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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 마지막 카페 수업입니다. 김종훈군이 발표한 최한기 관련 내용을 읽고 12월 2일까지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기철학과 경험 철학의 거장 최한기 201100690 김종훈
혜강 최한기는 조선 후기 실학자로, 기철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실학사상은 전통적 기철학과 서구과학이 융합된 형태로 드러난다.
생애
최한기는 1803년 경기도 개성에서 최치현과 청주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후에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태허정 최항의 15대 양후손으로 입적하였는데, 생부 최치현은 시로 이름이 있어 개성 사족들과 교유가 넓었으며, 양부 최광현은 1800년 무과에 급제하여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고 알려져 있다. 최한기의 어린시절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생원시에 합격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친부와 양부로부터 전통유학 교육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70세까지 벼슬에 나가지 않고 동서고금의 책을 구입하여 연구에 몰두했다. 최한기의 학술활동은 30대 이후에 활발하게 이루어 지는데 34세 에는 『신기통』과 『추측록』을 지었다. 이후 58세에는 사회사상을 담은『인정(人政)』을 저술한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기철학을 체계화하여 모든 학문과 사상을 전일적 체계로 집대성한 『기학(氣學)』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1877년에 사망했다.
배경
1. 시대적 배경
최한기가 태어난 해가 1803년임을 생각한다면, 최한기는 조선말의 격정의 시대를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최한기가 어린 시절인 1811년에는 홍경래의 난이, 노년인 1862년에는 임술농민봉기가 있었고, 말년인 1871년에는 신미양요를 겪을 정도로 조선말은 혼란했다. 1801년 정조가 승하하고 어린 순조가 왕이 되면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세도정치’ 시대가 열린다. 동시에 조선 후기 봉건사회는 토지 겸병이 광범하게 진전되어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1) 가 양적으로 팽창되어 갔다. 특히 이앙법(移秧法)·이모작으로 대표되는 농업 생산기술의 변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촉진되었다. 이 결과 지난날의 봉건지주와는 다른 서민지주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주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개선된 농업 생산기술과 시장의 확대라는 유리한 여건 속에서 차경지(借耕地)의 확대를 통해 상업적 농업을 하는 경영형부농이 성장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수의 소농민들은 몰락해 영세빈농·전호(佃戶)가 되었다.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들은 유민이 되거나 임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이 시기 농민층 분해는 다수의 소농민들을 중세사회의 특징인 토지에 대한 긴박을 해체시켜 임노동자로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부농·서민지주로 양극 분해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상공업은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해 부분적으로는 수공업자의 전업화(專業化)가 이루어지고 봉건적인 특권 상인에게 도전하는 사상인(私商人)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개성상인이나 의주상인들은 대외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등 상권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봉건적인 신분 질서의 구조에도 부(富)를 통한 신분 상승의 확대로 양반의 증가와 평민·천민의 감소, 몰락양반의 다수 존재라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양반 신분의 절대적인 권위도 동요되었다.
2. 사상적 배경
최한기의 기철학은 대체로 세 가지의 사상적 연원을 가졌다고 여겨진다. 서경덕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한국 전통 기철학과 서구의 자연과학 그리고 선행실학이다.
기철학의 원형은 중국의 장재(長載)에게서 찾을 수 있다. 장재는 기의 흩어짐과 모임에 의하여 만물이 생성되고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는 한국의 서경덕·임성주에게 이어지며 기의 움직임을 음양오행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기를 가능하게 할 형이상학적 존재로 장재는 태허를, 서경덕은 선천과 후천의 구분을, 임성주는 원기를 상정했지만 최한기에게서 그러한 구분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가 만물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라고 여기는것부터, 기의 움직임, 순화 등 이들과 크게 유사한 점이 많다.
최한기의 기철학은 서구 자연과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에 서구과학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17세기에 선교사들을 통해 전파된 서학은 19세기에는 탄압의 시기를 겪는다. 하지만 탄압 중에도 서학은 더욱 깊어지고 정교해졌는데 그 중심에 최한기가 있다. 최한기는 서학에 대하여 매우 심도 있는 이해를 가졌다고 평가된다. 특히 18세기 이전의 서학이 중세의 종교 중심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최한기는 뉴턴역학, 미적분, 지구의 공전설 등 비교적 근대적인 개념에도 밝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한기는 또한 후기 실학의 전통과도 일맥상통한다. 전기 실학의 중농주의적 색채가 상공업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퇴색되고, 자연의 순환과 조화에 대한 인식으로부터의 거리감을 갖고, 음양오행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등 후기실학과 최한기는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최한기의 기철학
최한기는 구체적 형태를 지닌 사물부터 인간의식까지 모두 기로 설명하기를 원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사물의 구성과 운동과 변화 모두 기로 설명한다. 그가 정의내리는 기는 활운동화(活運動化) 하는 것으로 우주 내에 가득 차있으며 운동과 변화를 거듭하는 것이다. 그는 기를 운화기와 형질기 두 가지로 나눈다. 운화기는 비·바람·더위·추위처럼 현상을 일으키는 기를 일컫는다. 형질기는 해·달·별·지구처럼 형체를 가진 것을 이루는 기다. 여기서 형질기는 운화기에 그 형성 근거를 두고 있지만, 운화기는 형이상학적인 요소가 아니라 실존하는 것이다.
