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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정진명
잔에는
눈이 있다.
담기는 액체가 만드는
동그란 눈.
잔에 담긴 물을
주스를, 와인을, 우유를
무심코 마시는 동안
눈은
세상을 본다.
사람의 눈이 보지 못하는
세상 밖을 비춘다.
비추인 그것이
어두운 몸속에 불을 지펴
세상과 연결한다.
잔에는
제 안에 담기는 것을
눈으로 만드는
허공이 있다.
2012.8.30.
잔 1
정진명
지구는
둥근 잔이다.
제우스의 투명 숟갈이
잔의 한 귀를 휘젓는다.
곧 사라지는 숟갈은
물속에 오래도록 회오리 자국을 남긴다.
치마와 우산이
훌렁 뒤집히고
흙탕물이 강둑을 비웃으며
마을과 논밭을 벌컥벌컥 삼킨다.
둥근 잔속을 어슬렁거리다가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 우습게 본
사람들의 큰 코를 한 방 친다.
잔의 코가 납작해진다.
2012.8.21.
잔 2
잔의 코가 납작해지면
벼루가 된다.
납작해진 바닥에서
검은 물결이 인다.
콧구멍 간질이는 털들을 따라가서
붓끝으로 6서를 토하고
4군자의 묵은 향기를 피운다.
바닥에서
얼마나 가파르게 서느냐가
높이를 결정한다.
가장 높이 오르려는 몸부림은
먹이 자신의 검은 영혼을 으깨는
밑바닥에서 시작된다.
찻잔속의 태풍으로 끝나도
그 몸부림이 멈추지 않는 것은
정신이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뱁새가 튀기는 그 먹물 속에서
붕새가 구만리 장공을 날아오른다.
2012.8.21.
잔 3
누가 권하지 않아도
스스로 기울이는 잔이 있다.
소낙비 수다스런 한낮
주먹밥처럼 뭉친 물방울을
기우뚱 긴 목 기울여
굳이 비우는
진초록 잔.
방울 속에 도르르 말린 하늘도
더불어 비우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다시 잔을 치켜드는
토란 밭, 보송보송한
오후.
2012.8.21.
잔 4
달과
수작하던
시인
묵객들
잔잔한 물에
잔 띄워두고
다들
어디 갔나?
영문 모르는
청개구리
임자 없는
연꽃 그늘 아래
연적처럼 놓였다가
물로 뛰어든다.
물살에 잔들
쨍그렁쨍그렁.
2012.8.21.
잔 5
잔에 물을 조금씩 담아
젓가락 연주를 하는 사람이 있다.
절대음은 없어도
각기 담긴 물의 양으로 제 몫을 우는 잔들.
도-레-미-파-솔-라-시-도
서로 어울려
청아한 목청으로 노래 부른다.
제 안에 담긴 만큼 소리를 내는,
사람은 잔이다.
누가 두드리는지 알 수 없어도
저마다 저만큼씩 소리를 낸다.
제각기 내는 소리들 모두 모아
자신은 모를 커다란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소리는
장자의 말마따나 하늘의 것이다.
내게서 나는 소리는 어떤 몫일까?
가만히 귀 기울여본다.
2012.8.21.
잔 6
잔의 쓰임은
잔의 몸이 아니라
잔 안의 빈 공간이다.
잔은
제 안의 허공으로 하여
자신을 완성한다.
닳고, 긁히고, 금간.......
내 안에도 그 허공이 있다.
그 안에 담겼다가 떠나간 나를
하나하나 완성한 것은
허공이다.
그 허공으로 찍어낸 순간들을
퍼즐처럼 맞추면
저만의 무지개가 된다.
빛은 색이 없고
허공은 꼴이 없는데
오늘도 잔 속에 무지개가 뜬다.
2012.8.21.
잔 7
같은 물이라도
뱀이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마시면 젖이 된다.
같은 잔이라도
차를 담으면 찻잔이 되고
농약를 담으면 독잔이 된다.
잔은
죄가 없다.
잔을 만든
도공도 마찬가지.
