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610년(광해군2년)에 공빈 김씨(恭嬪 金氏:광해군 생모)의 묘를 성능(成陵)이라고 묘호를 올리고 역내(域內)에 있는 사인(私人)의 묘를 모두 파내려 하였다.
이에 자손들이 이장할 계획을 강구할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영의정 이덕형, 영부사 윤승훈,완평부원군 이원익,청평부원군 한응인,지관 김여견등의 조언과 상소로 묘를 평치고 그위에 나무를 심는것으로 일이 마무리 되었다.
그 무렵 임진왜란등 오랜 전쟁으로 자손이 뿔뿔이 허터져 원지에 있고 오직 서울에는 삼척부사 조희보,교리 조즙,전수선 조익,예빈참봉 조수이,유학 조척등이 있을뿐이였다.
그중에 조척(趙滌:참의공)은 경향각지에 그 의견과 소요물품을 보내달라는 묘소봉변시통문을 보내게 되었다.
또한 평택현감 조수륜(趙守倫:풍옥헌공)은 사위 이덕수(李德洙)와 더불어 황혁(黃赫:처 이모부)에게 보내는 서신에 "정인홍의 상소로 흉흉하고 유영경이 싸움에 승리하여 잠시 정론이 이루어젔는데 논의가 백출하니 이 사이에 반듯이 대단의 사태가 있을것"이라 하고 또 "공성(恭聖:광해군의 생모 공빈김씨)을 추숭하는 일을 남인(南人)의 봉군지악(逢君之惡:임금의 악행을 자아내 맞음)으로 여긴다"하였다.
왕이 이를 보고 미워하여 하교하기를 "수륜(守倫)이 일개 음관(蔭官)으로서 감히 사복(嗣服:임금이 대를 이어 즉위함)한 초기에 망령되이 조정 정사의 시비를 논하되 작고 큰 일을 가리지 않고 황혁(黃赫)에게 밀통하였으니 헤아릴수 없음이 극하다.엄히 국문하라"하였다
이 내용은 광해군일기 정족산본(鼎足山本) 51권 광해군 4년 임자(壬子:1612년)3월 임술일조(壬戌日條)에 기록 되어 있다.
첫댓글 풍옥헌 할아버지가 14세 이고 저는 27세손입니다 서천이 고향이구요 현재는 울산에 와있네요
이상인사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