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 말은 "숭배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최상의 존경심과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시편 기자가 말한 대로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것"(시 29:2)을 말하는 것이다.
2). 예배의 본질
먼저 예배의 본질에 앞서 "예배의 이해"를 알아야 한다. 예배는 두 가지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첫째로 예배는 "무엇인가 우리가 하는 것"으로 본다. 제임스 토랜스(James Torrance)는 "오늘날 가장 보편적으로 이해되어지는 예배에 대한 견해는 주일날 아침에 우리가 교회에 가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즉 성도가 교회에 가서 찬송, 기도, 헌금을 하고 설교를 듣는 일들을 예배라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또 다른 예배 이해에 대해 말하였는데, 둘째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납 됨"으로서의 예배이해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어떤 종류의 행함을 보시고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우리를 받으시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에 동참케 됨으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용납되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회중은 부름과 응답이라는 상호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다. 이 같은 교제는 이미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즉 아담의 법죄 이전에 이루어졌던 행위였는데 하나님과 인간의 예배 형태적 교제는 자연적 관계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기초한 인격적 계약 관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계약을 지키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서 교제의 완성을 이루셨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 함으로 계약관계는 파기되었고 대화가 단절되었으며 더 이상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과의 대화는 물론 가까이 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자업자득의 결과이다.
그러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경배하며 교제를 나누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회중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부름과 응답의 교제 관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죄인의 대속물로 주시는 무한한 은혜와 회중이 그 은혜를 자주적인 자기 결정에 의하여 받아들이는 신앙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버트 G 레이번은 말하기를"예배는 신자의 새 생명의 활동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나타난 신격(Godhead)의 충만과 그의 강력한 구속의 행위를 깨닫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에게 합당한 영광, 존귀, 순종을 살아계 신 하나님에게 드리기를 노력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 된 자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에 대하여 믿음으로 응답하고 순종으로 봉사해야 하는데, 이것이 기독교 예배의 본질이요 핵심인 것이다.
3). 예배의 주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의 부름과 응답이라는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배가 현실화 될 때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체들의 상호적인 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예배에는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주체가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며 이 때의 주체는 하나님과 인간이다. 회중 예배가 이루어지는 현상을 관찰해 보면 하나님과 회중은 어느 한편도 수동적인 입장에서 손님으로 예배에 참여하고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과 회중은 모두 예배의 주인이지, 손님의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배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하나님과 사람의 은혜 계약에 기초한 만남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회중은 모두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회중 어느 한편이라도 객체로서 예배에 참여한다면 진정한 예배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회중이 은혜와 신앙을 근거로 해서 만날 때 예배는 성립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그의 백성들에게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찬양과 감사로 이에 응답한다. 이와 같이 예배자는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예배에 참여하여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접촉을 가지게 되며 이 같은 만남을 통해 이 타락한 세상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된다. 또한 하나님도 경배의 대상으로서 예배에 참여하는데 예배자인 성도와 인격적 교제를 가지는 주체적 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나게 됨으로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과 회중 모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광희 교수는 예배를 이렇게 정의하였다 :
첫째, 예배신학은 인격적 관계를 전제로 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나타내는 것이며, 둘째, 예배의식은 예배신학을 직접적,예전적으로 세상에 증거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예배의식은 선포적 의미로서 세상에 대해하나님을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이다.(롬12:1)
4). 예배의 목적
인간이 살아가는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표현하는 행위"(시 29:2, 96:8)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목적은 예배가 지향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목적이다. 인간이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이요(시 95:6),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죄로 더렵혀진 인간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으며(창 3:8),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능력을 빼앗기게 되었다(사 59:2, 64:7, 호 5:6), 은혜는 사라지고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가려 해도 죄가 그 길을 가로막게 되었다.(롬 7: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셔야 할 필요성이 대두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간의 죄를 씻어 주실 때에 인간은 비로소 믿음으로 능력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게 된 것이다. 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성도들의 행위가 예배로 표현되는 것이니 예배에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삶의 목적은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으며 예배의 목적은 "회중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을 계속적으로 새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서 그에게 맡겨진 책임을 충실히 감당하며 주어진 삶을 승리로 이끌 때에 비로소 예배의 목적은 완성되는 것이다. 루터는 초기에 " 죄인의 개종" 또는 "공중의 교육"이 예배의 목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바울이 말한 대로 "교회의 덕을 높이는 것"(고전 14:3-5, 엡 4:11-16)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엡 2:19-22)들이니, 궁극적인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5). 예배의 방법
오늘날 교회가 점점 세속화 되어가고 예배마저 세속화의 강한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교인들이 '공중 예배가 별로 의미가 없다" 고 말하고 있으며 예배 참석율이 점점 떨어져가고 있는 현실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 올바른 예배의 방법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방의 수가성에서 만난 여인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요 4:24)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은 문자적으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중생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리의 빛을 받은 자가 성령의 인도함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를 인도하는 자를 포함한 모든 예배자들이 지향해야 할 예배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참된 예배는 성령의 활동하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예배가 하나님의 초청(계시)과 인간의 응답이라는 요소들로 구성된다고 할 때 성령을 통해서 계시되고, 성령의 깨닫게 하심, 또는 인도하심으로 인간이 응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성령이 자유하시므로 예배의 형식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진리"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어느 정도의 억제함을 생각해 볼 때 너무 단편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완전한 예배의 자유함을 주장한다면 성경도 필요 없게 되고, 주술적 모습만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올맨이 "기독교 예배는 주님의 자유와 주권에 개방되어 있다. 예배는 교묘하게 다루기를 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배는 마술과 정 반대다"라고 말했듯이,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활동이 자유롭고 주권적이므로 인간이 성령의 활동에 대해서 어떤 규정을 세울 수는 없지만 예배에 있어서의 인간의 책임이 무엇임을 알게 하고 성령의 인격과 역사에 관한 명백한 교훈을 담은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따라서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 예배는 신학적인 제약을 받아야 하며, 예배 의식이 성령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면, 오늘날의 예배는 지난날의 기독교 예배와 일치하는 것이다.
(2). 질서 있게 드리는 예배.
예배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행위이다. 즉, 예배란 고립된 개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교회 전체의 행위이기 때문에 모든 신자는 단체에 대한 강한 소속감을 가져야 하는데, 이 단체의 가장 중요한 활동이 공적 예배라는 말이다. 신자들이 예배하기 위해 모였을 때 거기서는 자연스럽게 신자들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이 연합의 집단적 활동은 반드시 어떤 형태를 필요로 한다. 홀로 예배하는 자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해도 좋겠지만 공동체 속에 개인들이 집합했을 때는 어떤 질서가 필요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예배 의식이다. 오늘날 예배의 의식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어떤 교회들도 실상 그들이 모였을 때는 어떤 질서가 생겨나게 되고 , 그 질서는 새로운 예배 의식을 형성하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예배 의식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모순이 되고 말기 때문에, 예배 형식의 자유로움을 주장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반면에 예배 형식의 고착화는 예배에 식상하는 신자들을 양상하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며, 예배에서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를 거스리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형식의 자유로움을 가지되 어느 정도의 질서를 가지고 드려지면 자연히 예배 형식은 취해지는 것이다.
(3). 하나님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
예배는 신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이 예배를 완성시켜 주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예배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지만,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예배를 성부께 중개하며 ,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구원과 온갖 복을 예배자들에게 중개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배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 행위를 하나님의 역사 하심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자의적 행위로 인식한다면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말이다.
