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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쉘비 스퐁의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
제3부 비종교인들을 위한 예수
5장 예수 : 편견과 상투성의 파괴자
모든 형태의 편견은 모든 인간에게 있는 질병이다. 그것은 생존의 수법이다.
부족의 정체성은 인간 역사의 그 모든 가공스러운 함의와 함께 새롭게 자의식을 갖게 되 사람들이 생존수법으로 개발한 유일한 무기는 아니다. 자의식은 생존을 인간의 삶 전체를 조직하는 기본 목표로 삼았고, 따라서 이것은 부족적 종교가 발전하는 방식에 영향력을 미쳤다. 자기중심적 생존의식은 인간이란 종의 특징인 자기중심주의의 보편적 현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인들이 단정하는 것처럼 타락의 결과이거나 인간성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본래적 악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진화적 갈등 곧 적자생존을 위한 투쟁의 실체이다. 우리 인간성의 본질은, 어떤 수단을 이용해서든지 간에 동료 인간에 비해 윗수이고 우리의 적수들을 패배시키며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편견이 깊숙이 깃들어 있다는 말이다. 모든 형태의 편견은 인간에게 있는 질병이다. 그것은 생존의 수법이다. 그러므로 참 사람을 이해하고 참 사람이 되는 길을 걷기 위해서는 인간의 편견이라는 실체를 현미경으로 치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편견은 부족주의와 마찬가지로, 참 사람의 길을 가로막는 왜곡된 힘이다.
편견은 인간의 노골적인 투사 행위를 통해 작용하는데 거기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희생자를 지목한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그 희생자에게, 사실적이거나 상상적이거나 간에 관계없이 우리의 모든 무능, 고통, 공포를 투사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런 인간적 감정의 투사 대상인 사람들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무능과 고통과 공포로 인해 받게 될 비난을 면하게 된다. 그 희생자를 비난하면 되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한때 이런 논리를 폈다. 즉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도래하지 않은 것은 유대인들의 잘못 때문이었다. 그들은 구원의 메시지를 배척함으로써 기독교가 세계지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크리스천들의 분노를 사서 마땅하다는 논리였다. 남북전쟁이 미국 남부에서 벌어진 것은 흑인들의 잘못 때문이었다. 1930년대에 경제공황이 세계를 강타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잘못 때문이었다. 가족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여성들의 잘못 때문이다. 여성들이 동등한 직업, 동등한 임금 및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결혼이 어려워진 것도 동성애자들의 잘못 때문이라는 식이다.
편견은 언제나 편견에 사로잡힌 자의 무능, 고통 및 공포를 공공연하게 선포한다. 편견은 우리가 생존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또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만일 우리가 그 희생자에게 우리 자신의 무능을 성공적으로 발산하고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자기혐오 전체를 그에게 떠넘길 수 있다면, 우리가 지목한 희생자를 거부하는 것은 정당화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감정적인 합리화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지목한 희생자를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렇게 타인을 깔아뭉개서라도 자기의 자존감을 높일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생활환경이나 종교가 그들 자신이 구제불능일 정도로 속수무책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인종, 성, 성적 성향 등이 편견의 주요 투기장이다. 나는 그런 각각의 편견들을 없애려고 시작했던 혁명의 와중에서 살았고 또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지금 나에게 분명한 사실은 나의 기독교 신앙, 곧 타락하고 무기력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외부 세계로부터 구원자가 왔다는 메시지를 지닌 나의 기독교 신앙은 사실상 그 희생자들에 대한 나의 낡은 편견들을 축복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후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해 전적으로 새로운 이해를 갖도록 만들었다. 이제 나의 예수 이해는 침입하는 신, 곧 그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찾아옴으로써 우리 인간성의 구제불능인 상태를 확인하고, 더욱 많은 희생자들을 만드는 침입하는 신이 아니라, 우리를 새로운 인간성으로 초청하는 분이다. 구원은 우리의 죄 많음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무력감도 극복하는 새로운 의식에로 진입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나는 먼저 인종에 근거한 편견들을 검토해 보겠다. 우리는 분노를 취급한 앞장에서 인종차별의 외적 현상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인종차별이 예나 지금이나 종교적으로 어떻게 정당화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이것은 나의 자전적 시각에서 가장 잘 다룰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인종차별이 극심한 미국 남부에서 자랐다. 거기서 무지와 빈곤에 찌든 흑인들의 존재 때문에 나의 가족들처럼 교육받지 못한 백인들은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의 가족들은 "우리는 적어도 니그로들이 아니야"라고 말하곤 했다.(이것은 점잖은 사회에서 쓰는 말이었다.) 남부에서 흑인들은 한편으로는 의존적이며 유치하고 무능한 멍청이들로 정의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힘이 세고 강건하며 정력이 넘치는 자들로 정의되었다. 