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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부흥운동에서 복신의 위치와 위령제에 대한 제언
강 희 진 (2009)
서언
60년 백제는 신라의 오랫동안 치밀한 준비와 국제 정세의 급변에 대한 분석을 잘못한 백제 내부의 실책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는 외부적으로는 국제정세의 논리와 내부적으로는 정치 논쟁의 결과이기는 했지만 이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본 백제인들의 허탈감은 그대로 주저앉지만은 않았다.
백제의 서북부를 중심으로 나라를 구하자는 의로운 장병들이 일어났고, 점차 확산되면서 금강 이북은 물론 사비를 제외하고는 전지역을 완전 장악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들의 중심에는 복신과 흑치상지, 지수신 도침과 정무 등이 있었고, 이들이 주도하여 3년여 동안 이끌었다.
그러나 백제의 역사 또한 백제인이 쓴 역사는 소실되었고, 단지 역사의 승리자들이 쓴 백제의 역사를 볼 수밖에 없어 후인들은 행간을 읽을 수밖에 없다. 때로는 역사적 사건만 인정하고 그 내용과 관점은 또 달리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군다나 부흥 운동은 승리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창피한 일이어서 괘씸죄에 해당되어 더더욱 그 기록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백제의 기록을 볼 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 산국유사, 당서, 구당서, 자치통감, 일본서기로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쓸 수밖에 없는 기사들이었다.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이긴 싸움은 열이 백이 되고, 진 싸움은 열이 하나일 수밖에 없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8년조 “왕은 諸將의 敗積을 들어 죄를 논하되 차등을 두었다”에 보이는 기사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장수를 문책했다는 것은 그 패배의 강도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런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회복 운동의 실패를 내부의 질시와 갈등이라는 감정적 대응으로 보는 것은 백제의 멸망을 의자왕의 방탕함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같다. 이는 회복운동의 가치를 폄하시키고 회복 운동을 주도한 이들의 정권욕 정도로 폄하시키는 기록일 뿐이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 백제 부흥 운동의 주체 세력에 대한 논쟁과 거점에 대한 논쟁에 빠져 자칫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또한 우리가 새겨야할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고심을 하게 한다. 부흥 운동의 주요 거점이 예산에 있고, 그 인물들이 예산 임존성에 모여 3여년간을 피 흘린 역사적 의미를 우리 스스로 되새겨야 할 것이다.
부여 은산에서 복신을 위한 별신굿이 전해지고. 연기 지역에서 진혼제가 열리고는 있지만 예산에서는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한 때 부흥군에 대한 위령제가 조촐하게 지내긴 했지만 지금은 이마저 끊어지고 없다.
이글은 당시 복신을 위주로 전개된 부흥운동의 과정과 이 과정에서의 임존성의 중요성을 열거하고, 그 과정 중 복신을 중심으로 생긴 몇 가지 이해를 심화시키고, 백제의 어려운 정세를 틈탄 일본의 야욕을 밝히고자 한다. 또한 당시 백제를 위하여 피흘린 부흥군에 대한 진혼굿이나 아니면 또 다른 형태라도 그 위령을 달래는 의식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위한 글이다.
1. 6세기 중반 당시의 국제적 정세와 백제의 멸망
6세기경의 삼국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정권의 교체와 변화로 혼란의 시대가 가중되었고, 국외적으로는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상황의 변화에 따라 화전(和.戰)의 반복이 거듭 되었다.
특히 6세기 중반의 경우 신라의 배신으로 나.제 동맹이 깨지고, 백제 건설 이후 거의 전시기에 걸쳐 유지해온 백제와 중국과의 교류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는 644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는 동안 당을 돕지않고, 오히려 신라의 7성을 빼앗으면서 소원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만큼 신라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조공까지 중단하였고, 이 조공은 측천무후 때 다시 재개하려했으나 실패했다. 이는 곧바로 중국의 대 백제 인식을 바꾸는 조치와 같았다. 즉 백제가 걷고 있는 독자 노선이 중국에게는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로 단정하게 된 것이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의자왕의 정계개편이 가속화 되면서 선왕의 비 중심의 정계를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펼칠 사람으로 개편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성충과 흥수 같은 훌륭한 장수의 몰락도 있었고, 정변의 공신, 요녀 은고(恩古)의 전횡은 날로 심해졌고, 임자(任子) 등 정권 고위층들의 신라와의 간첩 활동 등의 이반도 이뤄졌다. 이는 곧바로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함락으로 이뤄졌는데 이때가 660년 7월이었다.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당군은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덕적도를 거쳐 금강을 거슬러 올라 한달음에 사비에 도착했고, 김유신 등이 이끄는 신라군은 계백의 항전을 뚫고 백제 동부전선을 돌파하여 사비에 당도하여 20만여 대군의 대 전투 속에서 드디어 3일 만에 사비가 무너졌다.
2. 부흥 운동의 전개
신라군의 사비성 함락은 백제 전역에 커다란 변동을 불러왔다. 즉 한쪽으로는 나당연합군에 항복을 하고, 한편으로는 나당연합군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사비 북부에서 주로 이뤄지는 부흥운동이다.