6) 예배의 구성 요소
예배의 구성 요소를 살펴보려는 것은 예배의 방법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정리해 보려 함이다. 예배는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 즉 역사적 사건들에 뿌리를 둔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극적으로 공연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예배에서의 공연은 낭독과 드라마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 낭독(신앙고백, 찬송, 설교)과 드라마(혹은 의식)는 그 근거를 구 약에서의 유월절, 신약에서의 성찬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앤드류 블랙우드는 예배를 "가장 훌륭한 예술"이라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바와 같이 만일 설교가 하나의 예술이라면 전체는 그 어느 한 부분보다 더 나아야 하기 때문에, 공 예배는 더 훌륭한 것이 되어야 한다." 고 말했다. 매주 예배를 준비하고 인도하는 목회자는 예배 인도의 기술의 명수가 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명수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참으로 의미 있는 예배의 부분들을 적당한 순서에 둘 수 있다면 설교의 기술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러나 단순한 변화를 위하여 예배 순서에 어떤 새로운 것을 넣거나 땜질하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그 문제를 주의 깊이 연구해야 하고 신학적으로 정확할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정확하며, 지적으로 만족을 줄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현대 한국 교회의 예배는 크게 다섯 가지의 요소로 구성되고 있는데 그것은 대체로 기도, 헌물, 음악, 말씀, 친교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예배 형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음악이다. 왜냐하면 음악으로 시작해서 음악으로 끝나는 것이 예배이며, 음악 속에 말씀과 기도의 요소를 포함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배의 음악은 찬송, 송영, 찬양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말씀은 예배의 부름과 성시 교독, 성경 봉독, 설교등의 형태로 나타나며, 기도는 형식적 기도와 비형식적 기도로 나눌 수 있는데 형식적 기도는 사도신경, 주기도문, 축도, 비형식적 기도는 대표기도, 공동기도, 묵상기도, 통성기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헌물은 각종 헌금과 헌납된 물건으로 구분되며, 친교는 광고, 새신자 환영, 성도의 교제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 형식은 교파마다, 교회마다, 조금씩 다룰 수 있는데 형식이 어떠하든지 간에 모든 예배의 요소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부름과 응답이라는 상호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의 형식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오늘날의 예배의 형식들은 낭독과 드라마(의식)라는 고대 교회의 예배 형식이 전승되어 온 결과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또한 예배에 깊이 관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감안하면 신학적으로나 영적으로 매우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예배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요 은혜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귀한 예배에서 찬양(찬송) 때문에 예배를 망쳐버린다면 결코 하나님은 기뻐하시지도 않으시겠지만 성도의 예배를 받으시지도 않으실 것은 확실한 것이다. 예배와 찬양의 관계에서 찬양(찬송)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가를 이론을 근거로 하여 그리고 현재의 목회자들의 찬양(찬송)에 대한 성경적(신학적)지식에 결부 시켜 예배에 찬양(찬송)이 차지하는 비중과 또한 이론적(신학적)으로 정립하여 나갈 때 예배는 예배다워지며 하나님은 기쁘시게 예배를 받으시게 되어질 것이다.
2. 찬 양
예배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영광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찬양만큼 적절한 방법도 없다. 찬양은 예배 형식이 이루어질 때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났고, 하나님 자신도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찬송을 부르게 함이라고 말씀하셨다.(사 43:21). 그러므로 찬양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어야 하고 궁극적인 목적이어야 하는데, 본 장에서는 찬양의 개념에 대하여 몇 가지 관점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찬양의 본질
찬양이란, 구원받은 자들이 넘치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속성, 이름, 그리고 행위의 탁월함을 선포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높여 드리는 경축적인 예배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찬양이란 하나님에 대한 경배로서, 그것은 항상 능동적이며, 단정적이고, 표현되어지는 것이며, 개방적인 것이다. 찬양이 언급되어지는 곳에는 항상 움직임과 행동, 소리, 그리고 노래가 수반되어 나타난다.
구약 성경에서 찬양과 관계된 히브리어들의 뜻을 보면 <칭찬하다> <자랑하다> <축하하다> <경배하다> <두 손을 치켜들다> <감사하다> < 무릎을 꿇다> <송축하다> <경의를 표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찬양으로 표현되는 헬라어들은 <찬양하다> <찬미하다> <찬송하다> <영광을 돌리다> <영화롭게 하다> <고백하다> <감사하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의미들은 경배와 감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경배는 묵상하는 예배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탁월하신 행위에 몰두하고, 친밀한 관계 안에서 표현된 사랑이며, 행위와 행동으로 표현된 것이다. 감사는 고마움을 나타내는 예배이며, 믿음의 표현이며, 하나님이 이루신 아름다운 일에 대한 반응이다. 이 같이 찬양과 경배, 그리고 감사가 가지고 있는 외형적 특징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본질적인 목적에는 차이가 없다. 즉, 찬양은 전 인격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를 들어내어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육체와 정신, 영으로써 하나님을 높여드려야 하며 찬양을 위한 효과적인 도구인 음악으로, 행위로 그리고 찬양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홀로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만을 찬양해야 한다.
요한 세바스챤 바하가 그의 모든 작품의 첫 머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기록했듯이, 모든 찬양은 (음악이든 다른 형태이든지 간에)인간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하여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이름이 영광받 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2) 찬양의 주제
찬양의 본질이 경배라면, 거기에는 경배를 받으시는 대상과 경배를 드리는 경배자가 있게 마련이다. 경배의 대상은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지만 경배자는 매우 다양해서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만물(계 5:13)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경은 여러번 거듭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성경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단순히 다른 존재와 구별하기 위해 쓰여지기 보다 여호와가 어떤 존재인가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매우 타당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하여 여호와의 이름으로 사용된 용어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구약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들
① 엘로힘
<엘로힘>은 창세기 1장에서부터 사용된 이름으로 성경에서 2,700회 이상 사용되었다. 이 이름의 어원은 "위대하고, 전능하며, 두려운 자"라는 뜻을 가진 <엘> (EL)이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엘로힘>이 "선언하다", 또는 "맹세하다"의 뜻을 가진 <알라> (Alla)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위엄하신 하나님, 창조주와 통치 주 하나님으로서의 일반적인 면을 지시한다. <엘로힘>은 하나님의 복수(Plural)적 호칭으로서 이 점이 암시하는 바는 분명히 삼위(Trinity)의 하나님을 뜻한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하나님의 완전무결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강한 의미를 나타내는 복수형을 썼다고 볼 수 있다. 즉 찬양의 완결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② 엘 샤다이
<샤다이>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48회 나오며, 이 말은 항상 "전지전능한"(Almighty)으로 번역된다. 이는 권세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미하며 특히 자연의 모든 세력을 굴복시켜 은혜의 사역에 이용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나타낸다.
③ 아도나이
구약 성경에 약 300회 나타나는 이 호칭은 복수형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주", "재판하다", "통치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은 전능하신 통치자, 모든 것의 굴복을 받으시는 "주"(Lord)이심을 나타낸다. 또한 헬라어로는 <쿠리오스>로 번역되며 에스겔서에서만도 약 200회 이상이나 <여호와>라는 호칭과 관련되어 쓰여지고 있다. 이러한 율법이 의미하는 바는 <여호와>, 즉 "자존하시는 자"(the one who is)는 동시에 "다스리는 자"(the one who reigns)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라는 말을 들을 때는 이상의 모든 의미는 물론, 그 이외의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④ 여호와
<여호와>는 성경에서 가장 자주 사용된 이름으로써 6,800회 이상이나 사용되어졌다. 이 이름의 핵심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의 정체(identity)에 대해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대답하신 내용이다. 는 항상 살아있는(ever-living)분이며, 또 유일하게 살아계시는(only-living)분이고, 스스로 존재하는(self-existent)분이자, 자신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분이시다. 또한 <여호와>란 이름은 여러 용어들과 같이 사용되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성경에 기록된 용어들을 보면, <여호와 이레>(출 22:14), <여호와 로페>(출 15:26), <여호와 닛시> (출 17:15), <여호와 카데쉬> (레 20:7), <여호와 샬롬>(렘 23:6), <여호와 샴마> (겔 28:35) 등이 있다.
