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家門의 傳統 美德을 말한다
▬ 선친(諱. 渭正)이 지향하신 가치관을 중심으로 ▬
靑 林. 姜 景 保
〈 차 례 〉
1. 머 리 말
2. 崇 祖 敦 睦
3. 敎 育 熱
4. 勤 勞 精 神
5. 家 族 愛
6. 맺 는 말
이 글은 先親께서 別世하시어 제27週忌때 추모한
思父文임 2005. 5. 18. 73세때 지음
1.머 리 말
자고로 모든 단체나 조직의 역사 본질은 뿌리와 正体性을 根幹으로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문의 뿌리를 보면 고구려 영양왕때 兵馬 都元帥 晋州姜公 (諱. 以式)이 元始祖이시고 고려 顯宗때 兵部尙書 殷烈公(諱. 民瞻)이 中始祖이시며 이조 太宗때 大司憲公(휘. 允熙: 1418년 53세때 양녕대군 폐출반대 이유로 유배후 사면됨)이 入島始祖이시다. 이어서 仁祖때(1646년) 寧國原從功臣公(휘. 翰宗: 1644년 무과급제 하였고 大司憲公의 6세손이며 유적비가 月坪洞 초입에 있음)이 入鄕祖이시니 우리들은 훌륭한 조상을 둔 名門의 후예이므로 명예로운 혈통과 家系의 긍지를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 가문의 正体性은 선친께서 항상 강조 하셨고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신 생활덕목에서 이어지는 것이 順理이고 아버지 유지를 계승하는 것이 자식들로서 孝의 정신이다. 선친의 생애를 요약하면 청,장년기를 日本에 사시면서 늘 祖上을 숭상하는 한편 우리들 장래를 위하여 교육에 중점을 두셨고 平生을 고된 노동과 사업을 하시면서 가족들을 극진히 사랑하셨다. 이 밖에도 보람차고 가치 있는 삶의 흔적들이 다양하게 있으나 주요한 大目을 꼽는다면 崇祖 敦睦과 子女의 교육열, 勤勞정신, 家族愛 등을 거론할 수 가있고 우리는 이러한 선친이 추구하신 가치관을 존중하고 지키고 또 가문의 美德으로 이어가는 것이 도리이므로 그 당위성에 관하여 차례대로 열거하고자 한다.
2. 숭 조 돈 목 (崇 祖 敦 睦)
선친께서는 평소에 뿌리 없는 나무 없고 샘 없는 강물이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즉 조상과 나와 나의 후손은 뿌리로서 나무와 가지와 잎이 무성해지듯이 그리고 샘에서 솟아나 시내 물이 흘러 강물이 되듯이 후손 개개인은 부분이 아닌 全体이고 일체임을 강조하셨다. 또 조상은 언제나 후손들을 보호하고 지켜 줄뿐 아니라 가문의 번영과 융성을 바란다고도 하셨다.
사실 훌륭하신 先代의 지혜와 삶의 고뇌로 이어온 조상이 계셨기에 오늘날 우리가 存在하고 있고 조상으로부터 이어 오는 수직적 전통 文化와 역사의 숨결속에서 우리가 성장하며 살아 왔고 앞으로도 자자손손들이 영원히 살아 갈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조상의 노고에 감사하고 숭배하여야하며 항상 우러러 보는 마음을 가져야하는 것이 후손의 갖추어야 할 정신자세이다.
조상을 위하는 祭禮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수직적 전승문화를 지키는 유교가문에서는 통상 時祭와 성묘,
忌祭, 명절제사 등을 每年 거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사때는 아무리 바쁨에 쫒기는 직업인이라도 宗門 전체를 관통하는 공동체 文化 行事이므로 참여하는 것이 도리이고 의무이다. 연이나 조상의 빛나는 얼을 되새기며 음덕을 기리는 제사 때는 종친간에 우애와 동질감이 생겨 단결과 평화가 유지된다. 따라서 共同体意識이 확산되어 화목과 협동이 잘 되어 가문과 핏줄을 다지는 상부상조라는 미래를 위한 설계가 가능하여 그런 집안은 敦睦하고 발전하고 번창하기 마련이다.
