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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쉘비 스퐁의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
제3부 비종교인들을 위한 예수
6장 예수 : 종교적 경계선의 파괴자
크리스천이란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예수는 이 온전함의 초상이다. 이 때문에 그의 완전한 인간성은 하나님의 궁극적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인간이란 종(種)이 자의식과 공포의 자각에 대처하기 위해 이용한 또 하나의 도구는 종교를 발전시킨 것이다. 사람들이 생존 욕구에서 충분히 벗어나서 이런 관점에서 종교를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피상적으로 볼 때도, 종교가 그 핵심에는 보상적이며 인간적인 활동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무력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주체할 수 없는 공포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대처한다. 그들은 방어자인 전능한 신의 능력이 나약한 자신들을 보호한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그들은 삶의 현저한 무의미성의 공포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손수 만든 이 외계적, 신적 존재에 대해 궁극적 의미와 목적을 투사한다. 끝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 피할 수 없는 죽음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희망을 만들어낸다. 그들이 영원한 신 안에서 자신들의 삶의 덧없는 성격을 극복할 수 있는 무한의 차원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런 세 가지 방식에서부터 생겨난 대부분의 종교제도들은 인간의 삶의 현실인 자의식에 대한 충격으로 인한 불안 자체를 진정시켜주는 답변을 제공했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본질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만 비로소 우리는 종교제도에서 주기적으로 유출되는 비합리적 주장들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당신은 궁극적 진리의 소유자라는 확신이 큰 위로가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종교제도들은 자기들이 신의 권위를 갖고 말하며 따라서 자신들의 말에 대해 아무도 도전할 수 없다는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종교제도 속에는 대안적인 주장이나 빗나간 주장을 제거하거나 말살하려는 의욕이 강한 것이다.
내가 앞([제3부] 2장)에서 이미 밝혔고 강조하기 위해 여기서 되풀이하는 것처럼, 종교제도들은 원촉적으로 인간의 진리 탐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제도들은 오히려 인간의 안전 추구와 직결된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인간이 극히 불안정한 세계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심사숙고 끝에 마련한 또 하나의 대처수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의식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의미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다. 인간 생활의 표징인 불안을 항상 느끼면서 산다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인간들은 거의 필연적으로 종교적 동물이 될 수밖에 없다. 종교는 인간 정신에 내재하는 절망적 및 만성적 요구에 응하고, 따라서 인간의 삶 자체를 집요하게 장악한다. 그러나 스스로 창조한 안전은 실재가 아니다. 사실상 종교는 전통적으로 보여준 바와 같이 진정한 안전이 아니라 그 환상만을 마련해 주었을 뿐이다. 종교는 대부분 민중의 아편 구실을 한 것이 사실이다.1) 그러므로 "비종교인을 위한 예수"를 제시하는 것은 거룩함으로 가는 대안적 오솔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가 자기를 키워준 종교와 신앙체계에 대해 취한 태도를 검토하는 것은 매력적인 연구라고 하겠다. 그는 사람들을 새로운 인간성으로 초대하고 또한 그의 완전한 인간성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임재를 그들에게 소개하려는 동기에서 종교적 경계선들을 거듭 파괴했다. 인간성을 제한하는 것, 다른 사람을 증오하고 거부하고 폭행하도록 가르치는 것 등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이 사실을 다양한 형식으로 언급했다. 이 때문에 그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심각할 정도로 위협적 존재가 되었다.
복음서에 묘사된 최초의 예수에 대한 초상은 하나님이 주입되었으면서도 온전한 참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 초상의 예수는 안전을 생산하는 종교적 교율들에 매이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하나님은 그의 안전망의 일부분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인간됨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었다. 인간의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과 종교적 규율들이 상충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하나님은 그 규율들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그에게 부여한 것처럼 이해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예수가 생명 지향적이었다고 전한다. 그의 가르침 중 상당 부분은 축하하는 것이었다. 그는 빈번히 잔치를 베풀었다. 그의 삶에는 향취가 있었다. 나는 이제 그가 종교 자체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복음서의 초상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것은 매력적인 연구가 될 것이다.