이와 같이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의 이름들을 살펴보았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경배의 대상과 찬양의 주체로서 어떤 관련이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아멘"이 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나타내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의 안에 있는 아버지의 존재하심이라면 우리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각기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삼위의 하나님이 경배의 대상으로서 찬양의 주체가 되심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또 다른 찬양의 주체 즉, 경배자에 대하여 살펴보자. 본래 하나님은 그의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로부터 찬양 받으시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은 창조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 할 수 있다.
(2) 찬양해야 할 피조물
성경에서 말하는 찬양해야 할 피조물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성경은 상황에 따라 찬양해야 할 피조물들의 이름을 거론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천사
"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20, 눅 2:13, 계 5:11-12)
② 성도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시 30:4)
③ 어린이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마 21:16)
④ 남녀노소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시 148:12-13)
⑤ 모든 백성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대상 16:36)
⑥ 모든 나라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라"(시 117:1)
⑦ 온 땅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시 66:1-2)
⑧ 만 물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
⑨ 여호와의 종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시113:1)
⑩ 호흡이 있는 자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시 150:6)
이와 같은 내용을 살펴 볼 때, 온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찬양의 주체로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됨을 알 수 있다.
3) 찬양으로 사용된 용어들
(1) 구약에서 사용된 용어들(히브리어)
① 할랄(haral)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 중에서 가장 최고의 표현은 <할렐루야>이다. 이 말은 "찬양"을 뜻하는 <할랄>에 여호와를 뜻하는 "야"가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할랄>은 구약 성경에서 99번이나 사용됨으로써 찬양의 뜻으로는 가장 많이 쓰여진 핵심적인 낱 말이다. 이는 < 칭찬하다. 자랑하다. 축하하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시편에서 주로 사용되었는데 찬양 자체가 그렇듯이 적극적이고 표출되는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대상 16:4, 시 56:3-4, 10, 84:4, 102:18, 113:3, 119:164)
② 야다(yada)
이 낱말은 구약에서 <할랄>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두 손을 높이 들고 감사함으로 경배하다. 두 손을 치켜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야다>는 하나님께 경배, 찬양, 그리고 감사등을 표현할 때 많이 쓰인 예배의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다.(창 29:35, 대하 20:21, 시 107:8, 15, 21, 31)
③ 바락(barak)
구약에 200번 이상 사용된 이 말은 <축복, 하나님으로부터의 축복, 또는 사람 사이의 축복>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나타내는 경우는 약 70번 정도 사용되었다. 이 낱말은 <무릎을 꿇다. 송축하다. 경의를 표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말의 대상이 하나님이 경우에는 하나님이 '성공과 번영, 그리고 풍성함의 근원'임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욥 1:21, 시 96:2, 103:1-2, 20, 22, 104:1)
④ 데힐라 (tehillah)
'데힐라'는 '할랄'에서 파생된 낱말로서 <노래하다. 칭찬하다>의 뜻을 지고 있는데 찬양의 중요성, 또는 방법을 나타냄으로서 찬양은 노래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성 어거스틴은 찬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다:
" 찬송가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만일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찬송하는 것이 아니다. 또 만약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하고 노래하기만 하면 그것은 찬송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찬송가란 다음의 세 가지 요소를 가져야 한다."
첫째로, 노래(Canticum)하는 것과, 둘째로, 찬양 (Laudem)하는 것과, 셋째로, 하나님(Deity)을 노래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좋은 의미로 정의된 이 찬송의 개념과 같이 노래하며, 찬송하는 것이 얼마나 찬양의 중요한 요소이며 방법인지를 알 수 있다. (신 10:21, 대상 16:35, 느 12:46, 시 22:3, 147:1, 사 61:3)
⑤ 자마르 (Zamar)
이 낱말은 시편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악기의 줄을 퉁기다. 노래하다. 찬양하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찬양에 있어서의 표현과 다양성을 의미한다.(삼하 22:50, 대상 16:9, 시 7:17, 9:2, 18:49, 27:6, 30:4, 33:2, 47:6-7)
⑥ 샤바흐 (Sabah)
이 말은 <외치다. 큰 소리로 말하다. 칭찬하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로써 찬양의 감탄적인 형태를 나타내는데 단지 몇 군데서만 '찬양'으로 번역되어 있다. (시 63:3, 117:1, 145:4, 147:12)
이 밖에 찬양을 뜻하는 히브리어들은 위의 도표에 기록된 용어들이 나타내고 있다.
(2) 신약에서 사용된 용어들 (헬라어)
① 아이네시스(ainesis), 아이노스(ainos), 아이네오(aineo)
'아이네시스' '아이노스' '아이네오'는 다 같이 <찬양, 찬미, 찬송>을 뜻하는데 '아이네시스'는 명사형으로서 동사인 '아이네오'로부터 파생되었으며 '아이네오'는 '아이노스'로부터 유래되었다. 특별히 '아이네오'는 구약의 "할랄"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신약에서 많이 쓰인 찬양의 낱말이다. (마 21:16, 눅 2:13, 18:43, 19:37, 행 2:47, 3:8-9, 롬 15:11, 히 13:5)
② 독싸 (doxa), 독싸조(doxaza)
'독싸'와 그것의 동사 형태인 "독싸조"는 일반적으로 <영광, 영광을 돌린다>로 번역되는데 때때로 <찬양, 찬양하다>로 번역되며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는 찬양의 말이다.
<영광송>(doxology)이라는 말은 '독싸'로부터 왔으며, 이 <영광송>을 송영이라 일컫는다.(마 5:16, 9:8, 15:31, 눅 2:14, 18:43, 롬 4:20, 5:16)
③ 에파이노스(epainos), 에파이네오(epaineo)
이것은 찬양(ainos)이란 단어 앞에 " ~에게"라는 접두어 "에피"(epi)가 붙은 말로서 "아이노스"의 강조한 형태이다. "에파이노스"는 <칭찬, 찬양, 찬미, 칭송>등의 뜻으로 쓰여졌고, "에파이네오"는 그것의 동사 형태이다.(롬 2:29, 13:3, 15:11, 고전 4:5, 엡 1:5-6, 1:12-14, 빌 1:11, 4:8, 벧전 1:7)
④ 율로게토스(ulogetos), 율로기아(ulogia)
이 낱말은 사람에 대해서는 쓰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대해서만 사용되는 낱말이다. 이 말은 <복된> 또는 <찬양 받으신>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눅 1:68, 롬 1:25, 9:5, 고후 11:31, 엡 1:3, 약 3:10)
⑤ 엑소몰로게오(exomologeo)
이 낱말은 <고백하다>는 뜻을 가진 "호믈로게오"로부터 파생된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고백하다, 자백하다, 감사하다, 시인하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 마 11:25, 눅 10:21, 롬 15:9)
이 밖에도 홈네오(hymneo), 홈노스(hymnos) - 메칼루스(megaluno) - 프쌀로(psallo), 프쌀모스(psalmos)등이 있으며 이 밖에도 많은 찬양의 뜻을 지닌 낱말이 있다.
4) 찬양의 방법론적 이해와 결과
리프브래 교수는 <찬양이란 믿는 자들이 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표출적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속성, 이름, 그리고 행위의 탁월함을 열심히 선포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높이는 경축적인 예배> 라고 정의하고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① 찬양은 경축적인 예배이다.
② 찬양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높이는 것이다.
③ 찬양은 밖으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④ 찬양은 열성적인 것이다.
⑤ 찬양은 선언과 선포이다.
⑥ 찬양은 하나님의 속성 , 이름, 그리고 행위가 중심이 된다.
⑦ 찬양은 넘치는 기쁨의 발산이다.
앞에서 찬양에 대한 용어를 살펴 볼 때 이러한 용어들을 통해서 찬양의 여러 가지 의미들을 알 수 있듯이 찬양을 드리는 방법도 다양해 질 수 있는데 여기서는 찬양의 수단과 방법, 자세, 시간과 장소등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내용을 알아보고자 한다.
(1). 수단과 방법.