한편 崇祖思想중에 先祖를 모신묘지가 가지는 가장 본질적인 기능은 조상과 후손들을 연결시켜 주는 交感의장으로 보는 것이다. 즉 묘지는 그 가문과 宗門社會가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價値를 전승시켜 공동체의 지속성과 사회적 통합 및 연대를 담보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묘소에 있는 여러 碑文들을 읽노라면 그 시대가 어떤 사회였으며, 그 조상과 후손들은 누구며, 또한 그들이 추구하는 정신적 지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묘지는 死者와 生者 모두의 가장 기본적인 信念과 가치를 상징적으로 극화 시켜서 가문구성원의 연대를 강화 해주는 文化的 제도이고 기능을 한다. 따라서 崇朝와관련하여 묘지운영도 가문의 기층가치를 담아 낼수 있는 종문단위 또는 가문 단위로 공동묘지를 조성하여 조상을 매개로 혈족이 모여서 가문의 정체성을 공유하며 보존하고 있는 것이 이름 있는 가문들의 트랜드이고 또한 아버지께서도 소망하셨다.
그러므로 우리형제들은 선친의 뜻을 실현하고 숭조돈목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제주시 연동에 사설묘지를 매입하여 용강동과 영평동 일대에 산재중인 조상분묘들을 모두 옮겨 고조, 증조, 조, 부모순으로 배열해서 안장을 하였다.
그리고 묘역내 시설들은 영구성, 존엄성, 실용성, 안정성 등을 살려서 명실상부한 가문 공원묘지 형태의 필요 충분 조건과 조경공사를 마쳐있다.
이제 우리들은 조상 유택을 실묘할 염려가 없고 선영을 효율적으로 보수 유지관리 함은 물론 후손들이 직계조상들을 한꺼번에 성묘를 편리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곧 萬葉歸根를 상징하는 가문의 성지를 보유한 셈이니 앞으로 시제성묘 등 숭조돈목체제를 유지하는데 큰 강점이 될 것이다.
그 동안 기제는 형제간에 분담해서 올리고 있고 추석명절과 時祭는 모든 兄弟가 윤번제로 거행하는 것을 家風으로 정착된지 오래 되어서 이러한 질서는 후세에도 가문의 전통으로 길이 존속 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
1.동서양인의 사후관(死後觀) 차이: 서양인은 사생단절형이고 동양인은 사생연결형이므로 제사문화를 중시함
2.묘역시설내용
1)묘역울타리돌담
2)배수로와 수방벽
3)매장묘와 납골묘
4)묘별비석과 상석
5)大司憲公제단비와 경계석, 판석
6)渭正公 유훈비와 경계석, 판석
7)망부석
8)석등
9)조경수
10)묘지 내 보도와 경계석, 판석
11)철제출입문
12)묘역정지와 차량 출입로
13)묘지차량 통행로와 시멘트포장
14)납골묘역경계석과 판석
15)헌성록비석 등 다수
3. 교 육 열 ( 敎 育 熱 )
선친께서는 우리들에게 “부모되기는 쉬우나 부모노릇 하기는 어렵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는 곧 누구든지 자녀를 낳으면 부모라는 이름을 얻게 되지만 부모 노릇을 올 바르게 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일찍이 아버지께서는 일본에 생활 근거지를 두고 家事, 宗事, 生業, 對人關係등에 충실하셨고 그중에서도 가장 우선순위 관심은 자녀교육이었다. 그 까닭은 基玹조부께서 平生을 鄕校 訓長신분으로 고향 교육 불모지대에서 등불이 되어 후학 양성에 전념하신 인생관에 영향을 받으신 것이 遠因이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다른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기에 다른 대상 특히 人間들과 함께 합리적인 人性으로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아버지 자신의 자각심이 近因으로 작용하여 子女의 교육에 열정을 쏟은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소년기에 아버지로부터 직접 明心寶鑑을 배웠기 때문에 기억이 나는데 勤學篇을 보면“人之不學은 如登天而無術하고 學而智遠이면 如披祥雲而觀靑天하고 登高山而望四海니라.”(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재주없이 하늘에 오르려는 것과 같고 배우고 지혜를 원대하게 갖는것은 상서로운 구름을 해치고 푸른 하늘을 보며 높은 산에 올라 사해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라는 句節이 있어 선친께서는 근학편을 자주 언급하시면서 우리에게 勉學을 독려하셨다. 이렇듯 學問을 무척 사랑하셨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인데도 직간접적으로
우리 8남매모두를 고등학교 내지 大學과정을 나오도록 힘써주셨다.
