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겨울호 (통권 127호)수록
이불에 대한 소고小考
곽 종 희
빨강 초록 비단색이 켜켜이 잠을 자도
정작엔 사십년 된 낡은 이불 덮는 엄마
기실은 지난날들을 버리기 싫은 거다
아부지 미운 정을 촘촘히 누벼 넣고
자식들 보고픔도 땀땀이 바느질한
숨죽은 그리움 한 채 덮고 사는 것일 게다
낡은 이불 한 채에 삐져나온 발이 열 개
흩어진 그 발들을 다독이는 꿈속에는
옥양목 시린 홑청이 서걱이고 있겠다
<당선소감>
당선소감을 보내 달라는 소식을 받고 몇 일간은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몇년 전 이사를 하던중
창고바닥에서 묵은 책들이 바랜 낙엽더미처럼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이란 제목도 보여서, 나도 이런 꿈을 꿀때가 있었구나!
새삼 스러웠습니다. 그때의 느낌은 회한도 아니고 미련도 아니고, 이미 판정난 패배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정없이 폐지로 버리고도 도대체 개운치 않았던 마음은 무었이었을까요?
그러던 중 우연찮게 시조집 한 권을 선물로 받게 되었는데, 그 묘미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고시조야 누구나 공부로 외운적이 있었지만, 현대시조 또한 종장에서 느껴지는 묘한 여운을 잊을 수 없어 한 번씩 흉내를 내보곤 했습니다.
시조집 한 권이 가망없는 불치라는 과녘에 희망이라는 화살로 사정없이 날아와 박혔습니다.
아편같은 시조맛을 잊을 수 없어 닥치는 대로 시조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만 오히려 써지지 않았습니다.
시조 종장의 반전처럼 내 인생의 종장에서, 나는 나와 한판 붙어 보기로 했습니다. 재대로 배워 보고 써 보겠다고 , 뒤 늦게 국문학도가 되었고 여전히 씨름 중입니다.
만만하지 않아 보이는 시조의 물살 속으로 한 발을 내 딛으려니 두렵습니다.
이제 부터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나이까지 버리지 못하고 데리고 온 내안의 감성도 잘 구슬려 볼 요량입니다.
졸작이라고도 말하기 부끄러운 저의 시조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일기장
제이슨 리
지나간 세월들은 공책에 바래있다
묘비석 글자처럼 요약된 편린들
애잔히 다시 읽으면 모든 일이 꿈인 듯
몇 장을 더 넘기면 나타나는 공백들
그 날의 페이지엔 무엇을 주저했나
눈물도 화석이 되어 부서질듯 굳었다
<당선 소감>
시를 쓰기 시작한 지 이제 일 년이 되었습니다.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한 두편의 시를 썼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페북에서 항상 용기와 격려를 해준 많은 시인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박영보 시인님은 지근에서 항상 좋은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고, 김호길 시인님은 격려와 칭찬으로 시를 쓰고자 하는 마음에 용기를 주셨고, 권갑하 시인님은 "시를 쓰려면 먼저 시의 씨앗을 품어야 한다"는 금옥 같은 말씀으로 시작(詩作)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번 당선이 제게 주는 의미는 무한한 긍정입니다. 시와 나는 과거보다 더 기깝고 친금하게 마주보며 인생과 자연에 대해 시공을 초월한 무한한 대화를 나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들을 여러분들과 나눌것을 약속 드립니다.
끝으로 좋은 작품이 많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_ 권 갑 하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전하는 신인의 자세로
곽종희 님의 「이불에 대한 소고 小考」와 제이슨 리(Jason Lee)의 「일기장」을 2018년도 나래시조 신인상으로 선정한다.
나래시조에서는 좋은 시인을 발굴하겠다는 의지로 신인상 선정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데, 이번에 좋은 신인을 배출하게 되어 기쁜 마음 금할 길 없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곽종희 님의 「이불에 대한 소고小考」는 절절한 사모곡 시편이다.
이불만큼 우리네 정서의 깊은곳을 차지하는 것이 또 있을까. 그랬다. 우리는 "낡은 이불 한 채에 삐져나운 발이 열 개"인 삶을 살았다. 그 속에서 가정의 온기가 일고 가족들의 사랑과 정이 싹 텄다.
아무리 좋은 새 이불이 있어도 "사십년 된 낡은 이불"을 덮고 사시는 "엄마"의 마음, 그것은 바로 "자식들 보고픔도 담땀이 바느질 한" "그리움 한채"를 "덮고 사시"는 마음 아니겠는가.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엄마"품처럼 마음이 따뜻해 진다. 그리운 시간으로 회귀를 불러 일으키는 좋은 작품이다.
제이슨리의 「일기장」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성찰 시편이다.
우리네 삶은 모두 일기장 속에 담겨있다. 기록했든 아니 했든, 무형의 일기장 속에서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실제의 일기장이 소중한 이유다. "지나간 세월들은 공책에 바래 있다" 첫 문장이 예사롭지 않다."눈물도 화석이 되어 부서질 듯 굳었다"는 마지막 문장 또한 깊은 속말이 전해진다. 언젠가 일기장을 적신 "부서질 듯 굳"은 "눈물"의 의미가 가슴을 적신다. 주저했던 순간들 , 공백과도 같은 생의 한 순간에 대한 반추는 생의 여백을 더욱 진하게 채울 것이다.
신인이란 도전하는 자이다. 더 높은 곳을 향하겠다는, 전례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도전에 담겨 있다.
등단한 이후에도 늘 도전하는 신인의 자세로 창작에 임하길 바란다. 그 누구든 도전 정신과 긴장이 풀어지면 좋은 작품을 빚을 수 없다. 늘 감각을 살리고 생각의 결을 드높여야 한다.
묵묵히 한 우물을 파는 장인 정신으로 , 세계적으로 위대한 한글에 바탕을 둔 우리 민족의 시 그릇인 시조를 통해 자신만의 시 세계를 마음껏 펼쳐 나가길 기대한다.
- 심사위원 : 권갑하, 김민정, 이승현, 손증호, 김윤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