찬양을 드리는 방법으로 ① 어떤(무엇으로) 것으로, ② 언제 ③ 어디에서④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를 말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가). 입을 사용함
① '말하는 것' (시 34:1, 107:32, 126:2)
② '노래' (시 27:6, 28:7, 59:16-17, 68:4, 69:30, 98:1-4, 107:22, 144:9, 147:7, 149:1, 엡 5:19)
③ '외치는 것' (시 32:11, 66:1-2, 17, 계 7:10)
(나). 손을 사용함
① ' 손을 듦' (시 63:4, 134:2)
② ' 손벽을 침' ( 시 47:1)
(다). 몸을 사용함
① ' 일어남' (시 134:1)
② ' 허리를 굽힘' (시 95:6, 대하 29:30)
③ ' 무릎을 굻음' (시 95:6)
④ ' 춤을 춤' (삼하6:14-16, 시 149:3, 150:4)
⑤ ' 기뻐 뜀' (행 3:8)
(라). 악기를 사용함
(시 57:8, 81:2-3, 92:1-3, 98:4-8, 144:9, 147:7, 149:3, 150:3-5)
(2) 찬양을 드리는 올바른 자세.
① 기쁨으로 (시 9:2, 28:7, 63:5, 100:2, 149:5, 렘 31:7)
② 즐거움으로 (대하 23:13, 29:30, 시 9:2, 66:1-2, 100:1)
③ 감사함으로 (시 92:1-3, 대하 3:12, 롬 15:9)
④ 전심으로 (대상 13:8, 시 9:1-2, 86:12-13, 138:1)
⑤ 마음으로 (고전 14:15)
(3) 찬양해야 할 시간.
① 성전 문에 들어갈 때 (시 100:2-4)
②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느 5:13)
③ 기도를 응답 받았을 때 (시 28:6)
④ 가난 할 때 (시 74:21)
⑤ 감사할 때 (대하 7:6)
⑥ 병들었을 때 (행 3:8)
⑦ 회개할 때 (시 51:14)
⑧ 새벽과 저녁에 (대상 23:30)
⑨ 하루에 일곱 번 (시 119:164)
⑩ 기쁠 때 (약 5:13)
⑪ 슬플 때 (욥 1:21)
⑫ 시시 때때로 (시 34:1)
⑬ 날마다 ( 시 96:2)
⑭ 일생동안 ( 시 104:33)
⑮ 자손까지 대대로 ( 시 78:4)
ⓐ 낙심될 때 (시 42:5-6)
ⓑ 주를 묵상할 때 (시 93:5-6)
(4) 찬양해야 할 장소.
① 가정에서 (행 2:46-47)
② 침상에서 (시 149:5)
③ 교회에서 (히 2:12)
④ 성소에서 (시 150:1)
⑤ 성도의 회중에서 (시 149:1)
⑥ 정직한 무리들 가운데서 ( 시 111:1)
⑦ 많은 백성들 중에서 (시 35:18, 109:30)
⑧ 열방 중에서 (시 57:9)
⑨ 전쟁터에서 (대하 20:21)
⑩ 옥중에서 (행 16:25)
⑪ 높은 데서 (시 148:1)
⑫ 천국에서 (계 14:3)
⑬ 하늘에서 (시 148:1)
⑭ 시온에서 (렘 31:12)
⑮ 신들 앞에서 (시 138:1)
ⓐ 땅 끝에서부터 (시 42:10)
(4) 찬양의 결과.
① 영혼의 즐거움과 만족을 준다. (시 7:2)
② 마음에 큰 기쁨을 준다. (시 28:7)
③ 많은 사람이 두려워한다. (시 40:3)
④ 마음이 영원히 산다. (시 22:26)
⑤ 많은 사람이 주를 의지한다. (시 40:3)
⑥ 두려움이 없어진다. (시 56:3)
⑦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욜 2:26)
⑧ 기적이 일어난다. (행 16:25-26)
⑨ 구원받는 수가 늘어난다. (행 2:47)
⑩ 전쟁터에서 큰 승리를 얻는다.(대하 20:29)
⑪ 우리의 영혼을 하늘 나라로 이끌어 준다. (시 42:4)
이상에서 살펴 본 바대로 찬양은 예배의 도구로서 가장 적합한 것이니 우리의 찬양은 가장 가치 있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의 가치 있는 형태란 음악적 가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하는 찬양,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찬양이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습관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드리는 찬양은 이미 찬양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양을 드릴 때는 마치 최초의 또는 최후의 찬양을 부르듯이 감사와 감격의 찬양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예배와 찬송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현대의 많은 목회자들은 설교(말씀 증거)만 잘하면 된다는 아주 잘못된 목회관념(예배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설교야말로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코 찬양이 없는 예배, 찬양을 소홀히 하는 예배에 말씀증거(설교)가 아무리 뛰어났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심은 물론 이런 예배를 과연 예배라 할 수 있는가?
예배의 시작 전에 찬양을 2-3곡 정도 부르고 곧 바로 예배에 들어가는 교회와 30분 이상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예배가 이루어지는 교회의 성도의 충만함과 믿음과 교회 성장에는 현격한(분명한) 차이가 있다. 찬양이 있는 예배에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와 함께하심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찬송은 결코 무시되어서도 안되며 또한 등한시된다거나 하여서는 결코 안 된다. 따라서 현대의 목회자들은 찬송을 배우고 그것을 예배에 접목을 시켜야 할 것이다.
III. 예배 의식으로서의 찬양
1. 예배 음악의 개념
예로부터 음악은 인간 생활의 경험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배 의식에 있어서도 신앙 체험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절히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예배와 음악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음악이 없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예배 의식에 있어서 음악의 역할과 형태는 예배의 정신과 목적을 상기시키고, 예배를 돕는 보조자로 봉사해야 하며, 음악 그 자체가 예배의 행위여야 한다. 예배에 있어서 음악은 예배자들의 종교적 의식이나 감정을 감화시킴으로서 말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까지도 표현할 수 있다.
예배자들은 음악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높이 찬양하며, 위로와 축복의 메시지를 듣는다. 또한 음악을 통하여 명상하며 참회와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 순종과 헌신을 다짐한다.따라서 예배 음악은 철저히 예배를 위한 음악이어야 하며 하나님과의 대화가 잘 이루어지도록 도와주는 도구 역할을 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계시를 받는데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택희 교수는 예배 음악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 종교와 음악은 서로 뗄 수 없고 예배는 음악이 없이 드릴 수 없을 것이다.
(2) 기독교에 있어서 음악은 다른 어떤 예술 형식보다 더 오래 전부터 종교 생활 특히 예배에 기능적으로 활용되어 왔다.
(3) 음악은 음악 그 자체만으로서도 훌륭한 예배가 될 수 있다.
(4) 음악이 예배 자체의 실제적인 매개체가 된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5) 몸과 마음으로 드리는 산 제사는 곧 하나님께로 보내는 노래와 멜로디를 만드는 것이다.
(6) 예배자들은 음악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높이 찬양한다.
(7) 하나님은 예배에서 음악을 사용토록 지시하고 격려하셨다.
(8) 개신교의 음악은 단순히 예배에 의한 기능이나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9)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음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음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 보다 꼭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 음악 그 자체가 예배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10) 궁극적인 음악의 목표가 예배임을 알아야 한다.
(11) 하나님 앞에서 그 아름다움이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아름다운 음악이 된다.
(12) 영적인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영적인 언어인 음악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13) 회중 예배가 시작된 이래 음악은 예배의 커다란 협조자 역할을 했다.
(14) 목표가 예배라면 음악은 경건한 것이라야 한다.
(15) 음악은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예배 정신을 더럽히지 않는 한 종교적 예배에서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예배에 특별히 공헌하는 특별한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에 있어서 음악은 철두철미한 신앙 고백이어야 하며 참회의 노래이어야 한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그들의 예배에서 음악을 사용하도록 지시하고 격려하였는데 예배 의식에는 설교, 기도, 성경 읽기 등이 있다. 그러나 군집한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잘 움직이게 한 것은 찬송(음악)이었다.
