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99A8CF335FA3828B2D)
25.
[현우석의 귀국]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현우석은 호주에서 출중한 외국어실력을 키우고, 경제적인 능력을 장착한 후 ‘짜잔’ 하고 이루나 앞에 나타나려던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현우석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잔뜩 들떠서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는 얼굴이다.
* * * *
같은 시각 루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추워지는 겨울날씨와 함께 해가 짧아진 탓에 사무실 안에서 보이는 창밖은 어느새 어둠이 가득 내려앉았다.
창밖을 바라보던 루나는 문득 일주일 전 주원과의 일을 떠올린다.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 거야? 너 내 폰으로 무슨 짓 한 거야?”
“이봐요, 이봐. 그래도 명색이 오늘 자정까진 남친이란 사람한테 말하는 것 좀 봐요. 지금 그 형을 더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말 안 해도 보여주고 있잖아요.”
“내가?”
되묻는 루나를 마주하고 팔짱을 낀채 비스듬히 의자에 앉은 주원이 씁쓸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루나는 지금껏 자신의 태도와 마음을 알기 위해 지난 일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집에 돌아온 후였다. 주원과의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 짓고 들어온 건지도 모른 채.
생각을 곱씹은 루나는 3개월이란 시간동안 주원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결론을 지었다. 자신이 오래전 현우석에게 했던 못된 짓을 주원에게도 해버리고 말았단 사실. 스스로의 감정을 잘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만남을 시작했고, 그로 인해 마음이 더 컸던 상대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상처를 받고 말았을 것이란 결론을 말이다.
“여보세요?”
“주원아, 오늘 시간 있어?”
“시간은 내면 되는데, 무슨 일이에요?”
“몇 시에 퇴근해?”
“7시 반이요.”
“그럼 내가 그쪽으로 갈게. 조금 이따 보자.”
무턱대고 주원에게 전화를 걸었고, 일방적인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7시 반. 낯선 장소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고, 운전석에서 루나가 내려 가만히 주원을 향한 시선을 맞춘다. 입고 있던 근무복을 벗어내며 다급하게 루나에게 달려온다. 새하얀 입김을 푹푹 뱉어내면서 오히려 루나를 걱정하듯 말하는 주원.
“왜 나와 있어요. 안 추워요?”
“오늘 내가 술 살게.”
“엥? 뜬금없이 무슨 술이요?”
“그래야 솔직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내가 너한테 지은 죄가 너무 커서...”
* * * *
장소를 옮겨 마주하고 앉은 루나와 주원. 주원은 루나가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 이유를 핑계 삼아 조금이라도 루나를 더 만날 생각에 따라나섰다.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에 놓여지고, 나란히 각자의 앞에 놓인 술잔을 주원이 채운다.
“미안해, 주원아.”
술잔을 다 채우고 술병을 테이블에 내려놓다 불쑥 뱉어내는 말에 멈칫하며 루나의 표정을 살피는 주원. 누가 보면 중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꼬리가 심하게 쳐져서 무릎 꿇고 빌라면 빌기라도 할 기세로 주원을 보고 있는 루나.
“내 감정도 잘 모르고, 상대의 감정의 깊이도 가늠하지 않고 무턱대고 시작부터 해버렸어. 진짜 내가 못된 년이야.”
“하... 그게 뭐라고 자신을 그렇게 깎아 내려요?!”
“내 잘못이야. 나 때문에 상처를 줬어 너한테.”
“누가 그래요? 상처 줬다고?”
“어?!”
“그렇게 미안해하지 마요. 힘들게 접은 맘 다시 욕심내고 싶어지니까...”
“최주원...”
“짠!”
술잔을 스윽 내밀었고, 그런 주원에게 루나는 용서 구할 말은 더 이상 꺼내지 못한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나는 주원이 채워둔 술잔을 비운다.
* * * *
“어디야 이 새키야.”
“여기! 여기!”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우석이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이 향한다. 이내 입 꼬리를 힘껏 귀에 걸며 웃어 보이는 우석을 향해 총총거리고 달려가는 한 남자.
