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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못 순교성인들 서짓골에 묻히시고
서짓골에서 나가사키에
나가사키에서 서울로
1.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성인들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 되었나?
1866년 3월 30일 갈매못 해변의 법장(法場 사형장)에서 다섯 분의 성인들을 참수 처형한 충청수영의 집행관은 그분들의 목을 벤 머리를 장깃대에 매달아 사흘 동안 효수하였다. 매어달린 그분들의 머리 밑에는 각각 ‘안가(安家)’ ‘오가(吳家)’ 등의 글자를 쓴 팻말이 달려 있었다. 그러한 효수 기간이 지난 후 그곳의 모래자갈 바닥에 병졸들이 대충 묻었는데,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카를 함께 묻고 다른 세 순교자들은 한 구덩이에 함께 묻었다. 순교자들의 효수된 머리와 알몸을 일치시켜 칡넝쿨로 묶어서 각각 그 시신별로 ‘안가(安家)’ ‘오가(吳家)’ 등의 글자를 쓴 그 팻말을 머리에 덮어 묻었다.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의 조선식 이름 안돈이(安敦伊)에 따라 그분의 시신에 ‘안가(安家)’, 오메트르 신부의 시신에 ‘오가(吳家)’ 등의 표식이 함께 묻혔기에 나중에 신자들이 수습할 때 유해 구분이 용이하였다.
2. 순교하신 성인들의 시신은 그렇게 방치 되었나?
함께 치명하시고 갈매못 형장 모래자갈 속에 묻힌 다섯 성인의 시신 가운데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시신은 두 달 후 5월 29일(음력 4월 16일)에 그분의 양자 황천일 요한과 조카 황기원 안드레아의 수습작업으로 홍산 삽티(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에 안장되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황기원의 딸 황 마르타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4월 16일(양력 5월 29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신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 사피(삽틔)에 묻었습니다. 지금(증언한 1922년)은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
한편, 장주기 요셉 성인의 아들 장노첨이 청양 다락골의 신자들을 찾아가 수습 협력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다락골의 신자들은 두려움으로 그 협력을 거절하였다. 이런 사실을 전해들은 남포현(보령시) 서짓골에 살던 이화만 바오로의 아들들과 신자들이 장노첨과 더불어 갈매못 현지에 가게 된다. 그 일에 참가한 이화만 바오로의 아들 이치문 힐라리오는 그 경위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병인 4월 초9일(양력 1866년 5월 22일)에 죄인(이치문)과 죄인 형 둘 이뀌수(요한 크리소스토모) · 이(치서) 이냐시오와 이(성여) 바르나바)와 김성집과 장 회장의 아들(즉 장노첨)과 또 다른 교우 몇이 가서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장 회장의 시신을 거두어 염하니까 날이 샜습니다. 빨리 염해서 10리 되는 곳으로 모셔다가 네 구덩이를 나란히 파고 관 없이 묻었는데, 그 후에 말을 들으니 짐승들이 송장을 파먹는다고 해서 죄인의 부친(즉 이 바오로)이 무덤 자리를 가보고 다른 데로 옮겨야겠다고 해서 그 해 7월 초9일(양력 8월 18일)에 죄인과 죄인의 형 이뀌수와 조카 (이) 바르나바 등이 가서 시신을 파서 외인 최가의 배에 실었습니다. 바람이 대단히 불었기 때문에 보름 동안 고생하다가 간신히 남포 서지동(서짓골)에 네 구덩이를 나란히 파고 네 시신을 관 없이 묻고 한 봉분으로 덮었습니다.”
네 분 성인의 유해를 서짓골에 옮겨 오기까지 ‘보름 동안’의 이러한 작업을 한 이치문 힐라리오의 증언에 따르면, 서짓골에 안장한 것은 그해의 (양력으로) 9월 1일이 된다.
3. 서짓골에 안장된 성인들의 유해는 그 후 어찌 되었나?
네 분 성인의 유해가 서짓골에 안장 된 후 16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그분들의 무덤에 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당시 조선대목구의 부주교인 블랑(Blanc) 신부는 1882년 3월 23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하였다.
“본인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 요셉 회장의 유해 발굴 임무를 맡고서 전에도 발굴을 했었던 교우들에게 유해를 찾아서 가능한 한 정성껏 유해를 가져오라는 지시를 하였다.”
