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생활사
고대로부터 사랑받아온 보석
[玉 ]
사치품 혹은 호사품이 없었다면, 과연 인류의 물질문명은 발전할 수 있었을까? 사치품을 향한 인류의 욕망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열심히 재물을 모으고 힘을 키우려고 노력하게 만들었다. 인류가 애용한 대표적인 사치품으로 금은보석을 들 수 있다. 특히 금이 알려지기 전까지 우리 조상들이 가장 사랑한 보석인 옥(玉)은 오래된 사치품이었다.
인간에게는 권력과 지배의 욕망,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 물건을 얻으려는 욕망, 감각과 관능성에 대한 욕망이 내재되어 있어 사치를 하게 된다고 [팡세(Pensées)]의 저자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은 지적한 바 있다.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지만, 욕망을 채워주는 사치품의 존재는 구석기 시대 후기부터 존재했던 인류 생활의 자극제였다.
기원전 6,200년 전 서요하 유역에 위치한 흥륭와 유적에서는 동아시아 최초의 옥제품인 옥결(玉玦-귀걸이)와 옥비(玉比)가 출토된 바 있다. 흥륭와 사람들은 이미 옥을 가는 탁마(琢磨) 기술과 구멍을 뚫는 천공(穿孔) 기술을 이용해 정교한 옥기 예술품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이때에 이미 농업과 같은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전문적으로 옥을 다듬는 장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옥은 고귀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이미 계급이 분화되고, 경제활동에 있어서 분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청동기 보급 이전에 이미 보석의 소유 여부로 계급이 갈라지게 된 것이다.
흥륭와 문화를 포함한 요서지역 신석기 유적에서는 다량의 옥이 출토되었다. 일례로 우하량 2지점 21호 묘에는 다른 부장품 없이 20여 점의 옥기가 시신을 치장하고 있다. 그런데 요서지역 신석기 유적에서 발견된 옥의 생산지는 요동반도에 위치한 수암 지역이다. 옥을 구하기 위해 요서지역 신석기인들은 요동지역까지 왕래해야 했다. 기원전 5,000년 전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지역에 살던 사람들도 흥륭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옥결을 사용했다. 옥은 이 시대 사람들에게 거의 유일한 사치품이었다.
옥은 각섬석(角閃石)의 일종으로 반투명한 암녹색 혹은 담회색의 보석이다. 옛사람들은 옥을 천지의 정수이며 음양에 있어 지극히 순결한 것이라 생각하여, 사람의 몸과 의복을 장식하는 기본 재료로 삼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옥을 가장 사랑한 사람들은 단연코 중국인이라고 하겠다. 기원전 283년 춘추 전국시대에 진나라 소왕은 조나라 혜문왕이 얻은 ‘화씨벽(和氏璧)’이란 옥을 갖고 싶어서 그에게 성읍 15개를 주겠다고 제의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빼어나게 좋은 옥은 값으로 따질 수도 없었다. 옥은 오직 갖고 싶은 자의 욕망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는 최고의 사치품이었다.
옥은 찬란한 빛깔과 은은한 광채를 내는 특유의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받았다. 중국인들은 옥을 중요한 의례에 예기(禮器)로서 사용했고, 작위의 상징으로 옥기를 상징했음을 『주례(周禮)』등의 기록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주나라 시대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 원형의 옥으로 제천의식에 사용된 벽(壁), 도끼를 상징하는 것으로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상서로운 구슬인 규(圭) 등이 예기로써 의식 때만 사용되었다. 하지만 춘추시대 이후로는 귀족들이 몸에 걸치거나 매다는 장신구인 패옥(佩玉)이 발달하게 되었다. 옥은 군자(君子)의 상징으로, 허리에 옥을 차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반인은 감히 옥을 사용할 수 없었다. 옥은 남과 달라 보이고 싶어 하는 왕과 귀족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옥은 장례 풍습에서 특별히 사랑받았다. 1968년 하북성 만성(滿城)지역에서 발견된, 기원전 113년에 죽은 한나라의 중산정왕묘(中山靖王墓)에서 출토된 중산정왕의 유골은 2천4백98개의 옥 조각들이 금으로 만든 실로 연결해 만든 옥갑(玉匣)으로 감싸여 있었다. 옥갑은 춘추전국시대부터 등장하는데, 장례 때 수의로 입힌 것이다. 중국 진나라 때의 학자인 갈홍(葛洪: 283〜343)이 지은 [포박자(抱朴子)]에서는 “옥을 시신의 아홉 개 구멍에 넣어 두면 시신이 썩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런 믿음 때문인지, 옥은 왕과 귀족들의 장례에 널리 쓰였다. 비싼 옥으로 시신을 감싸는 옥갑은 대단한 사치품이었는데, 이것이 부여(夫餘)에도 전해졌다. 후한은 자신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부여에게 옥갑을 선물하여 장례 때 사용하도록 했다.