있다면,
사람이 잔을 닮아
악착같이 담으려 한다는 것뿐!
2012.8.21.
잔 8
유리잔에 담긴 포도주는
잉크다.
보고
맡고
핥는
이의
오감을 몸속 구석구석에 새겨넣는다.
이 포도주를
피로 바꾼 이도 있다.
사람들은 거룩한 피로
제 몸 속에 말씀을 아로새긴다.
그래서 약하기는 하지만,
성직자들의 말에는 취기가 있다.
니체는 이 잔을 마시고
짜라투스투라가 되었다.
이걸 또 아편이라 읽은 건
칼 마르크스다.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의 예수처럼
내 잔을 들여다본다.
잔 속의 잉크가
출렁출렁 휘갈긴 붉은 글자를
읽을 수 없다.
2012.8.22.
잔 9
모든 잔 속에는
수평선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허물어지지 않는
확고부동한 중력의 사상.
그 수평의 도막들을 허물려고
사람들은 끝없이 잔을 기울인다.
가끔 밀려드는 멀미의 진원지는
그 맹목이다.
멀미를 견디지 못한 꿈들이
마침내 관 속의 수평으로 눕는다.
기울이려는 모든 것들의 몸부림을
천천히 바닥으로 눕히는,
수평선, 그걸 없애는 방법은
잔을 더는 채우지 않는 것이다.
2012.8.22.
잔 10
조선의 명문장가 경보 손순효는 주태백이었다. 하루 석 잔만 마시라고 성종이 내려준 은잔을 대장간에 보내어 사발만하게 만들었다.
은잔과 대접 사이
다시 오지 못할 세월이 두둥실 흘러
그리움은 내게 남은 마지막 사치.
내가 못하는 술로도
가끔 잔을 기울이는 이유다.
은잔에도
대접에도
똑같은 달이 뜬다.
2012.8.22.
잔 11
자루 달린 잔 하나
밤하늘에 떠있다.
하루 한 번씩 바닷물을 퍼올린다.
그 뉴하주 먹고
이태백은 달의 품으로 돌아가고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을 쓴다.
스스로 텅 비운 저 투명 잔을 보며
나는 뭐라고 써야 할까?
은하수로 담근 술에 취해
시간의 쳇바퀴를 돌다가
허공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쓸까?
저 술 한 잔으로 하여
가만히 앉았어도
붕새가 부럽지 않노라고 쓸까?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침묵을 넘지 못한다고 쓰자.
차라리 뱀의 다리라고 쓰자.
뱀의 허물이 은하수를 푸는 밤,
내 꿈이 구만리 날개를 퍼덕여
뱁새만한 붕새를 따라나선다.
2012.8.22.
잔 12
잔은
들고 나는 문이 하나,
입이 곧 똥고다.
채우고 비우기를
끝없이 되풀이하다가
지친 몸 끌고 박물관으로 가서
입을 아! 벌리고
똥고를 보여준다.
형광불빛 투명한 유약 속으로
술 내느라고 용을 쓴 괄약근
짜글짜글한 무늬가 드러난다.
입과 똥고를 나눈 사람에게서
비로소 선악도 나뉘니,
더러운 것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오는 것.
잔을 들면
내 입술에 닿는 것은
잔의 입이 아니라
똥고다.
2012.8.23.
잔 13
삶이란
모자라기보단
언제나 넘친다.
술이 넘쳐 주정뱅이가 되고
밥이 넘쳐 소갈병이 되고
생각이 넘쳐 우울증이 된다.
모든 경전은
넘침을 경계하는 마음의 오솔길.
넘쳐야 맛인 술도
넘쳐선 안 될 경계가 있다는 듯
부족한 술만큼
마음이 넘치는 잔이 있다.
계영배,
폭탄주가 일으키는 맥주 거품의 에베레스트 빙벽 7부 능선을 넘는
한 가닥 희미한 벼랑길.
2012.8.23.
잔 14
하늘과 바다를 앙다문 수평선은,
직선이 아니라
원이다.
물 조금 담긴 유리잔을 보면 안다.
