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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시 100인선
042 번째
강 숙 려 시 선집
피리 부는 당신
강 숙 려
인간과문학사
<서문>
가을 같은 여름 하늘이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밴쿠버의 한나절이다.
꽃향기 속에 묻어 일렁이는 바람이 향기롭다.
안개시인이라 누군가가 불러주었듯이 나는 안개 속을 좋아한다.
안개 속엔 언제나 뜬물 내음이 난다. 향수에 젖게 하는 어머니 내음이다.
따뜻하고 포근한 사랑 내음이다. 그리움의 분신이다.
사랑하므로 살 가치를 느끼는 나는 사랑하기를 좋아한다.
사랑하므로 행복해 지는 나는 사랑하기를 게으르지 않을 것이다.
어서 오라는 하늘의 서신이 올 그날까지 나는 사랑하며 살 것이다.
시가 그려지는 저녁노을을 나는 좋아한다.
황금빛 물드는 석양, 서서히 사라지는 아름다움의 뒤 안에 남는 고적함을,
자연을 노래하고 그리움에 매달린 줄 거미 더불어 이슬을 먹고 안개 속을 걸으며...
시가 무언지도 체 모른 채 나는 쓰지 않고는 못 견딜 참을 수 없는 상실의 아픔을 첫 시집 “그리움은 안개로 뜨고”에서 퍼 부었었다. 이어 “안개의 불”을 내고 잠시 안도의 숨을 쉬며 캐나다라는 먼 이국 불모의 땅에서 제 2의 삶을 시작했다. 마침 박우사에서 영문시를 찾든 중 내게 기회가 와서 모 수녀시인 시와 함께 영문 시로 “곁에 있어도 그리운 우리는” 이 출판이 되었었다. 그 이후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심신이 회복 중이었든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남의 경험을 하는 큰 은혜 속에서 신앙시집 “꽃비가 되어 흐르네”를 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을 나누기로 했다. 하여 그 당시 8천권 이상의 시집이 여러 교회로 나가서 작은 빛이 되기도 했다. 이어 그동안 여러 신문과 사보에 연재 되었든 수필들을 모아 “누군가, 향기 나는 이 새벽을 여는 이는” 수필집이 만들어 졌다.
시를 공부하든 그 시절부터 시조가 좋아 우리 서정의 마음을 담아 써 온 시조들을 모아 “바람결에 스치듯” 정형 시조집이 만들어져 어느 사이 7권의 책들이 상재 되었다.
세월은 절대 거저 가는 것이 아님을 세삼 느끼며 나는 늘 자신에게 되묻곤 했다. 너 자신의 자리를 잘 아느냐? 라고. 나는 시인이고 엄마라는 이 자리. 그리고 하나 더, 나는 주님의 자랑스러운 자녀라는 것 이다.나는 자랑스럽게 살아가리라. 이제 어려웠든 날들은 모두 잊고 바람결에 스치듯 그렇게 한 사나이의 늙어가는 아낙이 되어 사랑 더불어 그렇게 살기로 했다.
상추도 심고 고추도 심고 토마토 몇 그루도 심고 호박 넝쿨도 올리고 울콩도 심어 삼 세끼 보글보글 된장 끓여 오순도순 사랑 버무리며 그냥 살기로 했다.
‘너는 시인이다.’ 조용한 일상을 일깨워 주시는 <인간과 문학>의 유한근교수님의 오랜 사랑이 계셔서 새 힘을 얻는다. 멀리 있어, 조용히 있어, 가만히 있어 무명한 시인이라 잊혀져가는 변방의 시인들에게 희망의 새 소식이 되길 갈망하면서, 인간과 문학의 빛나는 100인 시 선집에 감히 동무하게 해 주신 님께 감사를 드리며, 내 쪽빛 곡간의 먼지를 털고 한 편 한 편 졸 시가 빛이 되어 날아오를 시간을 꿈꾸며 뽑아 심어 "피리 부는 당신" 을 편다.
2015. 여름 밴쿠버 냉리 칸츄리에서.
<차례>
저자 서문
1부 꽃잎이 되어 흐르네
알라딘의 렘프
내 속의 그대
꽃잎이 되어 흐르네
눈물꽃
나 그리고 너
인연
설화로 피어
그대 오시려나
꿈속의 불
꽃잎을 열어
그래도 봄이고 푼,
꿈꾸고 싶다
해후를 위한 기도
2부 곁에 있어도 그리운 우리는
꿈에만 피는 그대
곁에 있어도 그리운 우리는
스미는 듯 사라지는 의미
아쉬움
불이였든 그 태양
가을 서신
내 가슴에 있는 그대
아픔
당신, 사랑한 당신
당신은 가고
가당찮은, 염치없는 나
당신의 그늘
빗속의 해후
어쩌면 잊으랴!
가슴 꽃
나의 주문 나의 염원
피리 부는 당신
3부 언제나 열아홉
봄꿈
언제나 열아홉
꽃비가 되어
선운사 동백
외딴 방
밤의 고리들
Garage Sale에서
군인이 된 아들
선택의 귀로에서
웃음
자식이란
부부란
밀고 당기기
갈대 숲
바람이 되어
갈등과 갈망
연어
파도
4부 정형시(시조)
첫눈
안개의 불
이슬
달이 지네
가을 스켓치
새벽달
석류
님이여
인생의 가을
인생여정
순리 속 걸음
생의 노을을 보며
캐나다, 록키의 한 자락
5부 심지 없이 타는 불
사랑하는 당신 그리고 나
사랑은 별을 만들고
아내라는 이름은
밥이 되어
가을 편지
그리움으로 나는 시를 쓴다
숲속의 하룻밤
오후의 그늘
나무 단풍들고
눈물소리
심지 없이 타는 불
이별의 여운
오, 사랑이여!
정묘년 겨울
코모레이크의 저녁
마른 꿈 내음
바람으로
무제 1
소리가 되어
6부 인생은 홀로 나는 새이다
마음의 거울
바람결에 스치듯
정답 없는 인생
물과 같은 마음으로
유와 무
부정과 긍정의 고독
인생은 홀로 나는 새이다
새로운 삶의 도전
나의 잠언 여섯
내 떠난 자리에
세월은
내 친구 순자
편린의 세월
홀로 남은 그대여
잔인한 4월의 하늘이여!
새벽을 열며
오랜 기도
<시선집>
제 1부 꽃잎이 되어 흐르네
알라딘의 램프
별들이 하나 둘 꿈을 꾸면
내 안의 속삭임도 날아올라요
램프의 밝아지는 불길에
어루만져진 달큰한 내음
별 뜨는 어두움에 깃털을 세워요
- 알라딘의 램프여
아라비안 담요를 펴다오 -
날아날아 꿈속의 그대
별 같이 빛나던 웃음 아직 그곳에 있으려니
내 소녀의 가슴은 이미 그대의 것
날아라 바람처럼
그대의 뜨거운 입맞춤에 미쳐버릴
밤으로 가 다오
하얗게 밝아 오는 새벽이 오기 전에
날아라 날아라 더 깊은 밤으로
그대의 갈퀴 휘날리는 웃음 속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좋을 아득한,
아득한 그 밤으로 날아 가 다오.
내 속의 그대
멀리 있어 더 그리운 가
이토록 가슴 저미는 세월을 셈하며
하얗게 새우는 밤으로 새벽을 맞는다.
여명을 깨우는 저 새소리
가슴 위로 둥둥 떠가는 소리로
봄이었든 그 어느 날도
가을 되어 떨어지고
오고가는 순리 속에 던져두라 하였지만
그래도 목말라 흐려지는 눈시울
그대 아직도 내 속에 사는 가
멀리 두어도 멀리 있지 못하는
내 속의 그대.
꽃잎이 되어 흐르네
어느 햇빛 좋은 날
내 무덤가에 앉아 울 그대
한 손엔 술잔 들고
한 손엔 시집 한 권
흐르는 눈물로
시 한 수 읊겠네.
약속을 어겨서 미안하다면
서로에게 약이 될 눈물인가
바람처럼 서로를 바라보는 강
멀리 하늘이 되어 떠가고
이제 돌아와 보듬고 싶은 가슴
꽃잎이 되어 흐르네.
눈물 꽃
안개 속을 걸어 들어가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오면 아, 나는
한 아름 안개꽃이어라.
눈물 속은 얼마나 슬플까
눈물 밑을 걸으며 세월을 간다.
푸르고 푸른 젊은 밤이 별빛같이 반짝일 때
나는 눈을 뜨고도 향기 나는 꿈을 꾼다.
숨 쉬는 모든 것들을 잠재우고
스스로 늙어갔든 밤은
새벽 별을 탄생시키고야 소멸하지만
다시 태어남의 기쁨으로 소멸 되는
오늘의 그 무엇도
내일이면 잊어져야 한다.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오면 아, 나는
한 아름 안개꽃이어라
아, 눈물이어라.