이는 백제인의 흥망계절(興亡繼絶)의 정신이 바로 백제를 다시 일으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는 온 백성들이 합류하는 정신적 힘이 되기도 했다. 또한 왕의 굴욕적 항복과 나당연합군의 재물약탈과 부녀자들의 겁탈, 젊은이들의 살상 등은 백제인들의 항거를 불러일으켰다. 흑치상치가 항복했다가 이런 것이 무서워 다시 도망쳐 부흥군에 합류한 것을 보면 당시의 약탈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당시 부흥운동에 참여하는 주요 장수들을 보면 두랑윤성의 정무, 도침의 주류성, 임존성의 복신과 흑치상지들이다. 먼저 복신이 임존성에서 군을 일으켰고, 후에 흑치상지가 항복했다가 당군의 횡포를 두려워하여 도망나와 풍달군에 들려 군을 모아 임존성에 호응한다. 구마노리성에서 여자진이 군을 모았고, 도침이 두랑윤성에서 의병을 모은다. 도침은 현직 장수로 복신 보다 높은 관직을 갖고 있었고, 이 관직은 그가 죽을 때 까지 갖고 있었다. 정무는 도침과 매우 긴밀한 관계로 보인다.
각각 다른 곳에서 일어났지만 첫 전투시에 모두 임존성에 모인다. 이는 임존성이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함을 의미한다. 후에도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하여 후퇴할 때는 거의 임존성으로 거점을 옮긴다. 이리하여 사비를 제외하고는 거의 부흥운동에 합류하여 나당군과 대치한다.
다음은 시기별로 정리한 부흥 전쟁의 전개 일지다.
660년 庚申 7월, 무열왕 7년, 顯慶 5년
* 7월 : 백제, 신라 당군에게 함락
* 8월 : 의자왕 항복식
임존성에서 복신 항거.
26일 新羅軍 任存城 攻擊 不克
* 9월 : 3일 唐將 소정방 歸國, 유인원 留鎭
23일 백제의 餘衆 사비성 침입
28일 웅진 도독 王文度 삼년산성 伝詔式場에서 급사
* 10월 : 18일 무열앙 이례성 함락
30일 무열왕 사비 남족 백제 여중 격파
복신 사자 일본행 출발
* 11월 : 7일 왕흥사 잠성 함락
22일 신라 무열왕 귀경
661년 辛酉 무열 8년, 용삭 원년, 문무 원년
* 1월 : 유인궤 백제 착,
* 2월 : 백제병 사비 침입, 신라 대군 출동
* 3월 : 據 주류성에 웅거하여 백제군 웅진 강구에 양책 세우다.
5일 : 신라품일 分麾下軍하여 선행두릉윤성
2일 : 신라대군 고사비성외에 주둔하여 두릉윤성 공격 36일간 전투 불극
복신이 도침을 살해
* 4월 : 19일 신라 班師軍 빈골양에서 백제군에게 패
무열왕 원군, 加尸兮津에서 군퇴소식 듣고 加召川에서 돌아오다
*당고종 고구려 정복 행
* 6월 : 문무원년,신라 무열왕 薨
당사신이 신라에 와 사비성 解囲군전 출병과 군량 요청
* 7월 : 17일 김유신 대장삼아 20여장 출전준비
* 8월 : 신라대군 始사谷停에 도착
* 9월 : 19일 신라문무왕 熊峴停에 도착
27일 신라 瓮山城을 함락, 웅진도 개통
* 10월 : 29일 당제사자 래경, 문무왕 귀경
* 12월 : 10일 9장군 군량을 싣고 고구려 향
662년 戊戌 문무 2, 용삭 2, 천지 1
* 1월 : 왕자 풍 옹립, 일본 구원군 도해
* 2월 : 6일 김유신 소정방에 보내다.
* 3월 : 김유신 귀경
일본 구원군 주류성에 입거
* 7월 : 당병 지라성 함락
손인사 당병 7천인과 웅진도 행군,
(구당서)풍, 복신 살해
* 8월 : 당,라군 강동의 眞峴城공략 함락.
* 12월 : 풍, 복신등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이천
663년, 계해, 문무 3. 용삭 3, 천지2
* 2월 : 신라 백제 남부 사비 취함
풍, 복신 등 주류성으로 귀
* 5월 : 당장 손인사 덕물도 거처 웅진 도착
* 6월 : 풍, 복신 살해
* 7월 : 17일 신라문무왕 대군 웅진주 도착, 유인궤등과 합병하여 주류성 향
* 8월 : 13일 김유신 두솔성에 도착
17일 당라군 주류성 포위
27,8일 :백강에서 일본 대군을 공격, 대승, 풍왕 고구려 도주
* 9월 : 7일 백제, 일본군 항복
* 10월 : 21일 신라군 백제 遺將 지수신 임존성에서 공격, 불극.
* 11월 : 당라군 班師
8일 임존성 함락
20일 신라군 귀경
1. 최초 任存城據 복신장군과 부흥 의병군에 대하여
이설은 대개 두 설이 존재한다. 우선 당서(당서)에서 보이는 기록으로 흑치상지가 거한 것으로 나타는 것과 복신이 거하고 나중에 흑치상지가 합류한 것으로 나타난 일본서기의 그것이다.