사람들은 이렇듯 서로 상반된 공포에 내포된 모순을 감지하거나, 또는 흑인들에 대한 그런 두 가지 상반된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었던 백인들의 심리적 욕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이 모든 표현들은 흑인들이 일상적으로 당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대접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 예를 들어, 가령 아프리카의 후예들은 자연적으로 멍청하며 교육시킬 수 없다고 확신했다면, 다음의 논리적 결론은 당국자들이 그들의 열등한 인간성에 내재하는 근본적 및 본래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이나 예산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흑인 아동에게 극히 열등한 교육을 시행하는 인종분리 교육제도는 정당하고 적절하고 또한 자연적인 것이었다. 흑인들은 무식한 인종이라는 상투적인 이미지를 주입시키기 위한 많은 표현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한때 이런 조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수박이 잘 익었는지 알려면 그것을 때려 보라는 것이다. "수박이 니그로의 대가리처럼 빈 소리가 나면 익은 것이다." 나에게 이런 귀뜸을 해준 사람은 이 말이 살인적 편견을 조장한다는 생각없이 그냥 그대로 내뱉은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인종분리체제 속에서 자라난 나의 유년기에 흑인들은 본질상 의존적이고 유치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흑인들을 아이들로 취급함으로써 백인들은 스스로 어른처럼 느끼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미국 역사상 흑인 노예들은 심지어 어른이 되어서도 정기적으로 체벌을 당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독립할 정도로 중분한 임금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물질을 충분히 얻기 위해 백인 상급자들에게 굴종할 수밖에 없었다. 후대에 와서 흑인 행동주의자들은 그들이 "엉클 톰스"(Uncle Toms)라고 부르는 흑인들을 멸시하곤 했는데, "엉클 톰스" 신드롬은 그 흑인들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적 수단으로 사용한 수법이었던 것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채 멸시했던 것이다. 흑인들은 "엉클 톰스"의 특징인 비굴하고 아첨하는 굴종의 덕분으로 농장에서부터 그 착취자들의 가정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거기에는 좋은 음식이 있었고 그들은 거기서 일상적으로 주인들과 마님들의 비위를 맞출 수 있었다.
흑인들은 게으르고 주변머리 없는 인종이라는 주장은 특히 많은 것을 드러내는 주장이다. 나는 성장과정에서 이 두 형용사가 흑인들의 별명처럼 따라다니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나는 유럽인의 후예인 백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납치하여 자기들이 농장에서 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은 육체노동을 시키기 위해 미국으로 데려온 사람들을 게으르고 주변머리 없다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비로서 이 두 가지 말이 투사의 수단임을 인식했다. 여기서 게으르고 주변머리 없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는가? 유능한 흑인 노예들이 백인들의 무의식적인 무능을 섬기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가! 그러나 편견과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항상 우리 언어에서 슬며시 빠져나간다. 나의 유년기에 내 부모와 같은 백인이 하루 종일 고된 육체노동을 한 다음 그들이 하는 속어적 표현은 "나는 오늘 니그로처럼 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누가 게으른 자인가? 누가 주변머리 없는 자인가? 편견이란 그 피해자의 현실보다는 오히려 가해자의 자존감의 결핍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남부 지역의 백인들의 마음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불안의 원천인 큰 공포는 본질상 성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흑인들에 대한 두 번째 편견을 작동하게 만들었다. 남부의 민간전승에서 흑인 남성들은 동물과 같은 열정과 성적인 능력이 강력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여기에는 다른 나라에서 다른 시기에 기록된 세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가 한몫 거들었다. 남부 백인들의 가장 큰 공포는 인종분리에 대한 거의 모든 논쟁에서 반박할 수 없는 결론으로 나오던 말, 즉 "당신은 당신의 딸이 니그로와 결혼하기를 바라는가"였다. 나는 남부에서 자랄 때 이 말을 수천 번이나 들었다. 이 나라에서는 중매결혼을 하지 않으므로, 그 말에 담긴 무의식적 생각은 우리 딸들이 흑인 남자와 결혼한다면 그들은 백인 남성들이 두려워할 정도의 성적인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흑인들과 결혼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백인 남성들은 백인 여성들을 흑인들의 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항목이 남부 기사도 구약에 삽입된 것 같다. 남부에서 흑인 남성들에 대한 린치의 대부분은 백인 여성들에 대한 실제적 혹은 가상적 성폭행과 직결되었다. 흑인 애인에 의해 임신한 백인 여성들은 항상 "강간"이라고 호소하고 그녀가 애 아버지가 되기 원했던 사람을 고발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백인 여성이 흑인과의 성관계에 동의했다는 것은 백인 남성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따라서 백인 여성에게 이런 죄를 범한 자로 지목되거나 혹은 의심되는 가해자를 린치로 처형한 것이다. 백인 남성들은 정기적으로 (그리고 벌을 받지 않고) 흑은 여성들을 성폭행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는데도 말이다.