2. 예배 음악의 성서적 이해
먼저 예배 음악을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로 구분하여 성서적으로 이해를 시키고 역사적으로 학문을 깨닫게 될 때 현대의 목회자들이 예배에서 찬송이 갖는 비중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음악의 성서적 이해와 역사적 이해를 도모해 보고자 한다.
1) 구약 성서에 나타난 음악
우리가 예배와 음악에 관해서 연구하려면, 먼저 구약 성서를 살펴보아야 한다. 구약 시대에 음악이 있었다는 것은 인류 최초의 이방인 음악의 시조였던 유발과 그의 아비에 대한 기록에서 알 수 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음악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구약 시대의 모든 음악(시편을 포함한)들이 어떻게 불리워졌는지 그 확실한 형태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러한 구약 시대의 음악들을 알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학자들은 몇 가지로 유추해 추측하고 있다.
첫째, 구약 성서, 그 자체의 기록을 통해서 그 기록에 어떠한 음악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 옛날 벽이나 마루, 혹은 항아리, 벽화에 나타난 악기 모양을 보고 알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 악기들이 어떻게 제작되었으며, 어떠한 음률로 연주되었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셋째, 유대교 회당 음악을 통해서 유추하는 방법인데 이 유대교의 회당 음악은 수 천년 동안 스승으로부터 제자들에게 구전되어 내려온 원형이 거의 파괴되지 않은 음악이다.
구약 성서에서 음악에 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한 구절은 출애굽기 15장 1절의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라는 구절이다.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경축하면서 모세와 미리암과 함께 부른 노래는 아마도 히브리인 최초의 종교적인 노래일 것이다.
물론 당시의 음악들이 즉흥적인 것으로 보여지듯이 히브리인들의 종교 음악은 신앙적인 특성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이 같은 사실은 사사기에 기록된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에서도 알 수 있는데 지금도 우리 나라를비롯한 세계 여러 곳에 그러한 형태의 음악들이 남아있다.
이렇게 전승되어진 히브리인들의 종교 음악이 마침내 성전 시대에 이르러 체계를 이루어 가기 시작하는데, 역대상 15장 16절이나, 23장 5절에서 다윗이 음악 하는 자들을 훈련시키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역대상 25장 1절에서 8절까지에는 다윗이 음악 하는 자 288명을 선정해서 특별히 훈련시키고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4,000명의 레위인을 뽑아서 찬양 대원으로 세운 점, 또는 나팔부는 제사장 120명이 있었다는 기록들을 보면 당시의 음악 활동이 상당히 체계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음악이 히브리인의 생활에 중요하고, 필수적인 위치를 차지하게된 다윗의 통치기간 동안 예배시에 수 천 명의 레위인들에게 음악이 맡겨지게 되는 관례가 생겨났다. (대상 9:33, 15장, 16장, 23장, 25장) 기원전 968년에 솔로몬에 의해서 성전이 세워지자 예배에서의 음악 활동은 다윗이 계획했던 대로 실행되었다. (대하 5장, 7장), 대규모의 기악 합주와 합창단이 성전 예식에서 자주 연주하였다. 당시 연주된 음악의 형태나 기능들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제사드리는 것 만큼이나 성전 예배에서 확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믿어진다. 당시의 성전 예배에서 나타난 특징들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음악을 연주하는 레위인은 성별 된 자로서 찬양하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대상 9:33, 23:5)
②. 찬송과 함께 악기(Harp, Cymbals, Hom 등)가 사용되었다.
(대하 5:13)
③. 찬양하는 레위인들에게 맡겨진 임무가 구체화되었고, 그들은 전문화 된 교육을 받았다. (대상 15:22, 25:1-8)
④. 예배 음악이 조직화되었고 많은 인원이 찬양 대원으로서 임무를 맡았다. (대상 25장, 대하 5:12)
⑤.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찬양에 참석하였다.(대하 5:12, 7:6)
그러나 주전 578년 예루살렘이 느브갓네살에게 정복되고 파괴되어 이 때 살아 남은 유대인들은 70여년간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회당 예배가 발생하였다. 그후 주전 516년에 스룹바벨의 성전이 세워졌지만 회당은 성전과 함께 공존하였고, 계속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 회당 예배에서도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그것은 기악이 거의 배제된 성악 위주의 음악이었던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회당 예배에서 나타난 음악의 특징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2). 신약 성서에 나타난 음악
신약 성경에는 예배에 대한 내용이나 순서가 뚜렸하게 기록된 부분이 없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무질서한 예배를 책망하면서 예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
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
라.
이 말씀은 예배 요소의 다양함과 공동체적인 개념의 중요성에 대하여 지적하는 말씀이다.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어떤 예배 음악을 주로 사용했을까? 하는 질문에는 이론의 여지없이 회당의 예배 음악을 사용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사도들은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고 초대 교회도 형태가 회당과 매우 비슷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때 교회 음악 역시 회당의 음악과 비슷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은 회당 음악에 얽매어 있기보다는 매우 자연스럽게 음악을 사용했다는 것을 신약 성서 여러 곳에서 발견 할 수 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 한 것이나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언급한 것을 보면 적어도 세 종류의 예배 음악 형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바로 그것인데 일반적인 해석에 의하면 '시'는 구약 성서에 있는 '시편'을 '찬미'는 시편 이외에 성경에서 찿아 볼 수 있는 '찬미의 노래', 그리고 '신령한 노래'는 새로운 노래로서 특히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찬미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매우 열성적으로 찬양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고(약 5:13),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 나타나는 음악에 대한 바울의 권고를 보면 바울은 그리스식 사고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과 그리스 작가들의 의향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들이 전도하기 위해서는 전도하고자 하는 나라의 문화에 정통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야고보서 5장 13절에 언급된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적인 근원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즐거워하는 자는 노래 할 것이요'라는 구절은 히브리인들에게는 아주 적합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시편은 음악 문학의 본질적인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그가 히브리 음악의 민족적 성격과 그리스 음악의 예술적 기반에서 종합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베소서 5장 19절이나, 골로새서 3장 16절, 야고보서 5장 13절 또는 고린도서나 로마서의 말씀들은 교회의 지정된 예배나 회중에게만 국한시킨 말씀들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러한 특별한 예배 의식도 관련돼 있기는 하지만 그 보다도 오히려 매일 매일 신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먼저 보여주는 말씀이다.
3. 예배 음악의 역사적 이해
1) 속사도 시대에서 중세 이전까지 (A.D.100~400)
이 시기는 기독교가 세계를 향하여 뻗어 나갔는데, 이러한 확장은 히브리 문화와 , 로마문화, 그리고 여러 이방 민족의 문화가 혼합되어지는 현상을 나타냈다. 이 시기의 음악들은 물론 단음으로 된 멜로디를 가지고 있었으며, 다만 그리스 음악이 체계적인 이론을 발전시켜 현대의 음악 이론의 기초를 만들어 냈지만, 역시 단음 선율이었다. 그리스 음악은 시적인 요구로부터 일어나는 언어를 리듬적인 형태로 맞추어 성경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불렀다는 점에서는 히브리 음악과 비슷했지만 기보법과 음계, 그리고 선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달랐는데 이 점이 초기 기독교 음악에 많은 영향을 준 점이다.
