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문지기로 번역한 '뒤로로스'는 파수꾼으로서 몸 된 성전을 지키는 자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속사람이 겉 사람을 온전하게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3) 방주가 만들어지는 동안 자신의 길고 긴 내면의 짐승(겉 사람)들이 길들여져 간다.
4) 골방과 같은 방주는 누스 안에서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 본론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 오역이다
(바른 번역은 그 문지기는 그에게 문을 열고 그 양들은 그의 그 음성을 들으며 그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부르고 그들을 이끌어 간다)다
1) 문지기로 번역한 '뒤로로스'는 파수꾼으로서 몸 된 성전을 지키는 자다.
문지기로 번역한 ‘뒤로로스’는 파수꾼으로서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담당하는 자다. 강도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몸 된 성전을 지키는 자가 파수꾼이다. 이를 디아코니아라고 한다. 자신의 몸 된 성전의 문을 닫고 깨어서 지키는 자다. 디아코니아가 졸게 되면 강도인 감각적 욕망이 몸 된 성전을 뚫고 골방 안으로 침입하여 양들을 겉 사람에게로 끌어가게 되어 그 성전 또한 무너지게 된다.
그럴경우 디아코니아가 깨어나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워야 한다. 구약 성경에 적으로부터 침입을 받아 성전이 헐리고 백성들이 끌려가는 내용이 등장한다. 모두 내면의 이 일을 비사(히다)로 말씀하고 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속사람이 겉 사람을 온전하게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앞에서 잘못 번역된 구절을 언급한 바 있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한 내용은 ‘너 자신과 내 안에 세워져 있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몸 된 성전이 보호되어 진다.’다. 겉 사람의 감각적 욕망인 강도로부터 보호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주 예수를 믿으라’고 번역한 ‘피스튜손 에피 톤 퀴리온 예순 크리스톤’은 ‘그 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서 믿으라’ 또는 ‘믿어서 그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서 있으라’다. 주 예수를 대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그 뿌리가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그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으라’ 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거짓말이다. 시제는 1인칭 현재 단수다. 그 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으면 순간순간 겉 사람으로부터 일어나는 감각적 욕망의 실상을 알고 그 강도들로부터 보호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구원을 얻으려 하겠는가?
속사람이 겉 사람을 온전하게 지배하고 다스리는 내용이다. 너 자신을 강도들로부터 되찾아 온 것을 말씀하신다. 아들을 되찾아 오심이다. 만약 성전이 헐리면 보수해야 한다. 느헤미아 서신서가 대표적이다. 몸 된 성전을 지키는 디아코니아가 되어야 적으로부터 항상 지켜낼 수 있다. 이제부터는 다시 찾아온 몸 된 성전을 강도들(번뇌 망상)에게 다시는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각종 율례를 지키는 것으로는 안 된다).
‘그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부르고 그들을 이끌어 간다’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자기 양들에 대하여 속속들이 다 알고 있으며 그 양들을 아버지와 하나로 이끌어 가시는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자신의 양들이 아버지와 하나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3) 방주가 만들어지는 동안 자신의 길고 긴 내면의 짐승(겉 사람)들이 길들여져 간다.
‘누스’에 해당하는 산에서 백여 년의 기간을 통해 노아의 방주가 완성되면 방주 안으로 정결한 짐승 일곱 쌍과 부정한 짐승 두 쌍을 이끌어 들어온다. 겉 사람과 만나지 않는 산에서 방주가 세워지는 동안 내면의 속성들이 정결한 짐승 일곱 쌍이 될 정도로 정결한 짐승으로 70~80%는 바뀌게 된다. 방주가 만들어지는 긴 세월 동안 그만큼 자신의 긴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있는 짐승들이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구도 예외 없이 반드시 이런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단순히 그런 과정 없이 내면을 이야기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세상 종교인들은 내면에 부정한 짐승들이 99.9%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보는 나, 듣는 나, 느끼는 나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 과거에 기인한 자기 믿음과 겉 사람의 정과 욕심에 붙들려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역사와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4) 골방과 같은 방주는 누스 안에서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쿰 언약(세우다(קוּם)은 ‘견고히 하다, 확실히 하다’라는 의미로 이 언약은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고 확실히 세우시겠다는 말이다. 쿰 언약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방주 안으로 이끌려 들어온 짐승들에게 때마다 양식을 공급하게 된다. 방주의 문을 닫으면 노아 안에 있는 속성들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양식을 통해서 변화를 가져온다.
겉 사람의 번뇌와 망상과 완전히 차단된 그 기간을 일 년으로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다. 실제로 누스 안에만 들어가도 번뇌 망상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골방에 해당하는 방주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누스 안에서 아주 미세하게 일어나는 작용들까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해결하지 않으면 결코 지성소가 열리지 않는 것은 ‘나’라는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성소 안에는 ‘나’라고 할만한 것이 조금도 없어야 의식 무의식 잠재의식을 온전히 넘어서게 된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