톡! 하고 두드리면
가장자리로부터 둥근 수평선이
중심을 향해 두둥둥 몰려든다.
그 울림으로 연주도 한다.
잔을 두드릴 때마다
동그라미 수평선들이
복판의 점 속으로 사라지며 노래한다.
바닷가에 서면
멀리 수평선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비행사의 눈에 비친 고리 무지개처럼
듣는다.
동그란 직선이 타는
우주의 장엄한 음악을.
2012.8.23.
잔 15
무언가에 취하지 않으면
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
잔은, 두려움 너머
신에게 바쳐진 최초의 그릇.
피를 담든
술을 담든
취한 후에야 비로소 만날 수 있어
맨 정신으로 신을 마주한 자들은
모두 돌이 되었다.
벌떼처럼 모여든 사람들의 함성 속에서
승자가 치켜드는 잔에는
신의 권능이 담긴다.
세월이 흘렀어도 경기장마다
잔이 나타나
땅위의 영광을
하늘로 전한다.
신이 그 잔을 받아마심으로써
하늘과 땅 사이
사람이 완성된다.
2012.8.23.
잔 16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잔이 있다.
호적은 적도 부근.
바다의 보조개가 떠도는 바람을 움켜
점점 크고 두꺼운 잔을 빚는다.
바람과 구름과 비는
그의 빗자루.
부실한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휩쓸며
중위도 고압대까지 올라가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스러진다.
뜻모를 이에겐 재앙일 뿐이지만,
신이 세상을 사랑하는 한 방식.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한 잔으로 하여
달아오른 지구가 숨통을 튼다.
한 여름, 고요한 바다가 찡긋 웃고
인공위성 사진에
흰 잔이 하나 나타난다.
2012.8.23.
잔 17
뚜껑 달린 잔이
병이다.
뚜껑을 따면 병은
잔이 된다.
옆에 놓인 병따개 보란듯이 이빨로 따고
벌컥벌컥 마시던 맥주병, 음료수 병들.
젊은 날의 기억 속에는
모두 잔으로 남아있다.
뚜껑을 버리고
추억의 잔으로 남은 병들,
고물상 한 구석에 나란히 서서
제게 맞는 뚜껑을 기다린다.
병 주둥이에 누군가의 추억이
마술사의 장미처럼 꽂힌다.
2012.9.5.
잔 18
알파벳은 본디
상형문자였을지도 모른다.
CUP의 U는 컵을 닮았고
CAP의 A는 모자를 닮았다.
컵을 뒤집으면 모자가 되고
모자를 뒤집으면 컵이 된다.
모자는 손잡이 달린 컵이고,
컵은 손잡이 없는 모자이다.
위로 담아야 할지
아래로 담아야 할지를 구별할 뿐
담는다는 점에서 CUP과 CAP은 같다.
담는 것과 담기는 것 사이에
말이 갈리는 틈이 있다.
갈라진 말들을 쓸어담은 잔이 사전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야겠다.
종이 잔 속에 빼곡이 담겨서
말들이 자신을 설명한다고.
2012.9.7.
잔 19
외로운 사람의 곁에는
언제나 잔이 있다.
거기 담긴 것이
술이냐,
포도주냐,
맹물이냐,
양주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지독하게 외롭다는 것.
무언가에 젖어들지 않으면
미치고 말 것이라는 것.
잔은 그 속도를 늦춘다.
곧 있을지도 모를 사회면의 검고 짧막한 기사를
그로 하여 없앨 수도 있다.
집에 선뜻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 곁엔
말을 시키는 잔이 있다.
잔이 비는 만큼 눈물이 찬다.
2012.9.11.
잔 20
달걀 반만한 잔 속에서
때로 거인이 익사하기도 한다.
2012.9.11.
잔 21
가장 납작한 잔이 접시이다.
그렇지만 낮다고 우습게 보면 안 된다.
포도주 같은 걸 쏟으면 씻기 어렵거니와
함부로 얕보다가는
접시물에도 익사하는 수도 있다.
요컨대 문제는
잔의 모양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이다.
2012.9.11.
