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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프러포즈 대작전
호텔 스위트룸 객실 하나를 빌린 해율은 며칠 전 조언을 구했던 주한을 비롯한 다른 지인들까지 불러 모았다. 마치 오늘 일을 망치면 자신도 끝이라는 막중한 사명감으로 분주하게 움직인다.
“이건 어디다 놓을까?”
“들어오는 길에 깔아줘.”
“어, 알았어.”
“혜주누나, 음식 준비는 다 됐어?”
“어, 거의 다 된 거 같아.”
“그럼 봉주리 부를까?”
“아니! 아직!!”
다급한 목소리로 달려와 주한이 들고 있던 휴대폰을 뺏어들며 말리는 해율. 그리고 해율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린다. 무척이나 긴장해서 상기된 얼굴이다. 그런 모습이 낯선 듯 허윤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혀끝을 찬다. 그리고 허윤 곁에서 해율이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허윤의 옆구리를 쿡 찔러 정도껏 하라는 듯 눈치를 주는 주니.
“혜주씨, 기태형은 언제 온대?”
“아, 내가 얘기 안했나? 오늘 둘이 같이 맡은 프로젝트 때문에 야근 핑계 삼아 주리 잡고 있다고. 이따 주한이가 전화하면 그때 이쪽으로 출발하기로 했어.”
“아, 맞다! 맞다... 그랬지 참...”
“오빠 진짜 너무 긴장한 거 아냐? 이따가 주리 오면 실수하는 거 아냐?”
“안 돼! 오늘은 절대 실수하면 안 돼! 내생에 첫 프러포즈를 그렇게 망칠 순 없어! 아, 근데 진짜 느무느무 떨린건 어쩔수 없네.”
* * * * *
“민대리, 우리 이제 그만 퇴근할까?”
“어?! 아, 아니! 아직 할 거 남았지 않아?”
“그 정도야 다음주에 출근해서 검토해도 되잖아. 그만 가자, 너무 피곤하다.”
‘아, 아직 가면 안 되는데...’
“응? 뭐라고?”
“아, 아니야. 그래, 가자...”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혜주에게 ‘톡’을 남기는 민대리. 한참을 앞서가던 주리는 뒤 따르지 않고 있던 민대리가 느껴졌는지 걷던 걸음을 멈추고, 살금살금 기태에게 다가서서 휴대폰을 흠칫 훔쳐보려는 시늉을 하는 주리. 그런 주리의 행동에 뭐 잘못해서 크게 걸린 사람처럼 식겁하는 표정으로 다급하게 휴대폰을 몸 뒤로 감추는 민대리.
“뭐야, 그냥 보는 척만 하려던 거야. 뭘 그렇게 진저리를 치면서 감추고 그래? 사람 기분 나빠지려 하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가자, 너무 늦었다 그치? 근데, 이왕 늦은 거 야근한 우리를 위해 특별한 식사라도 스스로에게 대접해볼까?”
“뭔 소리야, 뭔 대접?”
“아니, 내가 오늘 고급호텔 음식이 먹고 싶어서. 내가 쏠테니까 어때?”
“뭐, 민대리가 쏜다면야 가겠지만... 근데 오늘 무슨 날이야? 갑자기 웬 고급호텔 음식?”
“사람이 뭐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고 그런 거 아냐?”
“민 대리 오늘 좀 이상하다? 어디 아파? 왜 이렇게 말을 횡설수설해? 알았다고, 가준다고 내가! 덕분에 호강 좀 해보지 뭐. 직장동료 잘 둔 덕에 고급호텔 음식도 먹어보고.”
어딘가 상당히 많이 불안해 보이는 민대리가 수상쩍었지만 늦은 시간까지 야근한 주리역시 출출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겸사겸사 민대리 차 조수석에 몸을 담았다. 한참을 달리고 있는 행선지가 어딘지 알 수 없을 만큼 낯선 길을 가고 있었고, 약간의 불안한 표정으로 민대리와 정면을 번갈아 수차례 보는 주리. 그런 주리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아무 말이나 막 내뱉기 시작하는 민대리.
“아! 이 근처에서 내 여동생이 호텔리어로 일을 하거든. 그래서 동생 덕 좀 보려고 이쪽으로 가는 거니까, 그 시선 그만 거둬주지?!”
“동생? 민대리 동생도 있었어?”
“어. 아니, 근데 그걸 여태 몰랐어? 나 여동생 둘이나 있다고.”
“둘이나?!! 대박. 난 왜 지금까지 몰랐지? 우리가 그렇게 안 친했나?”