“1년도 안 있었는데, 무슨 짐이 이렇게 많냐?”
“똑바로 거들기나 해. 차 어디 있어?”
“아, 맞다! 네 차 말인데... 형님이 주차를 잘못했다가 똥차가 됐어.”
“뭐?!”
“그래서 갈아치울까 하다가, 그래도 차 주인이 보고 바꾸는 게 날 것 같아서 냅두고 있는 중이래.”
“아 놔 진짜... 또 욕 안하고 착하게 살라 했는데, 한국 들어오자마자 열 받게 하네. 그래서 그 차 어디 있는데?”
언제 웃었냐는 듯 현우석은 인상이 있는 대로 일그러져서 남자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리고 그냥 무심결에 봐도 ‘저 사람은 화가 잔뜩 났구나’ 싶을 정도로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면서 차가 세워진 곳으로 다가선다. 마주하고 선 차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긁힐 대로 긁혀서 원래의 색이 그레이였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고, 양쪽 백미러 유리는 금이 갈대로 가서 자세히 봐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마주하고 선 차의 상태를 보며 연신 한숨을 푹푹 쉬어대던 우석은 흘끔 남자를 본다.
“내놔.”
“뭘?”
“하루만 빌리자. 네 차.”
“뭐?!”
“하루만. 중요하게 만날 사람이 있는데, 이 모양 이 꼴의 차를 몰고 갈순 없잖냐.”
마지못해 남자는 우석에게 자신의 차키를 건넨다. 한쪽 입 꼬리를 쓰윽 올려 얄궂게 미소를 짓더니 홀연히 자리를 떠나는 우석. 남자는 주변을 몇 번이나 두리번거리며 어찌할 바 몰라 하더니 상황을 받아들인 듯 똥차가 되어버린 우석의 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우석의 집으로 향한다.
* * * *
[다시 만난 남녀]
퇴근시간 무렵 낯선 번호가 휴대폰 액정화면을 채우고, 루나의 폰 진동을 요란스럽게 울려댄다. 전산을 보고 금액을 맞추고 있던 루나는 진동소리를 듣지 못하고 한참을 모니터 화면을 집중해서 보며 키보드를 타닥거리며 옆에 놓인 계산기도 함께 두드린다. 한참을 붙들고 있던 일이 해결이 된 듯 그제야 여유를 찾으며 책상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든다.
‘부재중3통, 문자1건’
통화기록을 보곤 알 수 없는 낯선 번호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루나. 한건의 미확인 문자메시지를 열어본다.
‘오늘 저녁 만나자, 이루나.’
이름을 아는 것이 낯선 이는 아닌 듯한데,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지 않는 번호라면 딱 두 가지일 가능성이 높았다. 루나가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상대가 기존의 번호가 다른 것으로 바뀌었거나 둘 중 하나. 상대가 기분상하지 않을 선에서 조심스럽게 신분을 확인하려는 내용의 답을 전송한다.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전화가 바로 걸려오는 낯선 번호.
“여... 보... 세요?”
“나야.”
“????”
“이루나, 나라구.”
“누구세요?”
“하... 현우석이다. 이루나.”
“어?! 어어?!! 너!!!”
“그렇게 놀래주니 기분 좋은데? 나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지... 진짜 한국 들어온 거야?”
“그럼, 내가 가짜로 한국 들어왔겠어?”
“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러니까... 아, 뭐지..?”
“퇴근 언제 해? 나 지금 청주야.”
“청주?!”
“뭘 그렇게 계속 놀래. 내가 어디로 데리러 가면 돼?”
“나, 아직 회사야.”
“알았어. 그럼 어머니 먼저 뵙고 있을게. 이따 보자 이루나.”
되물을 틈도 없이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리는 현우석. 우석은 어차피 루나에게 이사한 집 위치를 물어봐야 안 알려줄 것이 빤하다 생각해서 주변 친구들을 총 동원 해서 루나의 집 위치를 알아낸다.