잔 22
유리로 잔을 좀 크게 만들고
금붕어 몇 마리 넣으면 어항이다.
알록달록 금붕어 한 눈에 들어오도록
가림막같은 돌멩이를 치우고
커튼같은 물풀도 하나하나 없애
숨을 곳이 더는 없는 금붕어들
동료들의 몸 뒤로 서로 숨는다.
힘없는 것들 밖으로 밀려나고
격한 몸부림으로 떨어져나간 비늘이
가끔 저녁 뉴스를 탄다.
2012년 대한민국의 교실.
2012.9.11.
잔 23
서재 구석에
학이 둥지로 삼은 잔이 있다.
알록달록 5색종이로
손톱만하게 접은 수많은 학알들.
알을 접은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속으로 푸르륵 날아가고
알만 남은 둥지엔 품었던 기억이 아득하다.
창가에 노을이 곱게 물드는 저녁이면
가끔 학들이 날아들기도 한다.
그런 날이면 둥지 가득 온기가 피어나
지난 시간들이 핏줄을 타고 두근두근 꿈을 지핀다.
5색 알들이 껍질을 깨고 형형색색으로 날아올라
방안은 별 가득한 우주가 된다.
아직 부화할 알들이 남은 둥지,
마시면 추억이 삼켜지는 잔이 있다.
2012.9.12.
잔 24
잔을 들면
잠시 후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그래서 날개 달린 것들은
모두 잔에서 부화한다.
물위에 동동 뜬 물병아리
높은 바위 틈에 엉성하게 놓인 황조롱이
전봇대에 악착같이 붙은 까막까치는 물론,
지구 반바퀴를 도는 철새들도
시작은 주먹만한 잔이다.
날기를 일찌감치 포기한 것들도
잔에서 부화한다.
타조, 키위.........
꿈은 아직도 날고 있는 증거이다.
하지만, 너무 무거워서 끝내 날지 못하고
영원히 사라져버린 잔도 있다.
마다가스카르의 코끼리새.
새들은
자신의 꿈을 잔에 담는다.
2012.9.20.
잔 25
잔을 직접 만든 적이 있다.
물레 없이 흙을 일으키고
손잡이까지 붙였다.
뭐라도 그리라는 동료의 말에
한참 망설이다가
'퇴장(退藏)'이라 써 넣었다.
20년 전의 일이다.
20년 후에 나를 보니
'퇴장', 그대로다.
삶이,
잔 속에 담긴 셈이다.
말은,
잔이다.
그 속에서 삶이 찰랑인다.
쏟아진 뒤의 빈 잔에
남아있는 문장이
그의 삶이다.
2012.9.20.
잔 26
휘발성은 별의 잔상.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 순간 속에
영원이 책갈피처럼 한 조각 끼어있다.
잔에서 꽃피는 향기는
열매들이 밤새 모은 별빛의 영혼.
길 잃은 사람에게 영원의 틈을 보여준다.
잔은 영원으로 가는 스위치,
향기에 취해 말이 멎은 순간
밤하늘의 갈피엔 별똥별 길게 지고
일상에 지친 사람들
어두운 구석에서 잔을 잡아당기며
다음 날이면 기억 못할 제 본적을 묻는다.
2012.9.20.
잔 27
말하자면, 거미줄은
허공에 걸린 잔이 아니겠나?
눈 어두은 날것들
허공이 허용하는 무한한 자유로 하여
제 운명의 잔에 담기면
거미는 많은 발끝의 감각으로 잔을 당겨
육즙을 들이켜지.
오늘도 바람의 길목에 납작 잔을 펼쳐놓고
발끝의 감각을 햇살처렴 밝힌
길고도 목마른 기다림의 잔.
사막의 밤에 텐트를 펼쳐놓고
새벽 이슬이 고이기를 기다리는 조난객처럼.
2012.9.22.
잔 28
한쪽이 깨져나간 잔에
사람이 담겨있다.
두 다리가 바닥까지 엿가락처럼 늘어지고
잔 위로 넘친 팔은 책상에 괴어
떨어지기 직전의 머리를 떠받쳤다.