회고하건데 만약에 아버지께서 선진 교육문화도시인 大阪과 東京으로 나가시지 않고 고향 월평동에 정착하셨다면 우리들 명운은 오늘날과 같은 경제적 학업적 문화적 사회적 성취는 이룰 수 없었고 그저 평범한 필부의 인생을 면치 못 하였을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형제들은 선친 음덕으로 그동안 各界의 要職에서 숙련된 전문지식과 능력으로 公職者의 직분을 명예롭게 수행하였고 국가와 산업사회가 인정하는 상승된 신분으로 각자가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의 힘이었다. 이와같이 교육에 의한 개인의 성취는 그것이 국가와 사회발전에 기여하고 상승작용을 할 때 훨씬 더 빛나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 하면 교육은 사람들이 직업을 선택하기위하여 필요한 지식을 갖출 수 있는 과정으로서 실효성 있는 기능이 있다. 뿐만 아니라 교육과정을 통해서 학맥, 인맥 등 지식정보의 확충은 물론 성숙한 인간을 만들어 社會와 더불어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人材가 될수 있는 위력이 교육에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작금 세계적으로 국경 개념이 엷어지고 무한경쟁시대에 접어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勉學精神을 더욱 살려 子女교육투자를 최고의 德目으로 삼고 이어 간다면 자손들은 미래 비젼과 꿈을 얻게 될 것이고 가문도 함께 번창 할 것이다.
4. 근 로 정 신 ( 勤 勞 精 神 )
고전적인 召命論을 보면 인간은 일정한 使命과 그에 따른 일(勞動)을 하기 위해 부름을 받고 태어난다고한다. 그러므로 노동은 신성하고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한다. 사실 召命에의한 職業意識은 근대 자본주의 꽃인 都市를 빠르게 비대화시켰고 많은 노동력은 도시로 향하여 모여들게 하였다.
선친의 생애에는 가난한 환경이 있었고 참혹한 전쟁과 처참한 살육이 있었고 고통스러운 植民의 역사가 함께 있었다. 그러한 歷程속에서도 웅지를 품고 용기 있는 도전정신으로 日本의 二大도시인 大阪에 건너 가셨었다. 때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경 더구나 出陸禁止令(島內의 거주人口 유출을 막기 위해 공권력으로 약 200년간 출륙을 억제하였고 부득이한 사람은 出船證이라는 허가증을 발급했던 法令)治下에서 어렵게 渡日하여 처음에는 제품생산공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시면서 經濟的 기초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한때는 失職으로 좌절감을 안고 깊은 번민을 하면서 기능 연마에 혼신을 기울였다고 하셨다. 즉 人生을 성공 指向的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成功과 실패는 동일선상에 있는것이므로 실패를 통해서 원인을 점검하고 부족한것을 보충하고 人生의 지향목표도 수정하면서 다시 새로운 직장에 도전하셨다고 한다. 多幸히도 그 당시 노동임금은 노동수요처보다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숙련공의 보수가 매우 높았고 야근으로 할당량을 초과했을 때 수당이 더욱 많아서 성실하게 주야로 근로정신을 발휘하셨다고 한다.
本來 노동이란 자가노동이건 고용노동이건 그것은 人格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人間은 자기노동을 통하여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유지와 삶의 質을 추구하면서 직장구성원들과 함께 人間條件을 갖추고 사회적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며 성취하는 것이다.