유대교가 예수에게 가르친 것은 도덕법은 궁극적이라는 것과 만일 사람이 이것을 범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공동체 전체에 내리지 않게 하기위해 규정된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필연적으로 형식적 의로움과 가혹한 심판 의식을 낳게 한 사고방식이었다. 이 때문에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법 집행자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이 사고방식을 어떻게 처리했는가? 복음서만 읽어보아도 그가 그 경계선들을 확장하고 종교의 벽을 뛰어넘으며 사람들에게 따라오라고 초청한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에서 시작하고자 한다.2) 그녀는 애인의 침상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붙들려 당시 도덕적 재판관들 앞에 끌려오게 되었다. 그들은 법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가 가르친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공동체 전체가 도덕적 무정부주의로 떨어져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으려면 도덕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일어날 결과에 대해 알고 있었다.3) 그들은 심판과 보상 또는 징벌을 기본 특징으로 하는 유신론적 신의 이미지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 여인은 분명히 죄를 지었다. 그들은 그녀를 범죄 현장에서 붙잡았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심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과 함께 장부에 기록하기를 "그는[혹은 그녀는] 이 간음한 여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주지 않은 죄를 범했다"고 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통제된 마음 속에는 질투심도 숨어 있었을지 모른다. 즉 만일 그녀가 법을 어기고도 무사히 빠져나간다면, 왜 그들도 이처럼 자유 분망하게 행동하지 않았는가? 왜 그들은 법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움에 대한 보상을 원했던 것이다. 그들은 폴 틸리히가 말한 소위 "거부된 가능성의 보복"(the vengeance of the denied possibility)4)이라는 것을 겪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수에게 있는 자유의 의미는 제도적 종교인들에게는 항상 위협적인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이 만든 도덕법을 준수해야 한다면 그녀도 그래야만 한다!"고 그들은 말했던 것이다. 따라서 범법한 여인은 예수 앞에 끌려오게 되었다. 돌로 치는 것이 사형집행의 방법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편리한 것이었다. 돌은 이 좁은 지역에 무수하게 널려 있었고 집어 던지기는 힘든 것도 아니었으며 특별한 형 집행 장소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의 반응을 종교 지도자들이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판이한 것으로 묘사한다. 예수는 도덕주의와 심판이 온전함을 성취하는 무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여인과 그녀의 고발자들 중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의 고발자 중에 누가 심판할 자격이 있는지 물음으로써 도덕적 기준을 문제 삼는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 중의 어느 누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설 수 있겠는가? 우리 중의 어느 누가 다른 사람의 특수한 행동을 자극한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는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비난하는 말이나 행동을 유발시키는 원인은 무엇인가? 이런 욕구들은 어떤 내적 근거에서 발생하는가? 예수는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말한다. 외견상 의로운 사람들은 도덕법을 어기지 않기 때문에 의로운 것인가? 아니면 이 사람들은 사랑할 능력을 억제했거나 단지 붙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의로운 것인가? 만일 공개적인 돌팔매질이 행해졌다면, 이 여인의 고발자들이나 혹은 예수 자신은 보다 깊은 의미에서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은 더욱 비인간적이고 더욱 폭력적이며 또한 증오와 거부와 비인간적인 것을 자행하는 성향이 더 짙어지는 것인가? 도덕주의와 의로움은 결과적으로 사랑이나 새로운 삶을 낳지 못한다. 그것들은 법칙과 종교적 통제만을 만들 따름이다. 인간이 되려는 것은 종교인이 되려는 것과 똑같은 것이 아니다.