“난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봉대리가 아니었나보네.”
“뭔 말이 또 그렇게 되나... 아니거든?! 그래서 어디쯤인데? 다 와 가는 거긴 해? 먹으러 간다니까 나 갑자기 엄청 배고파졌거든. 들려? 배에서 꼬르륵 거리는 거?”
“참... 해율이는 봉대리 어디가 좋아서 죽는지 난 도통 모르겠네.”
“참나! 남 연애엔 신경끄시지? 나도 혜주가 민대리 어디가 좋아서 만나는지 모르겠거든?!”
“뭐어어어?! 에휴, 말을 말자. 다왔어.”
“쾌속 주차 부탁드립니다.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기 직전입니다.”
“언제는 생각 없는 것처럼 굴더니... 됐어. 내려도 돼.”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마치고, 민대리가 전 좌석 차문을 오픈하기가 무섭게 주리는 문을 열고 내린다. 그리고 이미 놀이공원에 와서 신난 어린애처럼 어떤 메뉴들이 있을지 한껏 기대에 찬 얼굴로 민대리의 인솔을 기다리고 있다.
민대리가 운전석에서 내리며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총총 거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뒤따르는 주리. 그 틈에 민대리는 어느새 호텔 건물 내에 도착했고, 엘리베이터를 탔다고 혜주에게 ‘톡’을 보낸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층계가 표시되는 곳을 응시하는 척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긴다.
* * * * *
“어떡해! 엘리베이터 탔대!”
“뭐?!! 큰일 났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일단 오빠부터 숨어!”
“나? 아, 그렇지. 그래. 어디 숨지?”
“아, 진짜... 저기 숨는다매. 언제 튀어나와야 될지도 기억하고 있는 거지? 이렇게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시간 내서 준비했는데, 당사자가 프러포즈 망치고 뭐 그러면 안 된다?!”
해율은 문을 열고 등장할 주리에게 ‘짠’ 하고 나타나기 위해 현관과 가까운 곳에 몸을 숨기고 튀어 나올 듯 뛰어대는 심장을 나대지 말라며 수차례 쓸어내린다. 그리고 깊은 심호흡을 수차례 한다.
* * * * *
“민윤아, 어디야? 몇 호? 아니, 왜 그런데로 오래?”
민대리가 동생과 짧은 통화를 나누는 듯 하더니 전화를 끊고, 기다리고 선 주리를 보며 어색하게 입매를 늘려 미소를 띤다. 그리고 손짓을 한다. 입모양으로 ‘702호’ 뻐끔거린다. 굳이 그렇게 소리 내지 않아야 하는 영문을 모르겠지만 주리도 모르게 민대리에게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 익숙한 호수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내뱉는다.
“어! 민윤아!”
“여기야.”
“어, 고맙다. 열어줘야지.”
“나 바빠. 여기 키. 근데 누구?”
“아, 처음 보나? 해율이랑 결혼할 사람.”
“뭐?!”
“뭘 그렇게 놀래.”
“해율 오빠 어쩜 나한테 그래? 내가 해율오빠를 어떻게 생각하는데... 한마디 말도 없이...”
“그건 나중에 연락할테니까 그때 와서 따져묻든 맘대로 하고, 일단은 우리 밥 좀 먹자.”
“밥?”
민대리의 동생인 윤아는 민대리의 여자 친구가 와 있는 객실 키를 가져다주러 온 거란 정도만 알고 있는데 뜬금없이 밥얘기를 하니 순간 모든 것이 실토될 뻔 했던 윤아에게 눈짓으로 윙크를 하며 빨리 가라는 듯 손짓으로 휘휘 흔들어 보이는 민대리의 행동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다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간다.
윤아에게 받아든 룸 키를 주리에게 건네는 민대리. 문 열고 먼저 들어가도 되는데 굳이 자신에게 키를 건네는 민대리의 행동에 조금씩 의구심을 갖게 되는 주리.
* * * * *
어둠이 가득 내려깔린 룸 안으로 두려운 마음에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뒤에 선 민대리만 연신 보는 주리. 민대리는 괜찮다며 조금씩, 조금씩 주리와 거리를 두고 뒤따르고 있었다. 어느덧 현관을 지나 실내로 발을 내딛을 즈음 알 수 없는 재채기가 들리고, 공포심에 큰 눈만 더 동그랗게 커진 채로 금방이라도 눈물이라도 나올 것처럼 긴장한 주리.
“짠!”
