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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원(屈原)...
1. 굴원의 일생
글:김충실(우로)
굴원은 전국시대(戰國時代:기원전475~기원전221) 중엽인 기원전 340년경 장강(長江)의 지류인 강수(江水)와 한수(漢水)유역을 아울렀던 초나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자귀현(秭歸縣)이다. 이름은 평(平)이며, 자(字)는 원(原)이라 했다. 사마천(司馬遷)의『사기:史記』「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에 따르면 굴원은 초나라 귀족의 신분으로 초나라 왕실과 같은 성씨 즉 동성(同姓)이다. 다만 초 왕실의 본성이 “미”성(“羋”姓)인데 굴원의 성이 “미”가 아니고 “굴”인 것은 그의 직접적인 선조인 초 무왕(武王) 웅통(熊通)의 아들 굴하(屈瑕)가 굴(屈)이란 지역에 분봉(分封)되어 후대에 “굴”을 성으로 삼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계의 내력으로 보아 굴원과 초나라 왕실은 시조가 같으며, 그 시조는 바로 전설 속의 인물이며 천하를 통일했다는 삼황오제 가운데 하나인 고양(高陽) 전욱(顓頊)이다. 그러하기에 굴원은 매우 자랑스럽게 이소(離騷)의 첫머리에 자신의 뿌리를 밝히고 있다.
내 집안은 시조 고양 임금의 후손이요, (帝高陽之苗裔兮)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은 백용이라 하네. (朕先考曰白庸)
명문가의 후예로 거기에다 천부적인 자질과 품성을 지니고 굴원은 태어났다. 중국문학사에 있어 최초의 시인이자 가장 위대한 시인중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굴원은 전국시대 중기라는 격변의 시대를 살았다. 주(周)왕실이 몰락하여 소국에 예속되는 작은 나라로 전락하자, 제(齊) ․ 초(楚) ․ 연(燕) ․ 진(秦) ․ 한(韓) ․ 조(趙) ․ 위(魏) 7국 사이에 끝없는 패권다툼과 전쟁, 개혁세력과 보수 세력의 충돌, 신흥계층인 사(士)의 등장, 백가쟁명의 사상과 학술 등이 분분한 시대였다.
전국시대 각국의 상황을 개괄하자면, 전국 초기 한때 강성했던 나라는 한, 조, 위였다. 특히 위나라는 문후(文侯)때 현신, 이리(李悝), 오기(吳起) 등을 등용하여 정치, 경제를 개혁하여 당시 가장 강한 나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개혁이 철저하게, 지속적으로 진행되지 못한데다 지리적인 불리함까지 겹쳐 진의 계속된 공격으로 나날이 쇠락해지고 말았다. 연나라는 북방에 치우쳐 있어 비교적 전화를 피할 수 있었기에 동북의 변방을 개척하는데 힘을 쏟았다. 제나라는 유구한 역사와 높은 문화수준으로 줄곧 동방의 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진나라는 원래 다른 6국에 비해 비교적 늦게 발흥했다. 그러나 효공(孝公)때 상앙(商鞅)을 등용하여 철저한 변법을 실시한 결과 가장 강대한 국가로 발전해 나갔다. 그리하여 전국 후반기에는 매년 각국을 공격하여 다른 6국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한편 초나라는 앞에서 언급한데로 장강유역에 위치하여 가장 넓은 국토와 기름진 땅,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한 국가로서 국력으로만 보자면 7국 중에서 천하를 통일할만한 나라 우선순위 1~2번 이였다. 사실, 변법시행은 진나라보다 초나라에서 먼저 시행했다. 도왕(悼王:기원전401~381)은 오기(吳起)를 재상으로 임명하여 강력한 변법을 시행했다. 변법의 요지는 세속귀족의 특권을 빼앗아 버리는 것 이였다. 즉 봉군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3대가 넘으면 작위와 봉록을 취소하고, 혈연관계가 소원한 공족은 공족으로 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오지로 이주시켜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계를 유지케 하면서 그들의 정치세력의 싹을 잘라버렸다. 또한 무능한 관리 퇴출, 불필요한 관직 폐기, 녹봉삭감, 등을 강력히 실시.. 거기서 얻어지는 경제적 이득을 군사양성에 사용했다.