“전에도 발굴을 했었던 교우들” 중 한 사람인 이치문 힐라리오는 이러한 블랑 부주교의 지시를 받고 서짓골의 네 분 성인의 유해를 다시 발굴하게 되었다. 그 사실을 이치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죄인이 강경이(즉 충남 강경)에 살 때 백 주교께서 신부로 계실 때인데 죄인보고 말씀하시기를 ‘그 시신들을 장사한 사람 중에 너희 형제 밖에 그 무덤 자리를 아는 이가 없으니 네가 죽기 전에 파와라’ 하시기에 죄인과 죄인의 형 (이) 이냐시오 치서와 죄인의 조카 이 안드레아와 김성보와 합 4명이 대개 신사년(1881년) 봄 2월 즈음에 가서 네 시신을 파서 백 주교께 바쳤더니 백 주교께서 그 시신들을 네 집에 두었다가 누가 오거든 주어라 하시기에 한 달포 동안 죄인의 집에 두었더니, 어느 교우가 와서 법국으로 들여간다고 하기에 내주었습니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서짓골의 묘를 “신사년(1881년) 봄 2월 즈음에” 발굴했다고 증언한 이치문은 임오년(1882년)을 1년 착오 진술한 것이다. 블랑 부주교는 서짓골의 순교자들 안장묘를 발굴 수습하도록 지시한 후 그 작업을 한 교우들로부터 성인들의 유해를 인수하고 확인하여 그 다음의 절차를 강구하게 된다. 그 사실을 블랑은 1882년 3월 23일에 아래와 같이 기록해놓았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유해를 옮기게 되어 본인은 은진군(Yun-tjia)의 강경리로 가서 그곳에 도착한 조선 교우들인 이 힐라리오, 이 이냐시오, 이 안드레아, 이 프란치스코, 이 바르나바, 김 안드레아, 최 바오로로부터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신앙을 위해 참수된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조선인 장 요셉 회장의 유해를 헝겊으로 싼 꾸러미 네 개를 받았음을 승인한다. 위에서 언급한 거룩한 유해의 이장에 이번에만 협력을 한 김 안드레아와 최 바오로를 제외하고 위에서 명시한 다섯 명의 교우들은 사형집행 장소 근처에서 우리 순교자들의 시신을 직접 거두어들였던 교우들이다. 이들은 시신을 정성껏 땅에 묻었었고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시신을 여기저기로 여러 번 옮기는 일을 했었다.
각 꾸러미마다 별개의 시신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신체의 부분들은 각각 기름종이로 싸여졌고 그 위에는 순교자의 이름과 함께 싸여진 부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꾸러미를 받고서 본인은 본인 앞에서 꾸러미들을 모두 열도록 하였고 특별히 다블뤼 주교를 위해, 해골이 싸여 있다는 꾸러미들 속에 해골들이 잘 있는지 살펴보았다. 본인은 거두어온 모든 유해들의 목록을 작성하도록 하였고 시신들을 각각 한 꾸러미에 넣도록 하였다.
교우들이 꾸러미들을 끈으로 묶고 난 후에 본인은 각 꾸러미의 중심 매듭에 본인의 인장을 찍었다. 인장을 망가뜨리지 않고는 매듭을 풀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우리 순교자들의 시신들이 분명하다는 다짐을 하고 각 시신마다 별도로 확인을 하고서 위에 명시한 교우들이 모두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으며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의 확신을 할 수가 없다고 복음서에다 선서를 하였다. 앞의 일들을 모두 증명하기 위해 조선어로 공문서를 만들고 위에 명시한 교우들 모두가 복음서에 선서를 한 다음에 서명을 하도록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봉인되고 겉에 순교자의 이름이 쓰인 네 개의 꾸러미들은 현재 전라도 진안 널티의 마 베드로(Moua Pierre)회장의 집에서 리델 주교의 차후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널티’ 공소는 현재의 진안군 마령면 덕천리이다. 이와 같은 경위에 대해서 블랑은 조선대목구장인 리델 주교에게 1882년 5월 12일의 편지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저는 거룩한 유해를 받고 틀림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강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동료들의 순교 이후에 일어났던 일들과 관련이 있는 것들에 대한 조서를 꾸미게 하였습니다. 교우들은 거룩한 유해를 깨끗한 종이에 쌌습니다. 잘 분리된 각각의 시신과 각 부분에 특기할 만한 글자를 적어 놓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 번 이장을 하는 일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서에 선서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선서를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항상 같은 교우들이 이 일을 해왔었기 때문에 거룩한 유해에 대한 확인도 아주 잘 되었습니다. 저는 주교님께 모든 서류의 사본을 보내드립니다. 관계자들의 서명이 있는 원본은 이곳에서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동료들과 교우들은 모두 거룩한 유해를 일단 손에 넣었으니 다시 땅에 묻지 말고 안전한 곳으로, 예를 들면 일본으로 보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골들을 각각 따로 헝겊으로 싸고 그 위에 순교자의 이름을 조선어로 적어 놓은 것입니다. 저는 제가 보는 앞에서 이 일을 하도록 하였고 각각 싼 시신을 묶은 끈을 제 인장으로 봉인하였습니다. 이 인장을 망가뜨리지 않고는 열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순교자들의 귀중한 유해는 현재 열성적인 교우의 집에 옮겨 놓고 일본으로 보내기에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마 오는 10월에 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그때까지 주교님의 반대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한 말입니다.”