몰고 왔던 차에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한가득 선물들을 사들고 도착한 집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두 세 차례 차안에서 선물꾸러미를 한참 꺼내 현관문 앞에 옮겨두고 차문을 잠그며 허겁지겁 현관 앞에 심호흡을 하며 선 우석.
‘띵동-’
“누구세요?”
“안녕하십니까 어머니, 현우석이라고 합니다.”
“누구?”
“현. 우. 석입니다. 루나 친구요.”
“어?”
사전에 아무런 말도 없었던 인물이 불쑥 찾아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옥경은 현관문을 열어 보이며 긴장한 듯 상기된 얼굴을 하고 선 우석과 마주한다. 불쑥 대면하게 된 옥경을 보자마자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네는 우석. 얼떨결에 인사를 받는 옥경.
“호주 갔다고 들었는데, 언제 왔니?”
“오늘 귀국하자마자 어머니 뵈려고 왔습니다.”
“오늘?! 루나랑은 연락했니? 루나가 오늘 아무 말 없었는데?!”
“아, 방금 전에 통화는 했구요, 집에 온다는 말은 안했어요. 서프라이즈 해드리려구요.”
“어머, 춥지. 이런, 얼른 들어와.”
“아, 저기.. 어머니 잠시만요...”
갑자기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앞에 차곡차곡 쌓아 올려두었던 선물들을 하나씩 들어 안으로 나르는 우석. 어안이 벙벙한 옥경은 만류할 새도 없이 선물꾸러미를 들여 넣고 있는 우석을 멍하게 바라보고 서 있다.
“아, 아니... 이게 다 뭐야? 뭘 이렇게 많이...”
“에이, 많다니요 어머니. 제가 그동안 드리고 싶은 것도 못 드렸는데, 그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얘! 루성아! 나와 봐라!”
야간을 하고 쉬는 휴무일이라 잠들어있던 루성이 방문을 열고, 까치집지은 머리모양 그대로 옥경의 부름에 이끌려 현관으로 걸어 나오다 잔뜩 놓인 선물꾸러미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리고 그 선물꾸러미를 옮겨놓고 있는 우석을 보고 또 한 번 놀라는 루성.
“안녕?! 오랜만이지? 잘 지냈어?”
“아, 안녕하세요.”
“미안한데, 이것 좀 같이 옮겨줄래?”
“아, 네... 네.”
사들고 온 선물꾸러미를 루성과 함께 안으로 다 들여놓고 나서야 거실에 자리를 하고 앉은 우석, 옥경, 루성. 가만히 앉아있던 우석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든다. 영문을 모르는 옥경과 루성은 우석이 또 무슨일을 하려고 이러나 싶은 얼굴로 가만히 바라보고만 앉아있다.
“어머니, 법당이 어딘가요? 절해야 되죠?!”
“어? 아니야 됐어. 괜찮아.”
“아니에요. 그래도 예의를 갖춰야죠. 이쪽인가요?”
자리에서 일어나서 법당이 차려진 안방으로 향하는 우석. 말릴 겨를도 없이 어느새 들어가서 향에 불을 태워 꽂고, 열심히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절을 올리는 우석. 그런 우석을 무흣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선 옥경.
“할머니, 할아버지. 루나 초등학교 동창친구라네요. 우석이도 소원 있으면 마음속으로 빌어봐.”
“아, 네!”
정성을 다해 고개를 조아리며 소원을 비는 듯 보이는 우석. 입매를 늘리며 미소를 띠는 옥경. 우석이 절을 다 하고 다시 거실로 나오던 찰나 도어락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현관문을 향해 마주하고 서는 우석. 말없이 입모양으로 ‘루나왔나보다’ 라고 하는 옥경. 현관문이 열리고 빨간색 다운패딩점퍼를 입고, 브라운계열의 염색한 단발머리에 초췌해진 얼굴을 들여보이는 루나를 마주하고 선 우석.
“루나야, 어서와.”
“나 왔...!!!”
“안녕? 이제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