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의 형성원리와 서술미학>, 보고사, 2014,8의 머리말입니다.
이 책은 제가 <조선시대 일화 연구>를 펴낸 지 17년 만에 다시 내는 일화 연구서입니다. 그 사이 일화에 대해서 성찰하고 고민한 내용을 모두 담았습니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이뤄낸 성과라 생각하며 다시 읽어보니 겸연쩍고 부끄러운 곳이 많습니다.
서사는 허구성을 전제한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서사학자들과는 달리, 저는 허구가 아닌 실재를 담은 일화도 당당히 서사의 영역에서 한 자리를 차지해야하며 일화가 그 어떤 허구적 서사 못지않게 다채롭고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해왔습니다. 이제 일화가 미미하나마 서사의 한 영역을 차지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허구와 실재의 구분이 분별적 사유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현실이 환(幻)이고 꿈인 것을 알게 된 이상, 허구와 실재를 나누어 비교하는 것은 꿈속에서 꿈을 꾸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인정합니다.
허구적 서사에 온갖 전도몽상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그게 허구 세계의 것이지 현실에서는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이라며 안도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일어나는 전도몽상이 허구 세계의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을 확인하면서 참담한 심정이 되고는 했습니다.
일화에 대한 첫 연구가 나올 때는 우리나라가 IMF 구제 금융을 받기 시작한 뒤숭숭한 시기였습니다. 현실의 이야기가 아름답기보다는 서럽고 아픈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두 번째 일화 저서를 내는 지금 우리나라는 그때보다 더 처참한 지경에 빠져 있습니다. 일화를 통하여 현실의 다채로움과 아름다움을 내세우려 하면할수록 현실의 사악함과 험상궂음이 도드라집니다. 이것은 이 책의 역설이면서 저의 역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생의 존재가 부처의 전제이듯, 험상궂음과 사악함은 자비로움과 진정성의 표징이라는 가르침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온갖 상대적 개념의 올가미를 벗어나는 순간 감격적으로 목도할 그 비약을 그리워합니다. 그러기 위해 여전히 누추하고 사악한 현실의 구석구석을 외면하지 않고 응시할 것입니다. 그러는 것이 일화 연구의 본령일 것입니다. 한 개의 티끌 속에 우주가 깃들어있다는 징표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이 책이 한 티끌 속에 깃든 온 우주의 마음을 더듬을 수 있는 초라하지만 뚜렷한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앞으로도 허구와 실재, 전도몽상과 평정, 추악함과 아름다움을 함께 넘어서는 일을 계속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실재와 평정과 아름다움에 기꺼이 집착하겠습니다. 부디 이 책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세계를 여실지견하기 위한 선언적 몸부림으로 이해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 책을 펴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지켜보아주신 분들이 참 많습니다. 한 분 한 분 떠올려보니 배은망덕한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모든 분들께 참회와 감사의 큰 절을 올립니다.
2014.8.
圓峯 이강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