이렇게 네 분 성인들의 유해는 서짓골에서 수습되어 강경에서 블랑 부주교에 의해 확인 절차를 거쳐서 1개월 남짓 강경의 이치문의 집에 보관되고, 이어서 조선 대목구장 리델 주교의 조치가 있기까지 전라도 진안 널티 공소회장 집에 일시 보관 되었다. ‘널티’는 현재의 ‘전북 진안군 마령면 덕천리’이다. 그 후 성인들의 유해는 일본 나가사키의 오우라 성당 구내 신학교에 보내져서 12년 동안 보관되다가 1894년에 서울로 모셔오게 되었다. 전라도 널티 공소에서 일본 나가사키까지 이송된 경위에 대해서는 기록된 문헌이 발견되지 않는다. 리델 주교에게 보낸 보고 편지에 씌어있듯이, 유해를 일본으로 보낼 적당한 시기를 모색하였는데 그해 10월 이후라 한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1882년 10월 이후에 그 일이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블랑 신부가 이러한 경위를 보고하는 편지를 받아야 할 리델 주교는 당시 조선을 떠나 있었다. 리델은 1861년에 다른 동료선교사들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시기에 중국으로 탈출하였다가 1869년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을 받아 1870년에 주교로 서품 받게 되었다. 리델은 교구장 주교로서 다시 조선 입국을 도모하던 중 1876년 5월에 블랑(Blanc) 신부와 드게트(Deguette) 신부를 먼저 입국시키고 드디어 1877년 9월에 다른 두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잠입하여 교구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입국 후 4개월 만에(1878년 1월말에) 리델 주교는 체포되고 1878년 6월 4일에 중국으로 추방당하여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리델 주교는 추방당하면서 1878년에 블랑 신부를 부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추방당한 리델 교구장의 부재중에 블랑 신부는 부교구장으로서 교구장 직무를 대행하면서, 서짓골의 순교자들 무덤을 발굴하도록 신자들에게 지시를 하고 모든 것을 확인한 후, 안전 조치로써 일본으로 유해를 보낼 뜻을 해외의 리델 주교에게 보고한 것이다. 그러던 중 블랑 신부는 교구장 승계권이 있는 주교로 서임되어 나가사키의 오우라 성당에서 1883년 7월 8일에 나가사키 교구장 프티장 주교의 집전으로 주교 성품을 받게 되었다.