그러나 초기의 200년 동안은 기독교 음악의 체계가 잡히지 않아서 각 지역에 따라 짙은 지방색을 띠고 있었다. 3세기에 이르러 많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이들의 기독교 음악을 잘 정립해서 이교도의 나뿐 영향이 미치지 못하게 했다. 더욱이 콘스탄틴 대제의 후원이 확립되면서 예배 음악은 잘 다듬어지고 정비되어서 널리 교회로 보급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틴 이전까지는 회당 음악의 형태가 전승되었으며 악기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회당음악의 전통이었으며 또한 박해를 받고 있던 교인들로서는 악기를 사용한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라 믿어진다.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교회 음악가는 밀나노의 성 암브로시우스(St. Ambrosius, 340-397)인데, 그는 성가의 완성을 꾀하여 4선법을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훗날 그레고리우스(Gregorius, 540-604)의 8교회 선법(Church Mode)의 기초가 되었다. 유세비우스는 이 기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모든 성도가 한마음,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성직자는 예배를 훌륭하게 인도했으며 의식은 경
건하고 엄숙하게 행하여졌고 교회의 엄숙한 제도는 중시되었
다. 시편이 노래되고 성가가 낭독되며 거룩한 예배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예식도 환해졌다. 모든 남녀 노
소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와 기쁨의 기
도를 드렸다. 모든 주교들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회중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미했다."
암브로시우스에게서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음악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어거스틴은 그 음악의 리듬적 구조에 대해서 암시를 주고 있다. 그에 의하면 아이암빅(iambic) 운율이란 것은 4분의 3박자에서 4분음표와 2분음표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시기의 모든 노래들은 악기의 반주가 없이 제창이나 독창으로 불려졌다. 이러한 암부르시우스의 찬송은 전 유럽으로 퍼졌으며 후에 교회의 작곡가들은 "멜리스마"라고 하는 하늘 장식을 사용하여 그의 음악을 아름답게 만들었지만 최근에는 암브로시우스 본래의 선율을 찿아 내기 위하여 장식적인 성격의 모든 음을 없애려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2) 중세 시대 (A.D. 400 - 1400)
암브로시우스 이후 교회 음악의 형식과 창법은 다시금 혼란을 일으켜 6세기말에는 한심한 상태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똑바로 보고 음악이 예배에 빠뜨릴 수 없는 요소임을 인식하여 개혁에 착수한 사람이 그레고리우스 1세였다. 그는 각 지방 교회의 성가를 정비하고 곡을 선정하여 "그레고리안 성가"로 통일시켰다. 이 과정에서 암브로시우스가 사용했던 4개의 선법에 다시 4개를 더하여 8선법을 탄생시켰다.
그레고리안 성가가 정리된 후 서방 교회에서는 공식적인 예배 음악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 성가는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었다. 즉 단순한 것과 복잡한 것이 있었는데 단순한 것은 성경 구절의 낭독에 사용되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음으로 노래하는 것이다. 복잡한 것은 그 길이와 음의 영역 및 정교함이 무척 멋지고 , 우아하며, 미사(Mass)중 음악적으로 중요한 부분인 "키리에"(Kyrie), "글로리아"(Gloria), "상투스"(Sanctus), "아뉴스데이"(Agnus Dei)에 사용되었다.
미사 (Mass)는 고유문화 통상 문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표1), 고유문은 교회력의 계절과 특수한 행사에 따라 내용이 변하기 때문에 작곡가들이 임의로 작곡할 수 없었다. 통상문은 고유문과 달리 미사를 드릴 때마다 언제나 같기 때문에 미사곡으로 작곡된 것은 통상문 뿐이다. 그 종류로는 키리에, 글로리아, 크레도(Credo), 상투스, 베네딕투스, 아뉴스데이 등이 있다.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및 각 지방의 교회 음악들이 집대성 된 로마 교회에는 세 종류의 음악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 제창 성가 (Unison Chant) ; 로마 멸망 이후부터 1100년경까지 로마 교회의 유일한 음악이었다.
② 무반주 합창 음악 ; 11세기에 발전하기 시작하여 16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③ 독창과 합창의 혼합 ; 16세기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악기가 반주를 맡았다.
일반적으로 단성 성가(Plainsong)라고 불려지는 제창 성가는 오늘날까지도 이상적인 교회 음악의 모형을 제시해 준다. 중세의 음악은 본문과 의식 ,또는 예배의 목적에 얽매어서 자유스럽지는 못했지만 높은 예술성을 나타낸다. 대개 단성 성가에는 단순한 것과 화려한 것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음 하나(간혹 드물게 두 개)에 한 음절의 가사를 붙이는 것이고, 후자(혹은 멜리스마틱)는 예배에서 불려질 본문가사의 근엄성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그레고리안 단성 성가는 예배와 아무런 영광이나 뜻도 없이 쓰여진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 구조는 10세기에서 11세기까지의 기간에 나타난 새로운 형식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10세기의 사본은 가수가 제창으로 부르지 않고 4도, 5도 혹은 옥타브로 병행되는 선율을 노래한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것이 시퀜스(Sequence)였다. 이것은 잘 정리되고 기록되어서 전통적으로 꼭 필요한 성가의 장식 구절이 된 수식구를 말하는데 연주자가 이것들을 쉽게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 가사의 리듬적인 정리가 이루어졌고 이것은 어떤 성가의 삽입된 수식구나 시켄스의 부가적인 재료가 되기도 했다.
12세기에 이르러서는 르네쌍스를 예고하는 음악의 형식들이 생겨났는데 그것은 콘둑투스와 모테투스였다. 이 형식들은 오르가눔과 디아포니를 사용함으로서 디스칸트가 일어나는데 초기의 디스칸트는 무질서한 음의 혼합으로 만족스런 소리를 내지 못하게 되어 결국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후에 현대 화성과 작곡에 중요한 요소가 된 반 진행 법칙에 등장하게 되었다.
12세기 후반 작곡에 흥미를 가진 수도사들은 3성부 작곡을 시작했는데 새로운 성부 작법을 위해서는 새로운 선율을 작곡해야만 했다. 이것은 선율을 조직적으로 세밀하게 서로 맞춰보거나 조사해 보지 않고서는 세 가지의 선율을 쓴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후기의 디스칸트 작곡은 16세기에 그 절정을 이룬 로마 교회의 합창 음악 작곡의 출발점이 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13세기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알 수 있는 음악사는 수도원 및 사원 학교에 있다. 그레고리우스 1세 때 성가가 정비되기 전까지 는 일반 회중들도 자연스럽게 음악 활동에 참여했으나 수도원에 성가 학교가 설립되는 등 음악 활동이 제도화됨으로써 회중들은 예배 음악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오히려 교회 음악의 수준이 저하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있어서도 폴리포니(Polyphony)의 발달이 가져온 교회 음악의 새로운 시도들로서 지적이면서도 기법적인 교회 음악을 작곡하려는 노력들이 많이 일어났다. 여러 성부 사이에 병 진행과 반 진행을 취급하는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디스칸트는 대위법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폴리포니 음악은 남부 프랑스의 '리모쥐'나, 극서 지방 순례지인 '산티아고데' '콤포스델라'에 이어 파리를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이들은 '노트르담 악파'라 부르는데 이 노트르담 악파를 역사 표면에다 크게 부상시킨 것은 '레오난'과 '페르탄'이었다. 이들은 세속 음악과는 현저히 다른 스타일로 작곡하였는데 13세기 이후의 종교 음악과 다른 형태의 음악을 비교해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노트르담 악파의 음악들은 전체적으로 고정된 신비적 표현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그 시대에 건립되었던 고딕 대성당들의 건축 양식과 공통된 것을 느끼게 한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음악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문학가들이 자신들의 모국어로 작품을 쓰는 등, 로마교회의 지배권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음악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프랑스에서는 마쇼(Machaut, 1300-1377)가 세속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을 주제로 하여 2-3 성부의 다성 음악을 작곡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란디니(Landini, 1325-1397)가 프랑스에서 쓰인 것과 같은 낭만적인 형식을 사용했으며 새롭고 명쾌한 마드리갈(훨씬 훗날의 마드라갈과는 다름)을 도입하였다. 이 시대의 음악을 비트리(Vitry)는 '아르스노바'(Ars Nova), 즉 <신 예술>이라 불렀다.
