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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후서6장1~7장1절
제목 : 은혜에 합당한 삶
하나님과의 화해를 강조한 바울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겪은 수난을 소개합니다.
나아가 상도들에게 관용을 호소하고 거룩한 삶을 촉구합니다.
1.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라(1~2절)
1)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1절).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본문의 '헛되이'(헬라어 '에이스케논')는 '빈', '공허한'의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었습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참여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는(5:15-17),
개인의 결단과 선택 그리고 끝까지 자기를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편 본문의 말씀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사항이 추론됩니다.
하나는,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영과 육을 더럽게 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에(7:1;12:20, 21)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내용의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 중 일부가 그 가르침에 현혹되어 교회에 문제를 일으켰으리라는 것입니다(11:4).
2)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2절)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이 구절은 사49:8의 인용입니다.
사 49:8은 여호와께서 그의 종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으로 바벨론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놓임을 받고 완전히 회복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49:8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이제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복음 시대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바울의 이 인용이 뜻하는 바는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는 때가 도래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바울은 본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때가 도래했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 때의 긴급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Tasker).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본절의 앞 부분에서 언급한 바, 구원의 때가 도래했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바로 '지금'(뉜) 바울이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5:18-21)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때'는 항상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어지는 날 곧 주께서 재림하실 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눅12:40), 도적같이 임할 것입니다(살전 5:2).
따라서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그 순간은 곧 종말론적인 '결단의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결단의 때'는
각 개인에게 올바로 선택해야 할 책임이 부과된 '책임의 때'입니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라는 외침을 듣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와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경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일꾼인 증거(3~10절)
바울은 사도의 직분이 조금이라도 손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항상 신중하게 행동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하여 자원하였으며, 환란과 고난을 참아 냈습니다.
1) 그가 치른 전쟁입니다. (3~5절)
(1)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였습니다(3절)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바울은 5:12에서 언급한 바 자신의 사도 직분에 대한 주제를 다시 거론합니다. 본절에서 바울은 비방받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이 자기 자신의 일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살았던 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에 거리끼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여기서 '거리끼지'(헬라어 '프로스코펜')는 '실족할 계기', '범죄할 기회', '걸려 넘어짐'의 뜻을 갖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인격적인 문제로 인해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 방해받지 않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바울은 많은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가령 그는 자신을 자랑하는 자라거나(3:1), 어리석은 자라거나(11:16), 미쳤다는 오해를 받았습니다(행 26:24).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하는 직책을 수행할 때 발생한 모든 문제들은 복음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일 뿐(고전1:23) 바울의 인격적인 문제나 그의 잘못된 신앙 생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편 본절의 '비방을 받지'(헬라어 '모메데')는 '조롱을 받다'는 뜻을 지닌 헬라어 동사 '모마오마이'의 가정법으로서 '의심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헬라어 동사가 본래적으로 나타내는 개념은 '비난', '책망'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어 자신의 진실성을 의심했던 행위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2)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입니다(4,5절).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감히 '자천'하고 있는데,
이것은 앞에서 자기를 천거할 의사가 없다고 말한 것(3:1)과 모순되는가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천거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것은 자기 스스로를 과시하거나, 어떤 외부적 권위에 의지하여 자신을 보증 받고자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바울이 자신의 이기적 야심이나 인간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사역하며 그리고 그것을 위해 그가 견디어 낸 무수한 고난들에 의거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말하는 것은 앞의 언급과(3:1) 모순되지 않습니다.
특히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이 당한 곤경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자신에 대한 천거는 말로써가 아니라 실제적 행동으로 보여주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많이 견디는 것. '견디는 것'(헬라어 '휘포모네')은 일반적으로 '인내'를 뜻하나, 이 말 속에는 시련을 체념적으로 수용하거나 수동적으로 참는 것을 넘어 적극적인 의미에서 끝까지 견디어 낸다는 뜻이 있습니다.
'많이 견디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홉 가지로 열거되는데(4, 5절),
이것들은 세 부분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➀ 본절에는 일반적인 시련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환난과 궁핍과 곤난이 그것입니다.
환난은 본서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로(1:4,8;2:4;4:17;7:4;8:2,13),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압박받는 체험을 말합니다(1:4-11).
궁핍(아낭카이스)은 역경이 끊임없이 닥쳐오는 상황에서 겪는 고통을 말합니다(행 20:34).
곤난(스테노코리아이스)은 좌절을 강요하는 극한 상황을 가리킵니다(1:7, 8;4:8).
➁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입니다.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 -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육체에 가해지는 핍박들입니다.