최한기는 기를 본질적으로 운화하는 존재로 본다. 운화는 활동운화의 준말로, 기 운동의 변화양상을 일컫는다. ‘활’은 살아 있는 기운으로 ‘생기’요, ‘동’은 움직이고 운동하는 힘으로 ‘진작(振作)’이요, ‘운’은 운행하여 질서 있는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주선(周旋)’이며, ‘화’는 변하여 소통함으로써 융화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변통’이며, 또한 인간의 생활 속에서 ‘활’은 마음을 간직하고 성품을 배양하여 미루고 헤아리는 ‘존양추측(存養推測)’의 의식작용으로 인(仁)을 이루고, ‘동’은 강건하며 유순하여 날로 새로워지는 ‘건순일신(健順日新)’의 도덕적 실천으로 지(智)를 이루며, ‘운’은 적절한 정도를 헤아려 일을 처리하는 ‘도량주선(度量周旋)’의 실무처리로 의(義)를 이루고, ‘화’는 변화하여 소통함으로써 조화하는 ‘변통융화(變通融和)’의 화합을 시키는 것으로 예(禮)를 이루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최한기의 理는 성리학적 理에 대한 생각과 반대된다. 그는 理는 비어있는 것으로 철저하게 기가 움직이는 방향이나 양상에 대한 지시로 여긴다. 그러니 물이 흐르는 理는 기가 물이 되어 흐르는 모양을 일컫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天과 人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진다. 그에게 하늘은 그저 기가 가득 찬 공터요, 사람은 형질기가 기계적으로 모여 구성된 것이다.
최한기의 인식론
최한기는 인식에 대한 생각도 재정비한다. 그는 기가 인간의식작용을 이룰 때 그 기를 신기(神氣) 라고 불렀는데 그 신기는 인식의 주체가 된다. 즉, 마음은 곧 신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기가 지각의 근거이고 지각 자체는 신기가 경험을 쌓는 것으로 이해된다. 최한기는 마음을 샘물에 비유하였다. “순수한 것은 샘물의 본색이고, 색을 첨가하는 것은 샘물의 경험이다. 첨가한 색이 없어지더라도, 순수한 가운데 경험이 절로 있어서 거듭 쌓일수록 추측이 절로 생긴다.” 여기서 추측은 이성적 성찰을 의미한다. 또, 감각적 경험은 신체기관이 하지만 최한기에게 이는 신기가 신체기관을 거쳐서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앎의 이른 상태를 그는 통(通)이라고 말한다. 그는 통을 추측통과 형질통으로 나눈다. 형질통은 감각경험의 앎이고, 추측통은 사유 활동을 통해 도달한 앎을 말한다. 최한기는 형질통이 보다 근원적이고 추측통은 형질통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여긴다. 그 이유는 감각경험 없이는 애초에 추측이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과, 추측은 감각경험의 시공간적 한계를 헤아리기 위해 목적론적으로 생성된 것으로 여기는데 있다.
그렇다면 이성적 성찰인 추측의 기준은 무엇일까. 최한기에게 있어서 좋고 나쁨, 나아가 옳고 그름을 빗댈 기준은 바로 자연 세계의 변화인 대기운화(大氣運化)이다. 추측을 통해 대기운화에 빗대어 보아 대기운화에 승순(承順)한 것이 옳고 적당한 것이다. 이러한 사유 과정 중에 이전에 추측했던 것을 끊임없이 검증하고 변통하여 대기운화에 승순하도록 짜 맞추는 과정을 증험(證驗)이라고 한다.
최한기의 사상이 독특한 점은 인식론적 토대에서 도덕적 당위성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서구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그와 같은 학문과 당위의 구분을 시도했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모든 학문을 정립한 것이『기학』이다.
