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우석의 질투]
“자기, 오늘 애들 앞에서 나 공개선언 할거다?!”
“...응.”
“뭐야? 그 반응은?”
“아니, 난 뒷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동창끼리 이렇게 됐다 하면... 이러니저러니 말 나오는 거 신경 쓰지 않고 넘길 자신이 없는데...”
“걱정 마. 나만 믿어. 알았지?”
우석은 약속장소에 도착해서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자 루나를 먼저 내려주고, 주변에 주차할 곳을 찾아 돌아다닌다. 빈자리를 찾아 주차를 말끔히 해두고, 차에서 내리는 우석에게 누군가 다가와 어깨에 손을 ‘툭’하고 치며 아는 채를 해오는 남자.
“이야, 현우석. 오랜만이다?”
“...유준석. 지금 오는 길이야?”
“어. 들어가자.”
앞서 걷는 유준석의 뒤를 따라 걸으며 우석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유준석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생이 되어서까지 루나에게 들이댔었던 놈으로 초등학교 동창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루나를 열렬히 짝사랑만 하다 거절당한 놈으로. 입술을 질근 물다 놓아버리며 미간을 찌푸리는 우석.
약속장소에 들어서자 먼저 들어간 준석이 루나를 자신의 곁에 앉히려고 손짓을 하고 있었고, 루나도 딱히 빈자리가 그곳밖에 없어서 앉으려고 몸을 낮추고 있던 찰나, 우석이 황급히 루나 곁으로 가서 어깨에 팔을 두르며 보란 듯이 ‘자기’란 애칭을 내뱉는다. 앉으려다 말고 우석의 태도에 당황한 듯 주변 분위기를 살피는 루나. 그리고 그 옆에 눈썹을 씰룩이며 눈을 크게 뜬 준석을 흘깃 확인하는 우석.
루나가 준석의 곁에 앉는 모습 자체가 보고 싶지 않았던 우석은 다른 테이블에서 의자를 하나 가져와 루나가 앉으려던 의자 옆에 둔다. 그리고 가져다 둔 의자에 루나를 앉히고, 원래 루나가 앉으려던 자리에 자신의 몸을 낮춰 앉는다.
순식간에 자리하고 앉았던 이들은 루나와 우석에게 시선이 집중됐고, 그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더 능글맞게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 보이는 우석. 그리고 조용히 루나의 귓가에 속삭인다.
‘나 지금 무지 질투 나는 거 참고 있어.’
‘질... 투?!’
그제서야 우석이 보인 태도의 의미를 알겠다는 얼굴로 잔뜩 긴장되어 있던 얼굴표정을 풀어 보이는 루나. 본의 아니게 공개선언 된 열애소식에 너도나도 궁금한 게 많은 듯 질문들을 건네 오고, 당황스러워 입도 못 떼고 있는 루나를 대신해 우석이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침착하게 대답을 해주고 있다.
술잔을 기울이며 주고받는 대화들로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우석과 루나의 연애를 축하한다면서 너도나도 권하는 술잔을 차마 마다하지 못했던 루나는 어느새 눈이 풀리고,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져 있었다. 루나의 옆에 앉아있던 여자동창이 집에서 애가 아픈 거 같다며 먼저 자리를 뜨는 바람에 자리가 비었고, 그 틈을 노려 화장실을 갔다 오던 준석이 루나의 옆에 앉는다.
“이루나, 그동안 그렇게 동창회에 안 나오더니. 오랜만이다?”
“어?! 유준석! 그래... 내가 너무 참석을 안했었지? 헤헤...”
크게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와 취해서 다들 목소리 톤이 업 된 상태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탓에 우석은 미처 루나의 곁에 다가와 앉은 준석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 틈에 취해서 기우뚱 거리면서 히죽거리고 있는 루나를 보면서 옅은 미소를 짓는 준석. 슬며시 루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슬쩍 슬쩍 흔들어 보지만,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루나.
‘이루나... 끝까지 날 거절하더니, 고작 선택한 놈이 현우석이냐?’
취해 있던 상황에서도 또렷이 들렸던 준석의 속삭임. 술이 번쩍 깨는 느낌인 루나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준석을 본다. 그리고 옆에서 동창들과 웃으며 대화를 주고 받다가 옆으로 시선을 돌린 우석이 그제서야 루나 옆에 준석이 다가와 앉아있는 것을 발견한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자니 준석의 태도가 눈에 거슬려 자리에서 헤롱 거리고 있는 루나의 손을 잡아채서 일어선다.
“뭐야, 현우석? 벌써 가려고?”
“봐라. 우리 자기가 벌써 너무 취하셨다. 니 놈들이 주는 술 사양 못하고 마셔서 그런 거 아니냐 이 새키들아.”
“우리가 뭐 어쨌다고...”
“암튼, 그래서 우리 먼저 가 볼 테니까 재밌게들 놀다 가라.”
“그래, 조심히 들어가!”
“오냐!”
취한 루나의 입술에 슬쩍 입을 맞추려고 얼굴을 가까이하던 준석은 썩은 표정을 지으며 ‘훅’ 하고 숨을 뱉어낸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쓸어 올렸다 내린다.
* * * *
“이루나, 이거 마셔.”