나 그리고 너
보고파 눈 감으면
언제나 다가와 내 앞에 서던
함박꽃 같은 너의 미소
오늘도 나는
눈물 묻은 그리움으로
너를 붙들고
먼 태고의 울음 듣는다.
기다리다 잠들면
꿈으로나 만나려나
해지고 달뜨면 별이 되어 보이려나
행여 발길 돌려 멀리 설까
애절히는 가슴은 주야장천(晝夜長川) 눈물이라
불을 밝혀야지
영원을 꿈꾸든 빈자리엔
들꽃만 외롭다.
인연
풀뿌리 같은 사연들의 세월이었지요.
어디에서 연유 된 인연이었습니까?
행여 우리
소매라도 스쳤든 인연이었습니까?
내 그대 몰라라
소리 죽여 울었든 까닭도
애절한 인연이었습니까?
아직도 아득한 그대 눈빛
전설의 조각처럼
등 뒤에서 울고
터질 듯 아파하는
그대 가슴에
내 뜨거운 손 얹었다 해도
그것도
스쳐가야 할 인연이었다고
말해야 하나요.
설화로 피어
안개발로
주렴 걷으시고 오시옵니까?
무지개 띄운 사연
어찌하라 하시옵니까?
오동잎 눈물로 지는 밤
한줌 재 되라 하시옵니까?
돌아선 발길
동짓달 바람이 차갑고
설레이던 가슴엔 찬 서리 심어
하얗게 설화로 피어
그대 발길 붙들라 신지요.
그대 오시려나
문마다 열어 놓고
행여
그대 오시나
소리마다 귀 기우려
행여
그대 어디 있나
새 소리 바람 소리
모두 떠가고
오늘도 해는 기우러
노을만 타누나.
꿈속의 불
꿈속에서 타는 불은 뜨겁지 않아
온 몸을 태우는 화염 속에서도
노곤한 졸음으로 꿈을 꾸어요.
붙들 수 없어
떠날 수도 없는
그대는 꿈으로 와서
한 세상 살자고 하네요.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오가는 그대 곁에
고단한 나의 울음은
하룻밤 피는 달맞이 꽃이라도
되고 싶어요.
꽃잎을 열어
그것은
가슴에서 들리는 개울 소리로
언덕을 넘어 작은 설레임으로 온다
먼먼 고향 보리밭이랑 사이로
살랑대던 작은 솔바람으로
간지럼처럼 볼을 부비며 온다
그것은
투명한 작은 꽃잎으로 와서
새벽별로 뜨고
애잔한 마음은 유리잔
이제 등 뒤에 다가선 체온은
불처럼 뜨겁고
향기로운 바람은
뜨거운 열기로 꽃잎을 열어
한 점 구름으로 하늘로 올라
달이 되고 별이 되어
아침 이슬로 내려앉는다.
그래도 봄이고 푼,
빠알갛게 타 올라 두근두근한 계절
향기로워라 꽃물 들 것 네
내 나이 열 살만 내려 준다면
한번쯤 해 보고 싶은 사랑놀이
그 짓은 언제나 아름다운 일
내 나이 스무 살만 내려준다면
꼭 한번 다시 해 보고 싶은 일도 있는데
오메, 죽 것 네.
꽃잎 앞에서도 부끄럼 타던 시절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기도 아깝것네
일장춘몽이라니 나그네 인생길에
그만하면 복인 것을 아쉬워 말거라
여복하면 오늘 떠난 이도 있을랴
네겐 꿈꾸는 내일도 있잖은가
그래도 봄이고 푼,
가을 단풍이 곱다.
꿈꾸고 싶다
꿈이고 싶다
돌이키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잊지 못해 가슴 아픔도 모두
한갓 꿈이었으면 싶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가슴 벅차고 가슴 아픈 것들 모두
이슬처럼 떨어뜨리고 싶다
그렇게 잊고 싶다
또 다시 밤은 가고
새로운 길에서
어깨 맞추며 길 떠나고 싶다
내가 염원하는 모든 것들이
줄지어 서는 그 언덕을 넘어
콩 심고 텃밭 일구고
뻐꾸기 울음 울어 졸음 기우는 해거름
그대 무릎베게에 단잠 드는 날을
꿈꾸고 싶다.
해후를 위한 기도
어둠 속에서도 파도는 부서지고
겨울 바다의 고독이 전설처럼 내려앉는
동백섬의 밤
그리운 것들은 끼리끼리 닮아 가고
기약 없는 해후의 격정을 나누며
눈물 없이도 이별은 온다.
그렇게 살아가는 어느 날
거리의 인파처럼 밀리면서 또
우리는 만나려나
해 묵은 사진첩 속의 얼굴처럼 웃는 모습
그래도 잊지 못해 그리워하려나
어둠 속에서도 파도는 부서지고
지나칠 운명이라면 그렇게라도 보내야지
눈물 없이도 울 수 있는
가슴이 되어야 한다.
제2부 곁에 있어도 그리운 우리는
꿈에만 피는 그대
잠에선 꿈으로 만나
고운 숨결 나누며
그대 눈 속에 내 마음 심고
그대 저린 가슴에 내 울음 실어
안으로 앓아눕는 그대에게로 가서
꽃이 되고 싶음이여
붙들 수 없어 떠날 수도 없는 그대
긴 한숨으로 남아
달뜨면 달이 되고 별 뜨면 별이 되어
다툼도 허물도 미움마저도
그리움으로 뜨게 하는 그대여
이젠, 고단한 나의 울음은
하늘로 올라 밤이슬에 젖고
새벽달의 그늘에서
몸져눕는다.
곁에 있어도 그리운 우리는
산 갈피마다 어둠이 내리고
저희들 끼리끼리 휘돌아 흐르는
개울물소리
가만히 있음을 견디지 못해하면서도
멀리 떠남을 또한 두려워한 우리
곁에 있어도 그리운 우리는
눈빛으로만 사랑을 그릴 뿐
목마른 나무는 긴 그림자만 드리우며
멀어져가는 시간의 꼭지점을 찾지 못하네
넘어야할 벽은 슬픔에 젖어있고
곁에 있어도 그리운 우리는
휘돌아 흐르는 개울물 따라 오늘도
정착 없는 길을 떠나야 하나요.
스미는 듯 사라지는 의미
바람이 이는 듯
물이랑 넘어
가슴으로 스미는
왔든 듯 사라지는
애달픈 그림자
있는 듯 없는
잡히지 않는 마음아
돌라선 듯 만 듯 떠나시었나!
오늘도 해는 기울고
서산엔 노을만 잠잠.
아쉬움
짧은 밤 쌓은 정이
만리를 넘는데
눈뜨면 사라질 안개로 구나
목마른 가슴은
천리를 뛰건만
안개 걷힌 하늘은 지척입니다.
불이었든 그 태양
황홀한 숨 가쁨
그 리듬의 빛깔들
타오르는 순간 속
오색 무지개 언덕
죽어도 좋겠다
그 느낌의
밤을
눈 감으면 보인다
불이었든 그 태양.
.가을 서신
하늘을 담은 강물이
제 혼자 흐르다가
이리도 고운 단풍 물들었다
산삐알마다 비쳐대는 그리움
그저 불붙는 사랑에 젖고 마네
구절초 향기로워 가을을 노래하던
억새풀마저 하얗게 가슴이 저는
시월상달 보름 밤
사위어 가는 풀벌레 소리
우리 그리움 하나
보듬어 비벼대는 억새사이로
모락모락 흔들리다 피어오르는
황금 노을빛 사랑 같은 것
제 혼자 서러움에 겨운 세월
떠 간다 둥둥
가을 서신 하나 들고.
내 가슴에 있는 그대
마음 문을 잠그고 눈 감고 앉으면
어느새 빗장 열고 들어서는
그대 환영
멀리 있어 그립고 그리워서 외로운
우린 슬픈 기린들
그리워서 아픔은
가슴 태우는 화염으로
나는 오금이 저리고
그대 잊으려 길을 떠나고
그대 지우려 하늘을 보지만
그런 나의 가슴에 더욱 파고드는
당신의 슬픈 눈빛
저린 나의 가슴에 오늘도
한 마리 기린으로
길게 눕는 그대.
아픔
사그락 거리며
잎새에 떨어지는 빗소리
팔을 들어 너의 이파리를 만지면
언제나
내 속살까지 적셔져요.
심장 밑바닥에서 하얗게 흐르는 아픔
빗소리 따라 흘러오는
간절한 저 내음
먹구름 한 점에
마음을 실어 보내고
멀리서 산비둘기 울음 들어요.
당신, 사랑한 당신
(병실에서)
오늘은 창밖에 눈이 내려요.
당신과 나의 그림을 그리려 새하얀 눈이 내려요.
가만히 내 손을 잡아오는 당신은
그것으로 모두를 답하고 있네요.
머잖아 훨훨 당신은 가고 눈물의 나는
이처럼 눈 내리는 창가에 기대서서 울고 있겠죠.
그날을 내 어이 감당할지요.