신석기 시대 이후로 죽은 이의 무덤에는 많은 옥기(玉器)가 함께 묻혔다.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인 부여 송국리의 석관묘에서는 한쪽 끝에 구멍이 뚫린, 굽어진 모양의 장신구인 곡옥이 출토된 바 있다. 곡옥은 이후 5〜6세기 신라 무덤인 경주 천마총, 월성로 고분, 금관총, 황남대총 등에서 대거 출토되었다. 천마총에서는 전체 출토 유물 가운데 68%가 옥 제품이었다. 곡옥은 귀걸이, 목걸이 등에 다수 사용되었고, 금관에도 많은 곡옥이 달렸다. 황남대총 금관에는 곡옥이 77개 이상 달렸고, 천마총 금관에도 58개 달렸다. 백제 무령왕릉에서도 옥에다 금으로 된 모자를 쓰인 곡옥을 포함해 100여 점의 옥기가 무덤 속에 부장되어 있었다. 황남대총에는 옥, 황금, 은, 유리 등으로 만든 엄청난 보물 7만점이 부장품으로 넣어졌다.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엄청난 사치를 부린 것이다.
1 ![]() | 2 ![]() |
1 경주 황남동에 위치한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곡옥 2 보물 619호로 지정된 천마총에서 출토된 목걸이. 청색의 유리옥과 금,은 제품이 일정한 간격으로 여섯줄 이어져있으며, 좌우와 가운데에 큰 굽은 옥이 매달려있다. 다른 무덤에서 출토된 목걸이에 비해 매우 화려하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
값비싼 사치품인 만큼, 무덤에 넣어둔 옥기 등은 도굴꾼, 외적에게 노략질의 대상이 되었다. 무덤에 많은 부장품을 넣어두는 풍습과 함께 도굴하기 쉬운 구조로 이루어진 무덤을 가졌던 고구려의 경우, 현재 남아있는 옥기는 집안시(지안)에서 출토된 옥배(玉杯) 정도에 불과하다.
옥은 왕실과 귀족들이 사랑하는 보물이었다. [후한서]에 따르면 부여의 창고에는 옥벽(玉璧), 옥규(玉圭), 옥찬(玉瓚-옥으로 만든 술그릇)등 옥으로 만든 것들이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나라의 귀중한 보물이라고 했다.
옥으로 만든 제품은 신성한 영험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3대 보물이 등장하는데, 황룡사 장륙존상과 황룡사 구층탑, 그리고 579년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은 옥으로 장식된 허리띠다. 진평왕의 옥대 외에도, 신문왕이 동해의 용에게서 받았다는 흑옥대에 대한 기록도 보인다.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진평왕의 옥대는 신라가 망할 때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바쳐졌는데, 길이가 10척(3미터)이며 62개의 옥장식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옥대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귀한 물건일 뿐 아니라, 적병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정도로 벽사(辟邪: 사악을 물리침) 기능을 가진 신기(神器)로 여겨졌다.