이러한 변법은 실효를 거두어 군사적으로 적지 않은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모두들 초나라의 강대해짐을 두려워하게 되었으나, 기득권을 상실한 세속귀족과 왕실 인척들의 압력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웠으며, 변법의 제안자인 오기를 제거하고자 혈안이 되었다고 『사기』의「손자오기열전」은 적고 있다. 아마도 오기의 변법이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그리고 꾸준히 시행되었더라면 중국통일의 주역은 초나라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도왕이 죽자 종실대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오기를 처단해 버렸다. 따라서 초나라의 변법 10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시대가 바뀌어 회왕(懷王)의 시대가 되었지만, 간신적자들의 참언만을 믿고 현신들을 멀리했기에 초나라의 정치는 여전히 부패의 늪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이런 부패의 심각성을 책사 소진(蘇秦)도 회왕에게 당시의 상황을 “오늘날 대왕의 대신과 친척들은 어질고 능력 있는 자를 해침으로써 자신의 세력만을 넓히려하며, 백성들을 죽도록 착취하고 있습니다.”라고 간언했다. 회왕이 진나라를 공격하다 붙잡혀 불귀의 객이 되자,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경양왕 또한 아버지 못지않게 어리석고 무능한 임금으로, 재위시절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수도인 영도(郢都)를 함락 시킨 후 “군신이 서로 공을 질투하고, 아첨하는 소인배들이 권력을 잡았으며, 선량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는 오히려 배척을 당했다. 백성들은 한마음 한뜻이 아니므로 성벽과 도랑도 고치지 아니했다. 기왕에 착한 신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방어시설조차 없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바로 이 회왕과 그의 아들 경양왕(頃襄王)때가 굴원이 활동한 시대였다. 군주의 무능과 불민, 신하의 부패와 탐욕은 초나라의 정치를 혼란의 암흑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였으며, 굴원의 작품 속에는 조국의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애끓는 통탄과 탄식이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 굴원의 모든 정치적 주장과 행로는 회왕과 경양왕 당시의 국제정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울부짖는 애통한 절규는 무지몽매한 이 두 임금에 대한 원망이며, 그가 흘린 피눈물은 동족과 백성에 대한 우려에서 솟아난 것이었다.
일찍이 굴원은 약관 20대에 회왕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좌도라는 관직에 올랐다. 좌도라는 자리는 조정에서 왕과 함께 국가 대사를 의논하고, 대외적으로는 각국의 사절을 접대하며, 제후들을 응대하는 직책으로, 그야말로 내정과 외교를 관장하는 중요한 관직이었다. 굴원은 좌도직에 있을 때, 내정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제초(齊楚)연맹을 맺기도 했다.
회왕 11년, 6국이 연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할 때는 회왕이 합종의 수장을 맡았다. 합종이란 북쪽 연나라로부터 남쪽 초나라까지 종(縱)으로 연결하여 연맹하는 것을 말한 것인데, 이때 비록 진나라의 강력한 저항으로 6국은 어떠한 결과는 얻지 못했지만 진나라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초나라의 위상을 높여 주었다. 이런 대치 상황에서 굴원은 더욱 적극적으로 초나라의 흥망에 책임을 느끼게 되었으며 회왕의 측근에서 지성으로 왕을 보필하여 임금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워 소신껏 일할 수 있었기에 상당한 성취도 이루었고 보람도 가졌다.
그러나 굴원의 이러한 바람은 초국 귀족대신들의 내심과는 맞지 않았으며, 그의 내정개혁 주장은 그들의 질투와 미움을 초래했다. 구 귀족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서로 연합하여 굴원을 배척하였고, 그에 대한 회왕의 신임을 빼앗기 위해 온갖 모략과 술수를 동원했다. 또한 친제항진(親齊抗秦)의 선봉장인 굴원을 제거코자 진나라 장의(張儀)는 초나라 조정의 간신배들을 이용하여 회왕에게 모함의 상소를 올리도록 했다. 그 결과 아둔한 회왕은 간신적자들의 참언만 믿고 굴원을 내쳤다.
회왕은 그토록 신임했던 굴원을 왜 이렇게 쉽게 내쳤을까? 직접적인 동기는 굴원과 작위가 동등하고 평소 굴원을 질투하고 있던 상관대부의 교묘한 모함 때문 이었다. 그는 두 가지를 들어 왕의 심기를 흐려놓았다. 하나는 굴원이 기밀사항을 누설했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가 국왕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것이었다. 기밀누설 문제는 비밀사항인 법령재정을 떠벌이고 다녔다는 것이고, 권위도전 문제는 “내가 아니면 아무도 법령을 만들 사람이 없다.”며 자신을 과시하고 다니는 거만한 신하라는 것이었다. 회왕은 그들의 술수와 모략을 믿고 화를 내며, 좌도에서 한직인 삼려대부 자리로 쫒아냈다.그 직은 왕족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자리였다.