블랑 신부는 주로 전라도 지역을 맡아서 사목활동을 하였는데 1878년에 진안군 마령에 사는 박중현 안드레아를 만나게 되었다. 박중현은 병인년(1866년)의 박해를 경험한 신자이고 성직자들을 보필하던 열심한 회장인데 한때 박해를 피하여 해외 망명을 하고자 밀항을 하다가 실패하고 진안에 숨어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경력이 있는 박중현을 만난 블랑 신부는 중국과의 연락을 육로로 하지 않고 일본을 경유하는 해로의 용이성을 착안하여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동료 선교사들과 연락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1876년에 조선과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맺음으로써 부산 등의 개항을 하게 되어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개항지에 일본인 거주 지역이 설정되고 일본 화폐의 유통 및 일본의 수출입 상품의 비과세와 양곡의 무제한 유출 등이 허용되었다. 블랑 신부가 일본인 때문에 난처한 일을 당한 일이 있다면서 1879년 12월 12일에 리델 주교에게 보낸 편지로 보고한 일이 있는데, 이는 일본인들을 이용하여 당시 일본에 주재하던 파리외방전교회 동료선교사들과 연락관계를 도모하다가 당한 일이 있다는 반증이 된다. 실제로 일본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일본 신학생을 조선에 파견하여 성유와 미사주를 블랑 신부에게 공급하기도 하였는데, 이렇듯이 블랑 신부는 비밀리에 일본 주재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의 연락망을 확보하고 있었다. 블랑 신부는 일본의 주교들과 중국에 머물고 있는 조선 대목구장 리델 주교에게 보고할 편지를 일본인 신학생들을 통하여 보내려고 1879년 10월 3일에 박중현의 아들인 박영학 고스마에게 심부름을 시킨 일이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바, 블랑 신부는 조선에 왕래하는 일본인들을 이용하여 일본 주재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교신하였다.
중국으로 추방당한 리델 주교 역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조선으로 다시 들어올 기회를 기다리던 차에 중병에 걸려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리델 주교는 교황청으로부터 이미 부주교 임명권한을 부여받은 터에 블랑 신부에게 서둘러 주교 서품 받도록 지시하였다. 그래서 블랑 신부는 일본으로 건너가 1883년 7월 8일에 나가사키에서 프티장(Petitjean) 주교로부터 주교 성품을 받게 되었다. 계승권 있는 부주교로 서품된 블랑 주교는 1884년 6월 20일에 리델 주교가 프랑스에서 병사하자 자동적으로 조선대목구 제7대 교구장직을 승계 받게 되었다.
일련의 이러한 블랑 주교의 일본 주재 파리외방전교회 동료 선교사들과의 관계와 주교 승품 과정을 통하여, 서짓골에서 수습된 순교성인들의 유해를 나가사키로 안전하게 옮겨 모시게 된 정황을 짚어볼 수 있다. 유해를 그렇듯이 나가사키로 옮길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던 블랑은 강경에서 이치문 힐라리오 등을 통하여 유해의 확실성을 확보하고 그 이송 전까지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의 열심한 교우 집에 모셔두었던 것이다.
1882년 2월에 서짓골에서 발굴 수습된 순교 성인 네 분의 유해를 나가사키에 이송하게 된 사연은 블랑 신부의 나가사키와의 관계에서 그 연관성을 짐작하게 한다. 유해 수습 후 블랑 주교가 조선대목구 부주교로서 나가사키에서 1883년 7월 8일에 주교성품을 받게 되기까지의 그 기간에 조선에서 일본 나가사키 사이에 확실한 연락망이 유지되었다는 반증이다. 그러므로 서짓골에서 1882년 봄에 발굴 수습된 네 분 순교성인의 유해는 1882년 10월 이후에서 1883년 7월 사이의 어느 땐가에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유해는 나가사키의 오우라 성당에 12년간 안치 보존되었다. 오우라 성당은 당시 일본 나가사키 교구장좌 성당이었고 그 경내에 신학교가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오우라 성당의 제대 밑에 안치했다고 하는데, 그 후 10년이 지난 때에 나가사키 교구장 쥘르(Jules) 주교는 신학교에 유해가 모셔져 있었다고 편지에 언급한다. 그러나 1883년 7월 8일에 오우라 성당에서 주교성품을 받은 블랑 주교는 아마도 조선의 자기 선배 동료 선교사들의 치명하신 유해들을 그 성당 제단에 바치고 나서 조선의 주교로 서품 되었을 것이다.