잔을 떠나지 못하는 건
잔을 떠나는 길이 그 안에 있기 때문.
공부가 합격으로 완성되기 전에는
낙오라는 씁쓸한 물이 올라와
잔을 떠날 수 없다.
목표마저 아지랑이처럼 아른대는 나른한 오후
맹탕의 시간이 흘러간다.
잔에 담긴 육신이 늘어져
바닥까지 길게 흘러내린다.
육신보다 더 무거워진 영혼은
잔에 담긴 엉덩이를 떼지 못하고
펼쳐진 책 위로 고꾸라진다.
2012.9.26.
잔 29
엿가락처럼 늘어진 다리를 거두어
유리잔 속으로 돌아간 사람들 있다.
투명잔 속에 앉아있어, 사람들은 때로
그가 공중부양 중이라고 착각한다.
늘어진 팔다리만 거두었을 뿐
그는 제 잔 안에 담겨있는 것이다.
세상으로 나가는 모든 문을 닫고
사방 벽을 투명 유리로 바꾼
그 절해고도 안에서 죽기로 한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놓인 잔을
때로 영롱한 빛이 가득 채운다.
그 빛의 무늬가 단청이다.
아무리 멀어도 영혼이 목마른 이들
단청 속 참빛을 찾아 세상 끝까지 온다.
잔은 늘 비어있다.
끝내 못 비운 사람들의 영혼이 거기 잠시 담긴다.
2012.9.26.
잔 30
본차이나 속에는 뼛가루가 들어있다.
논두렁 밭두렁을 천천히 걸어온 황소가
마지막 발걸음을 흙속으로 옮겨
더 없이 육중했던 삶이
존재의 무게를 줄이는 이 창백한 역설로
상아보다 더 깨끗한 순백의 잔을 빚는다.
미식가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가벼움은
한 평생 고단했던 소의 영혼이 떠나간 무게.
찻숟갈이 쨍 내는 맑은 울림으로
흙이 줄이지 못한 두께의 한계를 넘어
저리 얇고도 고운 자태를 뽐낸다.
닳고 닳은 무릎도가니 같은 잔 받침에
소의 눈동자처럼 순수한 잔이 놓였다.
조심스레 다가서는 입술을 밟고
황소 한 마리 뚜벅뚜벅 걸어간다.
밤하늘의 별자리 뒤에서
흩어진 뼛가루들 은하수로 빛나는 밤
길잃은 별똥별 하나 잔 속으로 찰랑 떨어진다.
2012.9.26.
잔 31
소리 지르는 잔이 있다.
사람을 쓸어담고 마구 흔들어
혼을 쑥 빼놓는다.
고래고래 넘치는 비명과 더불어
넋도 잠시 빠져나간다.
그렇지만 마약과도 같아
안 마실 수가 없다.
지루한 일상을 통째로 뒤흔들어
삶에 또 다른 차원이 있음을 일깨운다.
철없는 딸아이를 따라 탄 놀이공원에서
황천길의 샛노란 하늘을 본 적 있다.
그 잔의 멀미 밖으로 아이들 모두 떠나고
모든 추억들 천근 고요 밑에 깔창처럼 깔린 요즈음
어디선가 그 잔이 가끔 소리지른다.
2012.9.26.
잔 32
부딪히기 전에는 알 수 없지.
부딪힌 두 잔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어떤 불꽃을 튀기는지.
부딪혀 봐야만
비로소 확실히 알 수 있지.
부딪히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미지의 대륙을
일단 부딪혀
쨍! 하는 소리를 더듬이 삼아
번쩍! 하는 불꽃을 횃불 삼아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는 것.
내 잔이 넘치도록
내 잔이 깨지도록
삶은 부딪히는 거야.
2012.10.5.
잔 33
월드컵은 컵이다.
그 안에 깍두기처럼
토막 난 세상이 담겨있다.
4년에 한 번씩 기울여
칵테일처럼 섞는다.
온 세상이 취한다.
붉게 취한 한국,
독일까지 물들이다.
잔 34
여름내 뜰에 놓였던 와인 잔 하나
제 발등에 모자이크 그림을 그린다.