굴원은 삼려대부직을 성실히 수행했다. 정치적으로 좌절당한 그는 인재양성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초나라를 부흥시킬 희망을 이 젊은 귀족들에게 걸었고, 특히 그들의 고상한 도덕심과 조국에 대한 뜨거운 애국심을 기르는데 모든 주의를 기우렸다. 그러나 굴원의 이런 간절한 기원에도 불구하고, 이 젊은 귀족들은 그를 실망시켰다.
굴원은 아둔한 왕과 조정대신이라는 사람들이 진나라 장의(張儀)의 농간에 제초동명을 파기하는 것도 보았고, 진을 공격했으나 참담한 패배만 당하고, 오히려 진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생명이 죽고 수도가 함락 당하는가하면, 왕이 마침내 진나라의 부마가 되어 진의 압력을 받는 비참한 현실도 보았다. 이 모든 것을 목격한 굴원은 극도의 회한과 분노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생각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초는 곧 멸망할 것이며 백성들은 노예로 전락하여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할 것이다. 왕족의 몸으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조국을 보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처지에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굴원은 간신적자들의 허언과 농간에 의해, 그의 생에 두 번에 걸쳐 20여 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첫 번째는 회왕에 의해 한북일대로 유배를 당했으며, 다음은 그의 아들 경양왕에 의해 강남의 황량하고도 외딴곳으로 유배를 당했다. 긴 유배생활에 그의 생활은 몹시 곤궁하여 피골이 상접한 노인의 형색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쓰러져 가는 조국을 잊지 못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의 삶을 시로써 달래며, 임금이 자기를 불러 줄날 만을 기다렸다.
유배생활 중, 영도가 위급한 상항에 처했을 때는, 영도로 돌아가 초를 구할 마지막 기회를 얻고자했으나, 경양왕은 아예 그의 간을 거절하였고 그가 영도에 머무는 것조차 허락지 않았다. 마침내 기원전 223년, 진에의해 멸망당함으로서 죽웅(鬻熊)이후 600여 년에 걸친 초의 역사는 종말을 고했다. 시인 굴원이 받았던 정신적 타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너져가는 조국, 고통 받는 백성, 온갖 권모술수로 자기를 견제하는 부패한 귀족, 자신의 충정을 몰라주는 무능한 군주, 아무것도 할 수없는 암담한 현실, 숱한 회유와 압박 속에서도 초지일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그의 강직함은 마침내 분노로 폭발했다. 죽음으로 나의 충정을 알려 그들이 다시 깨어나게 하고 싶었다. 마침내 그는 호남성 장사 부근의 멱라강에 이르러 그 옛날 팽함(彭咸)이 그랬듯이 강물 속으로 훌쩍 몸을 날려 자살하고 말았다. 기원전 278년(경양왕 21년) 5월 5일, 그의 나이 62세 때였다.
5월 5일은 바로 단오절이다. 그가 고의로 단오절에 죽음을 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매년 5월5일이면 멱라강 일대의 백성들은 집집마다 찹쌀을 빻아 종려나무 잎으로 싸서 만든 각양각색의 종자(粽子)를 만들어 먹고 난 다음, 멱라강에 종자를 던지며 물고기들에게 굴원대부의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빈 후, 용주(龍舟)대회를 관람했다. 오늘날에도 강남지방에는 단오절을 전후하여 이 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되고 있다.
2. 굴원의 문학작품
굴원의 시가를 후대 사람들이 ‘초사(楚辭)’ 라고 통칭했다. 굴원자신은 자기 작품을 초사라고 명명한 적이 없고, 서한(西漢)때 와서 비로써 생긴 명칭이다. 서한 말기에 유향(劉向)이 굴원 등의 작품을 모아 『초사』집을 편찬하여, 그때부터 초사가 전문저서를 갖게 되었다. 초사는 대략 3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첫째는 전국시대 후기 중국의 남방 초국에서 고유한 언어와 음악을 바탕으로 출현한 일종의 새로운 시체(詩體)라는 뜻과, 둘째는 굴원과 그 이후의 작가들이 새로운 시체를 이용하여 저작한 시가(詩歌)라는 뜻, 셋째는 굴원과 송옥(宋玉)의 시가를 묶어 만든 책이름으로서의『초사』이다. 초사의 특성은 서정성이 농후하고 정서가 특이하며 문체가 화려 하다.