예수는 언제나 인간성을 종교법 위에 올려놓았으므로, 종교법을 보다 더 높은 목표에 종속된 것으로 만들었다. 다른 사례를 보면, 위로부터 명령하는 유신론적 신을 섬기는 예배와 관련된 종교법에 대해 예수는 도전한다. 마가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간 이야기를 한다(2:23-28). 그들은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잘랐다. 유신론적 통제 종교의 수호자들은 이 범행을 규탄하기 위해 하나님의 법을 즉각 끌어들였다. 도덕주의자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범한다고 고발했다.5) 예수는 다윗 왕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율법에 따라 제사장들만 먹게 된 제례용 빵을 먹은 사례를 들어 응답했다. 이 빵은 극단적인 경우 곧 굶어 죽게 되었을 때만 사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 다음 예수는 비록 안식일에 지키도록 규정된 종교법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부합하지 않으면 부도덕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종교의 우선순위를 뒤집었다. 그는 이것이 모든 종교법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역설했던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안식일 법에 적응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진실은 그 반대인 것이다. 오히려 안식일 법이 인간의 생명을 고양시키기 위해 창안되었다는 말이다. 만일 종교법이 삶을 제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간성의 이름으로 제거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권위, 전통 및 율법에 대한 놀라운 종교적 전환이었다! 예수는 수천 년 간의 종교적 교훈고 실천에 반하여 종교의 궁극적 목적이 가상적 타계의 초자연적 신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성을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상충될 때는 인간성의 고양이 항상 법보다 우선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놀라운 통찰의 순간이었고 새로운 의식의 변화적 상징이며 예수가 인간의 삶을 하나님 만나는 공간으로 보았다는 표징이다. 그 순간 타계의 권위적 어버이 상을 지닌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의 삶 중심에 내재하는 현존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마가는 이 통찰을 예수의 다음 이야기(3:1-6)에 도입한다. 그것은 예수가 또 다시 안식일에 회당에 나타나 이번에는 손이 오그라들고 마비된 사람과 만나는 이야기다. 그의 증상은 분명히 만성적이었고 생명이 위험한 질병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거룩한 안식일까지 범할 일은 아니었다. 만일 인식일에 선을 행하므로 하루의 고통을 감소할 수 있다면 그래도 선행을 연기해야 하겠는가 하는 질문이 사실상 예수의 대답이었다. 달리 말하면 지연되는 정의나 선이 정의와 선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삶은 유한한 것이므로 선행이 지연되면 그 사람은 하루의 삶을 잃어버리게 된다. 마가는 말하기를, 예수는 종교가 삶을 왜곡시키고 고통을 증가시키는 데 악용된 것에 분노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쳤고, 종교 지도자들은 이에 대해 크게 반발했다고 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고안된 종교법에 항거하는 자에 의해 자기들의 권력이 위협 당했기 때문에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즉 예수 때문에 그들의 권위가 상대화되었는데, 예수는 외계적 하나님의 거룩한 총애를 받기 위해 사용된 종교법은 타당성이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무정부 상태를 초래할 것이라고 외쳤다. 그 법은 삶을 종교적으로 지배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로 하여금 그런 종류의 도전을 계속하도록 수수방관한다면 그들의 종교적 권위는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통제하는 신을 수호하는 자들이 법과 질서에 대한 위협,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종교 권력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정치 권력자들과 모의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교회와 국가는 항상 타락하고 통제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 질서를 확립할 권력을 모색한다. 이와는 달리 예수는 종교법을 이용하여 삶을 규제하려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 조건을 영속시킬 뿐이라고 믿은 것 같다. 권위주의적 종교는 손상된 것을 관리하는 일에만 개입한다. 그 목적은 인간의 위험한 성향을 억제하려는 데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의 상황을 전적으로 달리 보았다. 그는 인간성을 통제와 법에서 탈피하여 온전함을 지향하는 여정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풍요한 삶을 향유하기 위해 규율, 방어, 부족적 경계선, 편견 및 심지어는 종교를 초월하도록 요청했다. 이것은 삶과 종교에 대한 독특한 접근방식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예수는 질적으로 달랐고, 별개의 인간 차원에 속한 것 같았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하나님을 그의 정체성의 일부로 보게 되었다.