유리 밖으로 땀처럼 빠져나온 와인이
조각조각 떨어져 과녁의 홍심을 완성하자
복판에 화살 하나 꽂혀
지나는 바람에 부르르 깃을 떤다.
꽁지만 남기고 다 박힌 화살에
붉은 과녁이 염통처럼 두근거린다.
화살을 저토록 깊이 박을 줄 아는 명궁은
시간!
내년 봄이면 다시 채워질 잔 하나
과녁 복판에 화살로 꽂혀있다.
2012.11.2.
잔 35
엎어놓은 잔은
무엇일까?
엎어놓아도
잔은 잔이다.
그냥 빈 잔.
사람의 잔도
때로 엎어놓아야 한다.
무언가로 쓰이려는 자신을 비우고
이따금 자신의 빈 곳으로 돌아가는 게 필요하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
바로 그 뜻이다.
그래서 하루종일 쓴 잔을
밤이면 조용히 엎는다.
엎어 놓아야만
다음 날 맑은 정신이 찬다.
엎어질 때
잔은 비로소 완전해진다.
2013.02.23.
잔 36
만두처럼
입을 꽉 다문 잔들
갯벌 속으로 묵묵히 길을 낸다.
어르고 달래도 옹고집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아
끓는 물속에서 캐스터네츠처럼
입을 딱 벌리고 죽어버린다.
열린 반쪽의 잔들, 패총에서
수천 년 전의 바다를 눈물처럼 담고 있다.
뻘 속 무한히 긴 길 끝에
진주 하나 내려놓고
딱 한 번 마지막으로 열리는 잔.
자신의 잔을 버린 푸른 진주 하나
태양의 둘레를 돈다.
2013.02.23.
잔 37
찬장 한 구석에 잔이 있다.
24년 전
애송이 선생이었을 때 만든 질그릇 잔.
다른 꾸밈 없이
퇴장(退藏) 두 글자만 쓰여있다.
물러나 감춘다!
목련처럼 벙글었던 그때
이번 삶에 무엇을 준비하려 했던 것일까?
24년 후에는 알 수 없어진 그 어떤 생각이
참새 둥지 만한 잔에 담겨
24년 후의 찬장 앞에 우두커니 나를 세웠을까?
잔을 꺼내 든다.
형광등 빛이 비춘 그 속에서
참새만한 어둠이 포르르 달아난다.
봄비로 촉촉해진 눈망울 속에서
목련이 젖은 날개를 편다.
2013. 04.14.
잔 38
봄은,
깨진 유리조각 같아서
잔 속의 투명 실핏줄을 쓱 벤다.
잠시후,
연초록 피가 눈마다 흘러내려
세상은 온통 형광빛을 낸다.
봄이 지나가는 지구본
유리잔의 안쪽은
상처 투성이다.
상처 없이 태어나는 목숨은 없어
연초록 피로 흥건한 잔은
막 태어나는 목숨으로 가득하다.
2014.06.12.
잔 39
문을 뒤집으면
곰이 된다.
그렇지만 잔을 뒤집으면
쏟아진다.
거울은 뒤집어도
아무렇지 않다.
뒤집히는 것이 있으면
뒤집히지 않는 것이 있다.
뒤집어지지 않는 것을
뒤집어보는 것이 시다.
담기지 않은 잔은
뒤집어도 쏟아지지 않는다.
2014.06.12.
잔 40
캄보디아에 가면
고무 함지를 타는 아이들이 있다.
물결에 흔들리는 것이
마치 범퍼 카 같다.
금새 뒤집힐 것 같은데,
그래도 용케 물살을 탄다.
가난의 물결을 넘어오던
한국의 지난 세월 같다.
그렇지만, 왜 뒤집히지 않겠나?
뒤집힌 것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기억이 끊어진 곳에서
잊을 만하면 배가 뒤집히고
사람들은 굴원이 된다.
남은 사람들은 초사를 읊고.
2014.06.13.
잔 41
잔이 뒤집히지 않는 것은
잔 바닥 때문이다.