구의 중간이나 말미에 ‘혜’(兮), ‘사’(些), ‘지’(只)등의 어조사를 사용하여 음운을 조절한다. 또한 방언구어를 운용함으로써 진실한 감정을 표현하여 지방색채가 농후한 것이 그 특징이라 하겠다. 초사는 굴원이 창조한 것이지만 이러한 창조가 아무 근거 없이 그냥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문화적 기초와 민족역사의 근원이 내재해 있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초사’는 북방 중원문화의 영향을 받고, 남방 토착문화를 계승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북방의『시경』, 남방의 음악과 가요, 초국의 무풍(巫風), 제자의 백가쟁명과 유세의 기풍, 그리고 초나라의 자연풍광이 ‘초사’를 형성하는데 종합적인 작용을 했다.
굴원이 도대체 몇 편의 초사를 썼는지는 장기간에 걸친 논쟁의 대상이었다. 굴원의 작품은 단지 초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만 유전되어 왔다. 서한시대 유향(劉向)이 궁중의 장서를 정리하는 책임을 맡아 굴원의 작품과 함께, 한대(漢代) 사람들의 작품을 16편으로 나누어 한 권의 책으로 편찬했다. 그러나 이 유향의 『초사집』은 실전되어 오늘날은 전하지 않는다. 동한시대 사람 왕일(王逸)이 유향의 16권 『초사집』에 근거하여 자신의 작품인 구사(九思)를 더해 모두 17권으로 된 『초사장구:楚辭章句』를 편찬함에 따라 ‘초사’는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전한 가장 오래된 ‘초사집’은 왕일의『초사장구』이다. 초사장구의 편목은「이소:離騷」․「구가:九歌」․「천문:天問」․「구장:九章」․「원유:遠遊」․「복거:卜居」․「어부:漁父」․「구변:九辯」․「초혼:招魂」․「대초:大招」․「석서:惜誓」․「초은사:招隱士」․「칠간:七諫」․「애시명:哀時命」․「구회:九懷」․「구탄:九嘆」․「구사:九思」이다.
이들 편목중,「석서」이하는 모두 한(漢)대 사람인 가의(賈誼), 왕포(王褒)등의 작품으로, 굴원을 추모하거나 굴원의 작품을 모방하여 쓴 글이라고 명확하게 주석을 달고 있다. 또 나머지 가운데「구변」․「초혼」은 송옥(宋玉),「대초」는 굴원 혹은 경차의 작품이라고 밝히고 있다. 왕일은 이들 작품을 제외한 「어부」이상의 총 25편, 즉「이소」․「천문」․「원유」․「복거」․「어부」각1편에「구가」11편「구장」9편을 합하면, 모두 25편을 굴원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반고가 한서 예문지에서 굴원부 25편이라고 한 것과 편수는 합치한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주장을 달리하고 있는바, 단시일 내에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임으로 굴원의 저작권을 쉽게 취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3. 굴원이 중국문화에 끼친 영향
굴원은 중국 문학 최초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굴원 이전의 중국 시단은『시경:詩經』의 시대였다. 시경 305편의 시는 북방 황하 유역의 백성들이 불렀던 민가를 모아놓은 것이다. 그 가운데는 작자를 알 수 있는 몇 편의 시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이름을 알 수 없는 민초들의 노래다. 그래서 굴원의 출현을 중국의 시가 역사에서는 ‘집체 창작의 시대’에서 ‘개인 창작의 시대’로 새롭게 진입하게 되는 상징으로 중요시 되었다. 굴원이 죽은 뒤 사부(詞賦)를 저작하는 선비들은 그를 의표로 삼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한대의 악부시(樂府詩), 당대의 율시(律詩), 송대 이후의 사곡(詞曲)등은 모두 굴원의 영향 아래, 오늘날의 모습으로 발전된 것이라 보기도 한다.
그러나 굴원의 가치는 단순히 시가의 획기적인 혁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편들이 후대 문인들의 교과서가 되었고, 그의 사상과 행위가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는 것이 더욱 소중하다 하겠다. 다시 말해서 굴원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의는 단지 사조의 화려함이나 상상력의 풍부함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굴원의 생명정신이 간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명정신이란 굴원이 일생을 통해 시종일관 견지했던 행위들이 중국의 역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어 마침내 정신적 상징으로 승화된 것을 말한다.
황벽련(黃碧璉)은『굴원과 초사문화 연구:屈原與楚辭文化硏究』라는 저서에서 중국의 오랜 역사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공인되는 것으로 1)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정정신’(忠貞精神 ) 2) 이상추구에 대한 집착과 진리를 견지하는 ‘탐구정신’(探求精神), 3) 불의의 세력에 용감하게 저항하고 죽어도 굽히지 않는 ‘저항정신’(抵抗精神), 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