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으로 이동해 한양조씨 시조단묘를 참배했다
제일 윗쪽부터 한양조씨 1세 시조 조지수의 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시조부터 5세까지 원래 북한지역에 그 유적이나 묘가 있으나 현재 남한지역 후손으로서 그 묘소를 찾을 수 없을 때 이렇게 설단으로 조성하여 모시는 것이 도리라며 설단의 전말비를 세워 놓았다
한양 조씨는 한양에 세거해 온 사족士族의 후예로서 고려 중엽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를 지낸 조지수를 시조로 모신다
첨의중서사는 첨의성과 중서성을 합한 관청으로 지금으로 보면 총리직에 해당하는 고위 관직이다.
족보에서 보면 한양조씨 시조인 조지수는 송나라의 조광윤을 선조로 하여 내려오다 그 후 함경도 덕원, 용진지역에 그 세거를 마련한 송나라 망족이라 되어 있다
함경도 덕원에 정착한 조지수는 아들 대에 이르러 큰 변화를 맞게 된다. 동북면 지역을 점령한 원나라가 이곳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지수의 아들 ‘조휘’를 쌍성총관에 임명한 것이다.
2세 조휘는 고려 고종 45년(1258) 원(몽고)의 쌍성총관부 초대 쌍성총관에 제수되셨고 이후 공의 증손자까지 99년간 총관을 세습하여 12개성을 통치하셨으며,1273년 돌아가셨다 라고 인물이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인 고려의 입장에선 고려의 자주적 영토회복을 방해하여 원나라에 철령 이북지방을 건네주고 본인이 그 지방을 차지하고 쌍성총관을 한 반역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몽골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1258년(고종 45) 북방이 허술해진 틈을 타 정주인 탁청 및 등주·문주 등 여러 성 사람들과 공모한 뒤 몽골군을 인도하여 동북면병마사 신집평 등을 죽이고 철령 이북의 땅을 들어 몽골에 반부했다.
3세 조양기는 고려 원종 14년(1273)부공인 총관공의 별세로 인하여 13세의 나이로 제2대 총관이 되었다.
충렬왕 7년(1281) 5월에 원세조(쿠빌라이)가 합포(현재 마산)에서 고려.원 연합군의 선단을 편성하여 일본을 정벌할 때 원의 장군 흔도타구를 도원수로,고려의 김방경을 원수로,쌍성총관이신 공을 부원수로 삼았다.
그러나,이 싸움에서 때마침 불어온 큰 태풍으로 도원수 흔도타구는 패하고 돌아왔으나,공이 이끄는 선단은 무사히 이기고 돌아왔으므로 원세조가 이를 크게 기특히 여겨 그 공을 찬양하고 상으로 금포(금옷)와 옥대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그대가 아직 미혼이니 이것을 입고 돌아가 어진 배필을 얻어 훌륭한 자손을 낳아 대대로 나의 자손에게 정성을 다하기를 그대가 지금 내게 하듯이 하라"고 하였다.그때 공의 나이 21세였다.
또 그 이후 함단군을 토벌하고 포로를 원나라에 보냈으니 역시 그때 나이도 21세였다.
조양기의 딸 조씨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조부 도조 이춘의 후처가 되어 2남 3녀를 낳았다.
1356년(공민왕 5)에 대대적인 반원운동(反元運動)을 전개하면서 밀직부사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로, 전대호군(前大護軍) 공천보(貢天甫), 전종부령(前宗簿令) 김원봉(金元鳳)을 부사로 삼아 이 지역을 수복하도록 하였다.
이 때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이 항거했으나, 조휘의 손자인 조돈(趙暾)과 이 지역에 토착해 있던 이자춘(李子春)이 고려군에 내응함으로써 조소생은 이판령(伊板嶺)을 넘어 도망하고 쌍성총관부는 폐지되었다.
이어 4세 조돈 선조는 고려 공민왕 5년(1356)쌍성총관부를 수복할때 협찬하시어 예빈경을 제수받고,개성에 저택을 하사받으셨다.
공민왕 8년에는 서경(현재 평양)에 쳐들어온 홍건적을 격퇴하셨다.
1360년 공부상서,1362년 해주목사,1363년 예의판서에 오르고,홍건적을 격퇴한데 대하여 1등공신에 책록되셨다.
우왕 원년(1375)삼중대광 용성군(정1품)에 오르셨다.
5세 조인벽은 용성부원군의 장자로 호는 우계 또는 해월정이다.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동북면병마사 유인우(柳仁雨)를 도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호군(護軍)이 되었고, 공민왕 임인년에 이방실과 함께 서경(평양)회복에 대공을 세웠으며,다음해에 김용을 토벌하여 2등공신이 되고,임자년에 판사로서 가주난동을 진압하여 만호가되어 함주 북청의 왜적을 격퇴하고,봉익대부에 승진,1375년(우왕)에 밀직부사로서 동북면 원수로,정사년에 신주,옹진,문화 등에 누차에 걸쳐 왜구를토벌하였다.
다음해에 판밀직으로 화포로 수군을 훈련,다음해에 강릉도 도원수겸 부윤,다음해에 상원수로 왜적을 격퇴,계해년에 문하찬성사로 동북면 체찰사,을축년에 4도 도지휘사,무진년에 삼사좌사,다음해에 판의덕부사로 승진하여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삼중대광(정1품)용성부원군삼사좌사겸판소부시사를 역임하셨다.
부인으로 환조(桓祖 : 李成桂의 아버지인 李子春)의 맏딸인 정화공주(貞和公主)를 맞았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태조 이성계가 처남인데도 불구하고 양양으로 은퇴하여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유림이 충현사,동명서원(강원 양양읍 조산리 소재)을 세워 모시고 조선왕조에서는 증좌정승 시호 양렬공을 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