인종의 역사에 대한 어떤 입장도 미국 남부의 편견 속에서 성과 인종이 얼마나 깊이 연관되었는지를 무시할 수 없다. "이종족혼교"(특히 흑인과 백인간의 결혼)와 "인종들의 혼혈화"에 대한 백인들의 공포는 물론 실제로 현실화되었지만, 백인 남성들이 흑인 여성들에게 가해자가 됨으로써 그것이 현실화되었다. 흑인들의 기억에는 이런 에피소드로 가득 차 있다.1) 이것이 노예제도와 인종분리 시대에 거의 보편적인 현실이었기 때문에 지금 미국에는 아프리카 가문의 순수한 토종 혈통만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없다. 백인 남성들은 흑인 남성들을 억압하고 흑인 여성들을 범함으로써 자기들의 성적인 무력감을 상쇄했다. 이런 범법자들의 일부가 새롭게 발견한 DNA 증거로 인해 그 이름이 밝혀졌는데, 그 중에는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과 같은 유명 인사들과 보다 최근에는 인종분리를 옹호한 사우쓰 캐롤라이나의 주지사와 상원의원을 역임한 J. 스트롬 씨몬드가 포함되어 있다.
만일 편견이 인간의 생존 시드롬의 일부라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를 어디로 몰고 갈 것인가? 만일 우리가 그 편견의 피해자를 패배자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우리가 승리가자 된다면, 이 승리자는 자신의 무력감, 곧 애당초 생존 문제를 자신의 생활의 중심에 자리잡게 한 무력감을 극복하겠는가?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무능하다는 또 하나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예수 이야기, 곧 인간성의 자기멸시적 측면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삶속에 개입해 들어오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이야기를 한다는 것도 이런 생존 문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그런 이야기는 오히려 우리의 고질적인 열등감을 확인해 줄 뿐이다. 우리는 타인을 거부하거나 또는 증오하는 것을 통해서는 결코 온전하게 될 수 없다. 이것이 예수가 이해했던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가 이것을 이해한 것은 신성(외부적 실재)이라는 어떤 가상적 정체성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인간성을 통해서 이해한 것이었다.
우리가 역사적 예수를 그토록 왜곡시킨 초자연적 구조에서부터 한 걸음 더 물러서서 그의 인간성을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예수가 당시의 비인간화시키는 인종적 편견에 대처한 방식을 직시하자.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사마리아인들은 불결하고 거부당한 쓰레기라고 불렀다. 그들은 유대 조상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혈통의 순수성을 잃은 혼혈이었다. 이처럼 사마리아인들의 조상 가운데 이방인들(이교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의 제도종교는 사마리아인들의 하나님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고 보고 그들을 이단자로 여겼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할 때는 주로 동쪽에 있는 요단강을 건너 광야를 거쳐 갔고, 남쪽에서 다시 요단강을 건너 서쪽으로 예루살렘에 가곤 했다. 그들은 이 길을 택함으로써 여행 중에 사마리아의 더러운 공기를 마시지 않을 수 있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가졌던 편견은 실제로 가해자들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극렬하고 뿌리깊은 것이다.