常之恐懼逐與左右十餘人*歸本部 鳩集亡逸 共保任存山 築柵異自固 旬日而 歸附者三萬餘人
- 新舊唐書 -
是西部銀率鬼室福信赫然發憤任射利山
- 齊明天皇 券二十六 -
최초의 부흥군에 대한 기사가 당과 일본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일본 서기에서는 복신이 임사리산(임존산)에서 복신이 거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 의한 것은 우선 복신에 의해서 각종(覺從)1)이 사신으로 와서 구원을 요청하는 상황이고 보면 이때가 흑치상지가 복신에 호응한 후 복신이 사신을 보낸 것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만약 당서의 기록처럼 흑치상지가 먼저 임존성에 거했다면 몇 가지 가설이 앞서야한다. 우선 흑치상지는 풍달군의 군장으로 그가 사비에서 도망 나와 풍달군으로 갔어야 타당하고, 그곳에서 방어하기에 좋은 임존성으로 왔다면 임존성주에 의존해야 맞고, 그렇다면 당시 임존성주는 이미 의병군을 모으고 있었던 상태로 보인다.
이 상황을 단재 신채호 선생은 먼저 흑치상지를 비롯한 임존성주가 당나라에 항복하여 성을 비우자 복신이 이들 일파를 몰아내고 부흥운동의 민군을 모았다고 판단한다.
당시 복신의 지위에 대해서는 당에서는 당시 적장 복신을 가짜라고 여기며 폄훼하여 기록하고 있고 성씨 또한 귀실(鬼室)씨로 보고 있고 지위 또한 당시 관등급이 16번 중 5번째인 한솔(捍率)에 불과하게 적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가짜라고 말한 진짜 인물은 무왕의 조카인 왕족으로 기록되어있다. 만약 왕족이 맞다고 하면 복신은 당나라 사신으로도 다녀온 외교관으로 외교수완이 뛰어난 왕족이다. 이 복신은 627년 이미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의자왕이 정권을 잡은 뒤에 행한 정치개혁 이후 자신의 정치력을 확대하기 위해 왕족을 각 지역에 좌평으로 삼아 주둔 시킨 사람 중에 한사람이거나, 의자왕의 정치개혁 때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한 왕족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전자일 가능성은 의자왕 뿐 아니라 성왕 이후 사비천도 후의 모든 왕이 대외 정책을 중시 여기는데 특히 이 서북부지역은 중국과의 교류의 교두보요, 한강 이남지역의 신라와의 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실권자인 왕족을 보냈을 가능성을 보면 복신이 임존성을 중심으로 실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설득력이 있다. 또한 적장의 기록에서 부흥군의 진영은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일본으로 사신으로 간 각종이나 일본은 그 내부를 볼 수 있어 이 부분은 일본서기의 사실기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복신이 <유인원 기공 비문>에서 말한 여항(閭巷), 즉 ‘민간인으로 귀실 복신이 왕족으로서의 권위와 명성을 함께 지닌 부여 복신의 이름을 빌린것‘2)이라는 주장과 삼국사기와 구당서에서 말한 “옛장수”라는 설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럴 경우 몇 가지 또 다른 가정이 들 수가 있다.3)
또한 부흥운동의 기치를 걸자마자 30000만이 모였다는 것은 이 변방의 백성까지 본국의 멸망이 피부에 느껴지지 않았을 것은 쉽게 집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곳은 전쟁을 직접 겪거나 군사적 이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당군은 덕적도에서 직접 금강을 이용해서 사비에 들어갔고, 신라군도 연기, 대전 , 논산 지역을 중심으로 백제에 진격하여 속전 속결로 사비를 함락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이 나락가 망했다는 사실을 전해 받고 그 많은 민중이 모였다는 것은 중심 장군의 신뢰문제가 절대적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임존성을 중심으로 한 초기 부흥운동 사항을 정리하면 신라군 5만과 와 당군 13만이 급습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사비를 점령한 날이 660년 7월이었다. 왕의 항복을 받고, 신라는 이 항복문서를 들고 신속하게 당시 임존성 뿐 아니고 모든 성에 이 사실이 알려지고, 항복을 요구했을 것이다. 이 때 흑치상지가 속해있던 풍달군을 비롯하여 많은 성이 항복을 하고, 아마 항복한 백제군은 모두 사비로 불러들였을 것으로 본다. 이는 흑치상지가 일개 풍달군장(당나라의 刺吏. 아전 정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비에 간 것으로 보아 항복한 군장 모두가 사비에 모여 나당 정복군의 치욕을 감당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임존성에도 성주가 있었을 것이고, 이 성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임존성이 갖는 지정학적 중요성에 비추어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곧바로 항복을 하고, 성은 비우게 된다.
이에 신채호 선생은 복신이 무왕의 조카로 애초에 서부은솔이었으나 간신 임자(任子)등에 의해 그 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신라가 공격하여 사비를 점령하고 항복을 요구할 때 항복을 하자 항장 은솔을 내쫒고 복신이 다시 복귀한 것으로 본다. 복신이 복귀하자 군인은 물론 백성들은 사기가 높아졌고, 임존성을 항전의 거점으로 삼기에 이른다. 임존성은 천혜의 성으로 난공불락의 성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의병들이 이곳으로 집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을 수리하고, 식량을 비축하고 무기를 챙기는 등 항전의 준비를 하는데 마침 항복했던 흑치상지가 부하들을 이끌고 임존성에 들어온다.