차라리 이대로 돌이 될까요.
아쉬운 당신 가슴에서 울 수 있을 날이
손으로 꼽아 얼마나 남았을까?
그래도 자라주는 당신의 수염을 깎으며
이 수염처럼 당신의 날도 자라나 준다면
아, 얼마나 고마울까요!
날마다 줄어가는 당신의 시간처럼
내 피도 조금씩 말라 갑니다.
두 눈 꼭 감고 뜨지 못해도
나의 전부를 아는 당신,
사랑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당신을 붙들고
정말 이대로 보낼 수 없어
까무러치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어요.
라이락이 지면 아카시아 향기 밀려 올 텐데
충주호 월척이라도 한번 올리고 가야죠.
여보, 눈을 떠 나를 봐요. 눈을 떠 봐요.
오늘도 눈물의 기도를 올리옵니다.
(1993년 슬픈 오월. 병실에서)
당신은 가고
당신은 가고
눈물이 비가 되어
세상엔 아무 것도 없었다.
어둠과 빗소리...
누가 그었나?
당신과 나 사이에
이 굵은 줄을
인연의 엷은 줄을 지나
이승과 저승의 굵은 줄을 넘어
당신은 바람처럼 떠나고
슬픔은 오직 남은 자의 몫으로
내 몸을 감아요.
육신의 고통에서 벗으나
안식을 취하는 당신에게
내 육신의 눈물을 보이지 않을께요
다시 만날 때까지
그대여 안녕!
내 사랑이여 안녕!
가당찮은, 염치없는 나
무심코 들어 올린 주민등록 등본
어느새 호주 난엔 아들이 올려있고
그대는 사망했다 적혀있었네
당신은 죽어 사망 난에 있고
나는 살아 그것을 인정하라 하네
세상에 이런 일이 해 아래 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인데
이토록 억울하고 서러운 일이
아직도 이해가 어려운 나는
때 되면 밥 먹어야 하고 잠도 자는 일이
가당찮은 이 일이
내가 하는 이 일이 맞는 일인지
염치없는 나에게 묻고 또 묻는다.
눈물로 피어난 해바라기 한 그루
당신 곁에 심어요.
당신의 그늘
목이 마르다
당신의 그늘이 그리울 땐
언제나
주체할 수 없는 당신 자리로
가슴이 조여 오면
산으로 강으로 헤매는 마음
실큰 울어도 좋을 구실이 되게
피라도 철철 흘리고 싶다
터지도록 부픈 속앓이를
기도로 삭이고 보면
풀어진 동공엔 하늘이 떠가고
아 나는 목이 마르다
내 남은 인생의 절반으로
당신의 하루를 살 수 있다면
기꺼이 하리니,
기꺼이 하리라.
아, 그리운 나의 사람아.
빗속의 해후
일천구백구십삼 년 오월 열이틀 새벽
비에 젖은 모든 것들이 잿빛으로 변하고
하늘도 강물도 통곡으로 변하던 시간
이십오 년의 파노라마가
그의 희미한 정신아래 지나가고
이제 그만 가야할 것이라 초점 없는 눈이
나를 찾던 아득한 시간
아직도 나는 묻고 싶다
이승의 강을 건너 저승의 문을 여는 것이
꼭 그가 해야만 했든 일이었든가
그렇게 그는 가고 세월도 가고
창밖에 내리는 비
목련꽃송이 후두둑 떨어지는 저녁
똑, 똑, 똑,
창을 두들기는 낯익은 빗소리.
어쩌면 잊어랴
산만한 머릿속
진정할 수 없는 이 아픔을,
인격이 무엇이랴
교양이 무엇이랴
너 다운 것이 무엇이랴!
벌떡 일어서서
온 방을 서성이구나
단 한번만이라도 그대,
아, 보고파라.
보고파라.
가슴 꽃
세상에는 희한한 꽃들도 지천인데
하필 그 꽃이냐고 멀리
딸아이가 와서 서럽게 울다 갔다
가을들녘 도란도란 시냇물이 흘러가는 모롱이에
저무는 노을 더불어 연보라 작은 꽃술을 열고
기다린 듯 눈물인 듯 고즈녘이 서 있는
그를 네가 만났더냐
슬프디 슬픈 목줄에서 쓴 물이 오르던 날을
네가 느껴 보았더냐
세상이 주는 것들의 허무를 감당치 못하여
여러 날을 퉁퉁 울어 보았더냐
어여쁜 꽃술로 나를 위로하던 꽃
차가워 더욱 뜨거운 열정으로 피어나던 꽃
보랏빛 향기로 감싸주던
내 가슴 가득한 그 이름의 꽃
구절초!
나의 주문(呪文) 나의 염원(念願)
햇빛 쏟아지는 벌판에서
나비처럼 날아오는
그를 만날 수는 없을까
가랑비 내리는 오후
산모롱이를 돌아 가만히 다가오는
그를 볼 수는 없을까
뒤척이다 잠이든 별빛 지는 밤
꿈으로라도 그대 손잡고 싶음이여
날마다 염원하는 나의 소리를
그는 어디에서 듣고 있을까
그냥 그렇게 마주치는 눈빛으로도
가슴 저미는 날을 갖고 싶다
이명 든 두 귀는 온 밤을 헤매고
어둠도 지쳐 새벽달의 등을 타고 떠난
시간은 바람처럼 휘돌아
낮선 침묵의 뚜껑 위에 걸터앉는다.
피리 부는 당신
밤바람 타고 들려오는 저 푸른 피리소리
죽어서도 살아남아 필릴리 필릴리 내 가슴에 당신
오늘도 내 그대 그리워 어쩌나 어쩌나
흔들리는 촛불마저 꺼진지 오래
타다 남은 시간 앞에 필릴리 필릴리
가슴을 적시네
퍼렇게 멍이 드네.
제 3부 언제나 열아홉
봄꿈
녹색의 비가 대지를 푸르게 칠하면
바람 속에 봄이 묻어오고
수선화 꽃술이 벙그는 소리
산수유 향기 감겨 내리고
계곡의 물소리 음계도 달라진다
하늘빛 고와 햇살 눈부신 창가에 서면
언제나 처럼 달려와 안기는
민들레 개나리 진달래 제비꽃
은빛 비늘을 털어 도란거리든 시냇물
아 고웁던 유년의 내 친구야
지금쯤 어디 메서 이 아침 봄꿈을 꾸는 가
채워지길 기다리는 그릇처럼
봄 가고 여름 가고 가을 겨울을 보내면서
언제나 봄이 오면 또 다시 새로운 꿈을 꾼다
바람 속에서 봄은 오고
꽃잎 벙그는 소솔한 소리
꽃술 흔들리는 향기에 취하여
내 마음 속 하얀 새들이 꽃잎을 먹고 있다
노랑노랑 꿈을 꾸면서.
언제나 열아홉
그 때는
사진 찍는데 마다 얼굴을 내밀었지
이제는 찍자 찍자해도 멀리서
웃기만 한다네
어느 날인가
생소한 나이든 한 여인이
사진 속에서 내 눈과 마주쳤을 때
다시는 사진 같은 것 찍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지
가슴이 썰렁한 게 그렇게
서운 할 수가 없더라고
딸아이의 싱그러운 젊음이
보기도 얼마나 아름다운 가
그것이 내 것이었더니
어느새 그리움만 노오랗게 피어오르고
가슴에 차오르는 회환이
뜨거운 눈물로 떨어지구나
그러나 마음은 열아홉
그 시절 꽃들이 노랑노랑 피누나.
꽃비가 되어
목련꽃 후루루 떨어지는
일몰하는 강가에서
꽃피든 그 시절의 향기에 젖는다.
솔바람 차 한 모금 음미하든 저문 날
눈물 없이도 울어대는 가슴을 기대며
떨리는 손끝으로 찍어내는 아픔은
서로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
상처로 남으리라
꽃 같이 좋았든 날의 기도도
꽃비가 되어 흘러흘러
가 버린 오후의 그늘
그 날은 다시 오지 않으리
결코 오지 않으리
푸르르 슬픈 안개는 넘치는 물결로
아득한 섬 하나 띄우리라
눈물만큼 아픈
일몰의 순간 같은.
선운사 동백
솔바람이 분다
나는 솔바람을 그리움의 시작이라 했고
그는 향수의 끝이라 했다
나는 늘 시작하고 싶어 그리워한다
우리 모두 그리움의 동산으로 올라
눈물이 나도록 그리운 것을
그리워하자
밤비 내리는 저녁 등불이 되어
오소소 추운 그리운 것들 모여
솔바람 차 한 잔 나누든 눈빛으로
떠나 볼거나
지금 쯤 선운사 동백은
붉게 붉게 떨어지고 있겠지
후두둑 후두둑 지고 있겠지.
