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샘 김동환의 백령도(白翎島) 탐색기-3
백령도의 유래와 공존의 가치
한국에서 8번째 큰 섬
한일어업협정 중단으로 파산한 부친
백령도는 고구려시대에는 곡도, 고려 현종때에는(1018년) 백령진, 1896년 조선 고종 시절에는 황해도 장연군으로 그리고 해방이후에는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되었고 95년에 인천시로 통합되었다.
제주도(1,845,88㎢),거제도(378,795㎢),진도(363,94㎢),강화도(305.75㎢),남해도(301㎢),안면도(113.46㎢),완도(85.3㎢)그리고 백령도로 우리나라에서 8번째 큰 섬이다.
그것은 공식적인 51.09㎢와 간척지를 합하여 면적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울릉도,돌산도,거금도,창선도,신미도,자은도,압해도,교동도등으로 이어진다.
백령도의 최고봉은 업죽산 (184m)으로 군사레이더기지로 활용되고 있다.
제주도 한라산(1,950m),거제도의 가라산(585m),진도의 첨찰산(485m),강화의 마니산(470m),남해도의 망운산(800m)등과는 현격하게 낮은 산이다.
백령도의 유래도 사랑으로 시작된다, 황해도에서 살던 선비와 사또의 딸이 사랑하게 되었으나 선비를 탐탁지 않게 여인 사또는 딸을 몰래 섬으로 감춰버렸고 이 사실을 꿈에서 백학이 알려줬다고 하여 흰백(白)과 날개 령(翎)을 합하여 백령도로 명명하고 있다.
3천2백가구에 5천6백명이 살고 있으나 군인가족이 절반을 차지한다.
40년 전만해도 꽃게와 홍어등이 즐비했던 이곳 수산업도 이제는 사라지고 고작 까나리 액젓과 백령약쑥, 돌미역과 다시마정도가 이곳의 특산품으로 알려져 있다.
40여년 전 아버님이 이곳과 인천에서 냉동공장과 어선을 운영하면서 꽃게를 잡아 학꽁치와 함께 활게로(살아있는 게) 포장하여 일본에 수출했다.
활게작업은 이곳 주민들의 중요한 일자리였다.
그러나 정치권의 분쟁은 한,일어업협정으로 이어지고 수출길이 동결되면서 아버님은 동네사람과 여수에서 올라온 학꽁치아가씨들 초소근무 군인들과 함께 눈물의 꽃게 파티를 해야만 했다.
먹고 버린 꽃게 껍질이 후지산보다 높게 솟아 올라 해를 가릴 정도이다.
그렇게 아버님은 냉동공장 사업을 접어야 했다.
백령도 주변에서 흔히 잡혔던 홍어,꽃게들은 이미 사라졌고 지금은 콩돌해변의 콩돌 소리도 멈춰 버렸다.
두무진 앞 물범바위에는 물범들이 하나 둘 떠나버리고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았던 사곶해변은 이제 푸석푸석 발자국만 쓰린 기억처럼 남기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삶의 편리성에 우리 인간이 저질러 놓은 자취이며 흔적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공존하는 지혜는 없는가.
수많은 초식동물들이 평화롭게 들판을 거닐 수 있는 것도 먹이를 두고 서로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키 큰 기린은 나무 높은 곳의 잎과 어린 싹을 먹고 코끼리는 아래 쪽 잎과 가지를 먹으며 가젤이나 누는 들판의 짧은 풀을, 얼룩말은 키 큰 풀과 줄기를 먹음으로써 경쟁을 피하며 평화의 행진을 한다.
나무늘보는 나방을 자신의 몸 위에서 살게 하면서 이들이 죽으면 그 영양분으로 초록이끼를 털 위에 피어나게 하여 위장색깔을 만들어 적들로부터 공격을 피하며 생존하고 있다.
백령도를 떠나면서 공존하는 삶과 자연이 선사한 그 존귀한 자연의 흔적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는 아픔이 거센 파도에도 씻겨 가지 않는다.
-시인,수필가,환경국제전략연구소 소장/김동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