'매맞음', '갇힘', '난동'은 사도행전에 상세히 나타나는데 사실상 그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행 13:50;16:19,22;20:34).
“매 맞음”이란 바울이 견뎌야 했던 매질을 뜻하는 것이며,
“갇힘과 난동”이란 그가 폭도들을 직면했던 일들을 말합니다.
➂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입니다. - 이것들은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짊어진 것들입니다.
'수고로움'은 열성적으로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한 일과, 바울이 교회에 재정적 부담을 지우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노동을 했던 것(행 18:3;살전 2:9)을 가리키고,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은 영적인 내핍 훈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고 살고 먹고 싶은 상태에서 그러지 못한 것을 가리킵니다(11:27).
바울이 이런 고난을 피하지 않고 온 몸으로 마주쳐 견디어 나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고 미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과 고린도 교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그렇게 했습니다(5:13).
2) 그가 사용한 무기들(6~7절)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5절에서 언급한 아홉 가지 시련들을 견디어 나간 것이 사도의 외적 자질이라면 6절과 7절에 열거되는 항목들은 사도의 직분을 이행하는 동안 줄곧 지향했던 내적인 자질을 말합니다.
(1) 깨끗함. - 영적인 순결 즉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과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실을 가리킵니다(살전 2:10).
(2) 지식 - 여기서 '지식'의 의미를 분명히 가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구원에 대한 지식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5:20).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시대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예수의 죽음과 그 죽음의 구속적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5:16, 18-20).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식을 가진 성도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민감하게 분별하여 그 뜻에 합당하게 살아갑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식'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대한 삶과 그 앎을 생활에 적용하는 것 모두를 포괄합니다
(3) 오래 참음. - 혹자는 이를 모욕이나 상해를 당했을 때 노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견뎌내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혹자는 본절의 '마크로뒤미아'를 4절의 '휘포모네'('견디는 것')와 구별하여 '견디는것'은 교회 밖의 대적들로부터 오는 시련에 대한 인내를 가리키며,
'오래 참음'은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인내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봅니다다.
실제로 바울은 사심 없는 순수한 동기와 목숨을 돌보지 않는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겨나는 오해와 불신, 분란과 열매 맺지 못함 등에 대해 끊임없이 참고 언제나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했고,
그의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습니다(엡 4:2;골 1:11;딤후 4:2).
*엡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골1: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4) 자비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스토테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결과,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태도로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갈 5:22;엡 2:7).
바울은 고전 13:4에서 사랑을 '오래참고 온유하며'라고 묘사했던 바 실제로 그 자신이 어려움에 직면하였을 때 다른 사람을 온유하게 대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혹자는 본절의 '자비함'을 '행동에 있어서의 선함'으로 보았던 바 이는 성령께서 주신 결과요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유래되는 삶을 변화시키는 증거입니다.
(5) 성령의 감화 - 여기에 특히 정관사가 없는 것은 '성령의 능력' 또는 '성령의 은사'를 암시합니다. 바울이 본절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변증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서, 고린도 교인들이 문제삼고 있는 그의 인간적 유약함은 바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실로 바울의 삶은 성령의 능력으로 점철된 삶이었습니다(롬 15:18,19).
(6) 거짓이 없는 사랑 - 이는 성령의 사역의 최대 열매입니다.
여기서 '거짓이 없는' '위선됨이 없이'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은 전적으로 위선이 아닌 순수한 것이었습니다(12:15;고전 8:1).
(7) 진리의 말씀. - 복음 곧 화해의 말씀(5:19)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비니다. 바울은 적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선포하였습니다(4:2).
바울이 선포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즉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의 설교와 행위 속에 현시(現視)됨으로써 증명됩니다(롬 15:19;고전 1:18;2:4,5).
(8)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영적 정비가 완벽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잘 사용하는 로마 군대의 무장법(롬13:12;엡6:13-17)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의 병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으나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의'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고결한 인격,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포괄한다고 봅니다.
이는 양손이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어 언제라도 적의 공격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태세가 완비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이 묘사는 마치 적군의 화전(火箭)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두 겹의 나무에 짐승의 가죽을 덮어서 만든 방패를 한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검을 든 로마 병사를 연상하게 합니다.
