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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7:24, 개정)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개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8:1, 개정)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개정)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고전 1:18, 개정)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원문을 직역하면 “십자가의 말씀”이란 뜻으로 구원에 이르는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구원에 이르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 로마서 7장과 8장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을 접하면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실패하는 바울의 모습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7장의 마지막에서 절망하고 있을 때 그가 한 법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바울은 “하나님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다시 설명하면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그렇게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한 이후에 자신의 결심과 노력이 아닌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그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이후에 그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로마서 7장 25절입니다.
(롬 7:25, 개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지금 바울은 자신의 노력과 결심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구원의 방법이 아닌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 8장에서 그것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롬 8:1, 개정)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개정)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울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하나는 “죄와 사망의 법”이고 또 하나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죄와 사망의 법”일까요?
“십자가의 도를 아십니까?”라는 책을 저술한 김호성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 안에서 사는 사람들부터 살펴보자.
10계명 중 1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다. 이 말씀을 듣게 되면, 죄와 사망의 법의 원리로 이 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야무진 결단을 한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1계명을 기필코 최선을 다하여 지키리라 결심을 한다. 그러나 결과가 어떤가? ‘처절한 넘어짐’이다. 왜냐하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계명도 같은 원리로 지키다가 실패한다. 3계명도 마찬가지다. 나머지 계명들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믿는 세월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죄책감, 정죄감만 늘어난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생각만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김호성 『십자가의 도를 아십니까?』 고양: 베드로서원, 2018. pp. 116-117.)
“죄와 사망의 법”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자신의 힘으로 야무진 의지의 결단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고 나서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던 사람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의 성령의 법은 무엇일까요? “십자가의 도를 아십니까?”라는 책을 저술한 김호성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만일 이 성도가 십계명 중 1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을 들었다 하자. 이 성도도 역시 결단을 한다.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결단한다. 하지만 두 개의 결단을 한다. 하나는 은혜의 결단 혹은 믿음의 결단이요, 또 하나는 의지의 결단이다. 죄와 사망의 법 안에 사는 사람은 의지의 결단만 한다. 그러나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 사는 사람은 은혜의 결단을 한다. 은혜의 결단이 무엇인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는 방법이다.
즉 1계명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을 때 먼저 은혜의 결단을 하나님 앞에 한다. 은혜의 결단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지 않으시면 제1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내 힘으로는 어림도 없으니 주님께서 도와달라고, 성령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도와달라고 고백하는 것이 은혜의 결단, 믿음의 결단이다. 주님이 능력을 주시면 지킬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9장 23에서 이 원리를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뭘 믿는다는 것인가? 예수님의 도움, 성령님의 도움을 믿는다는 말이다. 성령님의 도움을 받을 때 능히 지키지 못할 계명이 없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이 원리를 말씀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도움을 받을 때 모든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성령님의 도움을 요청한다. 성령님의 도움은 기도로 요청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께 기도로 말씀드린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 말씀하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의미다. 따라서 쉬지 말고 하는 기도는 신바람 나는 축복 자체다. 하지만 생명의 성령의 법을 모르는 이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고문과도 같은 말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여기 말씀하는 예수님의 계명이 무엇인가?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 지키는 모든 계명, 모든 율법을 뜻한다.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 지키는 계명은 주님의 능력으로 지키는 것이다. 주님이 99의 능력을 주시고 우리는 1의 능력을 보태는 원리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법으로 계명을 지키는 이 원리를 요한일서 5장 3절에서 명료하게 말씀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그렇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인데,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하신다. 하나님의 계명들이 정말 무거운 것이 아닌가? 아니다. 우리 혼자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매우 무겁다. 그러나 은혜의 결단을 하면, 즉 생명의 성령의 법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계명들이 가벼워진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그 계명들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다.
(김호성 『십자가의 도를 아십니까?』 고양: 베드로서원, 2018. pp. 117-119.)
