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계량(卞季良.1369∼1430)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활약한 인물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호는 춘정(春亭)이다. 그는 밀양 고을 통바우골에서 태어났다. 통바우골은 오늘날 초동면에 있다. 흰소머리를 놓고 하늘제사를 지냈다고 그 산 이름을 흰소머리산이라 했습니다. 고려말에 목은과 포은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17세 때 문과에 급제,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드러냈다. 20여 년간을 봉직하면서 태조실록을 편찬한다. 고려사를 개수하고 훈민정음 창제에도 초기에 참여했다. 현재 밀양에는 변옥란 등 3부자를 모시는 유허비가 있다.
검교판중추원사 변옥란(卞玉蘭)의 아들인 변계량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네 살에 고시의 대구를 외우고 여섯 살에 글을 지었다. 1382년(우왕8)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생원시에도 급제했다. 전교주부, 비순위정용랑장 겸 진덕박사가 되었다. 조선왕조의 건국 때 천우위중랑장 겸 전의감승이 되었다. 태종 초에는 성균관악정, 사제감소감 겸 예문관응교와 직제학을 역임한 뒤 당상관에 오르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세종 때 가뭄이 심하여 상왕인 태종이 크게 근심했다. 그러자 변계량은 태종 임금에게 하늘제사를 지내자고 주청했다. “고조선 시대 배달겨레가 하늘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고조선을 이어 받아서 나라를 일으킨 우리 조선국이 하늘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마땅한 일로 됩니다.”라고 말했다. 상황이 절박하다며 원단(圓壇)에서 기우제를 지내자고 청한 것이다. 태종이 그에게 제문을 짓게 하고 영의정 유정현을 보내 제사를 드린 뒤 얼마 후 과연 큰비가 내렸다.
또한 春亭은 세종대왕(世宗大王)에게 집현전(集賢殿) 설치를 주청하였고, 세종 2년 집현전이 설치된 뒤에는 대제학이 되었으며, 1426년에 우군도총제부판사를 역임했다. 변계량은 특히 문장에 뛰어나 거의 20년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문서를 작성했다. 또한 과거의 시관으로 선비를 뽑는 일에 지극히 공정을 기하여 과거시험의 폐단을 개혁했다.
그러나 대제학으로서 귀신과 부처를 섬겨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여 주위로부터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두려워 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변계량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정도전, 권근으로 이어지는 관인문학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화산별곡(華山別曲), 태행태상왕시책문(太行太上王諡冊文)을 지어 조선 왕조의 건국을 찬양했다.
저서로는《춘정집》3권 5책이 있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개수(改修)에 참여하였으며, 기자묘(箕子墓)의 비문과낙천정기(樂天亭記), 헌릉지문(獻陵誌文)을 지었다.
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한다. 변계량이 지은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해온다.
내해 좋다하고 남 슬흔 일 하디 말며
(내 하기 좋다고 남에게 싫은 일을 하지 말며),
남이 한다하고 의(義) 아녀든 좃디 마라
(남이 한다고 하여도 의로운 일 아니거든 따라하지 말라),
우리는 천성을 딕히여 삼긴 대로 하리라
(우리는 타고난 성품에 따라 나 생긴 그대로 하리라)
한편 그는 시집 간 누이동생의 모함으로 곤경에 처한 적이 있다. 정종 1년(1399) 8월 19일의 정종실록에는 변계량 누이동생의 사형집행 소식을 알리면서 사건의 내막을 기록하고 있다.
변계량의 누이동생 변씨는 죽은 남편 박충언의 종과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부인의 재혼이 허용되었던 조선 초기였던 때라 변씨는 다시 박원길과 재혼했다. 그 뒤 남편이 변씨의 부정을 알게 되자 변씨는 변계량에게 달려가 “남편의 성질이 사나워 같이 살기 힘들다”며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변계량이 허락하지 않자 변씨는 자신의 정부와 공모해, 박원길과 변계량이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했다고 정안대군 이방원에게 모함했다.
그 뒤 변씨의 남편 박원길은 억울하게 극심한 문초를 당했다. 결국 사건 전모가 밝혀지기는 했으나 박원길은 심하게 매를 맞아 이미 죽었다. 물론 변씨 자신도 정부와 함께 참형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