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자신의 의도를 살펴보자
본문: 마태복음 5장 17-48, 참된기독교 309
설교: 제레미 시몬즈 목사 /미국 새교회
설교 내용 요약: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율법을 '완성(fulfill)'하신다는 것은 율법을 설명하고 확장하고 율법이 가르치는 바의 실제를 보여주심을 말한다.
이것은 주님이 주시는 진리의 빛을 통해 각 개인에게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 진리의 빛은 특히 우리의 의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지난 주에는 산상수훈의 열 가지 축복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산상수훈은 우리 삶과 그 축복은 우리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산상수훈에서 축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즉 주리고 목마르고 애통하는 것은 우리 눈에 축복이 아닌 듯이 보이는데, 주님은 이것을 축복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인생에서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 일어나는 일에 대한 나의 '내면의 반응'이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는 의미다.
이 내면적 축복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달'과 '성숙'이라는 장기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 내면의 성숙, 즉 우리의 관심과 갈망과 깊은 사랑의 발달이야 말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축복이다.
우리가 살면서 점점 더 이웃에게 선한 의도를 품게 되고, 정의롭고 옳고 참된 것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축복이다.
그런 의도와 갈망이 바로 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우리 자신의 주림과 목마름, 즉 자신의 내적인 가난을 인식하고 애통해 하는 것은 축복의 시작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주님 말씀의 주제는 이런 산상수훈의 교훈 다음에 이어지는 것으로, 의미상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즉 우리의 내적인 성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가르침이다.
오늘의 본문에서 "계명중에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거나 어기도록 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일컬어질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을 "하나의 계명을 어기면 전부를 어긴 것과 같다. 따라서 인간은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 기존의 해석이다.
그러나 사실 이 구절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데 있어서 의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행동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의도의 차원에서까지 선하고 신실하고 정직해야 한다.
행동 뒤에 숨은 의도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갈망들 속에 그 나라와 그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심정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의식적으로 선택한 의도적인 악이 우리를 정죄하고,
의식적으로 선택한 의도적인 회개(악을 끊는 것)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다.
하나의 악을 의식적으로 선택해 의도할 때, 우리는 악이 죄라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이 된다.
하나의 악을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고칠 때, 우리는 악을 죄라고 여기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규정하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숨은 의도와 동기와 목적이다.
살인을 안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숨은 증오심을 버려야 한다.
간음을 안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혼인 외에서 정욕을 품지 말아야 한다.
이혼을 안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배우자를 배신하거나 떠나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어야 한다.
남을 해치는 행동을 안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어떤 악의나 반감도 품지 말아야 한다.
주님이 신약의 가르침을 주시기 전 구약시대에는 사람의 이러한 내적 자아, 즉 속사람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다.
선한 의도에 대한 인식이 없었고 율법에 따른 행위만을 강조했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주님은 바른 행위에 대한 계명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 내면의 중요성을 깨우쳐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이번 한 주간, 우리의 행위 속에 들어있는 의도들을 정직하게 관찰해보자.
그 안에 반감과 증오와 악의가 들어있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여러 이유를 들어서 그 감정들을 "품고 있어도 괜찮은 것"이라고 은연중에 합리화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자.
왜냐하면 우리가 의도 속에 품고 있으면서 어떤 이유로든 "괜찮다"고 합리화하고 있는 것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밖으로 표출되게 되고, 따라서 행동에 옮기지 않고 있어도 실제로 행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둘 것은
단지 생각으로 스쳐간 것은 정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우리 머리 속에는 수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그 떠오른 생각마다 다 우리의 책임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동에 옮기고 싶은 마음을 품은 것, 선택적으로 의식적으로 의도한 것만 우리의 책임이다.
주님은 우리 모두 의도가 선하고 신실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
그 선한 의도 안에 우리 개인과 사회의 축복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http://media.newchurch.org/audio/3927.mp3
Title: Observe Your Intentions
Lessons: Matt. 5:17-48, TCR 309
Sermon: Rev. Jeremy F. Simons
첫댓글 축복의 성격.
a. 외부가 아닌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
b. 일어나는 일에 대한 '내면의 반응'이 축복이 되는 것.
축복의 정의.
a. 선한 의도를 품는 것.
b. 정의롭고 옳고 참된 것을 갈망하는 것.
축복의 완성.
a.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
b. 발달과 성숙이라는 장기적 형태로 주어지는 것.
우리의 책임 범위
a. 행동에 옮기고 싶은 마음을 품은 것
b. 선택적으로 의식적으로 의도한 것
옛 글에 새 댓글을 달아주실 때마다 요점정리와 함께 본문도 새롭게 읽게 됩니다. 오늘은 마침 제게 이 글이 필요했었는지 몇몇 단어에 눈길이 오래 머무네요. 복습의 달인 꽁이님 덕분이죠. 감사해요!
2년전쯤 축복의 개념에 대해 배울 때
마음 속에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합쳐져 '축복' 이라는 이름표를 다는 광경을 바라보며 기쁨을 느꼈어요.
설교문의 압축, 최선의 단어 선택, 명료한 해석, 섬세하고 부드러운 감성이 스미기까지 애쓰신 라티와 함께 하는 감동이지요.
2.3.4.5.6.
20220122. 주**님의 댓글.
내면의 악의 의식적인 악의 내속에 또하나의 나 그것을 통제할수 있어야 선의가 될텐데 어려운 일이네요. 하루에도 수백번 타인을 비방하고 질책하고 자신이 악의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도 그마져도 인식조차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건 아닌가 싶습니다. 의식적으로 선의냐 악의냐가 중요한게아니라 생각자체를 모르는게 더 무서운것 같아요. 자신이 악의를 하면서도 그자체를 모르는것. 항상 깨어 있음이 중요한듯 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행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다면 결코 그 어떤 선도 행할 수 없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선의 근원되시는 분으로부터 선을 받아들여야만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연습하고 또 연습함으로써 우리는 그 두가지를 동시에 하는 진정한 방법을 체득해 나갈 것이다.
즉 진리대로 선을 실행함에 있어 능동적인 삶의 길과, 주님과 주님이 주시는 생명을 잊지 않는 겸허한 삶의 길을 동시에 걷는 방법 말이다.
이것이 진정한 명상, '매순간 깨어있음'(mindfulness)의 새교회적 정의이다. -거듭남
한 번에 하나씩만. 이게 포인트 같습니다.
모든 나쁜 생각 행동을 한꺼번에 의식하고 고치는 건 불가능하고
한달에 한두 번 자기를 검토하는 시간을 가지고
그때 내 레이더에 잡힌 하나에 초점을 두어 몇 주간 집중적으로 그것을 처리하고 다음 번 자기 검토 때 다음 것에 집증하는 식으로
하나씩 고쳐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네요.
양심이 아주 없지 않다면 누구나 자기 검토때 걸리는 게 아주 없을 수는 없을 거예요.
선택과 집증.
각개격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