거의 모든 종교제도의 또 다른 특징은 종교적 순결을 규정하며, 누가 정결하며 누가 불결한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토라에는 월경기에 있는 여인에게 접촉을 금하는 언급이 많다(레 12:1-8 및 15:19-30 참조). 유대교도 예외는 아니지만 고대의 많은 종교제도에서 월경기의 여인은 불결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녀는 부정적인 힘을 소유한 것으로 간주되므로 그 기간에는 부족의 복리에 잠재적 위해 요인으로 판단되어 격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매달 이 기간에 문화적으로 규정된 수치를 안고 살았다. 종교는 여러 차원에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을 자행한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배경 삼아 마가복음을 읽어보면 월경이 주기적이 아니라 지속적인 여인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이것은 그 문화의 가치체계에 의하면 그녀가 항상 불결하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자기 문제를 위해 치료의 손길을 찾았으나 무위로 끝났다. 그녀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다. 그녀는 자신을 저주했고 자기의 인간성을 폄하했다. 그녀는 공포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자기 종교가 지어준 감옥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자기가 풍문에 들은 예수를 찾았고 그의 옷을 만지려했다. 그녀는 자기가 접근할 때 예수는 저주보다는 오히려 용납해 주리라는 예감을 품고 자신의 인간성을 억압하고 더럽히는 벽을 허물었을 것에 틀림없다. 이런 행동을 통해 그녀는 치유되기를 기대했다. 마가는 그녀가 이런 만짐으로 병이 치료되었고 예수는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감지했다고 했다.
마가는 예수가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제자들은 그의 물음을 비웃었다. 그는 무리들과 항상 부딪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말하기를 이것은 의도적으로 만진 것이라고 했다. 자기에게 변화가 일어났음을 감지하고 자기가 치유된 것을 깨달은 여인은 공포와 전율에 사로잡혔다. 그는 예수에게 다가와서 자기가 고의적으로 예수의 옷에 손을 댔다고 고백했다. 토라의 법에는 이런 접촉이 예수를 불결하게 만들고 정결법이 정한 날 수대로 정결 행사에 참여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를 감염시킨 것을 알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여인은 종교법과 정결법이 자기를 규탄하리라는 우려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기 행동을 예수에게 자백했을 때 예수는 그것을 사랑과 은총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예수가 그녀를 건져 올리기 위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친밀한 인간관계에서 쓰는 말, 곧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를 구원한 믿음이란 그녀가 옳은 사실을 믿었다는 뜻이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녀의 믿음은 자신의 삶이 지금까지 알아왔던 것보다 더 크고 풍성한 삶일 수 있다는 것을 믿은 것이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믿음, 곧 자기를 자유롭게 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로 바꿀 수 있는 사랑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녀의 믿음은 한 사람에게서 흘러나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신적인 능력에 대한 믿음이었다. 예수는 그녀가 새로운 의미의 온전함을 지니고 평화 가운데 떠나갈 수 있게 했다고 마가는 말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예수의 확신을 또 하나 파악하게 된다. 그것은 곧 인간이 온전한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안전을 제공하는 종교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여건에서든지 이것을 온몸으로 살아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에게는 인간성 이상의 것이 현존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런 유형의 인간성을 대면한 적이 없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예수와 하나님을 동일시한 것이다. 자유롭고 온전한 인간성은 그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하늘 위에 모셨기 때문에 예수는 위에서 내려온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신성은 항상 아래로부터, 땅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 속에 들어오기 위해 하늘 위에 있는 어떤 천상적 영역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인간의 삶이 온전함 속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현현으로 간주되었으며 신성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 체험이 뜻하는 것이다.
