, 가족들도, 모든 사람들도 다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이성과 의학, 과학도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수님은 그 마침표들을 느낌표로 바꾸십니다.
예수님이 역사하시니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죽은 나사로의 마침표가 다시 사는 느낌표의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나사로가 살았다! 오라버니가 살았다! 죽은 자가 살아나다니!”
이 기적의 사실 앞에서 당시 사람들의 마침표 믿음도 느낌표 믿음으로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이런 것도 가능하시구나! 라고.
이 믿음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도 느낌표가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는 언제나 이런 반전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 말씀하실 때 하나님이 요구하셨던 것은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모리아 산 정상에 서서 아들 이삭을 죽이기 위해 칼을 빼어든 아브라함의 심정은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마침표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다시 돌려받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복을 안고 산을 내려오는 아브라함의 심정은 분명 느낌표의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역사는 홍해 앞에서도 일어납니다. 해방되어 나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죽이겠다고 이집트의 기병대가 추격해 옵니다.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홍해가 가로막습니다. '이제는 죽었다, 이제는 끝났다'라고 생각되는 순간, 하나님은 그들 앞에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바다 가운데 난 길을 걸어가면서 벅찬 감격과 놀람으로 그들의 가슴은 얼마나 벅찼고, 터질 것 같았을까요? 마침표의 인생이 느낌표의 인생으로 바뀌는 순간인 것입니다.
오늘 저는 홍해의 기적은 물론 나사로의 기적이 우리들의 시대에도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은혜임을 믿기에, 나사로의 기적이 여러분의 것으로도 나타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나사로에게 되어 진 일이, 나에게도 되어 질 일일 줄로 믿으세요.
혹 믿지 못하시는 분을 위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나 더 예로 살펴보겠습니다.
평생에 자식하나 낳기를 고대하던 아브라함 부부가 나이 각각 99세, 98세가 되어서 산부인과에를 갔습니다. “우리도 애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묻자 산부인과 의사가 생물학적, 의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당신 나이에서 더 이상 정자가 생산되질 않는데 어찌 아이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당신 부인도 그 나이에 난소를 배란할 수 없으니 임신하는 건 절대 불가능 합니다.”
산부인과 의사로부터 임신 불가라는 판정을 받은 아브라함 부부의 실망은 절망에 가까웠습니다. “이대로 끝난 것인가?” 아니었습니다. 세월은 그들 부부에게 마침표를 찍어 주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부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년 이 맘 때에 너희가 아들을 낳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꿈만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감격의 느낌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야 말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세상에서 받은 마침표가 하나님이 주시는 느낌표로 바뀐 순간이었습니다.
시간과 상황만 다르고, 사람과 대상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산부인과에서 임신 불가의 마침표를 받았다면 오늘 우리는 직장에서 실직의 마침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병원에서 치료 불가의 마침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산부인과에서의 마침표를 받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느낌표가 나타났듯이, 직장과 가정에서 또 사회에서 받은, 여러분에게 있는 모든 마침표들도 결국엔 하나님의 느낌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 되게 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된 일이 유독 나에게만은 안 될 거라는 불신과 패배자의 생각을 버리세요. 사라에게 됐다면 내게도 될 것이고, 나사로가 살았다면 나도 살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안 된다고 믿으시겠습니까? 된다고 믿으시겠습니까?
세상이 주는 마침표를 믿으시겠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느낌표를 믿으시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믿든 하나님은 믿음대로 되게 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계셨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세상이 준 마침표를 받아 들고, 이젠 그만 끝내야 하나? 여기서 그만 두어야 하나? 라고 하지 마세요.
예수 믿는 사람은 절대 마침표로는 그 삶이 끝나지 않습니다.
무능한 아브라함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바로 죽겠다 싶은 나의 모습이며, 무덤의 권세에 갇혀 썩어 가는 나사로는 우리의 현실이요 운명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십니다.
인생의 마침표가 느낌표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그 무엇이? 그 누가? 우리에게 마침표를 선포한단 말입니까?
주님이 마침표를 찍지 않으시는 한 우린 절대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설사 이미 마침표가 찍혔을지라도 우린 그것을 들고 주님께로 나갈 것입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하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친구가 실패했도다. 그러나 내가 일으켜주러 가노라"
"우리 친구가 병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고쳐주러 가노라"
"우리 친구가 마침표를 받았도다. 그러나 내가 느낌표로 바꿔주러 가노라"
예수님은 이렇게 저와 여러분을 찾아와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저와 여러분을 살리시고, 고치시고, 승리케 해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런 저와 여러분을 보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