외딴 방
소외된 자들이 모여 사는 가
그리운 것들을 잊지 못해 애절히는
밤의 소리들이 돌아 나가고
아직도 잠은 먼데
창호지 문설주 넘어 빠져나가는
새하얀 한숨
외딴 방
깜박이는 등불아래
멀리 개 짖는 소리
소리도 빛깔도 없는
먼 방
소외된 자들은 스스로
빛깔도 소리도 낼 수 없으므로
영혼을 바쳐
무채색의 그리움을 그려나간다.
밤의 고리들
허물어져 가는
기억의 덮개를 열면
안경 너머 빠져나가는
저 조각의 추억들
하얗게 지새운 밤의 고리들
돌아와 눕는 눈앞의 가슴이여
모질지 못해 가난한 마음들은
언제나 뒷곁에서 잠들고
스물거리는 햇살은
창틀에서 기웃거린다
이제 동짓달 기나긴 밤은
아린 가슴을 안고 눕고
길고 긴 여정의
열두세 무명 베틀에 걸린
눈물로 짜는 열두 폭 한숨이여.
Garage Sale (가라지 쎄일)에서
진풍경이다
버리는 쪽에선 하찮은 것들이
참으로 오늘 내 것이 되구나
어제 소중했든 것들도
오늘 한낱 잡동사니로
내게서 떠나보내면
새로운 내일 너에겐
소중한 가슴이 되는 일
인생은 쳇바퀴 돌듯 돌아가며
나누어 살아지니
크다 작다 아옹다옹도
도토리 키 재듯
그게 그거로구나.
군인이 된 아들
나라의 부름이라 했다.
국민의 의무라 했다.
아들은 씩씩하고 건강하게
자신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었다.
첫 번째 편지에
밤의 생각과 아침의 느낌이 또 다른
힘든 여정을 눈물처럼 말하여
누이를 울리고 우리를 울렸다.
다음 편지에
필사(必死)의 인내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더니
최선(最善)이라는 이름으로 기쁨 같은
사막의 여린 꽃이 피었다 했다.
인생은 인내(忍耐)의 꽃이라는 것을 아들은 알아가며
조금씩 사나이가 되어 갈 것이다.
길고긴 인내의 터널을 지나 남자로 돌아와서
살아있는 날까지 인고(忍苦)의 계절에 피웠든 꽃을
훈장(勳章)처럼 회고하며 삶의 길에 동반하리라.
여느 대한의 사나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게 ...
선택(選擇)의 귀로(歸路)에서
(아들에게)
인생은 늘
선택의 귀로에서부터 시작하게 된다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고뇌하며
승부수를 갖게 된다
자아가 너무 강하다보면
남도 다치고 나도 부러져 상처를 받게 되는 것
아들아
때론 젊음을 고뇌하며 길을 잃기도 하며
힘써 찾아내는 것도 멋진 일이다
약해지고 낮아지는데서 높아지고 강해지는
삶의 자세를 배워가는 도전(挑戰)의 길을 걷거라
하루를 천년같이
하얗게 밤을 지새운다하더라도
선택의 길을 열어갈 수만 있다면
너는 도전할 일이다
그래서 밤이 없다면 아침도 없듯이
오늘이 있어야 내일이 있고
어제가 있어서 오늘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날이 되거라
만약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이 있다면
신은 너에게
내일을 감추실까 두려워하길 바란다.
웃음
묘약이다
설한폭풍도 살랑이게 하고
엄동설한도 녹여
고운 봄 깃이 되게 한다.
뱃속에서 솟아오르는 기운은
목구멍을 간질이며
옆구리를 흔들며 쫓아 나온다.
그 웃음의 빛깔은
입술을 열어 소리 내게 하고
초승달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한다.
세상을 조금만 보면
많은 웃음을 얻으리.
초생달 눈으로 묘약을 마시며
고운 노래처럼 살고자 하여라.
자식이란
애물단지라
어른 된 지금이나 어린 그 시절이나
부모 가슴엔 큰 못이라
무자식 상팔자란 말 오죽하면 나왔을까
앉으나 서나 염려라
내 속에서 나옴인가
웬 욕심인가
부모마음 자식이 어찌 알랴
지 부모 되어 그 마음 알랴마는
그때는 또 제 마음이라
인생은 쳇바퀴 돌 듯 돌아가며
제 생각만 하는구나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주고주고 퍼 주며
그저
살아가는 일.
부부란
밉다 곱다 아웅 되며 정은 묻어나고
싫다 좋다 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들고 보면
한평생 옷고름 마냥 거듭 매어가며
달려 있는 게 부부 아닌 가
그렇게도 좋든 날엔 입으로도 나누고는
심사가 뒤틀린 날엔 무 자르듯
싹뚝 자르고 싶은 무정함이라니
사람처럼 이기적이고 간사한 동물이
또 어디 있을 라고 그러니
자꾸자꾸 수양하고 말씀 속에 묻혀
살아야 한다 않는 가
천년을 함께 가도 싫지 않을 내 호흡이 되고
너 피가 되어 뜨거운 손 꼭 잡고 초원을 걷자
훨훨 너는 나비 나는 꽃
그렇게 그렇게 이 한 세상
덩더꿍 덩더꿍 살아가는 일.
밀고 당기기
여자란 늘 모자라서 (혹은 지나쳐서)
응석으로 시작하여 투정으로 꼭 한바탕
불꽃을 튀기고 보면 막막한 게
저 양반 모습이 좁쌀만큼이나 작아 보이고
마냥 슬픔이 모여 가슴이 저리다
서러워서 울고 구겨져서 울고
눈퉁이 팅팅 붓게 울고 보면
저 곰탱이 양반 띵해져 있는데
오늘밤 안으로 풀어야 하리니
눈물 섞어 안기고 보면
토닥이는 넓고 큰 손등이 태산만해져
언제 좁쌀이었나 싶게 따듯하다
‘분을 품고 침상에 들지 말라’ 가슴에 주신
이 큰 은혜의 말씀 앞에
부끄럽지 않게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하리니
날마다 풀어가는 착한 숙제가 크다.
*밀고 당기기; 내가 만든 단어. 부부싸움
갈대 숲
지금쯤 갈대들
바람들 섞어 서걱서걱
울음 울것다.
청명 하늘엔 구름 둥실 떠가고
바람 깃든 갈대 숲 서걱서걱
울음 울것다.
누가 와서 함께 어깨 곁들여도
마른풀 내음 목에 감기고
버석버석 말라가는
가을 대궁들
지금쯤 갈대들
바람들 함께 섞어 서걱서걱
울음 울것다.
바람이 되어
바람처럼 그렇게 흘러간 오후의 그늘에서
눈이 부시도록 또한 그렇게 울어대든 하늘자락에
차마 붙들지 못해 잡지도 못한
차가운 손
나는 말하고 싶었다
다만 밖으로 나온 소리가
의미가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 여름날은 가고
누군가 있어 그 소리의 의미를 알아지는 날
한 움큼의 눈물 같은 것 뜨겁게 뿌리며
여기 이렇게 나는 설 것이다
돌이키고 싶지 않은 것들
모두 지우리라
바람 한 점 고요한 수평을 흔드는 일 쯤
더러는 지나가고 더러는 흘러 보내리라
세월이 말해주는 지혜를 따라
어깨에 스치는 바람이 되어
그렇게 흘러가리라.
갈등과 갈망
어쩔거나 시방 울렁이는
뼈 속까지 저려오는 저 울음의 속 까닭을
나는 정녕 몰라라 하여야 하나
때론 반짝이며 혹은 젖어오든
그 눈물 같은 웃음 뒤에 휘감기든
휘안한 방울 빛 사연을
어쩔거나 시방 이 가슴으로
찢어질 듯 절규의 소리 받아야 하나
사랑은 정녕 이렇게 보내야 하나
뚝뚝 푸른 피가 흘러내리는 저녁
세월은 시간을 옮겨놓고
절규의 사연도 가져가려나
밤은 가고 또 다시 새벽은 오려나
세월이 약이 되어 흘러간 오후의 그늘에서
우리는 은빛 노을이 되어
온유한 미소 속에 서로를 보아야 하리
그것이 사랑이기에.
연 어
긴 여로로
열려져 있는 생을 위하여
떠나야 한다.
필사(必死)의 조건이 무언지 모른 체
본능의 회귀(回歸)로 순회하는 삶이
그의 몫이다.
탄생을 위하여 축복의 파도를 타고
세레나데 혹은 장송곡의 연미복을 걸치고
소금보다 더 짠 눈물을 마시며
혼신의 힘으로 솟구쳐 돌아와야 한다.
미끄러지듯 흘러내려가든
그 연가(戀歌)의 골목
이제 돌아와 눕는 피곤의 세월
새로운 탄생을 위하여
필사의 회귀로 생을 엮는
영원히 불리 울 아득한 그 이름
연어!