개펄에 꽂던 빗살무늬토기처럼
풀섶에 꽂던 유목민의 뿔잔처럼
바닥을 송곳처럼 좁혀서
받침이 꼭 필요한 잔이 있다.
받침이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는 그 잔.
배는,
그런 잔이다.
평형수를 뺀 잔 하나로 하여
나라 전체가 침몰한다.
2014.06.23.
잔 42
잔에 실금이 가면
허공에도 실금이 간다.
잔의 이빨이 나가면
허공의 이빨도 나간다.
잔이 깨진다.
쨍~ 하고
조각난 사금파라에서
허공이 저를 드러낸다.
잔이 박살난다.
쓸어 담기는 쓰레받기 속에서
잠시 잔으로 왔던 허공이
본래의 제 모습으로 돌아간다.
2014.06.26.
잔 43
책은 잔이다.
표지를 열면
글씨가 문장이라는 빨대를 타고
눈알 속의 검은 주둥이로 주르륵 빨려든다.
밥통 대신 골이
그 액체를 삭인다.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고
또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다.
어느덧 빈 잔만 상에 놓이다.
다른 점은, 그 잔을 펴면
언제든 마실거리가 나온다는 것.
책은
영혼이 샘솟는 잔이다.
2014.06.26.
잔 44
때로
잔이 사람을 마실 때가 있다.
처음엔 입술을 잔에 살짝 대었다가
나중엔 저도 모르게 잔 속으로 빨려들어
허우적거린다.
더는 빠져들지 않겠다고 맹세해도
소용없다.
아예 온몸이 풍덩 빨려들어
끝내 빠져나오지 못한다.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것도 잠시
익사한다.
그런 주검에서는 고독의 냄새가 난다.
그 냄새에 취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잔의 모양을
관처럼 네모나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굳이 들어갈 잔이라면
그게 훨씬 더 낫다.
뚜껑까지 달면
잔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된다.
2014.06.26.
잔 45
삶이 반을 채우고
죽음이 나머지를 채운 잔도 있다.
어느 한쪽이 비면
어느 한쪽이 찬다.
사람들은 죽는다 산다 표현하지만
잔이 차고 빌 뿐,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아니다.
오고 가는 것은 죽음과 삶이지만
허공을 가득 담은 잔은 늘 그대로다.
차거나 빌 뿐인
그 잔.
2014.06.26.
잔 46
보기만 해도
녹이는 잔이 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어디 있는 줄도 모른다.
굳이 입술을 대지 않아도
연인의 눈에는 제짝이 잔이다.
게이머의 눈에는 화면이 잔이다.
세상이 못마땅한 노인에게는
뉴스만 나오는 티브이가 잔이다.
교미 후 암컷에게 제 몸을 먹이로 주는 사마귀처럼
보고만 있어도 녹는다.
천천히 녹아서 쭉정이만 남았다가
그 쭉정이마저 흐믈흐믈 녹는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녹이는 잔이 있다.
2014.06.26.
잔 47
똑같은 높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높고
누군가에게는 낮다.
물 한 잔이
목마른 자에겐 구원이고
배부른 자에겐 고통이듯
딱 절반 채워진 잔에서
찬 곳이나 빈 곳을 보는 것은
잔의 것이 아니다.
잔의 어디까지 채워지든
누구는 마신 양을 보고
누구는 남은 양을 본다.
2014.06.27.
잔 48
내가 버린 종이 잔이
메타세콰이어처럼 쌓인다.
나무에서 와서
나무로 돌아가는 사이
잔으로 있다.
내 입술을 스치고 간
오만가지 번뇌가 저리 우거져
출퇴근길 가로수처럼 따라다니며
마침내 돌아가야 할 곳을
화살촉처럼 가리킨다.
마이산에는 부처가 다녀갔다.
하늘 향해 수없이 솟은 돌탑이 그 증거다.
2014.06.27.
잔 49
이빨 나간 잔은
훌륭한 연필꽂이이다.