최한기의 도덕관
최한기의 기철학이 기존의 성리학과 다른 점은 인의예지가 사람의 본래적 속성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의예지도 기가 작용하는 방식의 하나 일 뿐이다. 그는 도덕성이 인간의 성품에 내재해 있다는 생각에서 탈피한다. 그렇다고 최한기가 도덕관념에 대한 생각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 최한기는 인간의 신체 뿐 만 아니라 심성에도 기화론(氣化論)을 적용했다. 심은 말했듯이 인간 마음으로 작용하는 기로써 신기이다. 대기운화는 도덕에 관하여도 기준이 되어 준다. 도덕적으로 볼 때 에는 대기운화에 대하여 순역(順逆)한가로 어떠한 일을 판단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일을 함에 있어서 그 일이 대기운화에 순하면 좋은, 선한 일이고 그렇지 않다면 좋지 못한 일이 된다. 즉 사람의 신기가 타인의 신기나 물(物)의 기와 교접할 때 그것이 대기운화에 순역한가를 따져야 하므로, 최한기의 윤리관에서 행위 없는 선악은 존재할 수 없다. ‘기는 운화할 뿐 선악은 사람의 행위에 달린 것’으로 선악은 구체적 행위가 대기운화에 순역함에 따라 사후에 구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한기의 기준에서는 행위만이 선한 것이고, 선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는 것 일까? 그런 것은 아니다. 신기의 운행이 선한 사람이 바로 선한 사람이다. 운화는 여러 차원의 개념이다. 개인의 기가 운화 하는 개인운화, 백성을 다스리는 통민운화, 그리고 온 세상의 기가 운화하는 대기운화 등 여러 차원의 개념 중에 개인의 운화가 상위운화에 일치할 때 선한사람으로 여긴다. 그리고 운화의 승순과 순역 여부를 따질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추측이다.
최한기의 도덕관에서 중요한 함의는, 그의 운화개념은 공리(公利)를 중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체운화 통민운화 대기운화는 그 속에 얼마만큼의 사람 즉, 얼마나 많은 기가 내포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그 범주를 달리한다. 더 큰 범주의 이득이야말로 바로 선이므로, 공리주의와 유사하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한기의 통치론
최한기가 생존하던 시기는 사회상의 급격한 변화와 더불어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사회가 혼란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최한기는 통민의 준적인 인도의 수립을 통해서 정치의 길을 찾아주고자 했다. 인도는 상위의 도에 승순 하는 것이니 통민의 준적이란 바로 천인운화(天人運化)와 일통치안(一通治安)이다. 그는 천인운화와 일통치안이 종횡으로 사물을 밝혀 만수를 총괄하므로 이것이 준적이라고 밝혔다. 일통치안은 통민운화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백성을 한가지로 다스린다는 의미이고, 천인운화는, 일신운화와 그보다 더 큰 범주인 통민운화,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범주인 천지운화가 일관 하는 것을 천인운화라고 불렀다. 백성을 통치함에 있어 통민운화 이상의 큰 도를 따르며 통치하면 그것이 선한 정치라는 것이다.
최한기의 민주적 사고
“정치의 대체를 달성하는 것은 만백성을 한 몸으로 삼아 만백성 가운데 만백성의 사무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선거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통민운화의 도리에 통달한 것이다.” 인정(人政)에 조선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 선거가 등장한다. 백성이 만백성의 사무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선거하는 것이라고 명시한다. 만백성이라고 하면 전 나라를 이르니 직접 왕을 언급하지 않았어도 이는 혁명적인 구절이다. 그런 것 치고는 최한기는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다. 왕권이 그만큼 약했다는 예증이 된다. 한 몸으로 여긴다는 데에서 신분여하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여기는 평등의식을 엿볼 수 있다.
최한기는 사람은 본래적으로 지니고 난 것이 없고 기로 구성된 것으로 사람 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곧 신분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조선사회를 비판한다. 첫 번째는 사농공상에는 소임이 있어 누군가 그를 저버린다면 나라가 힘들어지니 일에는 경중이 없다는 것으로 사민을 신분으로 규정지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재등용은 능력에 따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세도정치 하에서는 외척과의 친분에 의해 이루어짐을 비판한다.