가까운 편의점에서 숙취해소 음료를 사들고 운전석에 올라탄 우석이 병 뚜껑을 개봉해서 루나에게 건넨다. 루나는 손에 쥐어지는 음료를 아무생각 없이 꼴깍 거리며 마셔버린다. 그런 루나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귀여워 미쳐버리겠는 우석이 루나의 뺨을 손으로 쓰다듬는다. 방금 전까지 유준석 때문에 좋지 않았던 기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 녹듯 사라진지 오래인 우석.
“남치나....”
“왜 자기야.”
“사랑해.”
“......!”
“어?! 왜 말이 없어... 내 말 못 들었어 남치나?”
“다시 한번만.”
“사랑한다구우!! 내가 현우석을 무지무지 사랑한다.!!”
한손으로 가슴을 토닥이며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은 줄 알고 강조해서 크게 말하던 루나의 입을 우석의 입술로 막아버린다. 그리고 둘은 한참동안 진하게 사랑을 나눈다.
“나도. 이루나 무지무지 사랑해.”
“으흥... 좋아.”
* * * *
[프러포즈 준비 1단계]
“여보세요?”
“누나! 지금 어디야?”
“나? 집이지, 애 땜에 내가 어딜 가냐. 근데 왜?”
“그럼 내가 집으로 갈게.”
분주해 보이는 우석이 찾아간 곳은 우석의 첫째누나가 살고 있는 집. 3살, 5살 꼬마 둘의 엄마인 우석의 첫째누나는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를 유리잔에 담아서 쟁반에 받쳐 들고 우석과 아이들이 앉아있는 거실로 와 자리하고 앉는다.
“삼추나! 이거! 이거!”
“짠!”
“웬일이야?”
“도움 좀 구하려고.”
“도움?”
“내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는데, 도통 결혼할 맘을 안잡네?! 어떻게 하면 넘어올까? 매형이 누나한테 어떻게 했어? 프러포즈?”
“프러포즈라... 근데, 얼굴한번 안보여주고 결혼약속부터 하려고?”
“얼굴? 차차 보여줄게.”
“내 개인적으로는 단둘이 있을 때 진심으로 하는 고백이면 넘어가든데?!”
“다른거 아무것도 준비안하고?”
“여자는 너무 성대하고 큰 물질적인 것 보다 상대가 나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구나 ...라는 것만 보여도 마음을 열게 돼. 지극히 주관적인 내 얘기이기도 하지만.”
* * * *
[프러포즈 준비 2단계]
“루성아.”
“안녕하세요, 형.”
“오늘 저녁에 시간 있니?”
“저녁에요? 네, 근데 무슨 일이에요?”
“루나한테는 나만난단 얘기 하지 말고 나와. 알았지?”
우석은 며칠 전 첫째누나의 조언을 구하고 나서 루성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다. 아무래도 루나의 최측근이다 보니 다른 누구한테 듣는 것 보다 가장 정확하고, 직접적일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서다.
루나의 집에서 멀지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민속주점에서 저녁 9시에 만나기로 한 우석과 루성. 먼저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훑어보고 있는 우석. 잠시 후 출입문 벨소리가 울리면서 루성이 들어선다. 루성을 발견하고 우석이 긴 팔을 들어 올려 휘적거리며 손짓을 한다. 그런 우석을 보고 우석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저벅저벅 걸어와 자리 잡고 앉는 루성.
유심히 메뉴판을 둘러본 우석이 선별해서 메뉴 2가지 정도와 막걸리를 주문한다. 조금은 데면데면한 둘은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까지 조금은 뻘쭘한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앉아 있다.
주문한 메뉴들이 테이블에 놓여지고, 나란히 각자의 앞에 놓인 빈 술잔을 우석이 먼저 나서서 막걸리를 따뤄 잔을 채운다. 그리고 한잔, 두잔 마셔나가기 시작한다.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루성과 우석.
“내가 프러포즈를 준비하고 있는데 루나가 쉬운 여자가 아니다보니 변수가 많을 것 같아서 가장 최측근인 널 부른 건데 말이지...”
“우리 누나요? 우리 누나한테 프러포즈 한다고요? 전 그 결혼 반대네요.”
“왜? 내가 맘에 안 들어?”
“그건 아닌데요...”
“그럼... 왜?”
“우리 누나 정이 엄청 많은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한번 마음열고 잘해주기 시작하면 진짜 조건 없이 다 퍼주는 스타일이에요. 그렇게 되기까지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게 단점이기도 하구요.”
“진짜... 그런 거 같다.”
“그리고 다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아버지란 사람으로 인한 상처가 엄청 깊이 박혀있어요. 그러다보니 누나가 결혼에 대한 생각을 아예 접어버리다 시피 한거기도 하구요. 누나 생각은 그거죠. 지금 눈앞에서 아무리 잘해준다 해도 20년이 지나서 이렇게 변할 수도 있는 게 남잔데 어떻게 믿고 평생을 맡기고 시집을 가냐는 거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라도 늦은 연애를 시작하게 곁을 지켜준 형한테 고맙기도 해요. 안 그랬으면 이루나 진짜 재미없게 지금도 집, 회사. 집, 회사. 하면서 지냈을 거거든요.”
루성의 말에 한참을 귀 기울여 들으면서 말수가 없어진 우석. 루성은 루나가 말했던 것처럼 그저 막내에 불과한 철부지 동생이 아니었다. 루나를 생각하고 있는 깊은 마음이 저절로 헤아려질 정도로 아끼고 있었다. 오늘의 자리로서 루성을 다시 보면서 우석은 정말 더 많이 루나의 가족이 되고 싶단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