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과학이냐?
인간의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마음을 산출하는 기관인 뇌는 보인다. 컴퓨터의 정보처리 용량이 크면 더 좋은 프로그램을 움직일 수 있듯이, 뇌의 용량에 따라 인간의 마음은 더 잘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생후 1세 미만이라면 비록 뇌의 발달 속도가 매우 빠르기는 하지만, 대강 18세쯤 성인에 비해서 뇌신경세포는 70% 남짓 완성된다고 한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적어도 논리적 사고, 말하자면 고차적이지는 않아도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설득시킬 수 있는 조리를 갖춘 말과 생각과 같은 퀄리티가 좋은 프로그램은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이는 제 처지를 말하지 못하니까, 우는 것이겠지.
클라인이 정신분석의 입장에서 아이의 마음 곧 인간 마음의 아주 중요하며 결정적인 특징을 해명할 때, ‘아이는 입심 좋은 재담꾼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듯이 말을 한다. 비록 해석이라고 하지만, 과연 누가 아이의 입장이 되어서, 세상이 조각조각 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대상과 미분화라고 하지만, 과연 그것을 어찌 아는가? 아마도 정신분석학 전체에 대한 가장 쉽지만 혹은 피상적일 수 있는, 그러나 쉽지만 본질적인 비판이라면 그것은 검증하기 어려운 ‘소설’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시 피상적인 비판이다. 이것은 아이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또한 이것은 무의식의 이야기이다.
어른의 정신 병리와 아이의 사고와 행동(*정상보다는 비정상적인)을 관찰하여,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가설’을 세운 것이다. 관찰과 가설의 수립은 지극히 과학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가설을 통해서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것이다. 설명력이 높고 예측가능성이 크다면, 그것이 과학이다. 만일 설명력이 높지 못하고 예측가능성이 적다면, 가설이 흔들린다. 다른 가설이 기존의 것을 밀어내고,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가설의 등장을 기다린다. 이처럼 계속 되는 과정은 매우 과학적인 것이다.
클라인의 이론은 과학적 가설의 하나이며, 인간 마음을 해명하는데 설명력을 갖추고 있고, 이를 토대로 예측을 가능(*심리치료활동)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음이 움직이고 진행되는 일정한 길, 즉 심리(心理)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까르마에토스는 이 심리의 법칙을 기초적인 마음 혹은 낮은 마음의 법칙이라고 여긴다. 아직 아이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person이 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 마음도 인간이 되기 이전의 단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우울불안
백일이 지난 아이는 망상과 분열로 인한 불안감을 가지고 살다가, 생후 반년 정도에 이를 때까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조각 나 있는 대상들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자각이 생겨난다. 망상분열에서 남(*대상)이란 나와 구분이 잘 되지도 않고, 그래서 나 또한 확립되지도 않았지만, 좋은 젖가슴이 나쁜 젖가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아이가 비로소 객관이라고 부르는 사태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 아이를 사로잡고 있는 안팎의 불안감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성격이 바뀌게 된다. 이는 우울불안이다.
우울불안은 지금까지 강렬하게 사랑했던 좋은 젖가슴(*천사)이 나쁜 젖가슴(*악마)이라는 자각에 따라, 좋은 젖가슴에 대한 배신감(*너가 악마였어?)과 상실감, 그리고 강렬한 증오의 대상이었던 나쁜 젖가슴(*너가 천사였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뼈져린 후회의 감정(*죄의식)이 교차하면서 생겨난다. 그리고 나쁜 젖가슴이 좋은 젖가슴이었다면 이를 파괴하려고 했던 자신의 무능으로부터 불안감이 커져 간다. 왜냐하면 좋은 젖가슴은 삶과 직결되는데 이를 파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울불안은 후회와 죄의식과 무력감을 동반하고 있다.
<계속>
(*편집자주: 필자 이창일은 고려대 심리학과를 졸업.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주역>으로 철학박사, 서울불교대학원에서 트랜스퍼스날심리학을 전공하고 성격유형론 연구로 심리상담학박사를 받았다. 동양철학, <주역>, 심리학 분야에 다수의 저술과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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