예수는 이 편견을 어떻게 대했는가? 복음서들을 잠시 살펴보기만 해도 우리는 인간 예수가 당시의 이런 저런 비인간화시키는 현실들에 대해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요한도 편견에 대해 강한 어조로 말하지만 누가는 편견에 관한 예수의 반응에 대해 가장 강도높게 초점을 맞춘 복음서 저자이디.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는 "노예나 자유인이 없다."(갈 3:28)고 말하지만, "사마리아"나 "사마리아인"이란 말은 사용하지 않고, 마가와 마태도 역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이 문제에 관해 매우 구체적이다. 그는 예수가 복음의 메시지는 사마리아에도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했다(행 1:8). 복음의 빛은 편견이라는 열악한 인간 조건에도 비춰져야 하는 것이다. 누가는 예수가 두 개의 의미심장한 이야기에서 사마리아인을 만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누가의 첫째 이야기(10:29-37)는 예수가 강도 만난 사람에 관해 말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이다. 이 제목이 흥미를 끄는 것은 "착한"이란 형용사가 통상적으로 "사마리아인"이란 명사를 수식하기 위해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부족의 배타성과 종교적 의미의 상관관계에서 시작한다.2) 토라는 종교의 궁극적 의무를 곤경에 처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토라는 또한 이방인들(및 사마리아인들)만이 아니라 죽었거나 또는 죽을지도 모를 사람도 불결하다고 정의한다. 예수의 이 비유는 유대교의 두 대표자 곧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제의적 거룩함과 자비가 충돌하는 상황에 배치한다. 이 이야기는 이 두 사람에게는 자비가 없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다른 부족들의 인간성을 폄하하는 부족의 종교에서 자주 있는 일이다. 또 한편으로는 혼혈족이고 이단적이며 불결한 사마리아인들, 아마도 토라를 공부할 수 있는 혜택을 받지 못한 이들 사마리아 사람들은 부족의 종교적 정의에 감염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사마리아 사람은 곤경에 처한 사람, 곧 그가 시간, 관심, 돈을 줄 수 있는 곤경에 처한 사람만을 볼 수 있었다.
예수가 이 비유에서 청중들에게 하려는 말은 모래 위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의 한계선이 그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도 한계선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급진적이고 도전적인 결론이었다. 예수의 말은 편견을 가지고는 인간이 될 수 없고 편견은 항상 인간성을 파괴한다는 것이었다. 편견은 당신의 생존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하게 되는 것 곧 참 사람이 되려는 당신의 욕구를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만일 당신이 이렇듯 허약한 인간성에서 벗어날 수 없고 다른 사람을 파멸시켜서 당신 자신을 옹립하려는 공포의 경계선을 넘을 수 없다면, 당신은 결코 참 사람이 될 수 없다.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예수의 메시지다. 구원은 예수가 당신을 부르는 데서 오는 것이며, 또한 당신이 생존지향적이 아니라 새롭고 자아를 부정하는 인간성을 추구할 때 예수가 부족과 편견 같은 안전체계를 포기하도록 당신에게 능력을 부여하는 데서 구원이 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으로 가장한 신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참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이것이 예수 당시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안에 현존하는 하나님을 보게 한 예수의 온전한 인간성에 대한 통찰이었다.
누가의 두 번째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17:11-19)에서도 궁극적 의미는 위와 다르지 않다. 예수가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역 사이로 지나갈 때 나병환자 열 명이 그에게 다가와서 자비를 구했다. 나병은 문자 그대로 육체를 썩게 만드는 피부병으로서 중동 지역의 재앙이었다. 나병환자들은 버림받고 불결하고 접촉해서는 안되며 주민의 거주지 밖의 나병환자촌에서 살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예수는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보고, 토라가 요구하는 것과 같이 제사장들을 만나서 그들의 나병이 깨끗해졌고 사회질서에도 적응할 수 있음을 확인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나병환자들은 예수의 명령에 복종했고, 그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 세상에서 거부당하던 사람들이 이제 육신적으로 온전한 사람들이 되었다. 열 명중 아홉은 뒤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그들의 새로운 신분을 보이기 위해 달려갔다. 예수는 한 사람만이 자기가 깨끗해진 것을 알고 치유의 근원이고 대행자인 예수에게 감사를 표하려고 돌아왔다고 했다. 다른 아홉은 아마도 신앙이 돈독한 유대인이었던 반면에 이 사람은 불결한 혼혈아, 이단자, 이방인 사마리아인이었던 것이다. "일어나 가라. 너의 믿음이 너를 온전하게 했다"고 한 예수의 말은 그의 메시지의 본질, 곧 "가서 네 자신이 되라!"는 뜻이라고 나는 믿는다.