흑치상지가 사비로부터 임존성까지 오는데는 많은 성을 거치게 되는데 아마 풍달군이 임존성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비에서 당군의 약탈과 횡포가 두려워 도망 온 흑치상지가 풍달군에 이르러 부장 사택상여와 항전을 준비하며 기병(起兵)한 직후 자신의 세력기반이 있던 덕산지역으로 와 곧바로 인근 임존성에서 복신의 항전 준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임존성에 합류했을 것으로 본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당서이다. 흑치상지는 당서에서 밝혔듯이 백제 서부인이요, 키가 칠척이요, 지략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百濟西部人 長七尺餘 驍곡有謨略)
흑치상지는 바로 이곳 내포를 중심으로 한 서부사람이다. 아무리 복신이 왕족이고 군인들의 신임을 얻고있다하더라도 정서적으로 이곳이 뿌리를 둔 고향 사람만 못할 수 있다. 이는 의병을 모으고 있는 복신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또한 지략가이다. 싸움에는 반드시 지략가가 필요하고 특히 적은 수의 항전은 더욱 그러하다. 복신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았을 것이다.4)
그런데 이때 그가 가지고 온 것은 부하 10여명이 아니라 서부를 중심으로 한 항전의 소식도 함께였을 것이다. 도침, 정무들이 그들이다.
이에 고무된 장수들은 곧바로 서북부를 중심으로 주변에 표를 고하고 의병을 모은다.5) 그 의병의 수는 순식간에 3만에 이르며 최초의 의병운동의 발상지가 된다.
당시 백제 상비군이 6만 정도로 보는데, 3만은 단순히 잃은 나라를 구라고자 의분(義憤)으로 일어난 민초들이다. 정규적 군사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또한 직접적으로 군사적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도 아닌 데 나라를 잃었다는 한으로 일어난 다물(多勿)운동이다. 이는 이곳 임존성을 중심으로 한 내포지역은 백제의 중흥의 발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마한의 중심지에서 찾아야 한다. 백제가 해상 왕국으로 내륙으로 그 세력을 넓히는데 적극적인 도움을 주는 월지국, 목지국 등 마한의 중심국이 이곳에 있어 그 뿌리가 깊은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만큼 백제에 대한 자긍심이 깊은 곳이 임존성 주변지역이다. 바로 민초들의 의병은 백제에 대한 자부심에서 나온 다물(多勿)운동이다. 이 다물 운동은 신라를 계승 발전한 고려시대의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6)
이때의 진용을 보면 대체로 복신이 장군으로 전체를 이끌고 있었고, 흑치상지가 장수로 병력을 이끌고 있었으며, 지수신이 내무를 맡아본 것으로 보인다. 부흥전쟁 내내 흑치의 이름으로 싸운 전투는 보이지 않고 복신의 이름으로 싸운 것으로 보아 휘하 장수로 전투를 치룬 것 같고, 특히 복신이 죽자 곧바로 항복을 하여 복신을 사살한 자들로부터 피한 것으로 보아 복신의 지근거리에서 있었던 것으로 본인다. 또한 지수신도 마지막 임존성 전투 장수로만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복신의 전투에는 따라가지 아니하고 임존성의 후방 거점을 지켜낸 것으로 본다. 이는 복신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던 것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2. 부흥군의 첫 전투와 복신 - 임존성 전투의 승리
부흥군의 첫 전투는 남잠(南岑), 정현성(貞峴城) 등지에서 신라군을 공격했고, 정무(正武)의 병력이 두시원악(豆尸原嶽), 지금의 청양에서 당군을 깨트리며 부흥군에 합세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부흥군의 전투가 이뤄지는 데 8월 26일에 소정방이 이끄는 신라군과 당군이 임존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당으로 돌아갔다고 적고있다. 이 때 참여한 장수가 복신, 도침, 흑치상지였다는 것으로 보아 곳곳에서 일어난 부흥군들이 임존성으로 모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싸움의 승리는 앞으로 부흥운동의 주도권을 결정할 군사적 우위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이때 임존성 이하 200여성이 부흥군에 합류한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나당연합군이 각 성에 항복문서를 보내고, 성주나 장군들을 사비에 모이도록 한다. 그러나 이에 분개하여 일어나게 되는데 성주가 항복하면 장수가 일어나고, 성주나 장수 모두가 항복하면 주변 호족들이나 영향력 있는 인사가 들고일어나게 되는데 각기 군사력이 어느정도 갖춰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첫 전투는 당군의 공격이 아니라 부흥군의 공격이 남잠에서 시작되는데 이는 기습적 전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잠(南岑)은 사비에서 지척의 거리이고, 나당군의 외곽 경비와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두시원악(豆尸原嶽)에서 정무가 이끄는 항전군도 사비와 지척인 청양 부근이고 보면 나당군의 사비 외곽 경비부대와의 접전이었을 것으로 본다. 비록 작은 승리를 했으나 나당군의 엄청난 세력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이는 정무가 이 싸움 후 임존성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아 그 세력이 아직은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잠이나 두시원악에서의 군인은 의병이 아닌 군인으로 보인다.
이 두 전투는 나당군을 긴장하게 했고, 부흥군 또한 상호 연락을 취하고 연대를 취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게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도침이나 정무 등의 군사력과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모두 군사력을 이끌고 임존성에 모이게 되고, 이들의 항전의지와 군사력은 곧바로 나당연합군에도 들어가게 되자 660년 8월 26일에 신라병이 임존성을 공격하게 되는데 보기 좋게 패전한다.