꽃다발과 선물을 들고 나타나는 해율의 등장에 무심코 놀란 주리는 팔을 휘둘러 해율을 밀치고, 마구 발길질을 하며 소리를 친다. 그 힘에 해율은 바닥에 나뒹굴었고, 놀란 일행들이 실내등을 밝혔다. 순간의 충격으로 잠시 기절한 듯 보이는 해율은 아직 의식이 없다.
“뭐, 뭐야... 이게 다?”
“아니... 난 깜깜한데서 낯선 인기척도 느껴지고, 그런데 갑자기 뭐가 확 튀어나와서 놀래서 밀치고, 막 발로 차고, 팔을 휘둘렀는데....”
“해율아! 정신 좀 차려봐! 야, 기해율!”
* * * * *
“으음...”
“자기, 이게 다 뭐야?”
“어?! 내가... 왜 여기에...”
“내가... 놀래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자기를 팼나봐.”
“뭐어어?! 그럼... 내 프러포즈는?!”
“프러포즈? 프러포즈 하려던 거였어?”
“안돼에에에!!!!”
괴로운 듯 양 손으로 머리를 잡고 소리치던 해율은 허탈한 표정으로 주리를 본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될지, 어떻게 시작해야될지 막막하기만 했다.
“어쩔 수 없다, 기해율. 그냥 하려던 거 지금 해. 뭐 별수 있냐...”
“이런 식은 안 된단 말이야. 진짜 멋지게 해주고 싶었는데... 기절이라니...”
“잠깐!!”
함께 준비한 사람들마저 허탈하게 만드는 결과에 다들 실망감을 얼굴에서 감추질 못한다. 그래서 그냥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준비한 걸 들어보려고 하던 찰나, 좀 전에 만났던 민대리의 여동생이라는 윤아가 나타났다.
“오빠!!! 어떻게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이래?!”
“어?! 윤아야.”
“아니, 어떻게 나한테 한번 소개도 안 시켜주고 프러포즈를 하냐고오!”
“누구...?”
“아, 내 이종사촌동생. 기태형의 둘째 여동생 민윤아. 이 녀석이 어렸을 때 날 그렇게 졸졸 쫓아다니면서 잘 따르더니 지금 엄청 심통이 났나봐. 자기한테 말 안 해주고 결혼하려는 건가 싶어서.”
“그래서 결혼하려는 사람이 이 언니야?!”
“어.”
“주려고 준비한건 이거고?!”
“어...”
“줘봐.”
해율이 들고 있던 꽃다발과 선물을 주리 앞에 ‘쑥’ 내밀고, 무덤덤한 듯 들리지만 애정이 느껴지는 한마디, 한마디로 해율을 대신해 전하는 것 같았다.
“이제, 새 언니 되는 건데... 이렇게 만나게 돼서 좀 유감스럽네요. 오빠가 어차피 프러포즈는 망친 것 같은데, 내가 대신 줘도 괜찮아요?”
“아... 뭐... 네.”
“사실 내가 해율오빠 졸졸 따라다니다가 이성에 눈을 떴거든요. 뭐 놀라지는 말구요. 오빠랑 뭐 어쩌구, 저쩌구 한 사이는 아니고 그냥 나 혼자서 짝사랑 했었어요. 근데 뭐 이제 어른 되고 나니까 그게 사랑이 아니란 걸 알게 된 거죠. 근데 그래도 한때는 애틋함을 갖고 있던... 그런 해율오빠가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는데, 얼굴도 안보여주고 뭐 그래서 너무 섭섭한 그런 기분이랄까요? 이거 대신 제가 드릴게요. 해율오빠 제가 자부할 수 있어요. 평생 믿고 맡길만한 남자일거에요. 세상 이렇게 진국인 남자 또 없거든요. 이런 순애보도 없구요. 복 받으신 거예요 언니는. 부디부디 꼭 행복하세요.”
해율이 해야 될 일을 윤아가 대신해서 내 손에 꽃다발을 쥐어주고, 준비한 선물인 반지를 꺼내어 해율의 손에 건넨다. 차마 그것만은 해율이 직접 하는 게 맞는 것 같다면서. 어벙벙한 해율은 얼떨결에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주리의 손을 잡고 네 번째 손가락에 준비한 반지를 끼운다. 그리고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해율의 손에 끼워주는 주리. 그제야 자리에 함께했던 모두가 축하의 박수를 치며 너도나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고 있다. 그렇게 축하를 받고 있는 해율과 주리를 묘한 감정이 북받치는 듯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며 기뻐하고 있는 주한까지 모두가 행복이란 그릇 속에 담겨져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