예수는 온전함에 관심을 두었다. 결국 그는 인간성을 새로운 시각에서 본 것이다. 예수는 한 인격의 인간성이 다른 인격의 인간성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공포와 부족의 안전체계, 상투적 편견과 경계선들, 즉 그 뒤에 숨어서 망상적인 안전을 추구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부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예수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즉 참 사람인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요청은 인간성의 의미를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선물로 만들었다.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이 인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한 것이다. 예수의 인간성은 하나님이 의미하는 바 모두를 향해 그 자신의 삶을 열었다. 예수를 체험한 사람들은 이 새로운 삶의 차원을 체험했다. 그들은 그것을 보았고 그것을 느꼈고 그것을 주장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예수 체험이지, 예수 체험에 대한 1세기의 해석이 아니다. 이 두 가지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할 때,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의미와 여인이라는 의미에 대한 이해를 결합시킴으로써, 성 문제와 편견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자기중심적이며 생존지향적인 인간들이 자의식적이고 두려울 만큼 무능한 존재라는 충격을 다루는 방식을 보여주는 또 다른 상징으로서 초점을 맞추었다. 요한복음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공통적 편견이 분명히 작용한다. 그는 유대인의 무리 중 한 사람이 예수에 대해 한 이야기를 전한다. 즉 "우리가 당신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도 하고, 귀신이 들렸다고도 하는데, 그 말이 옳지 않소?"(8:48).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과 귀신들린 것을 결합한 것은 예수에게 "당장 꺼지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 이전의 이야기에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과 여인이라는 것을 결합함으로써, 당시 가부장 사회에서 이중적으로 무능한 사람을 우리에게 제시했다. 요한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4:7-42, 의역하여 인용함).
사마리아 여인은 물 길러 우물가로 갔다. 그녀가 도착할 때 우물가에 홀로 있던 예수는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청했다. 그녀는 그가 유대인이면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했으므로 관습을 어겼다고 대답했다. 요한은 예수의 이런 행동이 얼마나 부적절한 것인지를 자신의 독자들이 아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 시점에서 이야기 줄거리를 중단했다. 예수는 매우 의도적으로 그 여인과 대화를 계속함으로써 문화적 금기를 계속 범했다. 그는 여인이 예수의 정체를 알았다면 "생수"라는 선물을 요구했을 것이라고 했다. 유대 사회에서 "생수"는 항상 성령, 곧 기본적으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간주되는 성령과 동의어다.3) 문자적 사고방식에 갇힌 여인은 예수가 그녀에게 물을 줄 방법이 없다고 한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선생님은 어디에서 생수를 구한다는 말입니까?"라고 주장했다. 그 여인은 계속해서 예수를 자신의 조상 야곱 곧 그 우물을 사람들에게 준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하냐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는 다시 물의 심오한 의미를 영과 생명에 연관시켰다. 그는 우물의 물은 항상 순간의 갈증만을 해소할 따름이라고 덧붙였다. 예수의 말씀은 생존 추구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날마다 끝없이 추구하는 것이며 제아무리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생존 추구는 종국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한성과 죽음은 우리 존재의 일부인 것이다. 완전해지려는 갈망은 갈증을 영원히 해소하려는 갈망과 흡사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주는 물은 권력, 성공 또는 모종의 승리감에 대한 인간 추구의 반복을 중단시킬 것이라고 한다. 그는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그 여인은 그런 선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으나 그것을 여전히 문자적 수준에서 이해하고 나서 그 "생수"를 요청했다. 그 여인은 자기가 더 이상 물을 길러 우물에 오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 생활을 편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예수는 대화를 계속 하면서 여인의 희망을 감지하고 나서,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너라"고 했다. 그러면 그 여인이 원하는 바를 얻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 여인은 그 시점에서 자신이 인간적 성취를 위해 추구하던 것이 무산되었다고 자백했다. 그녀는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고 한 것이다. 그 때 예수는, 요한이 기록한 바에 따르며, 그 여인의 연약한 삶을 폭로했다. 예수는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그녀는 예수가 자기 영혼을 깊이 직시한 사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자기방어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다. 그녀는 사마리아에 있는 산에서 하나님께 에배드려도 좋을지 혹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야할 지 물었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 대화의 전환점을 찾았다. 즉 진정한 예배는 장소나 의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온전함을 체험하고 진리를 인식하는 영적 생활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때 여인은 또 다시 대화의 주제를 도래할 메시아 사상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유신론적 이미지로서 그녀가 생각하는 메시아는 구원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올 초자연적 인물이었다.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그 때 예수는 메시아의 명칭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동시에 "메시아"는 그녀를 지금 온전함으로 초대하는 자라고 새롭게 정의했다. 