흑치상지의 지략과 험준한 성곽의 지세를 이용하여 부흥군은 기분좋은 승리를 한다. 그들은 다만 작은 목책 하나 정도 깨트리고 갔을 뿐이다. 더군다나 부흥군들이 갖고있던 무기들은 다만 뭉둥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신라군의 병장기를 뺏어 군비까지 갖추게 되었다. 이는 모두가 벌떼처럼 모여있고 고슴도치 처럼 일어나서 산곡(山谷) 가득찬 의병들의 분기탱천한 사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복신은 임존성 전투에서 현직은 아니었으나 이미 수많은 의병과 부흥군의 연합을 이끌어 낸다. 이 전투 직후 근거지로 다시 돌아간 것으로 보인 도침은 주류성을 근거로 항전군을 이끌고 있었고, 정무는 두랑윤성을 근거지로 의병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백제 사비를 중심으로 서부를 완전 부흥군에 의해 장악하기에 이른다. 특히 서북부는 매우 견고한 군사력을 지니게 된다. 이는 복신으로 하여금 신라와 당나라를 몰아내는데 자신감을 갖게 만든다.
3. 1,2차 사비성 포위전투의 실패와 도침 책임론
임존성 전투 후 복신은 일본으로 원군을 청하는 등 매우 발빠르게 그의 외교수단을 발휘하게 된다. 이 원군 요청은 그의 정책을 살필 수가 있다. 이 부흥운동을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으로 보고 대비한다는 것이다. 사비 외곽의 세력을 결집 시키고, 견고하게 지키고 있다가 일본 원군이 오면 일시에 타격을 가할 것이라는 정책이 뒤에 숨어 있다.
그러나 이 부흥군의 군사적 체제는 정비가 불확실한 듯 하다. 각자의 자생력이 있었던 만큼 독립적 지휘력을 갖고 있었고, 아주 약한 결합력만 있었을 뿐으로 추정된다. 다만 복신을 중심으로 한 흑치상지, 지수신이 있고, 도침을 중심으로 한 정무 등이 전술적 휘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계속 복신은 통일적 지휘체계를 원했고, 통일적 전략과 전술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것으로 보인다.
복신은 부흥군 필패론과 나당 연합군의 필패론를 다음과 같은 이유로 각각 제시한다.
부흥군 필패론은 적이 양도(兩都)와 각 요해(要害)를 탈거(奪據)하여 우리의 군자(軍資)와 기계(器械)를 몰수 햇는데 초양의 산졸과 양민을 모아 죽창과 목봉으로 적의 궁실검전(弓矢劍戰)을 가진자와 싸움은 필패요, 나당연합군의 필패론은 당군의 10만은 오직 신라의 양곡과 아국의 약탈만에 의존할 수 밖에 없으나 신라는 이미 오랜 전쟁으로 국고가 탕갈되었고, 민간의 약탈은 다수의 식량을 댈 수 없고, 오히려 반감으로 인한 의병만 늘릴 뿐이니 험요한 성읍을 견수(堅守)하다 때를 타 공격하면 반드시 이긴다.
그러나 도침과 정무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진 듯하다. 이들은 이후 전투에서 보였듯이 사비를 공격하여 사비만 되찾으면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전술 적 차이는 엄청난 사건과 차이를 가져오게 되는데 그 것이 바로 도침의 죽음이다.
8월 26일 방어전투의 승리 후 9월 23일 사비 공격 전투까지의 한 달 정도 짧은 일정은 미쳐 부흥군이 체재 정비를 갖추기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특히 각자 독자성을 가진 군대들의 통제력을 갖는다는 것은 이미 힘든 일이었을지 모른다. 복신의 필승론과 필패론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당군 수장이었던 소정방이 임존성 공격 실패 후 백제 평정에 대한 전과를 자랑하기 위해 당군 1만 정도와 신라군 7천 정도만 남겨두고 철수를 한데서 벌어졌다.
불꽃처럼 일어나는 의병의 수와 사기충천한 부흥군의 기세, 속속들이 모여드는 주변 성들의 합류, 그리고 첫 싸움의 대승은 부흥군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9월 3일 당군 수장과 당군의 귀환은 부흥군의 자신감에 불을 지피었다.
도침은 매우 성격이 거칠고, 거만한 성격의 불같은 성격의 장수였던 듯 하다. 복신이 외교관 스타일의 장수였다면 도침은 유인궤가 사자를 보냈을 때 ‘사자의 벼슬이 낮다’하여 스스로 만나지 아니하고 외관에 가둔 일로 보아 야전사령관 스타일로 외교적 의례나 지략을 짜는 장수가 아니었던 듯 하다. 그의 이런 성격은 부흥군의 결집과 철저한 준비을 요구한 복신의 필승론에도 불구하고 대군을 이끌고 9월 23일 부터 시작하여 한 달 이상이 걸린 사비성 전투에 나선다.
처음 사비 남령에 책을 세우고 사비성 포위에 들어간다. 尒禮城 등 20여개 성이 부흥군에 합류하는 등 성공의 기미가 보이기는 하나 삼년산성에 머물러 있던 신라 무열왕 등의 군대와 싸움에서 수천의 사상자를 내고 만다. 뿐만아니라 이듬해 봄, 도침은 또다시 사비성 공격을 나선다.7) 웅진강구에 둔을 치고 공격했으나 만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임존성으로 후퇴하고 만다.