바울은 엡 6:16,17에서 그리스도인의 무장으로서,
공격용으로 '성령의 검'과 방어용으로 '믿음의 방패'를 갖출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3) 그가 얻은 명성(8~10절)
바울은 그의 사도 직무를 수행하면서 존경을 받을 때도 있었고 오해와 비방을 받을 때도 있었는데 잘 이해하였습니다(8~10절).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1)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 바울은 그의 사도 직무를 수행하면서 존경을 받을 때도 있었으나(갈 4:14) 오해와 비방을 받을 때도 많았다(10:10;11:23-33;고전 4:10;빌 1:15-18;살후 2:2). 바울은 이러한 현상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의아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어떠한 난관에 부딪쳐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그의 직책(5:18)을 묵묵히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2)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 본문은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공동번역)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뒤에서 비방하는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고 사랑하는 태도로 일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은 결국 교만과 자기만족으로 이끌 뿐이므로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바울은 본절을 통해서 '악한 평판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그를 해칠 수 없고, 좋은 평판이 참되다 할지라도 결코 그를 비뚤어지게 할수 없다'는 결연한 자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3)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 예수님께서도 생전에 미혹하게 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었습니다(마 27:63;요 7:12).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했을 때,
그의 대적들은 그를 가리켜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했고(고전 15:15),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속임수라는 비난을 하였습니다(12:16-18).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결코 거짓말하는 자가 아님을 하나님 앞에서 강력하게 증거합니다(4:2;5:11;11:31).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4)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여기서 바울이 무시당했다는 것은 아마 그의 사도직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고전 9:1;15:8, 9).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하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반(反)하는 자기들의 견해를 주입시키려 하였던 상황이 전개되었었습니다(10-13장).
그리고 사실상 바울은, 열 한 사도들 처럼 생전의 예수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외부적 조건을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모든 사도직의 유일한 근원인 하나님으로 부터의 사도직은 부여받았습니다(갈 1:1, 12, 16).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중심 사도로부터도 인정받았고(갈2:7, 9),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인정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5:11).
(5)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 본절은 바울의 역설적인 표현으로 실제적인 의미와 신학적인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바울은 죽음의 위협을 여러 번 겪었고(행 14:19;고전 15:30),
거의 죽게 된 상황에까지 이르렀었습니다(1:8, 9).
또한 그는 예수의 죽음을 그의 몸에 짊어지고 다녔습니다(4:10-12).
여기에는 자기 안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5:14, 15;롬 6:1-14;갈 2:20).
본절에서 바울은 그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 헌신된 도구가 되었음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6)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 구약성경에서여호와의 징계는 아들을 바로 세우기 위한 아버지의 행동에 비유되는 바,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증거로 이해되었습니다.
(욥5:17;시 94:12;119:67;잠 3:11,12;렘 31:18,19등).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그와 같이 생각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을 당하는 것은 그가 과거에 바리새인으로서 교회를 심히 핍박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고난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가 아니라 바로 세우기 위한 사랑의 표시임을 인식하였고 실제의 삶에서 이를 체험하였습니다(1:9;4:11;고전 11:32).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7)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 적대자들의 사도 시비, 그것에 의해 흔들렸던 일부의 고린도 교인들, 그리고 전체적인 이스라엘의 불신앙 등은 바울을 슬프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늘 기뻐하였고(2:3;7:4;롬 12:12;고전16:17),
그의 성도들에게도 그리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특징입니다.
(8)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 바울은 세상의 부를 거의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경제적인 가난의 상태를 언급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그가 고린도 교인들의 영육이 부해지도록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교회의 보수받기를 피했지만(5절;11:7-10;고전 9:12, 15, 18), 그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의 가난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였는가?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고귀한 지식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부요한 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빌3:8).
바울이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물질적인 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인간의 부요함을 위해서 스스로 가난한자가 되셨다(8:9).
(9)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바울이 '아무것도 없는 자'라고 했을 때,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관한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이 세대'가 진행되는 동안만 쓸모 있고,
다가오는 '새로운 세대'에는 전혀 가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었고
'새로운 세대'를 얻었으므로 사실은 모든 것을 소유한 자였습니다(고전3:21,22).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는 자'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고전3:23)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기 때문에 오직 주 예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심을 믿고 살아갑니다.
한편 본절의 내용은 영적인 것에 자신의 모든 사고와 행동의 초점을 맞춘 철저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바울 사도의 자화상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실로 소유와 무소유, 삶과 죽음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던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자였습니다.
3. 화해의 호소(11~13절)
교인들의 마음은 대적들의 농간에 넘어가 옹색해졌으나 그들에 대한 바울의 애정은 한결같습니다.
1)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습니다(11절)
“[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우리의 입이 열리고. - 그리하여 바울은 '숨김없이 다 말하였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본문을 '나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다 말하였고'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실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공개적이었고 신실했습니다(1:12-14;4:2).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정직하게 숨김없이 말하였고 그들을 향하여 마음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 속에는 어떠한 비밀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고린도 교인들의 어떠한 잘못도 자비로 덮을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7:3).
