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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기정 심리교육 디오라마 원문보기 글쓴이: 문기정
<을미년 새아침의 소요> 장자의 소요유와 소요정담 동아리
1.2년 사이를 두고 교수 정년을 한 동료 네 사람이 모였다. 화가, 경영학박사, 소설가 그리고 나. 짜임새가 있어보였다. 만나서 저간의 픽션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논픽션으로 꾸며 보기도 하면서 천진한 세상을 만나곤 했다.
김 박사님의 카페에 이런 글을 올린 지 어언 5년이다.
‘오늘 2009년 12월7일 월요일 오전 8시40분발 곡성행 버스를 타고 섬진강 나들이에 나섰다. 소설가 김 교수의 정년퇴임 선물로 사모님께서 대자연을 선물로 주셨다는 섬진강변도로를 답사키로 한 것이다. "정년퇴임 선물로 마땅히 드릴 것이 없어 섬진강과 강변도로를 선물로 드릴테니 앞으로 자주 이용하셔요."라고 했다는 사모님의 아이디어! 두 분은 이 코스로 정년퇴임 기념 도보여행을 했다는 것이다. 역시 교장선생님다운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곡성군 고달면에서 압록까지 12km를 네 사람이 천천히 걷다가 거의 압록에 도달할 즈음 섬진강변 자락에 앉아 찰밥+조기+귤+캔 맥주+커피…,도시락 점심은 꿀맛 바로 그것이었다. ’
최근, 나는 장자의 소요사상에 공감하고 있다.
장자 제1편에 등장하는 ‘소요유’는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의미이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이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 마치 무도(춤)과 같은 것. 춤이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작 그 자체가 목적이다.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이며 ‘자유의 절대적 경지’이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다. 무한한 소요유의 추구를 표방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라는 것이 장자의 주장이다.(신영복,강의,2012 참조)
우리 팀은 장자의 소요유 경지를 되새기는 만남이다.
장자의 ‘예미도중’(曳尾塗中)의 일화는 소요유의 면모를 보여준다. 장자가 낚시를 하고 있는데 초(楚)의 위왕이 사신을 보내어 장자를 재상으로 삼고 싶다는 뜻을 전했는데, 장자는 낚싯대를 들이운 채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내 듣기로 초나라에 신령스런 거북이를 3천년이나 비단에 싸고 상자에 넣어 묘당에 보관하고 있다는데, 당신이 그 거북이라면 죽어서 뼈만 남기어 존귀하게 살겠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소?”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겠다.”
장자가 우리 시대에 제시하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은 그 자체가 귀중한 창조적 공간이 되는 것이므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장자가 표방하는 가치는 ‘생명’그 자체이다. 그는 ‘생명 없는 질서’보다는 ‘생명 있는 무질서’를 존중했다. 따라서 반생명적, 반자연적, 반인간적 질서를 해체하려는 사상인 것이다. 바로 정신적 자유이다.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인위(人爲)로써 자연을 멸하지 말며, 고의(故意)로써 천성(天性)을 멸하지 말며, 명리(名利)로써 천성의 덕을 잃지 말라. 곧 천진(天眞)으로 돌아가라.” “노나라에서 갈매기를 잡아다가 묘당(廟堂)에 모시고 좋은 음악과 귀한 요리로 대접했더니 사흘 만에 죽었다. 말을 불로 지지고, 말굽을 깎고, 낙인을 찍고, 고삐로 조이고, 나란히 세워 달리게 하고, 마구간에 묶어두니 열에 둘 셋이 죽었다.” 인위적인 규제와 형식을 거부하는 장자사상을 엿볼 수 있다.
우리 네 사람은 소요할 때 아호를 쓰기로 했다.
<아호를 명명하며> 기축년(2009) 초겨울 넷이서 나선 강변 산책. 첫 번째 만남 곡성, 고달, 압록으로 이어진 섬진강변. 두 번째 만남 구례 압록까지 이어진 강변도로 . 강변을 거닐며, 노모님이 준비해 준 찰밥도시락, 아내가 보내준 굴비 네 마리, 차가운 맥주 캔 땀을 식히며 마음, 마음 나누다가, 넷이서 불러본 형님, 김 교수, 문 교수, 신운 님 가까운 듯, 정다운 듯 어색한 호칭. 아호를 명명 하세나.
장형 김 교수 고향사랑 해변사랑 캔버스에 담아내니 ‘해안’이면 어떨까. 김 교수 언젠가 왕인 유적지 천인천자 새기기, 교수님이 새긴 못지(池) 따라 ‘뜰못’ 이면 어떨까 문 교수 보성의 남쪽 산골사람 , 천진무구 순박한 사람, ‘남곡’ 이라면 어떨까 소설가 김 교수 지석강 굽어보고 자란 율치 동네 사람, 숫돌 되어 청동 빛낼 ‘지석’ 이라면 어떨까
여기 해안, 뜰못, 남곡, 지석이 모여 아호를 명명하노라. 우리의 영원한 형님 해안, 우리의 영원한 기둥 뜰못, 우리의 영원한 초석 남곡, 우리의 영원한 등대 지석.
그대들의 산책길에 해안, 뜰못, 남곡, 지석이 함께 하리라. 거기에 예술을 사랑하는 지인들이 구름처럼 모이리라.
산책길 남정네 네 사람. 뜰못이 기둥 되고, 남곡이 받침 되고, 지석이 빛을 내고, 해안이 채색하고 , 지인들이 응원하면, 아름다운 글, 멋진 영상, 찬란한 그림, 짜릿한 우정이 늘 우리들 곁에서 숨 쉬리라.
해안, 뜰못, 남곡, 지석, 포근한 산책길에서, 영원할 친구 아호를 붙이노라. (2010 경인년 2월 2일 남곡)
장자의 한탄.
三人行而一人惑(삼인행이일인혹) 所適者猶可致也(소적자유가치야) 惑者少也(혹자소야) 二人惑則勞而不至(이인혹칙로이부지) 惑者勝也(혹자승야) 而今也以天下惑(이금야이천하혹) 予雖有祈嚮(여수유기향) 不可得也(불가득야) 不亦悲乎! (불역비호)
세 사람이 길을 가는데 한 사람이 미혹되어 있다면 목적지로 갈 수 있다. 그것은 미혹된 자가 적기 때문이다.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미혹되어 있다면 고생만 하지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한다. 그것은 미혹된 자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온 천하가 미혹되어 있으니, 내가 비록 가려는 방향이 있다 해도 갈 수가 없다. 그러니 슬프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소요정담 동아리는 무위자연(無爲自然,자연에서 도의 뜻을 체득하며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 소요유하면서 생의 가치를 복원시키리라.
한 분은, 소요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고, 한 분은, 시니어 코디네이터로서 무위자연하며, 한 분은,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소요하면서 소설로써 생의 가치를 실현하며, 한 사람은, 무위자연 소요하며 심리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면서….
(2015.1.1. 새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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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상에 이런 만남이 또 어디 있을까. 남곡님의 뜻 깊은 글을 이제사 읽고 소감을 쓰고있는
무례함을 큰 마음으로 해량하여 주시기 앙망합니다. 항상 만나지만 또 보고 싶고, 만나면
헤어지는게 아쉬운 사람들...세상 사람들과의 만남 중 소중한 만남 '소요정담' 영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