이 두 실패한 전투가 도침에 의해 주도되면서 부흥군의 피해는 실로 엄청났다. 또한 나 당군의 반격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두랑윤성 전투이다. 사비성을 공격해온 도침을 물리치고 그 여세를 몰아 부흥군의 사비성 공격에 대비하여 선공을 친 것이다. 大幢 장군 品日을 비롯한 11명의 장군으로 대군을 이끌고 두랑윤성을 공격한 것이다. 임존성에 머물던 복신이 이에 대응하기위해 두랑윤성에서 진을 치고 지휘를 한다. 처음에는 두갈래로 공격하던 나 당군은 복신이 있는 두랑윤성에 공격을 집중한다. 이는 곧 복신군이 무너지면 부흥군을 제압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총력을 건 싸움을 하게 된다. 이 싸움은 거의 한 달 동안 벌어지게 되는데 신라군은 더 이상 싸울 전력이 없을 정도로 패하고 복신의 대승으로 끝이 난다. 또한 복신은 회군하는 신라군을 賓骨壤에서 공격하여 수 많은 군수품을 획득하기도 한다. 이 전투의 승리는 도침이 잃었던 군의 사기와 돌아서거나 망설이던 성주들을 부흥군에 합류하게 만들었다. 이후 전라도와 경상도 일부 지역까지 그 세력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투가 끝난 후 부흥군 내부에서는 전술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된다. 도침의 무모한 사비 공격에 대한 질책이 따랐을 것이고, 도침은 그의 성격으로 보아 이에 불응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복신보다 자신의 서열이 우위에 있었다면 더더욱 승복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도침의 죽음을 흔히 내부분열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인데, 특히 당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복신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전략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도침의 전투 실패, 이는 부흥군의 사기저하 뿐만아니라 망설이고 있는 각 성주들의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함께한 장수들의 도침에 대한 탄핵과 도침의 불응은 스스로 죽음을 불러왔을 것으로 보인다. 도침의 죽음은 부흥운동의 전략적 선택이요, 군사적 전략 실패에 따른 문책성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 때 모인 부흥군의 수가 3만명 정도 인데, 이중에 도침이 주도로 한 두 번의 전투 실패로 그 1/3이 되는 1만여명이 전사한 것이니 엄청난 전력 누수에 대한 책임은 누군가 지어야 했을 것으로 본다. 더군다나 이미 일본에 풍왕의 귀환을 요구한 뒤였으니 그 치명타를 짐작할 만하다. 풍왕의 귀환 요구는 그만큼 백제 부흥에 대한 복신의 자신감에서 온 것이다.
이 두랑윤성 전투 이후 복신으로 지휘체계가 단일화되고, 200여성이 부흥군에 합류함과 동시에 동시에 사비 동부도 장악하게 된다. 이는 곧바로 복신이 세워둔 전략 중에 하나인 나 당군의 식량로를 끊어 사비성의 나 당군이 고립되게 된다. 이때가 661년 여름이다. 가을까지 나당군의 解囲戰은 치열하게 벌어지고 드디어 9월 翁山城이 함락되면서 포위망이 풀리고, 한편 복신이 주도하는 부흥군은 부흥군대로 왜에서 온 豊을 왕으로 옹립하면서 체계를 완성시키면서 662년 쌍방간의 치열한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지게 된다.
4. 복신의 죽음에 대한 의문
풍왕이 옹립 되면서 부흥전쟁은 복신과 왜를 등에 업은 풍왕의 군사력이 합류하지만 옹산성 함락이후 상당한 전력의 약세를 면치 못한다. 그러나 이 두 군사력의 동침은 갈등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8) 그러나 이 갈등이 반드시 풍왕과 복신과의 권력투쟁으로만 보아야할 것인가 하는 데는 여러가지 의문이 남는다.
우선 이들의 갈등의 전개는 피성의 천도로 보고 있다. 주류성에서 피성으로의 천도는 백제부흥운동이 한창인 662년 12월에 단행되는데 풍왕의 주도하에 이뤄진다. 그 이유가 피성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기 때문이라 하여 장기전을 계획하고 전시체재를 재정비하려는 백제부흥운동의 전환기로 삼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당시 정세를 잘못판단한 것이거나 풍왕이 자신이 주도적으로 천도를 함으로써 백제인들에게 존재감을 알리고 세력기반을 확충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만큼 풍왕에게는 절심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적국들에게 단지 제사만 주관한다는 놀림을 받았을 정도이니 짐작이 간다. 이는 자신의 세력기반이었던 일본 측의 입장이 천도 절대 반대였고, 특히 에치노 다쿠스의 정확한 반대 논리는 후에 치명적인 입지를 갖게 된다.
결국 두 달 만에 다시 주류성으로 재천도를 하게 되는데 이후 6월에 복신이 모반을 꿈꾸고 이를 미리 알아챈 풍왕이 먼저 포박하여 복신을 죽인다. 이로서 복신의 일생은 끝이난다. 결국 3여년동안 백제부흥운동을 이끈 복신은 모반자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정말 복신은 백제 부흥군의 모반자로 남아야 할까, 그러나 이 과정에서 몇가지 흐름이 이어지지 않는 부분이 생기게 된다.
우선 풍왕을 살해할 이유가 불확실하다.