이것은 구원하는 자와는 매우 다른 개념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예수는 다시금 편견의 의미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관심(및 우리의 관심사)을 여성들에게 돌렸다. 예수 시대에는 인류의 절반에 달하는 여성들이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남성들에게 동산(動産) 정도로 취급되었다. 이것은 유대교의 입장이기도 했다. 즉 창세기에 의하면, 여성은 다만 오만한 남성을 섬기기 위해 내조자로 창조되었다(2:18). 이처럼 여성이 2등급 시민으로 개념화된 것에 기초해서 나중에 십계명에서는 사실상 여성이 재산으로 간주되었다. 즉 "너희 이웃의 아내나....소나 나귀나 할 것 없이 너희(남성의) 이웃의 소유는 어떤 것도 탐내지 못한다"(출 20:17). 만일 여성이 재산으로 규정되었다면 일부다처제는 이치가 맞는 것이었다. 남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수많은 부인, 양 및 소를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전쟁이 그칠 줄 몰랐다. 남성은 때때로 여성에 대해 생사의 권리마저 행사했다. 예수 시대에 유대인 남성은 증인들 앞에서 "이혼하자"란 말 한 마디로 부인과 이혼할 수 있었다. 이와 반면에 여성은 남편이 아무리 잔인하다고 할지라도 결혼생활을 피할 수 없었다. 여성에게는 인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에서는 과부들에게 그 남편의 시체를 화장시키는 불구덩이에 투신할 것을 권장했다. 그런 사회에서 여인은 남편의 아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회에서는 여인의 발을 묶어버림으로써 그들의 기동성을 빼앗고 손쉽게 감시할 수 있었다. 또한 다른 문화권에서는 소녀들의 음경을 절단시켜 성적 쾌락의 가능성과 함께 여인이 남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을 제거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남자들은 자기 아내들을 제멋대로 손찌검했고, 20세기 및 21세기에서까지도 여인들은 기독교 결혼 예문대로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서약해야만 했다. 우리의 삶에 대한 문화적 이해에 여전히 깊게 자리잡고 있는 이런 비인간적 행태의 근원은 무엇인가?
생존수단이 열악한 여성들은 그들의 몸과 능력으로 남성들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킴으로써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서구 역사를 통해서 여성들은 2등급 신분으로 격하되었는데, 기독교는 이런 조치를 하나님이 영감을 주고 정한 것으로 정당화시켰다. 어느 시대와 사회를 막론하고 여성들은 교육을 받거나 자기 명의로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투표를 통한 시민권 행사도 불가능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여러 형태로 희생당했는데, 이 모든 것은 여성들에게 열등한 신분을 부과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여성을 어린 아이처럼 부양의 대상으로 격하시켰는데, 여성들을 이처럼 의존적인 존재로 만든 것은 남성들이 지니고 있는 영원한 생존 욕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적 관계에서 남성들은 여성들의 낮은 신분이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기들의 생존 욕구를 충족시켰다. 여성이 이것에 반대한다면 그녀는 또한 하나님과 싸워야만 했던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여타의 모든 생존지향적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폄하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한다면 그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차별은 인간성을 강탈하는 또 하나의 편견이다. 성차별은 여성을 인간 이하로 취급함으로써 여성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수는 그 이상의 것을 이해했다. 예수는 성차별적 편견은 또한 남성을 뒤틀리게 만들고 그의 인간성을 파괴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인간에 대한 비인간적 취급은 항상 그 가해자를 비인간화하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종국적으로 어느 누구의 희생 위에 자기를 올려놓을 수 없다. 그렇게는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남성 아버지 하나님을 둔 기독교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교회는 인간을 타락한 것(그러므로 2등급)으로 간주하는 초자연적이며 침입하는 유신론적 신의 이름을 부를 때 남성의 행태를 인준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기독교의 아버지 하나님이 인간을 깨지고 타락하고 죄많고 무능하고 나약하고 의타적이며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이 필요한 존재로 간주한다면, 크리스천들은 여성들을 깨지고 타락하고 죄많고 무능하고 나약하고 의존적이며 어린아이와 같고 또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남성의 보호와 구원이 필요하다고 간주할 때, 하나님의 본성을 모방한다는 남성들의 편에서는 여성 혐오적 태도를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부류의 인간 행태는 수많은 종교체계와 관련되어 있는데, 이것은 남성이나 여성 모두를 온전함으로 인도하지 못하며, 나사렛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하나님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천당에서 내려보낸 구세주라는 예수의 이미지를 제거하고, 예수가 한 일을 통해 드러난 그의 정체성, 곧 과거에나 지금이나 그의 인격에 대해 크게 외친 메아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신학 곧 하나님의 본성과 예배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적절한 방법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그 여인에게 존경과 존엄성을 불어넣으며, 이로써 그 여인은 새로운 차원의 인간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복음서들의 다른 이야기들도 예수에 대해 이처럼 혁명적이면서 근본적으로 참 사람의 길로 이끄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은 예수가 두 자매인 마르다와 미라아의 집에 방문한 이야기를 한다(10:38-42). 요한복음은 이 자매들이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 동네에 살았다고 한다(12:1). 언니인 마르다는 귀한 손님을 맞아서 사회의 인습에 의한 여성의 역할에 따라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며 바쁘게 일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여성의 전통적 기대치를 벗어나 유능한 선생의 제자로서 그 앞에 앉아 학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르다는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에게 항상 있게 마련인 증오심을 품고 방으로 들어와 마리아를 부엌의 "여인의 일거리"로 보내라고 예수에게 요청했다. 누가는 기록하기를 예수는 그 요청을 거절했고 마르다를 위로했으며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랄 것이다"고 하면서 마리아의 전택을 옹호했다. 이것은 여성됨 및 인간됨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라는 요청에 의해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가 혁파되는 놀라운 이야기다.