파도
칠흑 어둠 속에서도 몰려와
부서지는 몸부림으로 달래야 하는 그는
천의 얼굴로 떠오르는 파도
그러나 그는
바다를 떠나지 못한다
성급한 물이
결을 다투어 비켜가 쓰러지고
충돌하는 격랑 속에서 나누어지는 숨소리들
덧없이 소멸되고 다시 일어서는 몸부림으로
그는 생을 엮는다
밤바다 별이 내려와 몸을 담그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없어지지 않는 무대 뒤로 잠시 사라질 뿐
그는 결코 소멸될 수 없는 얼굴로
부서지며 또 일어선다
그 불멸의 이름
파도!
제 4부 정형시(시조) 첫눈 외 12편
첫눈
푸르고 푸른
내 처녀의 무인지대
붉기 위하여 더욱 희여 진
열정의 꽃이다
한 방울 잉혈芿血을 뿌려
황홀히 눕고 싶다.
안개의 불
머무는 빛 길어 잠 못 드는
안개의 불
돌아 선 그림자
알 듯 말 듯 그리워
있지도
없지도 않는
빈 것 같은 서러움.
이 슬
고요한 하늘이
안으로만 흘러 흘러
떨리는 순간의 고백
한 점 구슬로 짐은
초연히 버림으로 얻는
내일의 열매라.
달이 지네
달빛을 앉히고 고이 접은 하얀 손
어디서 비오리 소리 눈물처럼 아린 밤
제 마음
이기지 못해
허공으로 달이 지네.
가을 스켓치
낙엽으로 왔다간 가을날의 실루엣
오솔길 길목에서 나누든
한 편의 시정
첫사랑
그림 같이 고웁던
울렁이든 그 가을.
새벽 달
한 움큼 뜨거움을 토해내고
닻을 내린다
가슴에 충만했든 눈앞의 의미
구름 속
안 보는 듯 다
알고 가는 새벽 달.
석 류
알알이 울음 울어 속으로만 차 오른
낮달의 하소인가 밤으로도 모자라
툭, 터져 나오는 저 분홍빛 하소연.
천년이 멀었겠나 만년이 더뎠겠나
풍한사철 산이 깎여 바다로 변하여도
이 마음 보듬어 가질 님 향한 속내여.
님이여
늦은 밤 풍경소리 님이 신가 기우리면
오소소 바람결에 봉창만 흔들리오
보선 발 그냥 내려서
맞고 싶은 님이여.
인생의 가을
빠알갛게 가을이 타는 산삐알 곁에
가까스로 함께 타는
저무는 황혼
하그리 서러운 가을
옷섶 가득 물들다.
인생여정
모질지 못해 가난한 마음
뒤꼍에서 잠들고
길고 긴
동짓달 밤을 안고 눕는 여정
열두세 무명 베틀에 건
눈물로 짠 열두 폭 한숨.
순리 속 걸음
꽃 지네
꽃이 지네
그 곱든 꽃 지네
내 인생 좋았든 봄날도 멀리 서고
그대여 웃고 바라 볼
우리 날은 얼말까.
여름 날 꽃 피어
가을 날 열매 맺고
바쁘다 힘들다 휘파람 불든 날도
이제는 멀리 아득한
그림 속 풍경 같네.
내 그리하였듯이
내 아이 젊은 날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인생길 그리하리
자연의 순리 속 진리
새겨가며 걷겠네.
생의 노을을 보며
아이들 자라서
웃음처럼 떠나고
인생의 저녁이 소롯히 젖어와
불붙듯
타오르든 열정도
지나간 옛 그림자.
저기 저
푸른 잎새
햇살에 반짝이고
그 좋든 시절도 한갓
저녁처럼 밀리어 오네
오, 나의
달빛 같은 내음도
세월 속에 묻어날까.
캐나다, 록키의 한 자락
천상의 기운을 내 품는 심오한 안개 속
치솟는 날개로 굽이치는 광활한 물소리
거목은
태고의 전설인 냥
하늘 향해 치솟다.
만고의 아름다움 오늘 여기 펼쳤구나
천만년 옥을 갈아 빙하에 풀었는 가
억 고의
꿈을 휘 젖는
만년설 옥색 물결
겹겹이 기묘괴암 구름도 놀라 머물고
장군의 말굽소리 쏟아지는 소용돌이
휘 감겨
파묻히고 품
다 젖도록 발이 묵히네.
제 5부 심지 없이 타는 불
사랑하는 당신 그리고 나
어느 날
외로운 들꽃이 되어 홀로
넓고도 넓은 들판에 서 보았는가?
어느 것 하나
두렵지 않고 서럽지 않은 것 있든 가
그 들판을 지나
이제 외롭지 않아도 좋을
그대 와서 내 곁에 섰노니
천년을 향기롭게 아끼며 살아야 하리라
따스한 숨소리 곁에 있어
문득 잠든 그대 얼굴 보노니
내 천년을 함께 업고 누운 그대여
이 한 세상 마지막을 불태우려 우린 만났는 가
그대 볼에 뜨거운 눈물 섞어 부비노니
우리 이 세상 작은 허물일랑 덮어주고 안아주며
하늘의 서신 오는 그 날까지
한 그림자 되어 살 부비며 살아야 하리라
밝아 오는 동녘에
향기로워 기쁨이 되는 날이 되라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사랑은 별을 만들고
간밤엔 늦도록 사랑을 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별이 뜨고 지는
아름다움을 보았네.
쏟아져 나온 별들은
소리가 되어 날아오르고
불이 되었네
나는 비로소 알았네
별은 어디에 숨겨졌다가 황홀히 뜨는 지를
사랑은 별을 만들고
어둠을 밝히는 등대가 되는 것을
하늘에 계신 큰 님은
사랑하여 별을 만들라 하늘을 채우라
짝을 주시고 나누게 하셨네
별을 뜨게 하는 사랑을 주신님에게
감사하는 오늘이라네.
아내라는 이름은
얼마나 아름다운 가
아내라는 이름은
얼마나 신의(信義)로운 가
집사람이란 이름은
그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그대들이여
오만하지 말라 겸손하라
오직 사랑하라
내 그 이름으로 불리어 살다가
그대 위해 죽으리라
그리하여 영원히 살리라.
밥이 되어
밥이고 싶다
‘누군 내 밥이다’ 라고 말하지만
또한 그러면 어떠랴
작아지고 작아져
그대 밥이 되어 가물가물 한 세상 살고 싶다
기꺼이 그대의 밥이 되어 기쁨으로 살겠다
나는 그대의 밥이 되고
그댄 나의 살이 되어
가물가물 한 세상 살았음 싶다.
가을 편지
가을이 오면
늘 상 마음에 뱅뱅 도는 것
서넛 있지
그 가을에 날아 온
첫사랑의 편지가 그러하고
오솔길 길목에서 마주 섰든
가슴 설레임이 그러하지
그 가을이 또 오면
내 사추기는 숨겨졌든 그리움으로
길 떠나게 한다
하늘을 닮은 청아한 수면 위에
낙엽 몇 닢 떨어지면
눈물 주루루 뿌리고서야 겨우
돌아와 서는 자리엔
가을 고추잠자리 낮게 날고 있다.
그리움으로 나는 詩를 쓴다
어떤 여인은
일생 사랑 시만 쓰는데
나는 늘 그리움으로 짚은 녹음처럼
세상 모든 것에 그리움의 동산을 꿈꾸며
그리워 시를 쓴다
어둠 속 모든 문 닫혀있을지라도
내 마음에 작은 창하나 열어
소망의 날개에 반짝이는 열정에
그대와 나의 날에 나의 가슴은
모든 그리움으로 타 오른다
무지개의 날개처럼 내 그리움의 날개는
노래가되어 때론 파도를 타고 때론 바람을 타고
구름 꼭대기에 올라 비로 내린다
흘러흘러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어
파도를 탄다
오늘은 어디 메서 무엇을 만나려나
나비가 되어 꽃으로 피고 새가 되어 멀리
하늘이 되고 비상의 날개에서 꿈을 꾼다
아 그리운 모든 것들이여
나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사랑에 빠지게 하고
춤추게 하는 그리움의 은혜는
풀잎 색깔의 풀빛 마음인 것을.
숲속의 하룻밤
오리나무 떡갈나무 오소리 나무들
어둠을 거슬러 하늘로 오르고
산모롱이에 걸린 그믐달 그림자
누렁이가 짖어대는 하늘엔
몇 개의 별이 떠오른다.
군불지피는 나무 둥구리 타는 소리
문지방을 넘어오는 그으름 내음
뒷곁을 돌아나가는 솔바람의 두런거리는 소리들
어디 하나 부딪칠 것 없는 스산스런 고요가 내리고
멀리서 가까이서 가랑잎들의 사그락거림에
어둠이 깊을수록 귀가 선다
으스스 무서움이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창호지 문구멍을 휘돌아 나가고
산속의 졸음이 깃드는 시간
몸을 털며 날아오르는
한 줌의 마음
한 짐 지고 들어온 세상 짐이
소리 없이 벗어지는 숲속의 하룻밤.