세상을 가르기만 하는 가위
갈라진 것들을 어떻게든 붙여보려는 딱풀
제 키를 줄일 줄밖에 모르는 4-H연필
떡방아를 찧을 때마다 뾰족한 심사를 내미는 샤프펜
키를 죽이는 대신 속을 비우는 볼펜
새 옷에 가끔 제 본색을 게우는 사인펜
어쩌다 들어와서는 뒤집힐 때까지
바닥에서 먼지와 함께 녹슬어가는 실못까지
이빠진 시린 입속에 모여서
뽑아주기를 기다린다.
아직껏 손잡이가 달린 채
홀로 서지 못하는 것들에게
든든한 언덕바지가 되어주눈,
1990.4.27. 여의도순복음교회동부성전취임기념
잔.
2014.06.27.
잔 50
무심코 놓인 잔을 들이켰다가
기름을 마시고 밤새 설사한 적 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변기 위에 놓일 때마다
어쩌면 이런 잔을 들이키는 우연의 연속이
삶이 아닐까 생각했다.
마시지 않을 수 있는 잔도 있지만
마실 수밖에 없는 잔도 있다.
마시지 않을 수 있는 잔을 결정하는 것은 나지만,
마실 수밖에 없는 잔을 결정하는 것은 나가 아니다.
어쩌면 예수가 마신 잔도
이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실 수밖에 없는 잔을
나 스스로 결정했다는 것........
2014.06.27.
잔 51
잔을 엎으면
산이 된다.
잔이 놓였던 자리의 허공처럼
산들은 시간의 잔이 남기고 떠난 흔적.
한 철을 빙 돌아와서
다시 영겁으로 떠나간다.
사람들이 무시해서 그렇지, 잔은
단 한 번도 똑같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자리에 따라
산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 그 증거다.
잔이 돌아와도 산과 꼭 아귀 물리지 못하는 것은
자리 뜬 잔을 정확히 되돌려놓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산은 시간의 잔이 남긴 허공이다.
오랜 침식을 거쳐 지평선으로 돌아간다.
잔에 담겼던 것들이
마침내 수평선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2014.06.27.
잔 52
도자기로 시를 빚는 시인이 있다.
처음엔 상상력이 도자기 속으로 들어가더니
나중엔 밖으로 나와 칡덩굴처럼 멀리 뻗쳐간다.
불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그릇처럼
생각의 시를 담금질한다.
시가 도자기를 닮다가
마침내 도자기가 된다.
수 틀리면 쨍 하고 깨져 허공만 남는다.
도자기의 속도 밖도 아닌 허공이
시처럼 빛난다.
깨진 도자기처럼 내 잔에도 시가 있다.
모든 것에 시가 빛난다.
그 빛나는 모든 것이 시다.
2014.06.27.
잔 53
유리잔은 빛이 통과하는 것 같지만
유리잔도 통과 못하는 빛이
유리잔을 보여준다.
빛 때문에 보지만
빛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빛 때문에 가려지는 것들이 있다.
그곳이 시의 본적이다.
유리를 통과하지 못하는 빛이
잔을 보여준다.
다 떠나고 남은 자리에서
물거품처럼 떠오르는 시처럼.
2014.06.27.
잔 54
붓글씨 한 자 쓰고
차 한 잔 마시고
다시 한 자 쓰고
또 한 잔 마시네.
쓰다 보니 잔이고
마시다 보니 먹물이어서
잔과 잔 사이로 흘러간
옛 사람들의 예술을 보네.
한 자 쓰고
한 잔 들면
잔과 잔 사이
달이 뜨고 꽃이 피네.
2014.7.5.
잔 55
여자의 잔은 남자
똑바로 선 여자를 기울여
찰랑이던 것이 넘치게 한다.
서로에게 기대어 이쪽 저쪽으로
중독성 알콜을 교환하다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 정지한다.
결혼은
그 기운 잔이 멈추어선 각도.
어느 한 쪽의 바닥이 비울 때까지
다른 한쪽을 흡수하여 구별이 안 되는,
남자의 잔은
여자.
첫댓글 오랜만에 선생님 새로운 작품 자주 만나네요.
정말 오랜만에 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