사치품은 소수만이 어렵게 구할 수 있을 때 가치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치품인 옥을 사용하는 왕실에서는 누구나 옥을 사용하는 것을 결코 탐탁스럽게 여길 수 없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144년 신라 일성이사금이 민간에서 금은주옥(金銀珠玉)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린 바가 있었다. 또한 834년 신라 흥덕왕 때에는 각 신분별로 옷, 수레, 집 등의 사용 규정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진골 신분은 잘 다듬은 무늬장식이 있는 백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은 임금과 왕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5두품부터는 사실상 옥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 규정에는 금, 은, 각종 실크, 모직물, 대모(玳瑁) 등 다양한 사치품의 사용에 대한 금지 조항이 있다. 이런 조항이 있었다는 것은 그 만큼 사치품의 수요가 많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치품은 국가간의 선물이나 교역품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후한이 부여에게 옥갑을 준 것처럼, 고구려도 북위에게 섭라1)(涉羅)에서 생산되는 옥(珂)을 주었는데, 섭라가 백제에게 합병되는 탓에 북위에 수출을 못하는 경우가 생겨 외교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고려는 조선에 비해 사치를 많이 부린 나라였다. 1140년 인종 때 제정된 제사복장 제도에 따르면, 고위 귀족들이 입는 일품복(一品服) 가운데 칠면류(七冕旒)는 술 장식 한 줄에 옥 12개를 쓰고, 옥은 적색, 백색, 푸른색 3색을 섞어 쓸 것을 규정하는 등, 공(公), 후(侯), 백(伯) 등의 고위관리들은 옥이 장식된 허리띠를 착용했다. 1123년 송나라 사람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도 ‘고려의 신하들은 모두(悉) 자주색 무늬가 들어간 비단옷을 입고 옥대는 금으로 만든 물고기가 장식된 것을 찼다’고 기록하고 있어, 고려의 관리들이 옥대를 착용하는 것은 매우 일상적이었던 듯하다.
1 ![]() | 2 ![]() |
1 물고기와 새 등을 정교하게 조각한 고려시대의 옥 공예품 2 강화도 전등사의 옥등잔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고려 때에는 왕비와 세자 책봉에 관련된 문서나, 송덕문(頌德: 공덕을 기리어 지은 글) 등 귀한 문서는 옥으로 된 문서인 옥책에 글자를 새겨 썼다. 이 밖에도 물고기, 새 등을 정교하게 조각한 옥제 장신구 등이 많이 만들어졌다. 옥은 왕과 신하들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사찰에서도 사용했다. 강화도 전등사, 선원사에는 고려시대 옥등(玉燈) 유물이 전한다. 옥으로 된 그릇에 기름을 넣고 불을 켜면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가평군 현등사 창건 연기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옥으로 만든 것은 이외에도 옥술잔(玉斝), 옥향로, 옥향합, 옥피리, 옥등롱(玉燈籠)이 있었다.
고려시대 환구단(圜丘壇)에서 사방신(四方神)에게 제사를 지낼 때 올린 폐물은 청규(靑圭), 적황(赤瑝), 황종(黃琮), 백호(白琥)등 옥제품이었다. 옥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기도 했다. 이때 임금은 면류관의 좌우에 옥을 꾀어 9줄의 술을 단 규류(九旒)를 머리에 쓰고, 면복(冕服)이란 옷을 입었다. 임금은 옥반지를 비롯한 옥을 몸에 한껏 착용하고 제사에 참석했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는 왕실과 귀족, 승려들의 사치에 옥이 널리 사용되었다.
언제부터 우리 조상들이 황금을 보물로 여겼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늦어도 삼국시대 초기부터는 황금이 보물로 알려진 듯하다. 금이 발견되기 전까지 최고의 보석이었던 옥은 차츰 귀금속에게 최고의 자리를 내어주지만, 여전히 보석으로서 사랑받았다. 조선시대에도 옥은 귀한 것으로 여겨져, 왕이 사용하는 도장을 옥새(玉璽), 왕의 앉는 의자를 옥좌(玉座)라고 부르는 등 권위와 신분을 상징하였다. 또한 왕과 왕비가 착용하는 장신구에는 옥으로 만든 것이 많았다. 조선시대 왕의 장례 때는 예외 없이 옥이 사용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죽은 임금의 입에 옥을 물게 했다.