4. 성인들의 유해를 나가사키에 옮겨 모시다
네 분 성인의 유해를 나가사키에 안전하게 옮겨 모시게 되었음을 1882년 11월 6일 일본의 대목구장인 프티장(Petitjean) 주교의 편지로 알 수 있다. 일본의 프티장 주교의 다음과 같은 편지 내용에 의하면, 조선 대목구장 리델 주교의 승인을 받아서 나가사키로 유해를 모시는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프티장 주교는 다음과 같이 조선 대목구장 리델 주교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가사키에 있는 우리들은 오늘 큰 기쁨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 블랑 주교의 매우 귀중한 위탁물인,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와 조선인 회장의 유해를 받았습니다.…”
그 후 10년이 지난 때에 나가사키 교구장 쥘르(Jules) 주교가 쓴 편지에 의하면, 오우라 성당 구내 신학교에 네 분 성인의 유해가 정성스레 보관되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년 후의 나가사키 교구장 쥘르 주교는 위앵 신부의 전기를 저술하던 라마제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공경하올 주임 신부님,
신부님께서 지난 9월 1일에 보내주신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위앵 신부의 유해가 여전히 이곳에 있다고 신부님께 말씀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저는 그 소중한 유골이 들어있는 작은 나무 상자가 신학교에 있는데 보존 상태가 여전히 완벽하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저는 덮개나 나사로만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제 앞에서 덮개를 열게 하고 우리들의 소중한 순교자의 유골이 들어있는 삼베로 된 조그만 자루를 제 손으로 만질 수 있었습니다. 격한 감동이 일어난 것을 신부님께서는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위앵 신부와 서로 의지하며 지냈던 수개월 동안의 추억이 더욱더 확대되었습니다. 제게 유골 자체를 보고서 만지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었다고 고백하는 건 전혀 힘든 일이 아니지만 그 유골을 지켜주는 봉인을 떼는 것은 저의 권한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유일하게 이 소중한 보물을 처리할 권리가 있는 조선 선교지가 우리에게 의뢰한 위탁물을 파손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5. 성인들의 유해를 서울로 모신 경위
네 분 성인의 유해가 나가사키의 신학교에 12년 간 정중히 보관되어오다가 블랑 주교의 선종 후 조선 대목구장으로 취임한 뮈텔 주교의 의지에 의해 조선 땅으로 귀환하게 된다. 일본에서 귀환되는 유해의 이송 출발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조선 대목구의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의 1895년 12월 31일자 일기에 필체가 다른 문건이 첨부되어 있다. 이것은 원문을 그대로 복사하여 중간에 꽂아둔 사본이다. 1932년 라리보(Larribeau) 주교가 일본의 후쿠오카에 들렀을 때, 그곳에서 활동했던 파리외방전교회 살몽(Amédée Salmon, 1845-1919) 신부의 일기 중 일부를 베껴 쓴 문건이다. 조선과 관련된 내용을 라리보 주교가 베껴왔는데, 그 중에서 우리의 성인 순교자들 유해와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894년 5월 1일 르 포르페(le Forfait) 호의 지휘관인 친절한 르퀼루(Reculoux) 선장이 정오에 조선으로 떠났다. 주교님께서 그에게 서울로 되돌려 보내져야 하는 네 분의 순교자 유해, 즉 세분의 유럽인들과 조선인 한 분의 유해를 부탁했다. 각각의 순교자들의 유해는 교기(Kyoki)로 만들어져 나사로 잘 고정되어 있는 네모난 상자 안에 모셔졌고, 주교님의 인장으로 봉인되어 있다. 스티내커(Steenackerrs) 영사는 르퀼루 호의 지휘관을 호위하여 유해함들을 배까지 수행해주었다. 그것은 세관에서 유해함을 열어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유해함들은 단지 국적기의 보호 아래 통과되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젊은 프랑스인 타세(G. Tasset)는 동양어학교 학생으로 교육부 장관인 스켈랭(Squellen) 씨가 현지에서 조선어를 배우도록 보내기에 르 포르페 호를 타고 한국으로 행하는 중이었다.”
살몽 신부의 이 일기는 일본에 있는 조선 순교자들의 유해를 프랑스 선박을 이용해 조선으로 보내던 사정에 대한 내용이다.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회장의 유해는 보령 서짓골에 묻혀 있다가 안전상의 이유로 블랑 주교에 의해 1882년 일본 나가사키로 옮겨졌다. 블랑 주교의 후임자인 1894년 당시 조선 대목구장 뮈텔은 이 유해들을 다시 조선으로 옮겨 오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서 당시 나가사키 대목구의 사목을 담당하던 파리외방전교회가 동일한 전교회 선교사 주교인 조선 대목구의 뮈텔 주교의 뜻에 따라 흔쾌히 순교자들의 유해를 조선으로 귀환해주었던 것이다. 5월 1일 나가사키에서 그렇게 르 포르페 호에 실려 보내진 유해는 5월 13일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5월 22일에 뮈텔 주교에게 인계되었다.