외계적이고 초자연적인 신을 섬기는 종교는 항상 부랑자를 지목하고 그 부랑자가 거룩한 영역안에 들어와 오염시키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종교의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한다. 일반적으로 부랑자는 별종의 존재로 치부된다. 공포는 메스꺼운, 무서운, 전염되는 등의 형용사를 첨가하고 하나님이 거부한다는 징표를 덧붙인다. 이런 판단은 통상적으로 무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예수가 살던 문화에서는 문둥병자들이 주로 그런 대상이었다. 레위기 법에는 모든 문둥병자들은 그 불결한 질병이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둥병자들의 옷은 찢겨지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져서 사람들이 그들을 식별하고 기피하게 했다. 문둥병자들은 그들의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계속 외쳐야 한다(레 13:45). 문둥병자들은 문자 그대로 사회에서 추방되어 집단 및 도시의 성곽 밖에서 거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법은 또한 문둥병자들이 깨끗하다는 확인을 받기 위해 거쳐야 할 의식을 규정해 놓았다. 문둥병자들은 이 의식을 마친 후에만 사회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레 14:2-3).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문둥병자들을 대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가는 제일 먼저 이 대면을 거론한다(1:40-45). 한 문둥병자는 예수가 자기를 치유할 능력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는 "선생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고 한다. 마가에 의하면 예수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며 응답했다. 이것은 확실히 신중하고도 인격적인 행위를 간략하게 묘사한 것이었다. 문둥병 감염자에게 공개적이고 직접적으로 손을 대는 것은 무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고, 그것은 또한 정결한 자와 불결한 자를 구별하는 능력에 기초한 제도적 종교의 권력을 공포에 떨게 했을 것이다. 마가는 예수가 "그렇게 해 주마. 깨끗하게 되어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한다. 여기서 예수의 행동은 다른 복음서 본문에서와 같이 종교법을 파기하고 생명과 온전함을 우선시하는 데 일관성을 보여준다. 당신은 문자 그대로 접촉할 수 없도록 규정된 사람을 접촉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상상할 수 있는가? 이 접촉은 생명의 회복과 함께 인간성의 제고를 함의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배제하는 장벽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성 앞에서는 무지가 후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예수가 체현한 종류의 인간성이었고, 이것이 또한 신성을 극히 새로운 방식으로 정의한 인간성이었다.
도덕적 심판은 생명을 주지 못한다. 예수가 단행한 것처럼 심판의 경계선들을 초월하는 사랑만이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는 항상 생명에 저해되는 벽을 쌓는다. 이것이 외계적인 신을 만족시키고 신의 총애를 받으려는 종교가 반복해서 하는 일이다. 예수의 제자라고 하는 자들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자처하면서 공포에 질린 사람들과 권위주의적 제도의 요구에 모두 부응하기 위해 예수의 존재 의미 전체를 때때로 훼손하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문둥병자들 곧 불결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얼굴은 다양하다. 첫째로 그들은 이방인들로서, 기독교 공동체가 주로 유대인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을 때 예수의 메시지에 응답하면서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고 했던 이방인들이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포용할 것을 역설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대교 전통이 예수에게로 가는 유일한 관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베드로는 빛을 보았다고 한다.
베드로가 이 보편적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회심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10:1-48). 베드로는 지붕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토라에 불결하다는 온갖 동물들이 그려진 큰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하늘의 음성은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고 했다. 베드로는 자기는 깨끗한 것만 먹는 유대인으로서 불결한 음식은 먹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하늘의 음성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고 했다. 베드로는 일어나 고넬료라고 하는 이방인의 집에 가서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누가는 말하기를, 베드로가 그 다음에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내려오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베드로가 이 현상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임을 안다고 해석한 것은 삶이 변하는 순간이었다. 장벽을 허무는 예수는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도 이 사람들을 새로운 의식의 차원으로 계속 전환시킨다.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기 위해 공포의 안전망을 넘어서는 예수는 복음서 초상의 백미(白眉)이다.
