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갑오년) 10월 8일 미자 상세조 할아버지 묘제를 모시고, 도미부인 경모제를 참석한 후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있는 성삼문 태생지인 유허지 내 노은단, 충문사를 들러 사육신의 한분인 성삼문의 내력과 영정을 모신 충문사 사당을 들러 문화해설사인 황필성씨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듣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유허지 내 유허비와 노은단, 충문사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여 본다.
성삼문 선생 유허지 (成三問 先生 遺墟址) 소개
→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있는 성삼문 선생이 태어난 생가터
▶ 성삼문 유허지(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5호) → 소재지: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114-1번지
<성삼문 선생의 생가터(유허지)에 세워진 비석>
<성삼문 선생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그가 태어난 집터(생가터)>
지금은 이곳이 성삼문 선생의 유허지임을 알리는 비석만 서 있을 뿐 빈터로 남아 있습니다.
충청남도 기념물 5호로 지정된 성삼문 유허지(소재지: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114-1번지)는 성삼문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고려말 명장인 무민공(武愍公) 최영장군이 태어나기도 한 곳이다. 유허지 내에는 성삼문 선생을 기리기 위한 유허비가 함께 세워져 있는데 유허비란 옛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후세에 전하고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두는 비로, 이 비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면서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1418∼1456) 선생의 공적을 적고 있다.
유허지 내 유허비는 아래사진 참조 바랍니다.
▶ 성삼문 유허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64호) → 소재지: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104번지
<성삼문 유허비의 앞면과 뒷면의 모습>
유허지에는 사당이 있고 언덕에 묘가 있다. 마을 아래 길 옆에는 유허비가 있는데 성삼문선생의 유허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선생은 현재의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서 태어났고 성생을 비롯한 육신의 절사를 기린 후 유허비가 세워지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유허비는 1668년 민유중이 중추관찰사로 왔다가 선생이 살았던 유허를 둘러본 후 선생을 추모하고자 비석을 세우고자 하였고, 이에 송시열이 글을 짓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허지(遺墟址)로부터 동북 50m 지점에 있는 노은단(소재지: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산 21-2번지)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로 노은서원이 훼철된 후 성삼문 선생을 비롯한 사육신(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유성원)의 위패를 묻은 단소(壇所)이다.
▶ 유허지에서 바라본 노은단의 전경 → 소재지 :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산 21-2 번지
▶ 유허지에서 바라본 노은단 신문 전경
▶ 노은단의 현판글씨 → 서예가 장강(長江) 변수길(卞壽길) 선생의 글씨입니다.
▶ 노은단의 내부 전경(1)
▶ 노은단의 내부 전경(2)
노은단은 1676년(숙종 2) 성삼문(成三問)의 구택(舊宅) 근방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洪北面) 노은리(魯恩里)에 건립한 성삼문의 사당으로 성삼문 선생의 위패가 모신 곳이다. 이곳에 단을 모아 노은단이라하며 매년 제향을 올리고 있다. 1954년 홍성 고적현창회에서는 제단을 보수하고, 해마다 음력 10월 20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전의 제단 자리는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약 50m 지점에 있으며, 유허비는 약 30m 거리의 마을 앞에 있다. (출처 : 홍성군청)
1676년(숙종2) 사인(士人) 이량(李湸)이 선생의 옛집 근처에다 사당을 세우고 사육신을 같이 모실 것을 소청하자 녹운서원(綠雲書院)이란 사액을 받았다. 그 후 매년 12월에 제사를 지내오다가 고종 때 서원이 훼철되었으며, 1954년 홍성고적 현창회에서 폐허가 된 단소를 보수하였다. 민진후(인현황후 오빠)와 우암 송시열은 이 동네를 노산(魯山:단종의 왕호)의 노(魯)자와 은의(恩義)의 은(恩)자를 따서 노은(魯恩)이라 호칭하였는데, 1709년(숙종35)에 노은서원으로 개칭되었다. 노은서원 옆에 별사(別仕)를 세워 성승(성삼문의 아버지)의 위패를 1687년에 봉안하였으나 1871년 노은서원이 훼철될 때 함께 철거되었다. 그 당시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현 노은단 자리에 묻고 단을 모아 ‘노은단’이라 하며, 매년 10월 20일에 제향을 지내고 있다. 성삼문의 탄생지와 성장지는 현 노은리의 오동나무 있던 자리를 기준으로 구분되는데 위채는 성삼문선생의 성장지, 아래채는 출생한 곳으로 추정된다.
<성삼문에 대한 인물 소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꼽힌다. 본관은 창녕. 자는 근보(槿甫)ㆍ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아버지는 도총관 승(勝)이다. 외가인 홍주(洪州) 노은골에서 출생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묻는 소리가 3번 들려서 삼문(三問)이라 이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 식년시에 응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세종의 명으로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ㆍ신숙주ㆍ최항ㆍ박팽년ㆍ이개(李塏) 등과 더불어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 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차례나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音韻)을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오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했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유성원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실패하여 능지처형(?遲處形)을 당했고 집안도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1691년(숙종 17)에 관직이 회복되었으며, 1758년(영조 34)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숙종 2년(1676)에 이량과 호서의 유림 등이 선생의 옛 집 근처에 사당을 세우고 사육신을 같이 모실 것을 청하자, 나라에서 녹운서원이라 하였고, 뒤에 노은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고, 후에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노은단이라고 하고 제사를 지냈다.
<성삼문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사당인 충문사의 전경>
▶ 노은단에서 바라본 충문사 사당의 전경
▶ 유허지에서 바라본 충문사 사당의 전경
▶ 최근에 건립한 성삼문 선생의 사당인 충문사
→ 충문사(忠文祠)라는 이름은 선생의 시호(諡號)인 '충문(忠文)'에서 따온 것입니다.
해마다 음력 10월 20일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 충문사에서 바라본 노은단의 전경 모습
▶ 충문사 내삼문인 충절문
→ 성삼문 선생이 훈민정음 찬제에 큰 공을 세운 때문인지 내삼문이나 사당의 현판은 모두 한글로 썼습니다.
<성주도씨 대종회 문중원의 유허지, 노은단, 충문사 견학 사진>
▶ 황필성 문화관광해설자가 성삼문 유허지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 노은단의 앞에서 기념촬영
▶ 충문사 사당 앞에서 기념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