<1993. 한맥문학 등단 시 >
오후의 그늘
낙수물 소리 들으며
노곤히 빠져드는 잠 속에서
행복이란 이름으로 꿈을 꾼다
슬픔은 슬픔끼리
기쁨은 기쁨끼리
저희들 입맛끼리 모여 사는 고을엔
아침 햇살부터 다르게 내린다
시간의 곁으로 흐르는 물빛 속
출렁이는 가슴으론 셈 할 수 없는 아픔
그것의 바닥엔 끈끈한 욕망의 자국
보내자 보내자 하면서도
아직도 붙들고 있는 욕망의 고리들
슬픈 눈물처럼 기웃거리는
가난한 마음들이 모여 사는
오후의 그늘이여!
나무 단풍들고
모든 타는 것들 단풍이 된다
불타는 마음 붉게 붉게
이리도 불타는 서러움의 노래
불타는 것들 그리운 것들
결코 들어 낸 저 속내
지는 것은 슬퍼라
지는 것은 외로워라
울음 울것다
울음 울것다
태우고 태우다 한 잎 남기지 않고
모두 털어 내리라. 이제
묵묵한 동면으로 하늘 향해 서리라
잉잉 바람 함께 울며 보낼
인고의 세월
새로움으로 거듭나는 저 잎새
파아랗게 돋아라
파아랗게 돋아라.
눈물소리
눈물보다 더 순수한 것이 또 있을까?
너무 기뻐도 너무 슬퍼도
먼저 나오는 게 눈물이고 보면
사람의 가슴에서 제일 순수한 것이
이 눈물 나는 일이 아니겠는 가
만남도 이별도 눈물이라는
순백의 아름다움을 수놓는
감정과 이성의 갈림길
그래도 눈물을 앞세우든 때가
얼마나 순수했던 가
내 눈물 앞에선 언제나
꽃잎이든 그 사람도 가고
이제는 그 눈물마저 말라가니
사물을 우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야 마는
야박한 세월 앞에 서고 보면
이젠 회한의 눈물이 흘러내리는구나.
심지 없이 타는 불
내가 소원하고 있는 것들조차 빛이 바래고
내가 가지고 있든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진
어느 날 경계선도 없이 찾아오는
인생의 마지막을 누가 물어서 선을 그으리.
때로는 폐허처럼 황폐하고 삭막한 인생길에서
혹은, 고통보다 더 무서운 그리움의 형벌 속에서
벌거벗은 채
이거르진 양철 같은 긴 인생의 터널을 지나
쇠잔해진 육신 그 그늘
오늘도 나는 심지 없이 타는 불꽃으로
영원을 태우고 있구나.
이별의 여운
불같은 사랑이라 할지라도
사랑(愛) 하는 데는 시간의 계산이 없어도 좋다
그러나 정(情)이 드는 데는 시간이란 세월이
부여 되어야 하는 것이니
정(正), 가치로 따지자면 정(情)이 아닐까
오랜 시간 정들어 오매불망하여도
또 다시 맞이하여야 하는 이별 앞에서
눈물이란 치료제로 가슴을 달래야 하구나
최후의 그 영원한 이별을 위하여
우리는 그렇게 그 많은 그것들과
연습하며 살아가는 가
날마다 갖가지 이별과 마주치면서도
항상 익숙한 가슴이 아님은 미련(未練) 때문일까
사랑하고 정들고 이별하는 가슴 아픔을
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미련을 꿈꾸는 미련퉁이 인간이기에
가능한 특권인가 싶으다.
오 사랑이여!
사박사박 걸어오는 소리 들린다
인생이
목숨보다 더 끈질기게 물어뜯으며
차라리 절규였든 환희의 그림자
폭풍 뒤의 그 평온을 두려워하는 그는
너는 날아 가버릴 새 같아
내 낡은 새장을 고칠 여유를 주렴
나는 내가 두려웠다
내가 아닌 내 안의 내가 두려웠다
약속을 지킬 손가락을 내밀지 못한 체
내 안에 꿈틀되는 세상을 보았다
핏빛 노을이 서녘 하늘을 덮던 날
이별의 쓰디쓴 입맞춤을 하고 하얗게
미쳐버린 그를 나는 보았네
그가 아닌 그가 나를 활키고
내가 아닌 내가 몸서리를 치든 일
사랑은 그렇게 갔다
연민과 갈등으로 얼룩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시간이 세월 되어 강물 곁에 고이 눕는 날
하늘 어딘가에 민들레 홀씨처럼
떠돌던 사랑 하나 또 다시 올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기에.
정묘년 겨울
저기 저 눈바람 속에 검붉은 파도가 일었든가
아무도 알아내지 못하는 눈길을 걸으며
그의 가슴이 되어 울어야 한다
내 눈물마저도 그에게로 가서 기쁨이 되던
햇빛 하얀 그 날은 이제 오지 않으리
시처럼 살자 손가락 걸던 속살에
뚝뚝 흐르는 핏빛 노을
눈에서 멀어지든 바다
가슴에서 멀리 하늘이 되어라
이제 추억의 그늘진 가방에서
툭툭 털며 걸어 나와
분노의 파도를 잠재울 수 있다면...
오, 사랑이란 이름으로 새겨진
황홀한 상처여.
코모레이크의 저녁
듣고 싶다
피아노시모로 내려앉는 그대 이야기
말하고 싶다
그늘진 호수의 물결을 열어
산다고 다 사는 것은 아니다
사랑한다고 다 기쁨은 아니다
뜨거운 가슴을 열었다 해도
다 불타는 것은 아니다
세월은 가고
흔들리는 물결 위에 쓰러지는 그 가슴
어찌 잊었노라 말할 수 있는 가
눈물만큼 자라 올라 하늘로 하늘로 커가는
내 노래
너는 잠 속에서 시작하고
거울 뒤에 숨는 구나
꽃잎이 되어 흩어지고 날아 가구나
내 노래의 메조포르테처럼
아직 잠들지 않는 기억으로
그 어딘가에서 흔들리는 그대 종소리
들리어 온다
꽃잎이 되어 나부기면서.
*코모레이크: 캐나다 밴쿠버 코키틀람 동네 가운데 있는
아름다운 작은 호수
마른 꿈 내음
하얗게 부서지는 달빛 소리
못다 푼 실타레인 양
동짓달 긴 밤을 흔든다
열릴 수 없는 나의 어두운 창
떨리는 손으론
차마 문고리를 달 수 없는
마른 잎새 같은 그리움 하나
까치 빈 둥지 속
색 바랜 상념들을 주워 모아
붉은 독백으로 별을 띄운다
그립다는 말보다
더 간절한 침묵의 눈빛
침상을 흔드는 그대 숨결
하얗게 묻어오는
아직도 잠들지 못하는
마음 꿈 내음.
무제(無題) 1
저녁 햇살이 노오랗게 고여 있는
고즈넉한 들길에 서다
일탈의 아슬 함이
톱니 한 개를 설적 비틀다
찌이익-찌익
내 속에 숨어 살던
가늘고 긴 현(弦)이 울린다
흐린 햇살이 일렁인다
하얗게 서리 내리는 마음 밭에
울어 피는 눈물꽃 너는
떨칠 수 없는 내 영혼의
아픈 편린이구나.
바람으로
흔들리고 싶다
바위처럼 산처럼 앉았다 하여도
조금은 흔들리지 않을까
그 누누한 바람 앞에서
나는 무엇으로 서려나
흔들리는 것들 모두 눈물이다
흔들리는 것들 모두 그리움이다
바람 앞에서 흔들리고 싶다
온 통 흔들리어
멀리 서고 싶다
멀리 있어 더 잘 보이게
멀리 서고 싶다
노을이 되어 돌아와
품고 싶은 아득한 그대여
나 여기 흔들리는 바람으로 서
그대 깊이 묻히고 싶다.
소리가 되어
누가 이 새벽을 소리로 채우는 가
누가 이 동틈을 푸르른 몸짓으로 채우는 가
이별의 눈물 같은 소리로
기다림의 초조로운 몸짓으로
슬픔처럼 눅눅한 기적이 흐른다
환희처럼 풀풀 기적은 흔들린다
흔들리는 몸짓으로 깨어나는 이 아침
갈닢 마른 안개 속으로 들어가
한 마리 사슴으로 서고 싶다
이별도 기다림도 다시 만남도
모두가 그리움의 안개 같은 것
가슴을 채우지 못한 것들은
모두 눈물이다
푸르른 몸짓으로 깨어나는 이 새벽
나는 소리가 되어 날고 싶다
훨훨...
제 6부 인생은 홀로 나는 새이다
마음의 거울
무심코 뿌려놓은 말의 씨들이
다른 사람의 가슴에서
무슨 색깔로 자라고 있을까
늦은 저녁 찬찬히
거울 속의 나를 본다
때 묻은 마음속엔
자신을 감싸는 지혜를 키우며
너보다 나를 먼저 놓는 잣대는
굵어져 간다
부끄러운 마음을 가슴에 안고
거울 속의 나를 본다
내가 뿌린 말의 씨들이
새벽이슬처럼 싱그러운 향기가 되고
가을날 추수처럼 알찬 빛으로 자라게 하리라
마음의 거울을
닦을 수건을 곱게 접어 본다.