당시 복신이 쥐고 있던 권력은 이미 기술했듯이 풍왕이 제사만 주관할 정도였고, 당의 포로를 처리하는데도 복신이 주도하고 있어 오히려 풍왕이 왜 장수를 만나 신세한탄을 할 정도였으니 굳이 풍왕을 제거하여 부흥군의 명분을 잃게할 필요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 즈음 부흥군의 전세가 거열, 거물성과 사평성이 함락되는 등 절대로 우세하게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풍왕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세력 기반이었던 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추진한 천도가 실패함에 따라 더욱더 입지가 좁아질 수 밖에 없어 그 초초함이 극에 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서 왜가 출병을 결정하는데 이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면 후에 왜가 이 싸움의 주도권을 쥐고 싸우기 때문에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일본은 끊임없는 한반도 정복설과 정복 희망에 대한 기록들이 일본서기에 보면 곳곳에서 나타난다. 이는 중국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으로서, 중국의 일본 침략의 교두보를 막는 것으로서 한반도가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혼란은 그들에게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복신에 대한 신뢰는 무한했다.9) 그러나 풍왕의 이러한 초초함은 천도 실패에 따른 책임 문책을 이용하여 복신을 제거하려 했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천도 실패에 따른 책임은 져야했고, 왜장에 비해 암묵적인 동의를 하며 적극적인 반대를 하지 않았던 복신에게 화살을 겨누는 것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좋은 계략 일 것이다.
복신을 잡고 죽이는 과정이 너무 치밀하게 계획된 순서대로 이뤄지는 것은 단순히 모반의 계획이 들통 나 처형하는 것과는 다르다. 철저한 계획에 의해서 이뤄진다.
우선 굴실10)에서 병을 칭하고 쉬고 있던 복신을 잡아들이고, 손바닥을 뚫어 가죽으로 묶지만 쉽게 죽이지는 못한다11). 명분 없이 단순히 모반이란 이름으로 처단하기엔 복신 세력으로 둘러쌓인 주변 세가 석연치 않다. 드디어 결심한 듯 풍왕은 인민재판에 회부한다. 신하들을 모아놓고 그의 죄목을 성토하기 시작한다.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한다. 이는 부흥운동에서의 복신의 위치와 복신의 업적을 아는 장수들이라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때 덕집득(德 執得)이 총대를 메고 나선다. 복신은 악역한 자다, 살려둬서는 이득이 없다, 그를 처단하라! 아무도 그를 말리지 못한다. 다만 복신이 그를 향해 침을 뱉고 소리친다. “이 어리석은 종놈!” 이미 복신은 백제의 운명을 알았을까, 흑치상지도 이 중에 있었을 것이나 이미 판이 넘어간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후 어떤 싸움에도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과정에서 실망하여 당으로 항복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12)
어쨌든 이 과정에서 복신은 죽고 부흥군의 전세는 아주 약화된 채, 백강전투를 맞이한다. 물론 모든 전투는 일본군에 의해 치러진다. 백강전투의 패배는 부흥군 전체의 패배와도 같았다. 왜냐면 이 과정에서 풍왕이 도망치고 일본군은 전멸한채 몇몇만 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5. 최후의 전투, 임존성의 지수신
그러나 마지막 자존심은 지수신이 임존성에서 지켜내고 있었다.
지수신은 부흥운동 3년 내내 최후 전투를 제외하고는 어떤 전투에도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데, 아마 복신이 최후 거점의 중요성을 알고 임존성에 남겨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초기부터 복신, 흑치상지와 함께한 그는 임존성의 지세는 물론 남아있는 부흥군을 통솔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그만큼 믿을만한 장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것은 부흥운동 전투 내내 불리하거나 큰 전투에서 패하고 물러날 때는 어김없이 임존성에 거하기 때문이다. 또한 임존성에 거할 때는 신라나 당나라도 한 번도 공격한 기록이 없다. 다만 소정방에 의한 부흥운동 첫 거점지의 실패한 공격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 정도로 완고한 성벽과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임존성의 견고함과 아울러 난공불락의 성임을 잘 나타나는데, 이 성을 맡고 있던 장수가 복신이 믿고 맡긴 지수신 이었다. 한편 그의 출신은 밝혀진 바가 없으나 그는 백제의 서북부 출신이 아니었나 추측한다. 그것은 최후의 거점성에는 이곳 의병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고, 그들을 지휘하는데는 이곳 출신의 장수가 훨씬 효과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하는 성이었으면 더욱더 이곳 출신의 장수만이 효과적인 전술을 짤 수 있다. 실제로 지수신은 지세를 적절히 이용하고, 소책, 대책도 적절한 곳에 세움으로써 효과적으로 공격을 막아낸다.
대대적인 백강전투의 승리를 한 나당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최후의 항전지인 임존성에 진을 치고 성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성의 견고함은 끄떡없이 견디어 낸다. 이때의 군사는 거의 서북부 지역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백제의 병사들은 삼년을 전투하면서 거의 대부분 전사하였고, 주 전투가 금강과 사비성을 중심으로 벌어졌으므로 이곳에 군대가 많이 남아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의 성을 수비하는 인원과 단지 백성들이 있었을 뿐으로 추정한다면 마지막 까지 지켜낸 군사들은 백성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견고한 성도 항복한 장수 흑치상지에 의해 무너지는데, 본래 흑치상지가 이곳 부근의 풍달 군장이었고, 부흥군 초기 임존성 전투의 선봉장이었다는 말을 뒷받침 해주듯이 그는 이곳의 지세나 공격과 방어의 전략에 대해 꿰뚫었을 것이다13). 결국 흑치상지의 공격에 의해 드디어 3여년에 걸친 백제부흥운동은 막을 내리게 된다.
결론
지금까지 백제 부흥운동 전투에 대한 대강의 과정을 복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또한 이 과정에서의 복신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특히 복신과 흑치상지, 지수신 등이 이곳 백제 서북부 출신일 가능성에 대해 짚어봤다. 이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짚어왔던 과정과 대동소이한 것을 또 다시 짚어본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첫째, 부흥운동 과정에서의 복신의 위치를 알아보았다. 복신은 부흥운동 내내 탁월한 지휘자였고, 전략가였고, 부흥운동의 핵심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출신이 흑치상지와 마찬가지로 예산 지역이었을 가능성이다.