14세기 음악의 특징은 세속 음악의 품위를 높였다는 것이다. 13세기까지는 교회와 수도원이 헌신적으로 교회 음악을 지켜왔으므로 성가가 더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14세기에 들어서 세속 음악의 새로운 양상을 띄기 시작해서 가사를 자국어로 쓰고 멜로디를 높은 성부에 두는 등, 신예술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는 인간 영혼의 구원 이외의 소재는 잘 다루지 않았던 작곡가들이 자연적 미와 인생의 단순한 쾌락을 다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 음악 운동은 부르고뉴 악파를 거쳐 플라드르 악파(혹은 네델란드 악파)에 이르는 발전을 거듭하게 되는데 이러한 발달은 필연적으로 교회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새로운 다성 음악을 낳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종교 음악으로는 마쇼의 '노트르담미사'를 들수 있는데 사제이고 시인이면서 음악가였던 마쇼는 풍부한 감성과 탁월한 재능을 사용하여 새로운 예술의 중심에다 기독교의 본질적인 표현인 미사를 놓았던 것이다. 그는 앞 시대의 딱딱한 리듬 정형을 배제하고 새로운 유동적 리듬을 사용하는 특징 등을 가지고 있는데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한 작곡가에 의하여 연작으로 창작된 최초의 다성 미사곡이라는 점이다. 이 키리에로부터 아뉴스 데이에 이른 5장의 미사 통상문 창작법은 후세의 모든 작곡가들에게 미사곡 창작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 것이다.
3) 르네상스에서 바로크 시대 이전까지. (A.D. 1400 - 1600)
르네상스란 일반적으로 고대 문화의 부흥을 뜻하는 말이지만 음악에 있어서는 이러한 현상을 찿아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 시기의 음악은 바로크(Baroque)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내용을 보다 넓은 뜻으로 해석하여 인문주의적인 예술 ,창작 태도, 조화 및 비례의 중시, 합리적인 기법의 연구, 명확한 표현과 그러한 음악의 배후에 있는 인간상 등에 착안한다면 15세기말부터 16세기에 걸친 음악에는 틀림없이 르네상스적이라 일컬을 만한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나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음악 작품은 전 시대의 것에 비해 현저하게 넓어지고 새로운음 공간이 개척된 것도 회화의 있어서의 원근법의 탐구에 비길 수 있을 것이며 악보 인쇄술의 발명과 정량 기보법의 보급 또한 르네상스의 과학 정신과 관련된다. 르네상스 음악의 숨결은 이미 14세기의 마쇼나 란디니 등의 작품 속에서 느낄 수 있었지만 15세기말부터 16세기에 걸처 전개된 플랑드르 악파의 음악에 의하여 본격적인 첫 걸음을 걷게 된다.
이 시대의 대표적 음악가인 옥케겜(Ockeghem, 1430 - 1495)은 세속음악을 발전시키면서 교회 음악에서도 합창의 성부를 분리하고 합치는 방법을 잘 사용해서 조화 있는 다성음악(Polyphony)을 구사했다. 또한 그의 제자 죠스갱 데 프레(Josquin de pres. 1450년경-1495)의 음악은 르네상스의 문화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죠스깽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작곡의 개념을 수정한 것인데 특히 그의 미사곡에 이르러 르네상스 음악의 전형이라 일컬을 만한 것이 성립되었다. 일관된 모방양식, 명확한 악절 구분, 가사와 음악의 밀접한 연결, 균형 잡힌 악곡 구성, 완성된 순환 미사곡의 형태, 미사 각 부에 있어서의 정선율의 유기적인 통일과 변용, 절도 있는 정적인 표출력등은 음악에 있어서의 르네상스적 요소로 주목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대의 많은 음악가들은 죠스깽의 천재성을 깨닫지 못했지만 루터가 그의 훌륭한 자질을 인정하게 된다. 그는 죠스깽에게 섬세하고 예민한 음악성과 통찰력을 보았던 것이다.
15세기 후반에 죠스깽이 강조한 것은 각 성부들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정선율로 채택된 멜로디에 대선율이 추가되었다. 그러다가 후기에는 테너 성부에 추가된 대선율(디스칸트)과 함께 제3성부인 콘트라 테너 성부가 소리의 증대를 위해 추가되었다. 죠스깽 이전의 시대에는 이러한 성부들이 각각 독립적으로 취급되었고, 각 성부별로 가사를 따라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1450년 이후에는 각 성부에 같은 가사를 쓰게 되었고, 또한 각 성부는 독립된 선율이 아니라 성부간에 모방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작법에서는 음을 더 많이 공명시키기 위해서 3성부 이상의 것도 사용되었는데 화성적인 조화를 위해서는 더 많은 주의를 요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15세기 후반에 초보 단계의 화성 진행이 도입되었다.
죠스갱 이후에 서방 교회의 음악은 기교와 창법에 있어서 놀랄만한 진보를 이루었지만 당초의 숭고하고 엄숙한 정신을 잃어버렸고 세속적이면서 유회적이 되어 뜻 있는 이들의 근심을 자아내게 되었다. 그 즈음 성실한 신앙과 탁월한 능력으로써 교회 음악을 타락에서 구해내고 그것에 새로운 입김을 불어넣은 사람이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1525-1594)였다. 그는 주로 교황청의 대성당에 봉사하며 예배를 위한 작곡에 몰두하였다. 그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정서감과 음악적 표현의 청정함, 전통과 진보의 융합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그는 한마디로 르레상스 말기를 장식하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 즈음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개신교의 음악은 여러 면에서 로마 교회의 음악을 닮고 영향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 나름대로 독특한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루터는 암브로시우스 성가에서 힌트를 얻어 그 당시의 스타일로 그리고 독일 사람을 위하여 새로운 성가의 일종인 코랄을 창조하였다. 주요 선율이 화성적으로 처리되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최상성(소프라노)파트로 노래되어진 이 코랄은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 음악의 가장 귀중한 토대가 되었고 훗날 바하(Bach) 예술 속에서 현저한 광채를 드러낸다. 이 때에 만든 루터 자신의 노래 'Ein feste Burg ist under Gott'(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오늘날까지도 불려지고 있는 유명한 찬송의 하나가 되었다.
루터의 음악은 회중에 의해 불려지는 찬송(Hymn) 에 그 기반을 두고 있으며, 모든 예배와 음악에 평신도가 참여하게 하여 대중 노래가 예배에 도입되게 만들었다. 개인들은 구룹별로 독창적인 창의력을 발휘해서 예배드릴 수 있었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직접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다. 루터의 찬송이 특별히 중요성을 띄고 있는 점은 그것이 수 천년간의 성직자의 통제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와 다른 두 종교개혁자, 즉 칼빈(Calvin)과 쯔빙글리(Zwingli)의 음악관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한다. 이들이 가진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 모두 신령한 찬송을 원했다.
둘째 ; 자국어로 된 찬송을 만들었다.
셋째 ; 성경의 시편들로 신령한 찬송을 만들었다.
넷째 ; 성경 외적인 것들로 찬송을 만들기도 했다.
다섯째 ; 그들은 찬송을 절대로 예배의 부수적인, 즉 예배를 돕기 위한 하나의 장식물로 보지 않았다.
여섯째 ; 그들은 멜로디와 가사가 일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의 찬송관은 다음과 같이 다른 점을 보이고 있다.
◎ 쯔빙글리
①. 회중이 찬송을 부르는 것은 불가하다.
②. 찬송가 가사를 임의로 지어서는 안 된다.
③. 합창 음악을 가정에서는 할 수 없다.
④. 합창 음악의 예배시 사용은 불가하다.
⑤. 오르간 음악이나 기악음악이 예배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 칼 빈
①. 회중이 찬송을 부르는 것은 가하다.
②. 찬송가 가사를 임의로 짓는 것은 허용이 안 된다.
③. 합창 음악을 가정에서 하는 것은 가하다.
④. 합창 음악의 예배시 사용도 불가하다.
⑤. 오르간이나 기악 음악은 사용될 수 없다.