바람결에 스치듯
눈을 떴다고 다 보는 것은 아니다
떴으나 봐야할 것은 못 본다 하고
굽이굽이 물 흐르듯 물거품 안고
잘도 말하지만
정작 할 말 못할 말구별 못하니
푼수라
보지 않아도 좋을, 차라리
보지 못하는 게 복이 되는 날이 있다
듣고 싶지 않은, 차라리
듣지 않아서 복이 되는 날이 있다
말하고 싶지 않은 대답도 있는데
말의 씨들이 홀씨처럼 날아다닌다
못 본 듯 못 들은 척
또한 벙어린 듯 살고 싶다
이 가을에 누가 와 묻거든
바람결에 스치듯 곱게 미소하는
미소만 남기라 하겠다.
정답 없는 인생
이십대를 물음표라면
불혹에는 느낌표
이순에는 마침표 일까?
이제 인생을 논해도 거침이 되지 않을
내 인생에 책임을 져야할
지천명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조석으로 부는 바람도 그냥이 아니고
계절 흐름도 그냥 보내기가 아쉬웠구나.
내가 거두어야 할 결실은 무엇이며
내 발자취는 바로 찍혀 있으려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
안타깝고 애절한 마음
희비는 초년이나 장년이나 마찬가지
늘 상 부족하구나.
인생이란 정답이 없는
끝없는 욕망의 전차인가 보다.
물과 같은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억울할 것도 하나 없는데
욕심 때문에
그것이 늘 마음을 괴롭히고
슬퍼하기까지 아니 하던가
따지고 보면 크든 작든
자기 그릇대로 살기 마련인 것을
짓눌린 가슴을 달래어 펴고
나를 비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둥그런 그릇 네모난 그릇
깊은 그릇 얕은 그릇 어느 그릇에 담아도
그 모양에 맞추어 담기어 지는
물처럼,
낮은 곳으로만 흘러 겸손을 가르치는
물처럼,
모든 것 다 품어 씻어주는 사랑의 메아리
물처럼,
그렇게 살아야 하리
그렇게 흘러야 하리.
유(有)와 무(無)
있고 없음은
마음 문을 열고 닫음에 있더구나
붙들고 놓지 못하는 마음은
늘 가난하였더니
열어 놓고 보니 모두가
내 것인 것을
어제는 사거리 앞 빌딩 두 채를 나누어 주고
오늘은 모퉁이 커피샾과 가구점을
탐내는 친구에게 주려고 한다
내 것은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줄 수 있어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
가난한 마음 붙들고 우는 누구든 오라
나는 저 별도 너에게 주려고 한다
있고 없음은 잠깐 욕심일 뿐
어차피 빈손으로 떠날 터인데
웃을 수 있는 날까지
가슴이 다 닳도록 퍼 주고 싶구나.
부정(不定)과 긍정(肯定)의 고독
우물가에서 검은 물통과 흰 물통이 말한다.
난 아무리 채워가도 늘 비어오니 슬픔 이란다
난 이렇게 비어와도 다시 채울 수 있어 기쁨이지
부정과 긍정의 가슴은
백지 한 장의 슬픔과 기쁨이다
마음자리 하나 바꿈에 흑(黑)과 백(白)의
행(幸)과 불(不)이 오간다
네 것도 내 것처럼 움켜쥐다보면
어느새 빈 대궁에 꺾어진 허리만 남지
세상은 나를 위해 변해주지 않는다
나 스스로 변해가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
우물가의 대화는 나에게 교훈을 주고
꽹과리처럼 울지 말고
분투노력(奮鬪努力)하고 사랑하라 한다.
인생은 홀로 나는 새이다
주검 앞에 서 보면
그 죽음 앞에서 우리는 철저히 홀로라는 것을
눈물 없이도 뜨겁게 알게 되거늘
가는 자도 혼자요 남은 자도 혼자인 것을
그리움이 안개처럼 젖어 이렇게 쓸쓸한 인생이고 보면
비울 수 있는 넉넉함을 배울 일이다
가슴은 하나인데 마음이 열둘이었든
나의 죄를 고백하노니 듣는 자여 용서해 다오
여기 버리고 지우고 홀로서서
먼 태고에 귀 기우리는 슬픔이 있노니
오오 그리운 모든 것들아
영영 나는 너를 놓지 못하고 홀로 나 여기
목 놓아 울게 하는 그리운 것들아
버려도 다가와 더욱 혼자이게 하는
슬픈 시간이 흘러간다
어둠이 흐르고 밤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창문을 열고 멀리 어둠 속에서 뚜벅뚜벅
내 가슴으로 걸어 들어오는 빗소리를 들어보라
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오직 홀로라는 것을 알게 되리니
인생은 홀로 나는 새인 것을
그리움이 안개처럼 젖어오면
더 더욱 홀로임을
그림자 없이도 더 잘 보이는 것임을.
새로운 삶의 도전
만약 내게 갈등이란 아픔이 없었다면
모난 내 육신을 갉아내는 작업을
알기나 했을까
만약 내게 망각이란 고요가 없었다면
어지러운 바람을 잠재울 수 없어
바다로 갔을 거야
만약 내게 이별이란 벼랑이 없었다면
눈물을 모르는
거죽 같은 삶 이었으리
부질없이 잡혀있든 욕망의 사설을 풀어
이별의 갈등과 아픔에서 외출할 수 있는
망각이란 처방약이여
새로운 대지를 향할 수 있는
새털 같은 발길이여!
나의 잠언 여섯
하나
고기가 썩지 않으려면
소금에 절여지고
얼음에 채워져야 하는 것처럼
오늘의 내 고통이
내일의 희망을 위함이라면
나는 오늘의 이 고통의
뿌리 깊이까지 감사하며
더욱 더 겸손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둘
어느 날부터인가
밤하늘의 별을 세지 않았고
꽃들의 웃음을 붙들지 못하고
입술에서 웃음을 잃었다면 가슴에서
행복을 가리고 있는 탓이다
행복은 금고를 여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여는 것이다
마음을 여는 것은 황금 열쇠가 아니고
배려하는 사랑이다
사랑은
비움으로 채워지는
무의 경지이다.
셋
하찮은 불씨가
낟가리를 태우고 집을 태운다
불씨는 커지기 전에 끄는 것이 상책이다
마음에 그런 불씨가 있다면
밤을 넘기지 말고 찾아가서 사과하라
그리하여 용서하여 용서 받자
용서는
용서하는 자의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넷
인간의 욕심은
풍선을 부는 것과 같다
풍선은 불수록 커진다 그러나
멈출 때를 알아야 한다
너무 불면 터진다
터질 듯 터질 듯 멈추지 못하는
욕심이 화근이 되어 풍선은 터지고
허무만 남아 마음을 괴롭히게 된다.
다섯
불필요에
마음이 잡혀있지나 않은 지
미련으로 미련스런 아집에 걸려 있지나 않은지
무시로 씻어내는 작업으로 더욱 작게
단순하게 천진했든 원초의 마음으로
미련을 던져 버려라
수도자의 마음으로
비움으로 채워지는
참 나를 찾자.
여섯
시간은
말없이 와서 내 곁을 지나지만
속절없이 가지는 않는다
시간은 나를 생각하게 하고
선택의 기회를 남긴다
시간은 세월이다
시간을 낭비하는 자는
인생을 허비하는 어리석음이다.
내 떠난 자리에
내 것이라 탐하지 말자
어차피 길은 하나요 손은 빈손이라
그날의 것으로 기쁨 되는 풍족으로 살라
사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자
내 것이라 아끼며 붙들었든 오직 한 사람
그도 갔는데, 뒤돌아보지 않고 허위허위 가고 말던데
무엇을 내 것이라 마음을 두리요
가는 것은 보내고 오는 것은 거두어들이고
사랑하고 사랑 주며 애틋히 살다가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깨끗하게 정돈하고 살 일이라
내 떠난 자리에 한그루 향기로운 꽃이라도 피어 날 수 있다면
마냥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월은
남의 서러움도 내 것인 냥 서럽고
남의 즐거움도 내 것인 냥 즐거워지는 건
예쁜 마음이라서 꼭 그런 건 아니야
남의 영광도 샘나고
남의 애통도 더러 고소하던 땐
그래도 젊음이라 시새움도 많고
희망도 가슴 넘치게
발 돋음 하든 시절이었지
그렇게 나르든 날도 지나고
이젠 모든 게 둥글게만 보고자 하여지니
지난 세월 그냥 흐른 건
정녕 아니네 그려
세월은 어린아이를 키우며
열매 맺는 가을을 익히고 자기를 돌아보게 하는
명철하신 그 님의 눈빛이었네.
