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끼의 말뚝
전 정 우
< 5 회 >
당부해서 잭을 보냈다. 본업인 삐끼 질에 불이 붙으나 다름없었다. 잭만 한 삐끼는 이 카지노에 없다. 사근사근한 언행과 바른 예절, 머리 회전이 빠른 놈이었다. 삐끼가 나쁜 직업은 아닐 것이었다. 도박에 소질이 없는 고객을 도와서 돈을 따게 해주고 고리를 뜯는 일, 나쁘지 않았다. 흥을 돋우어 주고 실속도 차리는 직업, 카지노 측에서도 양질의 삐끼는 쌍수로 환영하면서 줄줄이 놓아먹이는 형편이었다..
어슬렁어슬렁 다가간 잭이 따리를 붙이는 사이에도 나는 셔터를 눌러댔다. 잭의 움직임까지 덤으로 잡혔다. 오래 지나지 않아서 지폐 한 장을 들고 물러 나온 잭이 고개를 흔들었다. 돈도 많지 않아 보이는 치들, 사람을 의심하는 정도가 심하다는 불평. 들고 온 돈을 내 호주머니에 쿡 찔러 넣어 준 잭이 할 일 다 했다는 식으로 사라졌다.
기분 나쁠 것은 없었다. 동족이 카지노 밥이 안 된 것 하여도 다행이었다. 윤과 일행의 점수를 올려주고도 먹잇감으로 점찍어 둔 것까지 잊지 않았다. 방아쇠만 당기면 끝나게 되어갔다.
블랙잭을 거쳐서 슬롯머신 줄에 일행이 앉은 것은 꼭두새벽이었다. 벌써 적지 않은 돈이 새어나간 눈치였다. 저렇게 돈이 나가면 내가 헛장사를 하게 될지 모른다는 조바심. 그동안 셔터를 짧게 누르거나 '고앤스톱'을 반복한 횟수는 줄잡아 오십여 회는 되었다. 가까이 촬영할 때는 돈이 오가는 모습이나 얼굴 표정, 멀리 찍을 때는 주변 환경과 여러 사람이 적당히 배열되도록 애썼다.
사진 한 장에 수천 달러, 동영상 한편에 수만 달러까지도 호가하게 될지 모르는 작품.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싶었다. 몇 번만 더 셔터를 누르고 치울 생각이었다.
룰렛이 카지노 대표적인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인기는 슬롯머신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 모두 아는 사실이다. 바카라, 블랙잭, 포커 같은 게임은 실력 있고 기술 좋으면 한몫 잡는다. 슬롯은 그 게 아니었다. 운이 따르면 돈이 붙고 없으면 나가는 게 슬롯 게임이었다. 잭팟만 펑 터지면..... 적은 돈이 아닐 것. 수백만에서 많게는 수천만 달러까지, 그 돈이 어느 순간 벼락처럼 퍼부어진다. 카지노 전체가 발칵 뒤집히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카지노마다 그런 일이 어쩌다 한번은 있기 때문에 도박에 미치는 놈도 있고, 패가망신한 다음 삐끼로 전업하는 치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노력 끝에 성공이라는 데, 그러나 돈 꼬라박는 노력 끝에 내가 이룬 것이라고는 삐기 질이 유일했다. 삐끼는 우리 말 바람잡이의 은어, 이곳에서는 ‘로퍼(roper)로 통하지만 실감나는 말은 아니었다. 내가 노렸던 것은 오른쪽에 자리 잡은 윤의 곁자리와 꾼들 정신이 오락가락할 시간대였다.
드디어, 방아쇠를 당길 시간이 촉박해 왔다. 윤의 옆자리를 지키던 고객이 일어서서 가자 널름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내가 윤의 기계를 들여다보았다. 번쩍번쩍 나타나고 사라지는 그림이 그저 그랬다. 어쩌다가 한번 빤닥한 그림이 그려지는 순간 내가 한 손을 윤의 등짝에 올려놓고 능청부터 떨었다.
"좋타! 푹푹 질러 봐!"