2)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12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본절은 '여러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옹색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마음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는 뜻입니다(공동번역).
분명히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가 소원해졌습니다.
이는 아마도 거짓 교사들이 바울이 그들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동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11:11).
아무튼 문제는 바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좁아진데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그들을 책망하거나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기보다는 자신이 여전히 예전처럼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부드럽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13절)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아버지로서 그의 영적 자녀들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랑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녀에게 자존심이나 권위를 내세워 옹졸해지는 법이 없듯이 바울 자신도 단순히 가르치는 자로서가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자로서 권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 바울은 오해를 하고 불평을 한 고린도 교인들을 나무라지 않고 그에게 사랑의 마음을 가지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의 권위로써가 아니라 부모의 사랑으로 자녀들에게 주는 호소였습니다. 혹자는 바울이 본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오직 '공정하게 행동할 것'(fair play)을 요청하고 있다고 봅니다.
4.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14~7:1절)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백성이요 자녀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보는 관점도, 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도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돌단→성막→솔로몬 성전→예수 그리스도→거룩한 백성들의 모임(공동체)→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순서로 완성이 되어집니다.
1)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14절)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13절)이 믿지 않는 자들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했을까?
갑자기 서신의 주제가 바울과 고린도 교인과의 관계에서, 고린도 교인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의 관계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절의 '믿지 않는 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바울의 적대자들을 가리킨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근거로서 본서의 주제는 불신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대적하는 거짓 사도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고 제시합니다.
(2) 문자 그대로 불신자들을 가리킨다.
(3) 믿음의 순수성을 해치는 세상과의 타협을 가리킨다.
(1), (2), (3)의 견해가 모두 일면 타당성을 지니나, '아피스토이스'의 어의상, 그리고 전후 문맥상 (2)와 (3)의 견해가 더욱 타당합니다.
한편 성도들의 순결을 요구하는 본문은 신 22:10의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와 레 19:19의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하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라는 구약의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문의 '멍에'는 믿음의 순수성을 저해하는 불신자와의 결혼(고전7:39), 우상숭배(고전10:14), 도덕적 타락(고전6:8),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11:4) 등과 밀접한 관련을 갖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바울은 본절을 통해 신앙과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 성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 '불법'은 불신자와 적그리스도의 특징입니다(롬 6:19;살후 2:3, 7).
반면에 '의'는 신자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의 '의'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칭의의 차원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 바울은 신자들의 순결성을 강조하기 위해 매우 극단적인 대조법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은 구원 얻는 자들과 멸망하는 자들(2:15)이 동반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세상의 빛'이시며(요 8:12;9:5),
세상은 멸망으로 귀착할 어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마 8:12;25:30).
2)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15절)
벨리알'의 음역으로 본래는 '무가치함', '악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말은 매우 나쁜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컨대, 개인에게 적용될 때는 불량하거나, 방탕하고, 거친 사람들에게 적용되었고(삿 19:22;삼상 10:27), 다른 단어와 함께 사용될 때는, '악심을 품은 허위 선전'을 뜻하는 '벨리알의 말'(신15:9;시41:8;101:3), '거짓 증언자'를 뜻하는 '벨리알의 증인'(잠19:28), '음모를 꾸미는 자'를 의미하는 '벨리알의 충고자'(나 1:11) 등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이 말이 사해 사본에서는 '악마의 왕'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단'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가 어찌 상관하며. - '믿지 않는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킬 때 바울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14절).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서로 상충하지 않은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자는 근본적으로 병립할 수 없으며, 운명을 같이 할 수가 없습니다(2:16).
3)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16절)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오. -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말라'(14절)는 주제에 대한 논증이 본절에서 절정을 이루며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이유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상이 함께 동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성도들의 몸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바울이 언급한 바 있습니다(고전 3:16;6:19). '성전'는 구약 시대의 성전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온전히 임재하시는 '지성소'를 가리킵니다.
성도들의 몸이 곧 하나님이 온전히 임재하시는 성전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우상이 있을 수 있는 여지가전혀 없어야 합니다(고전 10:14).
4)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17절)
“[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 본문은 이사야가그의 백성들에게 바벨론은 떠나 그곳의 이교주의와 단절하라고 권고한 사 52:11의 인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기 위해서는 백성으로서의 순결성이 선행적으로 요구됩니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려면 음행, 토색, 우상숭배 등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고전 5:1-13).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본구절 앞에 '그러면'(카이)이 있습니다.