한마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을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 25에서 “하나님의 법”을 발견하고 감사를 드렸는데 바로 육신의 힘으로는 안되지만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을 발견하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어두신 새로운 길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에 대한 책을 읽다가 워치만 니의 책에서 이를 증거하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비슷한 경험을 해본 일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즉 당신은 어느 친구를 찾아가 보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신은 그 친구가 몹시 불친절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주님께서 당신을 보호하여 주실 것을 믿었다. 당신은 출발하기 전에 주님께 당신 자신으로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 필요한 모든 것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고 나서 당신은 놀랍게도 그 친구가 대단히 불친절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당신은 돌아오는 길에 그 경험을 되새기며, 당신이 그토록 침착했던 것을 기이히 여겼다! 그리고 다음 번에도 그와 꼭 같이 침착할 수 있을지 궁금해 했다. 당신은 자신에게 놀라서 그 사실을 해명해 보려고 했다. 그에 대한 해명은 바로 다음과 같다. 즉 성령님께서 당신을 승리하게 하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와 같은 경험을 계속하지 못하고 가끔씩 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경험은 계속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성령님께서 어떤 일에 착수하고 계실 때 우리는 노력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이를 악물고 노력하여,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을 훌륭하게 자제하였기 때문에 영광스럽게 승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참다운 승리가 있는 곳에는 육적인 노력이 없다.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게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워치만 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서울: 생명의말씀사, 2022. p. 182.)
이 예화가 보여주는 의미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성령님께 도움을 청하며 기도하고 나아갔더니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서 감당을 하게 된 것 말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고,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데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음으로 말씀대로 감당하게 되는 일들 말입니다.
이런 발견들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고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내려 놓아야만 그 가치가 있는 것이지 어느 정도 내려놓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살아서 힘을 쓰기 때문에 여전히 실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이해함에 있어서 기억해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전적인 포기라는 단어입니다. 어느 정도 죽어서는 안됩니다. 전적으로 죽어지고 주님께 맡겨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워치만 니는 전적인 죽음의 필요성에 대하여 그의 책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약 이십여 명의 형제들과 같이 중국의 어느 곳에서 머무르던 때가 있었다. 우리가 머물던 집에서는 목욕 시설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강으로 목욕을 갔다.
한번은 한 형제가 한쪽 다리에 쥐가 나서 갑자기 물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수영 잘하는 다른 형제에게 손짓을 하여 빨리 그를 구조하러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점점 필사적으로 “저 물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소?”라고 고함을 질렀다. 다른 형제들도 거의 나처럼 당황해서 격렬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 수영 잘하는 형제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달갑지 않은 구조 작업을 지연시키면서 침착하고 태연하게 자기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는 동안 물에 빠져 들어가는 불쌍한 형제의 음성은 점점 쇠약해져 갔고 그의 힘은 소진되어 갔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런 사람은 정말 싫어! 한 형제가 자기 목전에서 물에 빠져 들어가는데 구조하려고 하지도 않고 보고만 있다니!”
그러나 물에 빠진 형제가 실제로 가라앉아 가고 있을 때 그 수영 잘하는 형제는 서너 번 손을 재빨리 휘두르더니 벌써 그의 옆으로 다가가서 그를 잡고 나와 두 사람은 무사히 땅으로 올라 올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회가 생기자 나의 견해를 늘어놓았다. “나는 당신처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한번도 만나 본 일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자신을 조금 덜 생각하고 그를 조금 더 생각했더라면 그 형제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수영 잘하는 형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더 일찍 그를 구원하러 들어갔더라면 그는 나를 너무 꼭 붙잡았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익사했을 것입니다”라고 그는 대답하였다. “물에 빠진 사람은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스스로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최소의 노력도 하지 않을 때까지는 구조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핵심을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가 어떤 일을 단념할 때에 하나님은 그 일을 시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힘이 다하여 스스로 아무 일도 더 할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정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육은 무익하다! 하나님은 육이 죽어야 마땅하다고 선언하셨다. 우리가 진실로 그 사실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모든 육적인 노력들을 포기함으로써 하나님의 판정을 확증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우리의 완전한 무력함을 말해주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선언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오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급의 원천에 대한 오해이다.
우리는 율법을 보면서 우리가 그 요구들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하여야 할 사실은, 율법 자체는 정당한 것이지만 만일 그것이 잘못된 사람에게 적용된다면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워치만 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서울: 생명의말씀사, 2022. pp. 171-172.)
“물에 빠진 사람은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스스로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최소의 노력도 하지 않을 때까지는 구조를 받을 수 없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 마지막에서 절망하며 호소하는 내용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롬 7:24, 개정)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처럼 우리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에 대한 전적인 포기가 우선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죽어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고 성령께서 역사하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려면 자신의 열심을 100%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헷갈리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는 질문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들이 무엇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들의 노력을 포기하고 손놓고 막연히 하나님의 역사만을 기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야기를 했듯이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의 차이는 “의지의 결단”과 “은혜의 결단”입니다.
