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상실한 사상에 의해서는,
인간의 대조화도 없으며,
투쟁과 파괴의 아수라계를 만들어 낼 뿐이다.
정도 성취(正道成就)는,
중도의 마음을 목표로 해서, 일상생활 속에서 (중도의 마음을) 실천하고,
끊임없는 반성과 보은의 행위를 하는,
(중도의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
제 3 자의 입장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어떠한 제3자? 막상 제 3 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막연함을 느낍니다.
내가 한 것을 어떠한 제 3 자의 입장으로 보아야 할지 . . .
마음의 원점과 마음의 발견을 완전히 외워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완전히 이해하여야 알 것 같습니다.
다만 부처님의 눈으로,
다만 예수님의 눈으로,
하여야 할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이 듭니다.
인연있는 이여, 같이 생각해 봅시다
********
중도의 마음은 사심이 없는 신의 마음, 신의 척도.
사자에게 먹히는 소의 입장을 생각하면,
먹히는 소는 비참하고 슬픕니다.
=사심으로 보는 개인의 입장 : 소에게는 사자가 있는 무서운 세상이지요,
하지만 사자의 입장에서는 먹이가 있는 고마운 세상이지요.
=사심으로 보는 개인의 입장.
풀의 입장에서는 소가 너무 많으면 풀이 씨가 마르므로
소의 수를 조절하는 자연의 섭리라고 보면,
초목을 위한 신의 배려임을 생각합니다.
=제 3 자의 입장
내가 영혼이 없는 육신뿐이라고 생각하면,
개인의 입장을 떠날 수 없지요.
하지만 내가 영원불멸의 영혼으로서
잠깐 이 세상에 왔다 가는 존재라면,
가능한 일이 되지 않을까요? )
6. 깨달음의 피안으로의 길
중도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것은 부처님이 설법하신 중도의 목적에 맞는 팔정도 밖에 없다.
바르게 본다. 바르게 생각한다. 바르게 말한다.
라는 세가지의 정신작용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생활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그리고 기초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에는 속담에,
보지 않는다. 듣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
라는 삼원(三猿)의 속담을 통하여,
번뇌 이탈의 기초 조건으로 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번뇌라고 하는 미망이 생기는 것은,
보거나 듣거나 말하거나 하는데서 일어나는 수가 많다.
그러므로 번뇌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눈. 귀. 입을 닫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은, 말 그대로 닫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정신 작용을 통해서,
현실사회 속에서, '그것을 올바르게 행하라'고 하는 뜻이다.
삼원(三遠)의 예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도피가 되기 때문이다.
중도를 마음의 척도(尺度)로 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생활,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그러나 세 마리의 원숭이의 예는,
번뇌가 생기는 가장 위험한 정신 작용에 대한 경고를 뜻하며,
인간의 약점을 꼬집은 속담이다.
팔정도의 첫머리에 있는《‘바르게 본다.’(正見)》라는 것은
'선(善)한 중도의 마음의 눈으로 보라'.
(주;선(善)한 중도의 마음의 눈= 자비. 사랑. 감사. 보은. 관용)
《‘바르게 생각한다.’(正思)》라는 것은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선(善)한 중도의 마음으로 생각하라.'
《‘바르게 말한다.’(正語)》는 것은
'선(善)한 중도의 마음으로 생각한 바를 말하도록 하라'는 뜻이다
마음이란, 의식의 중심이며,
의식의 중심은,
자타의 차별관이 없는 선(善)한 마음이다.
다음으로 《‘바르게 일한다.’(정업)》라는 것은
주어진 그 직무에 대해서,
충실하게 의무와 책임을 완수한다는 뜻이다.
이 경우의 일이란,
단순히 표면적으로, 양적으로 남보다 많이 한다는 것보다도,
사람들의 행복을 빌고,
일하는 환경 그리고 제공자에게 감사하며,
그 감사의 마음을, 행위에 의해서 보답한다는 것이다.
일하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사람들은,
또 일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로가, 보다 나은 생활의 안정과, 마음의 조화를 꾀하고,
서로 보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자기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
가령 일의 양은 적어도,
진심에서 우러나는 봉사의 행위 쪽이,
신(神)은 훨씬 더 기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혼의 수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일, 그 자체는, 혼 수행의 재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질(質)과 양(量)이 상부하면,
그 보다 더 나을 것은 없다.
그러나 신불(神佛)의 눈은,
어디까지나 그 질(質)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된다.
옛날부터,
부자의 만등(萬燈)보다, 빈자(貧者)의 일등(一燈)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에서 우러난 행위,
그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본주의도 마르크스주의도,
물질과 경제가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은 없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과연 경제만일까.
경제만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인간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화폐경제라고 하는 것이,
온갖 불안정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바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사실로부터, 참된 행복이란 과연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富)만이 인생이 아니다.
p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