[동의보감]에서는 옥을 갈아서 복용하면 체내 노폐물을 배출시켜 주고, 장수하게 되며, 폐장 기능을 윤활하게 해주면서도 소화계통에 효과가 있고, 특히 가슴이 답답할 때 좋다는 등 옥을 대단한 약재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옥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믿어, 임신한 왕비들은 늘 옥을 가까이 했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서는 서울의 수공업장인 경공장(京工匠)으로서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된 옥을 다루는 기술자(玉匠)의 정원을 10명, 구슬장인(珠匠) 2명이라고 규정했다. 옥규, 옥책, 옥보(玉寶), 석경(石磬), 옥반지, 옥관자(玉貫子) 등 옥의 수요가 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기도 남양, 함경도 단천 등 주요 옥산지 30여 곳이 등장한다.
하지만 조선은 옥을 활발하게 생산하지는 못했다. 조선은 사치를 배척하여, 옥기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철물, 소와 말, 금, 은, 구슬, 옥, 보석, 염초2), 군사물품 등 금지한 물건을 몰래 매매한 자는 교수형에 처한다고 [경국대전]에서 정하고 있음을 보아 옥의 거래는 극히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옥은 평민들이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조선 사회에서는 부자가 되어도, 신분이 낮으면 함부로 사치를 할 수 없었다.
옥 생산이 활발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금, 은과 더불어 옥이 명나라가 조선에게 줄기차게 요구했던 공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금은의 경우 국내 소비보다 명나라에 유출이 많아지자, 이것이 민폐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은 금광, 은광을 폐광시키고 생산을 중지하기도 했었다. 옥도 마찬가지였다. 조일전쟁(임진왜란, 1592∼1597)시기에 조선에 왔던 명나라 장군들과 관리들은 조선에서의 옥 채굴에 관심을 기울여, 전쟁 중에도 옥을 캐내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여러 이유를 내세워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옥을 캐어 얻은 경제적 이익보다, 나라와 백성의 고통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조선 옥의 최대 소비처는 중국이었지만, 조선은 중국과 정상적인 무역거래로 이익을 얻어낼 능력이 없었다. 옥 생산량이 늘면 조공품의 양만 늘어나게 되므로, 금광 등과 마찬가지로 개발을 억제해 저들의 요구를 줄이는 것이 차라리 나았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옥의 채굴을 중단하지는 않았지만, 극히 제한적으로만 생산하고 왕실을 중심으로 일부 계층에서만 사용하였다. 따라서 중국에서처럼 다양한 옥기 공예품들이 만들어지지는 못했다.
지나친 사치는 배척해야 하지만, 적당한 소비는 경제를 성장시킨다. 사치품의 존재는 인간으로 하여금 잘 살아보려는 의지를 키우게 하며, 국가로 하여금 부를 축적하고 팽창을 촉진하며 물질문명을 발전시키는 이유가 된다. 황금이 전해지기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가장 널리 사랑했던 보석인 옥은 일부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사치품이었다. 삼국, 고려시대에는 옥이 황금과 더불어 왕실과 귀족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며 많은 옥기가 만들어졌다. 반면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치를 배척하고, 옥 채굴을 소극적으로 함에 따라 물질문명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자극제가 되지 못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참고문헌: 신대현 저, [옥기공예- 옥과 옥기를 통해 본 동양의 정신문화], 혜안, 2007; 장 카스타레드 저, 이소영 옮김, [사치와 문명], 뜨인돌 2011; 베이징대학교 중국전통문화연구중심 저, 장연ㆍ김호림 옮김, [중국문명대시야] 1, 김영사, 2007; 이해련 외 지음, [중국동북지역고고학연구현황과 문제점], 동북아연구재단, 2008.
주석
[네이버 지식백과] 옥 [玉] - 고대로부터 사랑받아온 보석 (한국의 생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