정신을 기계에 빼놓고 있던 윤이 흘끔 나를 쳐다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어서 입까지 벌어졌다. 자지러지게 놀란 표정이었다. 나를 알아 본 것, 잠까지 깼다면 다행일 것 같았다. 씩 웃어주고 계속하라고 턱으로 기계를 가르쳤다. 윤이 마지못해서 지폐 한 장을 기계 아가리에 밀어 넣고 나를 쳐다보았다. 놈의 지갑 속에 백 불 지폐가 아직 몇 장 담겨 있는 것을 내가 놓치지 않았다. 그 돈이 공금이든 고리채를 내서 싸 들고 온 돈이든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태연하듯이 윤도 태연하기 위해서 버둥거리는 모습이 조금 짠했다.
"야! 강준호! 일어서자. 저쪽에 가서 이야기하자."
"이야기? 좋지."
윤한수를 따라서 내가 일어섰다. 윤의 윗사람들이 흘끔 나를 쳐다보았다.
"강준오! 오랜만이다. 잘 지내? 식구도 자알 있고?"
공직 생활하는놈 답게 윤이 격식부터 차렸다.
"아니. 노름 빚 때문에 마누라 잡혀 먹고,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 됐다. 어쨌든 우리 사이에 격식 차리고 자실 게 있냐. 그보다 흥정할 게 있다. 네 사진을 몇 컷 찍었는데 사주라는 부탁이야. 형편이, 어떠냐?"
"뭐, 찍은 사진을 사라고? 미친 새끼, 환장했구나."
"면목 없다. 호주머니는 마르고."
"이민 와서 잘 된 줄 알았더니, 거지발싸개 된 게 아냐?"
"뭐라고? 좋다. 흥정, 끝난 것으로 해두자. 뒷말 없기다. 낼 아침에 일어나서 유튜브나 한번 살펴봐라. 틀림없이, 신문사에서 내게 전화해 올 데가 몇 군데 있을 기다."
거지발싸개는 몰라도 홈 리스가 덮고 자는 넝마에 대한 기억은 뚜렷했다. 이불의 악취만 해도 대단했는데 거지발싸개라면 어쩔 것인가? 불쾌했다. 하기는 간판을 내건 거지가 따로 없는 나라에서 그런 게 있을 리는 없었다. 있다 해도 상관할 필요는 없었다. 홈 리스가 바로 거지, 내가 홈 리스이므로.
첫댓글 드디어 오늘 강준오와 윤이 대면을 했군요.
거지발싸개...ㅋㅋㅋㅋ
허긴 삐끼란 말도 그들만의 은어겠지요?
그런데 강준오가 방아쇠를 좀 빨리 당긴 느낌이네요.^^
좋지 않은 냄새를 피운 쪽에서 성내는 것, 흔한 일 같습니다. 이빨을 먼저 드러내서 상대를 제압하는 것으로 자신의 구린 부분을 덮어두자는 약삭빠른 계산으로 이해해도 좋겠지요 .
삐끼라는 말, 자신이 없어서 검색해 보았습니다.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예문 하나 - 행인 한 명에 네다섯 명의 삐끼들이 달라붙어 “물 좋은 데서 한잔하시죠.”라며 합창하듯 외쳐 댔다. -
새벽열차에서 내린 시골 사람들을 향해 달라붙던 서울역 삐끼들의 행각은 지금도 여전하리라는 생각입니다.
이래저래 이야기도 중반에 이른 것 같군요. 거듭, 감사합니다.
거지발싸개
오랜만에 들어보는 정겨운(?) 단어네요.
이제 부터 가파른 산으로 오르는 건가요?
언어의 출생 성장 소멸도 사람과 비슷하다는군요. 그럼 옛말이란 이미 사망한 말? 알 수 없네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하나는 철 지난 말과 뜻하지 않게 부딪쳤을 때 사람마다 반응이 조금 다를 수 있다는 점이지요. 장란삼아 친한 사람과 '거지발싸개'를 자주 입에 올렸던 사람에게는 정겨움이, 혐오의 뜻만 머리에 담아 두고 있는 사람에게는 몇 배 진한 저주의 말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옛친구인 강과 윤의 재회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도박중독자로 한계점에 이른 친구 강과 조우한 윤 역시 약점을 지닌 사람, 우정과 서로 지닌 구린 부분 때문에 몇 마디 주고 받은 말이 비비 꼬였다고 보아도 무방할 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