둘째. 부흥운동의 실패를 내부 권력욕이나 갈등에서 찾기 보다는 전략적 차원에서 다루어보았다. 도침은 전략의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풍왕의 복신 살해는 일본의 주도권 장악의 한 시나리오로 바라보았다. 약간의 무리가 있을 수 있으나 풍왕의 행동에는 의심 가는 행위가 많다.
셋째,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인 임존성도 예산에 있고, 부흥운동의 핵심 인물인 복신도 임존성에서 항전의 횃불을 밝혔다. 또한 첫 전투부터 마지막 전투까지 당시 백제의 서북부 지역인 예산을 중심으로 한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백제 부흥군 위령제
이 모두가 예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들이고, 예산을 중심으로 한 백성들의 희생으로 치러낸 흥망계절(興亡繼絶)의 정신이었다고 본다.
백제부흥운동의 정치 군사적 움직임을 대체로 세 차례로 규정한다.
첫째는 660년 백제부흥전쟁이요, 둘째가 신라 쇠망기에 일어난 후백제의 성립이요, 세번째는 고려왕조 중 13세기 호남지역의 민란 형식이다. 그 후 정치적 영향력은 행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백제 문화 복원은 계속되었는데 이는 백제문화 부흥운동이라 할 수 있다.
백제식 탑인 정림사지 5층 석탑과 서천 비인면의 탑, 공주 계룡산의 남매 탑, 규암면 장하리의 석탑, 무량사 5층탑 등은 백제부흥의 문화적 정신적 기운의 발흥이다.14)
또한 고려말에 중창되는 예산 수덕사의 건축양식은 그대로 백제 양식을 본뜨며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예산지역에서는 백제부흥운동에 대한 연구만 있을 뿐, 그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은산에서 복신에 대한 별신굿으로 위령제가 전해지고, 연기 지역에서 부흥군 진혼제가 열렸다. 청양의 두릉윤성 백제 부흥군 위령제, 홍성에서는 홍성 백제 부흥운동 순의열사 위령제를 열고 있다.
그러나 정작 부흥운동의 중심에 서있고, 당시 제일 많은 희생과 순국을 한 열사들이 예산 주변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그나마 예산에서는 앞에서 밝혔듯이 위령제가 조촐하게나마 치러졌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없고,후세들에게는 다만 글로만 전달될 뿐이다.
앞에 두 분께서 조사 발표한 것도 모두 이와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 이복현 선생은 임존성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조사하였고, 성부제 선생은 부흥운동에서의 임존성의 역할을 조사 발표했다. 이는 앞으로 임존성을 주제로 한 진혼굿 이나 행사에 스토리텔링을 제공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글 또한 그 안타까움이 최소한 진혼굿으로 승화하길 바랄 뿐이다.
첫댓글 백제 부흥운동의 핵심세력은 서방성이다.
백제는 사비성이 함락되었을뿐 백제 땅 모든 지역은 온전하였고, 상황 전개만 관망하다가 임존성에서 흑지상지가 나당군의 공격을 물리치자 부흥운동에 동참하게 되지만, 적극적으로 함류하지 않은 느낌이다. 백제가 5방성 체제로 나라를 통치하였지만 지방 토착세력을 완전히 지배하지는 않은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서방성은 백제의 중앙세력과 관계 깊은 지역으로 다른 지역보다 특혜받은 지역으로 보인다.
부흥운동은 강 서쪽에서 시작되어 불어나는 유민 지원군으로 안전하고 넓은 공간을 찿아 중부로 들어간 곳이 산악 지역이고, 임존성에서 가까운 산악지역 이다.
도침은 660년 9월 임존성 전투직후 근거지로 돌아가서 주류성을 근거로 항전군을 이끌었고, 정무는 두랑윤성을 근거지로 의병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흥운동 시작부터 백제 서북부는 완전히 부흥군에 의해 장악된다.
위 내용을 되새겨보아야 한다. 도침과 정무는 서로 기까운 관계였고 그들이 머문 지역이 어디인지를 밝히면 주류성의 위치가 드러나게 된다.
도침은 승려로 알려져 있고, 성왕이 창건한 미륵사 승병을 이끌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정무와 연통하는 관계였다면, 금강 서북부 산악지역의 어느 사찰에 머물면서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였을 개연성이 크다. 도침이 살해되었을때 정무 또한 무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부흥운동을 기록한 옛 고문서에 어떤 사유로 도침이 머물면서 항전한 곳을 주류성으로 기록하였는지 불명확하다.
도침은 흑치상지가 부흥군을 이끌고 임존성에서 나당군을 격퇴시키자 정무등 부흥군의 여타 세력들 처럼 임존성으로 합류한다.
도침의 본거지가 임존성과 가까운 곳에 있었을 개연성을 말해주는 사실관계가 아닐까 한다.
백제의 왕사 사찰은 사비강 건너편 왕흥사였다. 왕흥사 뒷산에 왕흥사 잠성에서 사비성을 공격하자 나당군에게 가장 먼저 진압되었던 곳이다. 도침은 이때 왕흥사를 떠나 이웃한 어느 사악지역의 사찰에 머물다가 임존성으로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