그리고 그 유해들은 서울 용산에 세워진 신학교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4년 후 1898년 명동 대성당이 준공된 다음에 1900년 9월 10일 대성당의 지하 소성당에 이전하여 안치되었다가, 병인 순교자 시복을 기하여 1967년 절두산 기념 성당의 순교자들 유해 안치실에 이전 안치되어 오늘에 이른다.
병인년(1866년) 3월 30일에 충청수영 보령 갈매못에서 치명하신 그분들의 ‘시신’은 그해 여름(8월 18일∼9월 1일)에 서짓골에 정식으로 안장되었으나, 서짓골의 신자들 또한 치명하고 떠난 후, 돌보는 사람 없이 외교인 땅주인들에 의해 훼손될 것을 우려한 교회 당국의 조처로 그분들의 유골이 발굴 수습되어 일본으로 임시 옮겨졌다가 서울로 돌아와, 다른 순교성인들의 유해들과 함께 ‘한 곳’(절두산 성지)에 영구 보존을 명분으로 안치되어 있다.
그러나 ‘절두산 성지’란 다블뤼 안토니오 성인과 위앵 루카 성인과 오메트르 베드로 성인과 장주기 요셉 성인과의 연관성이 없는 곳이다. 다만 ‘한 곳’에 모아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이른바 ‘관리정신’이 그 ‘한 곳’의 명분을 채워줄 뿐이다. 그러한 관리적 명분 보다는 신앙 증거의 역사인 ‘순교사’를 옳게 간파하는 역사적 명분을 후대에 전승시켜야 한다.
순교자의 무덤을 찾는 신앙의 후예들에게는 그 무덤을 증거로 하는 신앙의 증표를 보아야 할 권리가 있다. 어찌 된 역사인지 간파되지 않는 유해 안치실에서 거기 순례하여 온 후예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모아다 안치한 유해들의 명패를 바라보고는 무슨 신앙적 감흥의 은혜를 얻을 것인가?
치명자들의 무덤!
무덤은 가장 확실하고 강열한 신앙 증거의 현장이다.
서짓골이 그 현장이다.
서짓골!
갈매못의 병인년 치명 사실을 가장 잘 증거 해주는 곳이다.
그러나 그 서짓골은 후대의 ‘관리’가 문제된다는 이유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무덤의 형태를 상실하게 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무덤의 형태 그것을 상실하게 된 불가항력적인 역사 자체를 서짓골은 더욱 강열한 신앙의 징표로 간직하고 있다. 치명하여 그 시신이 묻히신 네 성인들의 살과 뼈가 진토 되어 버려진 그 산골의 흙에 보이지 않게 섞여 있다. 출토된 뼈의 조각들을 여기저기 보관하여 징표로 삼는 것이 신앙의 참된 표현은 아니다. 그 보다는, 지구의 수명과 함께 할 땅이 역사를 말해주는 그 장소에서 징표를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한다.
서짓골이 곧 그러한 징표를 보여주는 역사의 장소이다. 그 까닭은 단순히 치명하신 분들의 시신을 묻었던 장소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 치명 성인들의 살이 썩고 뼈가 스러진 흙이 거기 묻혀있다는 사실 보다도 더욱 진한 사실이 그 곳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 곳에 살던 이름 없는 사람들이 치명하신 성인들의 시신을 목숨 걸은 비장함으로 모셔왔고 그 때문에 그들 또한 성인들의 뒤를 이어 치명의 길로 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 때문에 이름 없이 치명으로 사라진 그 서짓골 사람들의 신앙이란, 그들이 모셔다 묻어드린 성인들의 신앙보다 엷은 빛깔로 하늘에 기록될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영웅으로 추앙되는 장수의 공적을 기리는 탑에 비하여, 전장에서 이름 없이 산화한 무명용사의 보잘 것 없는 비석 앞에 서서 느끼는 감흥은 더욱 진한 것이다. 그렇듯, 갈매못의 병인년 위대한 치명 성인들의 시신을 모신 탓으로 끌려가 죽었으나 정작 그들의 시신은 찾아지지 못하고 그 이름마저 굵게 기록된 바 없다 하는 것이 우리 후예들의 감흥을 더욱 진하게 하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