◎ 루 터
① 회중이 찬송을 불러야 한다.
② 찬송가 가사도 지을 수 있다.
③ 합창 음악이 가정에서 가하다.
④ 합창 음악의 예배시 사용도 가능하다,
⑤ 오르간이나 기악 음악도 교회에서 사용되어져야 한다.
이렇게 다른 세 사람의(넓은 의미에서는 루터와 다른 다 사람의 차이) 찬송에 대한 차이점은 최근까지도 개신교의 각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칼빈은 교회에서 악기 사용하는 것을 절대로 금했기 때문에 그의 추종자들은 그들 교회의 비싸고 값진 오르간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찬송도 교회 예배시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오직 교회 밖에서 개인적으로 부르는 것만 허용하였다. 그리고 예배시에는 "모든 찬양의 노래는 사람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신실한 찬양의 노래로 그 선율은 단순하고 순수한 것이어야 한다. "고 말하면서 오직 시편만을 부를 것을 허용하였다.
칼빈은 구약에서 악기를 사용한 것은 "그들이 아직 유치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구약시대를 지금에 와서 흉내 낸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은 가장 단순한 형식으로 예배되어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칼빈의 영향이 강하게 미친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즈, 독일의 일부 그리고 스위스와 같은 곳에서는 음악의 발전이 아주 미비한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그와 반면에 루터는 독일어의 찬송과 함께 라틴어의 찬송도 그대로 썼을 뿐 아니라, 예배도 독일어, 라틴어 모두 허용하였다.
루터는 음악을 신학 바로 다음가는 학문이라고 생각했고 아무리 큰 보수를 준다고 해도 음악에 대한 자신의 짧은 지식이나마 양도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했다. 음악은 악마를 쫓아버리기도 하고 사람을 즐겁게 하거나 슬프게 하기도 하며 감동을 안겨 주기도 하고 악한 것들을 잊어버리게도 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학문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음악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큰 은사요 선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루터는 음악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음악을 독일 국민 교육의 필수로 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사상 때문에 루터교에서는 음악을 충분히 공부하지 않은 신학도에게는 목사 안수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루터의 노력들로 인해 성가대가 생겨나게 되었고, 회중이 선율을 부를 때 성가대가 도와주게 되었다. 그러나 1600년경에는 성가대의 역할이 커졌다가 회중이 노래할 때 오르간의 화음을 맞추게 되자 대치되었다.
종교개혁 이래로 코랄의 전통적인 노래 방법이 계속 되긴 하였지만 원래의 투쟁적인 기풍은 완화되어 갔다. 때때로 옛날의 루터 찬송가의 이상을 부활시켜 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종교개혁 초기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활기 있는 회중 찬송은 부활되지 않았다.
4) 바로크 시대에서 낭만주의 시대까지 (A.D. 1600 - 1900)
17세기와 그 이후에 독일 개신교 음악에 의한 변화와 함께 로마 교회의 음악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교회 음악의 변천사가 항상 그러했듯이 옛날의 음악들은 세속 음악의 발전에 의해 야기되는 새로운 문화적 욕구를 더욱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음악으로 대치되었다.
독일의 개혁교회에서는 17세기초에 세 가지의 중요한 교회 음악이 사용되었다. 그것들은 코랄과 모테르와 오르간 음악이다. 또한 이 때에 화성, 조성, 그리고 형식구조의 새로운 발전의 산물로서 오페라(Opera)가 발전하게 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독일에서는 칸타타(Cantata)와 수난곡(Passion)이 창작되게 되었다. 따라서 17세기 독일의 '개혁된 음악'은 코랄, 모테트, 오르간 음악, 오페라 레치타티브, 오페라 아리아로부터 파생된 형식과 음조를 띄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음악에서의 이러한 발전은 형식주의와 미숙한 지방주의로의 타락을 나타내는 겉만 화려한 연주 양식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독일 개혁주의의 근본정신 마저 위협 받게되었다.
이때에 등장한 "요한 세바스챤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그때까지의 프로테스탄트 음악을 총 집대성하여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위해 새로운 음악의 보물 창고를 마련하였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교회의 반주자로 보냈으나 그 사이에 창작한 무수한 오르간 곡과 칸타타와 수난곡 및 모테트와 미사곡들은 복음주의의 신앙과 정화된 예배 의식과 코랄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프로테스탄트 음악의 빛나는 알맹이들이다.
바하의 음악에는 당시의 수학적, 철학적, 경향이 형태는 약간 다르지만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그것은 바하의 설득력 있는 논리적 구성력 가운데에 복잡한 구조상의 여러 문제를 즐겨 취급하는 경향, 또는 대위법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한 기교 가운데에 감추어져 있는 뛰어난 세련성과 수정 같은 투명성안에 존재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하의 음악은 다른 어떤 음악상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수학과 음악과의 내면적 관계를 나타낸다.
또한 바하는 어떤 종교 음악에서도 볼 수 없는 정렬과 설득력, 투철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으로서 성서와 기독교의 신조를 설명하고 있다. 그의 음악들은 위대한 설교자의 설교와 매우 닮아 있는 것이다.
바하와 함께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헨델(G.E. Hendel, 1685-1759)은 영국에서 활약한 음악가인데 그는 오라토리오(Oratorio) <메시아>로서 음악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다. 헨델의 오라토리오는 그 극적 성격을 알 때 비로소 바르게 이해 될 수 있다. 헨델은 오페라를 작곡하고 상연하는 30여년 간의 경험에서 현실적인 무대의 제약이나 극장에 읽히는 인습과 전통의 제약을 밟지 않고 가장 인상적인 형태의 음악극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메시아>를 작곡하는 동안 여러 차례 깊은 감동에 빠져 어떤 때는 넋을 잃은 상태로 있기도 했다. 더욱이 <할렐루야 코러스>를 작곡했을 때는 감격한 나머지 "하늘이 열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다"고 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어쨌든 헨델의 음악에 대한 공헌은 영국에서 많은 찬송 작곡가들이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또한 이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이어지는 고전주의 시대에서 화려한 음악의 꽃을 피우게 된다.
한편 개신 교회에서의 회중 찬송은 시편가의 발전에서부터 시작된다. 독일에서는 이미 루터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한 찬송가와 코랄이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칼빈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와 네델란드에서는 시편가(Psalmody)가 발전했다. 칼빈은 음악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못했지만 1542년에 제네바에서 시편집을 발행하였고, 모테트의 형식으로 불려진 시편가들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초기의 시편가들은 회중이 부르기에는 너무 어려웠지만 점차적으로 보다 쉬운 곡조가 채택되었다. 영국에서는 전통적이고 의식적인 로마 교회의 음악 대신 두 종류의 신교음악이 강조되었다.
첫째는 영국 교회의 신교음악이 로마 교회의 음악과 일반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둘째는 평민의 신교음악 즉, 이미 설립된 교회에 별로 만족하지 못하는 비 국교들의 음악이 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는 이 비 국교도들이 오늘날의 음악에 중요한 종교 음악의 유산을 남겼으며 그들은 루터보다는 칼빈의 신학에서 더 많은 영향을 입었다. 오늘날에도 그들의 영향은 영국의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뿐만 아니라 영어를 말하는 지역과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영국 찬송가에서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사람은 바로 이삭 왓츠(Issac Watts, 1674-1748)이다. 왓츠의 영국 찬송에 대한 관계는 암브로시우스의 라틴 찬송에 대한 관계, 마쇼의 프랑스 찬송에 대한 관계, 그리고 루터의 독일 찬송에 대한 관계, 마쇼의 프랑스 찬송에 대한 관계, 그리고 루터의 독일 찬송에 대한 관계와 같다. 그는 대중 예배에 찬송을 도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편견을 극복하고 최초로 찬송을 대중 예배에 도입한 사람이다. 왓츠의 뒤를 이어서 등장한 사람들이 챨스와 요한 웨슬레 형제였다.
첫댓글 귀한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