복음서들은 예수가 온전함과 인간성을 옹호하기 위해 종교적 및 사회적 정의를 부정한 또 하나의 사례를 제시한다. 즉 그에게는 여성 제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가, 마태 및 누가는 모두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남성지배적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런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감지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성차별을 하지 않는 예수를 이해하는 것은 극히 어려웠다. 서구 역사를 통해서 남성 교회지도자들은 인류의 반에 해당하는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성서 이야기에는 예수가 여성 제자들을 둔 사실이 심도있게 서술되어 있다. 여성 제자들은 복음서 안에서 대체로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예수의 생애 마지막 순간인 그의 죽음과 부활에 이를 때 비로소 눈에 띠게 된다. 그 때 여성 제자들이 돌연히 등장할 뿐만 아니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마가의 말과 같이 예수가 잡혔을 때 남성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기"(14:50)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가는 다만 십자가 앞에 있는 이 여인들이 예수의 공생애 시작부터 그를 따랐다고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즉 이 여인들이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와 함께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 다음 마가는 이 여인들이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라고 이름을 밝힌다(15:40).
마태는 예수의 여성 제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즉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찍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를 시중들면서 갈릴리에서 따라온 사람들이었다." 그는 또한 그들의 이름을 열거한다. 막달라 마리아, 야보고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및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이름이 없음) 등이다(27:55,56). 누가는 십자가 앞에서 애통하는 자들을 이렇게 기록한다. 즉 "예수를 아는 사람들과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닌 여자들은, 다 멀찍이 서서 이 일을 지켜보았다"(23:49). 누가만이 예수의 갈릴리 선교와 연결시켜 이 여인들에 관해 언급했다. 그는 그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8:3)고 기록했다. 누가 역시 그들의 이름을 나열한다. 막달라라는 마리아와 요안나 및 그밖의 많은 사람들이라고.
예수가 선교할 때 그를 돕고 그가 죽을 때 돌본 바로 그 여인들이 4복음서 전체에 묘사된 부활 드라마의 주역이 된다. 특히 막달라 마리아는 모든 부활절 이야기에서 마치 비교적 높은 신분에 속한 것처럼 여인들의 명단 첫 머리에 기록되어 있거나(마가 16:1, 마태 28:1, 누가 24:10) 무덤에서 유일한 애도자인 동시에 부활의 첫 증인으로 되어 있다(요한 20:1). 베드로가 남성 제자들의 대표였던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여성 제자들의 대표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예수가 열두 남성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주변을 방랑했다는 전통적 표현은 분명히 성서적으로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공적 선교활동 전체를 통해서 그에게는 이름이 알려진 남성 및 여성 제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1세기 상황에서는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장벽을 부수고 완전한 인간성을 저해하는 모든 한계를 극복한 참 사람 예수에 대한 이해와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진정한 관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로 추측했다. 그녀는 예수의 동료였는가, 그의 아내였는가, 그의 애인어었는가? 어떤 자료도 확실성을 보장할 만한 실질적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부부였을 가능성에 대한 주장을 펼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 주장을 나의 책에서 밝히려고 했으므로4) 여기서는 반복하지 않겠다. 지금 나의 관점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나는 여기서 예수가 인간의 생존 욕구에 매이지 않은 삶을 드러냈으며, 다른 사람을 폄하함으로써 자기를 높이는 안전지향적 편견을 거부함으로써, 그의 완전하고 자유로운 인간성을 온몸으로 살아냈다는 사실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신성(divinity)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 곧 예수 안에서 신적인 방문객이 되어 천당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진입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능력은 인간의 온전성의 능력인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온전한 인간성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 불완전한 자신을 엄폐하는 방어선을 뛰어넘도록 사람들을 개방시키고 초대하며 가능케 하는 능력이다. 나사렛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는 여러 성육신 이론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육신 이론들은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재에 대해 설명을 구성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신성을 만나게 되는 때는 인간성이 온전해지고 심오해져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개방적이고 무력한 자가 될 때이다. 이 순간이 바로 인간 예수가 하나님이 의도하는 모든 것에 대해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볼 수 있게 하는 순간이다.