내 친구 순자
순자가 보내 온 오월의 편지엔
아카시아 향기가 묻어나는 유년의 안부를 묻고 있다
말없는 시간에도 안부가 궁금한 우리
비 오는 날엔 관절이 쑤신다고 말하던 순자는
오늘은 큰 아들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
할머니가 되었노라 기쁘다고 웃었다
할머니가 되는 일은 그렇게도 쉬운가
할머니가 되는 일이 그렇게도 기쁜 일이든가
웃어야 하고 기뻐야 하고 그것이 인생이라 말하고 싶은 것인가
내 친구가 할머니가 되는 일은 너도 그렇게 되었노라 말하는 것인데
나도 덩달아 기뻐하고 웃는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직도 마음은 유년의 양지바른 언덕에서 꽃따지를 캐는데
굴러가는 소똥만 보아도 허리를 잡고 웃던 그 꿈꾸는 소녀인데
시간은 그냥 우리를 데려가지는 않았구나
할머니란 이름을 달아주고 주름이란 훈장도 달아 주구나
친구야 내 친구야 너와 나는 죽마고우라
아름다운 내 친구야 아프지 말거라
웃음 잃지 않길 5월의 꽃길에서 안부를 보낸다.
편린의 세월
산모롱이를 돌아 그곳
싸늘한 새벽 공기가 뽀오얀 입김으로 그림을 그려 놓던 곳
아직은 물때가 좀은 이르기도 하것다 마는
밤 세워 달려가지 않을 수 없던 미친 그 곳이라
두 손으로 무거운 다리를 붙들어다 옮겨 놓으며
‘이 보소. 입덧에 겨워 어지럼 타던 이 놈이 기어이 지렁이 맛에 취했소 그려’
아직도 귓전에 들리리 그곳에 가면,
아카시아 흐드러지게 피던 5월 강가, 꽃잎을 먹으며 그를 바라보노라면
막 입덧을 마친 붕어들이 퍼드득 퍼드득 수초를 찾아 산란을 시작하고
수컷들도 바쁘고 함께 덩달아 바쁜 그도 저린 몸을 곧추세우며
스스로 흥에 겨워 ‘어이, 어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머잖아 먼 나라의 추억이 될 것을 알기에 눈물을 울컥울컥 삼키는 나를
먼저 알아차린 그였을 것이었다.
미끼에 걸려 올라온 알베기 붕어를 텀벙 물속으로 다시 던져 넣는 것을 보면,
목마른 그의 심사가 풍덩풍덩 물속으로 곤두박질 쳤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아직도 물속에서 붕어 더불어 유영하리라
용납하고 싶지 않은 그 서러운 시간 속에 갇혀 남은 자의 서러움은
봄 가고 가을 가고,
세월은 시간을 먹고 아이들을 키우고 벙그는 꽃들은 영원을 꿈꾸며
인간은 망각이란 쓴 약으로 내일을 살아 간다
세월의 수레바퀴 속에서 오늘을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다가오는 봄 소리에 붉게 물드는 설레임,
오늘은 활짝 열어 터지도록 부푼 봄을 낚아나 볼 꺼나.
홀로 남은 그대여!
홀로 불어오던 바람도 잠잠히 빈 나무 가지에서 잠든 한나절 일세
제 하늘인 냥 소음 가득 흔들던 큰 잠자리도 날아가고
파아란 하늘엔 흰 구름만 유유자작 하네
그토록 세상 만물들 몸부림쳐 얻어내는 것들 또한 한때처럼
이 세상 인생은 잠시 잠깐 소풍일 뿐
솔로몬의 부귀영화도 부질없는 헛것일진데
하루살이의 내일이 없듯 어찌 내 것이 있으랴
욕심은 욕심을 낳고 욕심이 과하면 일찍 그것들과의 이별도
빠른 법 이어 늘 시방 저 하늘이 파아랗게 보이고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을 환히 볼 수 있다면 곁에 있는 모두를
사랑하고 사랑할지니 그대여
이 뜨거운 목마름을 경험하노라면 행복하고 행복할 것이로되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더 고되게 힘주어 살아보게나
결코 그대에겐 행복이란 싱그러운 흔들림의 간지럼은 없을 것이라네
오 홀로 남은 그대여 마음을 다하여 몸을 다하여 이 싱그러운 한나절의
행복을 부디 그대의 것이 되도록 나는 기도할 것이네
내려놓고 내려놓아 빈 마음이 되어보게나
엉키고설킨 인연의 고리를 놓고 미움도 서러움도 놓아 버리게
그것들 결코 내 것이 아닐 진데 제 삼의 것에서 온 어둠이라네
오 홀로 남은 그대여
축복의 이 하루를 마음으로 받고 온 몸으로 표현해 보게나
시방 저 여리고 야릿한 이파리들의 새 순처럼
간지럼 타는 봄빛을 한정 없이 누려보시게나
행복은 내 안에, 깊은 안에 있었던 것을.
잔인한 4월의 하늘이여!
하늘도 울고 땅도 한없이 울어야 하겠다.
차마 꽃들도 피지 못하고 후두둑 떨어지구나.
그 누가 이 꽃들을 피지 못하게 하는 가?
그 누가 이 꽃들을 안아 일어나게 할 것인 가?
잔인한 4월의 하늘도 울고 천지가 통곡으로 물들었구나.
어린 꽃들은 사랑하는 자들의 품으로 이제 다시는 오지 못한다니
눈물 없이는 잠들 수 없는 이 처절한 울음을 어디에 둘까?
절대로 이 부끄러운 어른들을 용서하지 말지라.
희망과 꿈으로 찬란히 피어날 4월의 꽃들은
푸른 바다의 출렁이는 파도 더불어 유채 향 꽃그늘을 그리며
삼삼오오 풍선처럼 부푼 꿈으로 참새처럼 재잘 되었을 웃음이
한 순간 어둠 저 편으로 날아갔구나.
어린 꽃들아 차마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 꽃들아 어디를 갔니?
그 어둠의 밑바닥에서 사랑하는 자들을 부르고 통곡하는구나.
애통한 그 부름을 피맺힌 가슴으로 붙든다.
내 탓이라, 내 탓이라 부르짖으면 덜 부끄러울까?
안전불감증에 매사 안일주의에 이기적인 사고로 살아 온
이 시대의 어른들의 부끄러움이 세월호를
저 푸른 암흑의 바다에 묻고 말았음을 통탄하며
더 이상 미숙한 국민이어서는 안 됨을 젊은 희생자들의
영전에 삼가 고개 숙여 참회할 일이다.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더 이상 부끄러운 국민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명심하고 명심하며 안일주의가 불러일으켜 만든 이 사고 앞에
머리 숙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명세할 지라.
가슴을 짓 뜯으며 부끄러워 통곡할 지라.
아, 차마 눈물 없이는 보낼 수 없는
우리 꽃다운 새싹들이여!
부디 고이 잠드시라. 부디 이제 잠드시라.
그대들 꽃으로 피어날 하늘이여 축복을 주소서.
삼가 명복을 빌며 빌며 오열하는 이 시간
그대들 닮은 꽃들도 펑펑 지고 있구나.
새벽을 열며
쏴아ㅡ
옷깃을 여미게 하는 흔들림에
새벽을 여는 청아한 새소리 귓전을 치고
빛이 아직 오기 전 소리로부터 그렇게
마음의 창은 열리다
조금씩 철이 나면서
세월을 이고 가는 내 모습에
아릿함도 씁쓸함도 더러는 들지만
새벽을 열며 시詩를 들어다 보는 마음엔
어여쁜 지혜 하나 언뜻 보일라.
소리로 시작 된
하루의 문을 빛이 열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되라 두 손을 모으며
오래도록 기억해도 좋을
아름다운 사건 하나 문득
만들고 싶어진다.
오랜 기도
새벽을 열어 동트게 하는 이여
새들을 지저귀게 하고 이슬을 굴리는 이여
오늘도 예쁜 입술만 열게 하소서
떨어지는 말들은 진주가 되게 하시고
움직이는 그림자마다 빛이 되어
일어서게 하소서
누군가를 닮고 싶어 걸음마 하고
옹알이 하는 것들
모두 당신이게 하소서
하늘을 열어 별을 뜨게 하는 이여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돌아오는
탕자의 길에 밝음이 되는 이여
오늘에 감사할 수 있는
기도만 하게 하소서
얻는 것마다 희락과 화평으로
주는 것마다 자비와 양선이게 하소서
나아가는 길섶에 오래 참아
온유와 절제의 꽃이 피게 하시고
날마다 기쁨으로 주를 증거 하는
자녀 되게 하소서.
총 99편입니다.
아름다운 시선집이 되길 소망합니다.
졸작을 늘 부끄러워하면서도 뽑아내려니 아쉬웠습니다.
비록 졸품이라도 한 편의 시를 낳는 산고의 고통이 따른 탓이라 여겨집니다.
첫 시집을 만들 때의 유한근교수님의 수고가 오늘 또 있으셔야 작품으로 탄생할 것이기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