최한기에게 있어서 사람의 고하를 나눌 기준은 능력에서 나온다. 그래서 그는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보장하고 그에 따라 사람의 자리를 나눌 것을 말한다. 또 사람의 타고난 기질차이는 없지만, 교육의 양이 동등하여도 사람에 따른 순역의 정도차이가 있다. 같은 교육을 받아도 더 대기운화에 가까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본래적 차이는 아니고 교육의 본질적 속성으로, 최한기는 대기운화에 더 가까운 사람이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는 것이 운화에 역하는 것으로 사농공상 구분 없이 교육을 동등히 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한기는 경험적이고 실증적이며, 실용적인 기술을 교육해야한다고 말한다. 각 분야의 교육을 통한 전문화를 꾀하면서도 그는 모든 사람에게 문자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법 때문이다. 최한기는 근대적 개념의 법 앞의 평등 을 중시했다. “법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사람만이 법을 안다면 법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수단일 뿐 신기에 의해 운화를 인식할수 있는 인간 본성의 평등성이 현실에서 구성되기 위해선, 제도적 평등이 우선해야한다.” 동시에 최한기는 만들어지는 법을 당대 백성의 호오에 의해 시의적절성을 판단해 법의 효용을 가려야한다고 말했다.
최한기는 권력의 독점을 막기 위한 권력분립의 원리까지 소개한다. 그는 학풍과 사상에 따른 붕당은 인정했지만 붕당의 크기가 권력화 되어 붕당이 정치패싸움으로 변질 되는 것을 우려했다. 조선 사회에서 권력분립을 이루어야 할 것은 왕과 붕당인데, 붕당이 서로 권력다툼만을 한다면 본래 백성을 위해 자신들이 해야 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이 지시한 인사여도 그것이 대기운화와 공의에 어긋난다면 간언을 통해서 신하들이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정치와 통치가 공의와 공론에 의해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통치행위를 임금의 타고난 권리로 보는 시각과는 거리가 먼 발언이다. 최한기는 “백성이 하고자 하는 바는 하늘이 반드시 그것을 따른다.” 고 말을 하며 민심과 천심을 동일시했다. 이는 백성의 뜻에 따라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엔 후대의 포폄을 감당할 수 없다며 근대 여론 개념 또한 소개한다.
1) 조선시대 토지 소유주인 지주와 이를 소작하는 전호가 연결되어 나타나는 토지소유형태. 조선시대 토지는 소유권을 중심으로 국가 소유는 공전(公田), 개인 소유는 민전(民田)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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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번 발표를 통해서 성리학적 이와 최한기의 이가 반대되는 의미이고 최한기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인 기활동운화에 대해 알게 되어서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한기의 기철학이 기존의 성리학과 다른 점은 인의예지가 사람의 본래적 속성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고 했는데 또 다른 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최한기는 시대를 앞선 인물로 그 당시 신분제 폐지를 주장하며 법이 평등하지 못한 사회에서 법의 평등을 주장한 것을 보면 시대를 앞선 선구자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리고 인재등용에 있어 기틀을 마련한 것을 보면 얼마나 뛰어난 인물이며, 선구적인 인물이엿는지 알 수 있습니다.
최한기는 기의 철학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운화기고, 세계 각국의 지리, 역사, 과학, 천문학, 의학 등 서양학문을 소개하는 많은 저술을 통해 서양 과학기술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면모를 보아 그는 조선후기의 실학자중 가장 서양적 사고를 수용하려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최한기는 동서양의 화합을 추구한
실학과 개화사상가라고 생각합니다.
최한기는 실학자라기 보다는 서양철학자에 더 가깝습니다. 서양의 학문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최한기가 말하는 '기'는 성리학에서 말하던 '기'와는 다른 정의를 갖는데, 이는 최한기가 서양철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감각 경험의 축적인 형질통과 사유의 결과물인 추측통으로 나뉘는 앎으로 보았을 때 그의 인식론은 성리학과 양명학에서 발견되지 않는 새로운 철학이고, 이는 서양철학의 경험주의와 이성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최한기는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풍속과 예교는 지키면서 서양의 우수한 문물을 수용할 것을 주장하고, 귀천에 관계없이 사회 각 분야에서 재능 있는 사람을 두루 등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최한기는 선현들의 기철학을 계승하여 고도로 발전시킨 동시에, 이전 실학자들이 도입해놓은 서양의 과학지식을 극대화시킨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나아가 최한기의 학문은 시민적 입장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실학이었기에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가교자’로서 그의 사상사적 위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발표와 수업을 통해 최한기의 철학에 대해 자세하게 알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저는 기가 성리학에서 다루는 기로 이해하고있었는데 그 기를 이기론적인 기가 아닌 기의 의미 자체로 이해해야 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최한기는 그 부분을 잘 살펴볼 수 없지만, 다양한 사상을 통해 자신만의 기 철학을 펼친 점이 의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