“의지의 결단”에는 자신의 열심과 노력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은혜의 결단”에는 “의지의 결단”에서의 주체가 자신이었다면 그 결단의 주체가 “나”에서 “성령”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건강을 위하여 탁구를 치고 있는데 탁구장에서 저를 보고 탁구 대회에 나가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을 하다가 사람이 채워지지 않아서 단체전에 나갈 수가 없다고 하길래 마지못해 대회에 참석하기로 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참석하여 치러지는 대회에는 처음으로 나가기에 성령님께 기도했습니다. 제가 목사인 것을 사람들이 다 아는데 나가자마자 탈락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5번만 이기게 해주십시오. 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성공과 실패는 이제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회 당일 새벽기도를 마치고 일찍 체육관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대회에 참석을 했는데 진짜 다섯 번을 승리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여기에는 저의 노력도 필요했겠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으면 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를 이길만한 강자들이 여럿이 있었지만 제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은혜의 결단을 설명하자면 탁구대회에서 5회를 이긴 것은 성령의 도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탁구대회에서 경기를 하지 않았다면 한 번도 이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참석했고 경기에 임했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이길 수 있었던 것처럼 은혜의 결단을 하는 사람은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주체는 자기가 아닌 성령님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그 사람의 삶에는 생명이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가는 삶을 가리켜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할 때 “십자가의 도”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원문으로 직역하면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이 말은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을 의롭다고 하셨습니까? 그 방법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이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서는
첫째로 자신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둘째로 성령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합니다.
셋째로 성령을 의지하며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과연 그 일을 행할 수 있을까? 하고 자신에 대하여 절망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아보지도 않습니다. 미리 포기합니다. 이것은 성령을 의지하는 삶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은 마치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던 것처럼, 모세가 홍해를 향하여 갈라지라고 명령한 것처럼 내일의 일들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령을 의지함으로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갑니다.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승리하는데 어떤 이들은 여전히 죄와의 싸움에서 실패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서울 사랑하는 교회를 담임하는 변승우 목사님은 『다이아몬드 같은 진리!』라는 책에서 그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교회들 안에 퍼져 있는 구원파적인 거짓 복음을 들었다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하고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여야 한다고 배운 사람들 중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 믿음의 효과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뭐가 빠진 것일까요?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성경대로 믿음의 효과가 나타날까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진지하고 신실한 신자들이 죄와 치열하게 싸우며 사투를 벌여도 죄에게 번번이 지고 방법이 없어서 절망 속에서 도움을 청할 때였습니다. 그럴 때 목사지만 때로는 다음과 같은 반항적인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시고, 성도들이 진실로 그렇게 살길 원하고 몸부림치며 노력하는데도 그렇게 살도록 하지 않으시는가? 그렇게 안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정말 회개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 그런 이들을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진심으로 결단하고 노력하는 것 외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정말로 주님을 의지하고 진지하게 결심하고 노력해도 안 되는데, 예수님이 우리 죄를 십자가에서 모두 지셨으니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라고 전하는 것이 어떻게 진짜 복음일 수 있겠는가? 효과가 있어야 복음 아닌가?’
이 말에 공감을 느끼는 분들 많으시지요? 심지어 통쾌하다고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이고 또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평은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에서 자유케 되고 순종할 수 있는 비결을 복음 안에 이미 계시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충분히 깨닫지 못해서 누리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진리를 ‘제대로’ 모르니까 ‘제대로’ 믿을 수 없고, ‘제대로’ 믿지 않으니 믿음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미~읻~씁니다”하고 목청을 높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믿음이 무엇인지 배워서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믿음의 효과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경험에 흔들리지 말고 성경 진리 위에 굳게 서십시오!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믿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죄를 이기지 못했다면, 성경이 거짓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여러분의 믿음이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에 뭔가가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는 것이 믿음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변승우 『다이아몬드 같은 진리!(평신도용)』 서울: 도서출판 거룩한진주, 2015. pp. 187-188.)
이렇게 말하면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부활신앙을 내포합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의 성격’을 보여줍니다(23-24절). 우리는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처럼 단지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라 복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닫고 그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그 외 그 어떤 것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단지 예수를 믿는다고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으면 구원은 실재가 되지 않습니다. 그 능력을 믿어야 실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이들의 믿음에 빠져 있는 부분입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진실하게 믿지만 믿음의 효과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변승우 『다이아몬드 같은 진리!(평신도용)』 서울: 도서출판 거룩한진주, 2015. p. 200.)