이는 앞의 조건이 충족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영접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5)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18절)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 본절은 바울이 구약성경의 여러 구절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삼하 7:14;사 43:6;렘 31:9).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울이 삼하 7:14과 사 43:6을 나름대로 수정 인용함으로써 '남자'(휘우스, '아들')와 '여자'(뒤가테라스, '딸')를 명시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을 때 남자들과 여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를 갖게 됩니다(갈3:28;4:5, 6;엡 2:18).
전능하신 주 -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Martin).
6)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7:1절)
“[7:1]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이 약속 -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거하시겠다는 약속(6:16-18)입니다. 이것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당신이 거하는 성전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 여기서의 '두려움'(포보)은 더러움과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두려움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무조건적 두려움, 즉 경외심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경외심은 성도들이 성결(聖潔)한 삶을 살도록 해주는 기본적인 바탕이 됩니다.
바울의 경우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그의 모든 사역의 동기가 되었으며 이것은 아울러 사도로서의 그의 가르침에 대한 순수성을 변호해줍니다.
한편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유대 지혜 문학에서 발견되는 삶의 원리입니다(시 2:11;5:7;잠 1:7, 29;8:13;전 12:13).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성도에게 요청되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하기 때문이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할 성전도 마땅히 거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레 19:2).
본문의 '거룩함'(하기오쉬넨)이라는 단어의 어원인 형용사 '하기오스'('거룩함')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무려 229회나 나오고, 동사 '하기아조'('거룩하게 하다')는29번, 명사 '하기아스모스'('거룩')는 10번 나온다는 분석(Robertson)은 '거룩'이라는 덕목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말해줍니다.
그런데 이 '거룩'은 일회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성결을 향한 노력을
끊임없이 함으로써 얻어집니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 여기서 '육과 영'이란 그리스도인의 전인격적 자아를 의미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및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 전체를 일컫는 말입니다(고전 7:34, Plummer).
따라서 어느 한쪽이 더러워지면 그것은 다른 쪽도 더러워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온갖 더러운것'은 무엇이었을까 ? 혹자는 본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미 더럽혀졌음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봅니다(Harris).
이 경우 '더러운 것'(몰뤼스무)은 우상의 신전에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것, 이방인들의 사원에서 열리는 축제나 의식에 참여하는 것,
어떤 특정한 이교에 가입하여 회원이 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고전 8:10;10:14-22 주석 참조).
이와 더불어갈 5:19-21에서 언급되고 있는 '음행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등이 본절의 '더러운 것'에 해당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성결하게 해야하며 그것이 곧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결국 본절은 성도의 성결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1) 성결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요구받는 것이며
(2) 단순히 윤리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생겨나고 또한
(3) 성결은 영과 육, 즉 성도의 전인격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가령 영적 성결만을 중요시할 때는 쾌락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고 육체적성결만을 강조할 때는 율법적 금욕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점 등이 그것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지금’은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바로 그 은혜의 때요, 새 언약(3:6)의 시대입니다(1,2절).
그러니 그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거부하는 일이고, 자신에게 부여된 화목의 책임(5:18)을 회피하는 일입니다.
신앙과 삶은 오늘의 결과입니다.
한때 좋았던 신앙에 기대어 오늘을 안일하게 보내고 회복과 소명을 이를 기회마저 놓치고 있는 건 아닙니까?
2) 바울은 복음 때문에 고통으로 얼룩진 삶과 그 모친 고초들(4,5절) 가운데서도 지킨 신앙의 미더들(6절)을 사도의 ‘신임장’으로 여깁니다(3~7절).
주를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 않고, 이 세상에서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처럼 충성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의의 병기로 맛서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3) 회해의 사역에 참여하는 모든 이에게 환대와 냉대, 존귀와 비난이 모두 있을 것임을 예상해야 합니다(8~10절).
바울이 전하는 진리는 마치 거짓처럼, 고난은 징벌 처럼 여겨졌고, 그는 이름도 가진 것도 없이 근심만 가득한 채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 역설입니다.
절망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이 머물고 드러나는 조건이요, 세상의 신화를 깨트리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4) 교인들의 마음은 대적들의 농간에 넘어가 옹색해졌으나 그들에 대한 바울의 애정은 한결같습니다(11~13절).
이제 자신의 포용에 화답하여 의심을 버리고 마음을 넓히라고 호소합니다.
마을이 닫히면 상대를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쉬습니다.
나는 이렇게 애타게 걱정하는 지도자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립니까?
5)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백성이요 자녀입니다(14절~7:1절).
그러니 이 세상을 보는 관점도, 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도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고 자녀 된 정체성을 뒤흔드는 그 어떤 일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은혜로 나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임재 약속을 하찮은 세상 정욕과 바꾸지 않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