이보다 앞서 사도행전(8:26-40)에는 집사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 때 벽이 또 하나 무너지는 이야기가 있다. 이 남자는 당대의 종교법에 이중적으로 저촉되었다. 즉 그는 불결한 이방인일 뿐만 아니라 그의 육체적 거세 상황이 그를 용납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모세는 "고환이 터졌거나 음경이 잘린 사람은, 주님의 총회 회원이 되지 못합니다"(신 23:1)고 말을 한 것으로 토라에 인용되어 있다. 이 본문은 상대성이나 애매성으로 인해 무시된 적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성서를 인용하는 자들이 그들의 편견을 방어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명쾌한 가르침"이라고 한 것이다. 그 의미는 제자들에게 명약관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그 법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거세한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고차적 인간성의 이름으로 종교법에 다시 한번 도전한 것이다. 그는 예수의 의미가 자기를 주관한다는 확신대로 행동한 것이다.
역사를 통해 예수의 제자들이 공포로 인해 쌓아올린 여타 장벽들도 흡사하게 붕괴될 운명에 처했다. 시대를 초월하여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 자신의 생존 의식에 대항하여 투쟁했다. 실상 기독교 역사는 과거의 종교법과 나사렛 예수에게서 힘차게 흘러나오는 자유 사이의 지속적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피해자는 비록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완전한 인간성을 고양하는 데 역행하는 장벽들은 역사를 통해 거듭 붕괴되었다. 우리는 정신병자들, 흑인들, 유대인들, 왼손잡이들, 남성 및 여성 동성애자들의 사례를 들 수 있는데 그들은 모두 종교적으로 거부당하는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배타적 장벽들은 결국 사람들이 예수에게서 체험한 능력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하나님은 천상의 재판장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성이 장벽들이 없는 상태가 되기까지 인간성 안에서 작용하는 생명의 힘이다. 이것이 참 사람 예수의 충만한 인간성에서 계시된 하나님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정의, 곧 외계적 힘에 대한 우리의 낡은 견해로부터 우리의 삶의 중심에서 발견된 것으로 바뀐 새로운 하나님 정의였다. 이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를 존재하도록 초대하며, 이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를 살도록 초대하며,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사랑으로 초대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의 삶 속에서 생명의 원천을 보았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의 사랑에서 사랑의 원천을 볼 수 있었다. 그를 참 사람이 되게 한 그의 용기에서 우리는 모든 존재의 근거를 볼 수 있었다. 이런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성육신"이란 말이다. 그것은 믿어야 할 교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체험해야 할 현존인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종교 없는 기독교"(religionless Christianity)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6). 본회퍼는 인간성이 "성숙한 세대"라고 할 때 인간이 유신론적 종교의 타계적이며 초자연적인 어버이 하나님을 제쳐둘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킨 때를 가리킨 것인데, 이 때 인간의 의식에는 새 날이 밝아온다는 것이다. 이 유신론적 하나님은 너무나 오랫동안 새로운 하나님, 곧 인간성의 중심에서 등장하며 예수 체험의 궁극적 깊이와 의미인 생명과 사랑과 존재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우리의 눈을 가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초청은 우리의 인간성과 그 잠재력을 속박하고 제한하는 모든 장벽을 넘어서게 하는 여정으로의 초청인 것이다. 예수는 전통적 기독론이 주장한 바와 같이 외계적 하나님이 그의 삶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신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예수가 신적인 존재라는 것은 그의 인간성과 의식이 철두철미 온전하고 완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미가 그를 통해 흘러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생명, 사랑 및 존재의 초월적 차원을 향해 개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이 미래의 기독론을 위한 기초이다. 다시 본회퍼의 말을 빌리면, 크리스천이란 종교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는 이 온전함의 초상이고, 따라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예수의 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의 궁극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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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것은 칼 마르크스의 입장이다.
2) 이 이야기의 권위와 위치에 대해 신약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고대 사본들에서는 이 이야기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나에게 큰 관심거리가 아니다. 나는 예수에게 돌려진 것들의 상당부분의 역사성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복음서 전승의 중요한 부분들과 일치하는 예수상을 보여준다.
3) 이스라엘의 몇 사람 혹은 심지어 왕의 죄 때문에 역병이 백성 전체에 퍼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창 18-19장).
4)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1. 2: Christ and Existence
5) 이런 행동의 불법성을 이해하려면 출애굽기 14:11을 보라.
6)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p.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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