이 예수는 후대의 교회가 만들어 놓은 예수상, 곧 죄인들의 타락한 세상을 구출하기 위해 외계에서 오는 유신론적 신 이미지의 노예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신의 구출에는 구원이 없다. 오히려 구원은 온전함에로 초대받았다는 의미이며 당신 자신과 하나님 자신과의 일치를 축하하는 것이다. 구출은 감사를 유발할 수는 있으나 온전함은 창출하지 못한다.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예수를 외계적이며 천상적인 신의 성육신으로 간주하는 것은 예수 체험의 궁극적 의미가 될 수 없다. 나는 구원이 인간의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 참 사람 예수 안에, 곧 부족의 한계, 편견, 성차별 및 공포에서 자유로운 실존 안에 있다고 믿는다. 그런 삶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약속에 동참하도록 용기를 줄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그 약속에 동참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실재를 체험하리라 믿는다.
내가 묘사하려는 이 예수상은 성서 가운데 제4 복음서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런 신적인 예수는 우리의 시야에서 감춰질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요한복음이 예수에 관한 전통적 신화, 곧 침입하는 신으로서의 예수, 인간 형태 속에 들어온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를 확인하는 것으로 읽는다면, 이 신적인 예수는 우리의 시야에서 감춰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요한의 예수상을 체험적으로가 아니라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성향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적인 것을 체험하는 것은 신적인 것을 통해서가 아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의 신적인 체험은 인간적인 것 안에서 연유된다.
우리는 예수를 참 사람으로 볼 수 있기 전에, 낡은 형식을 타파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란 말의 의미 전체를 체험하도록 열려지게 된다. 이것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살린다"(요한 5:21)고 한 말씀의 진정한 의미이다. 요한의 이 주제는 계속 메아리치고 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셔서, 그 속에 생명을 가지게 하여 주셨기 때문이다"(5:26),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8:19),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12:48),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14:9), 끝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했다"(15:9). 이 구절들이 주장하는 바는 예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 안에서, 우리의 진화적 과거의 장벽들을 넘어서 날아올라 영적으로 충만하며 생명과 사랑의 근원, 곧 폴 틸리히가 하나님이라고 부른 "존재의 근거"(the ground of being)에 대해 개방된 인간성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충만한 삶과 희생적인 사랑 및 인간의 완전한 존재됨에 대한 비젼은 실로 강력한 영상이다. 이것들은 예수가 주는 선물이기 때문에 그는 "신성"이란 말이 듯하는 의미로 들어가는 현관이 된다. 이것이 내가 예수를 주님이라고 하는 뜻이고, 따라서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으로 나아가는 나의 여행길이 되는 것이다. 예수의 인간적인 삶은 그의 삶의 심오한 의미인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을 열어 준다.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본래 의도되었던 바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 것으로서, 거기서는 인간의 존재 의미에 관한 견해를 포함해서 모든 것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이것을 탐지하는 분이 된다. 이것이 내가 섬기고 싶은 예수이고, 내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이며, 내 마음을 끄는 동시에 나에게 도전하는 예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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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런 이야기들은 특히 Alex Haley의 책 Roots와 Queen에 잘 나타나 있다.
2) 이 비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나의 책 A New Christianity for a New World, 134ff.를 참조하라.
3) 니케아 신조에는 "나는 성령, 곧 주님이며 생명을 주시는 분을 믿습니다"라고 고백되고 있음을 주목하라.
4) 나의 책 Born of a Woman, 13장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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