그러므로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닫고 그 능력을 믿음으로 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같은 진리!』라는 책에서 변승우 목사님은 죄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를 한 가지 더 말씀을 하였는데 “성령님을 의지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복음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복음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에스겔 36:27)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구하고 의지하면 이대로 돼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안 될까요?
성령님은 크게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하나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게 돕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위에 임하셔서 성령의 은사로 봉사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은 새 언약에 관한 예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내 영'은 성령세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예언은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죄를 이기고 말씀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일은 거듭날 때 일어납니다. 복음을 제대로 알고 믿을 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죄를 이기는 능력,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으로 경험하려면 먼저 바른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죄에서의 구원, 즉 죄의 형벌과 지배에서의 구원입니다(마 1:21, 요 8:34-36). 이것은 성령이 우리 위에 임함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복음에 대한 무지 때문에 많은 이들이 새 언약이 약속하고 있는 성령의 내주를 구하지 않고, 봉사와 증거를 위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구하고 의지합니다. 그리고 변화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많은 이들이 성령충만하지 않아 죄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성령세례나 충만을 구합니다. 그 결과 성령을 받고 방언하고, 예언하고, 병을 고칩니다. 그러나 죄는 못 이깁니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는 봉사와 증거를 위한 은사와 권능을 부여하는 것이지 죄를 이길 능력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세례는 주로 기도를 통해서 받습니다. 물론 믿음도 필요하지만 기도할 때 받습니다.
그러나 내주하시는 성령은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성령의 내주)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라디아서 3:2)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롬 10:17). 그러므로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성경적인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을 때 성령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바른 복음을 듣거나 믿지 않으면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바로 알지 못하면 '성령을 의지하면 죄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이 공허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의지하면 변화된다'는 설교를 듣고 성령을 의지하지만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아무리 성령을 의지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이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이기는 것은 단순히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성령님이 안에 계셔야만 가능합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8-9)
바울은 육신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안에 거하는 사람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힘쓰고 애쓰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내 힘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말씀대로 살 수가 있어. 그러므로 나는 성령님을 의지할 거야!’라고 결심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죄를 이기고 말씀대로 살게 하는 동력인 성령님이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의지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중 죄를 이기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바로 알면 달라집니다. 복음을 제대로 믿으면 실제로 성령님이 임합니다. 죄를 능히 이기는 능력으로 우리 안에 임하십니다. 그래서 거듭나고 죄에서 자유케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세례가 아닙니다. 바로 복음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로마서 1:16)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새 언약인 복음이 약속하고 있는 성령의 내주입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에스겔 36:27)
무턱대고 성령을 의지한다고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복음을 바르게 깨닫고 믿는 자에게 내주하십니다."
(변승우 『다이아몬드 같은 진리!(평신도용)』 서울: 도서출판 거룩한진주, 2015. pp. 315-318.)
결론)
오늘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새롭게 열어놓은 구원의 길입니다. 이 길을 걸어가려면
첫째로 자신의 열심을 죽여야 합니다.
자신이 살아있으면 우리는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롬 7:9, 개정)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롬 7:10, 개정)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구원의 새로운 법 즉 성령의 법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에스겔 36:27)
성령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자신은 모든 일에 손을 놓고 기다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의 중심이 성령님께 향한다는 말입니다. 일을 행하게 되는 주체의 변경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는 나의 열심으로 이루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룰 것을 믿는 것입니다.
셋째로 복음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1)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즉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변화시키실 것을 믿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2) 성령의 사역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사역은 두 가지로 되어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내적 사역 즉 말씀대로 살게하는 사역입니다.
또 하나는 성령의 외적사역 즉 봉사하고 섬김을 이루는 사역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외적 사역인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로 봉사와 섬김의 열매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서는 실패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는 내적 사역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믿음의 승전보가 여러분의 삶에서 울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길이 전부입니다. 믿음 생활에서 승리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예전에 유대 팔레스틴에서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의 도우심과 보호를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며 자라갔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은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보호를 받으면서 우리들의 믿음이 사도들의 믿음처럼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때 오늘을 사는 우리들 가운데 사도들이 세워질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세워지고 교사와 목사들이 세워지고 복음전도자들이 세워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던 하나님의 손길, 능력의 손길이 우리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간증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넘쳐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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