결국 선친께서는 근로자 생활 십여년만에 직계존비속의 가족부양과 자녀교육은 물론 故鄕에 넓은 농토와 큰 住宅을 구입하셨다. 한편 장남이 明治大學에, 次男이 수도에 있는 正則高校에 진학하자 집을 東京으로 옮기셨고 그곳에서 個人事業을 영위할 수 있는 자금까지 마련하셨다. 뿐만아니라 매년 正初, “설” 무렵에는 일시 귀향해서 10여일간을 도련, 용강, 월평, 영평등지의 종친과 住民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어려운사람들에게는 金品을 나누어 주는 등 사랑을 베풀기도 하셨다.
이와 같이 노동은 두 가지 힘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富와 安樂과 權力을 얻을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직업의식과 의무감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고취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즉, 노동의 보수는 자신과 그 가족들에게 물질적, 사회적, 文化的, 정신적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고 따라서 주변의 기아, 질병, 장애인, 고아, 노쇠자등에게도 나눔과 사랑을 베풀수 있는 여력을 얻을 수 있게 한다.
格言에 잘 살면 먼 일가도 찾아오고 못살면 피 붙이 兄弟라도 떠나간다는 말이 있다. 이제 우리는 선친의 고귀한 근로정신을 귀감으로 삼아 失職者나 무직자가 되지 말고 無에서 풍요롭게 有를 만들어 가는 전문적인 職業人의 필요조건을 갖추어서 자신과 가족은 물론 불우한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미덕을 이어 간다면 미래 우리들의 삶의 가치와 보람은 더욱 빛날 것이다.
5. 가 족 애 ( 家 族 愛 )
하늘이 자식을 주시고 안주시는 것은 世上일이 자기마음 대로 안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있다. 基玹조부와 任氏조모께서 슬하에는 二世가 없어서 선친
이 양자로 입적하여 7男 1女를 낳아 기르셨다.
<참 고> 子 : 祥保(濟州道廳,課長), 禧保(國稅廳, 書記官),
景保(韓國資産管理公社, 監事), 翰保(韓國産業銀行, 責任者), 萬保(漢拏日報社,部長), 昌保(信協大學 校授, 法學博士),
淳保(韓國電力公社, 責任者), 靜女(白鹿潭호텔 社長).
흔히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혼도 진도 다 빠지도록 돈 벌어 들이는 기계역할을 하고, 어머니들은 멍에를 안고 혼신의 힘으로 자식수발을 하면서 희생을 한다. 주고 또 주면서 결코 아까워 하지 않는 모습을 당연한 듯이 받기만 하던 子女들은 훌쩍 자라난 어느 날 똑같은 모습의 부모가 되어 내리 사랑을 베풀어 간다.
마치 나무를 비유해서 보면 먼저 나온 가지가 밑을 받쳐주고 나중에 나오는 가지가 그 위로 올라간다. 人生에 대한 지혜와 사랑이 있는 父母가 밑 가지라면 미숙하고 도움을 必要로하는 子女들이 윗가지다. 밑에 있다고 不平하지않고 위에 있으면서 밑가지의 힘을 고마워 하기에 나무는 멋 있고 튼튼하게 서 있는 것이다.
이처럼 家族愛 역시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으며 사랑이 있는 安定된 가정이 없다면 家族들은 건강하기도 어렵고 幸福하기도 어려워진다.
선친의 내리사랑은 타인이 추종을 불허하였다. 2次대전말기 日本領海 주변의 군함, 수송선, 여객선등은 美海軍의 함포와 잠수함공격으로 海上봉쇄가 되었다. 한편 美空軍의 東京폭격으로 많은 시민들은 매일 참혹하게 죽어 가고 부상당하고 있을 무렵 아버지께서는 가족위험을 분산하기 위하여 1次로 장남과 차남을 귀국시켜 안착부터 확인하셨다. 이어서 모든 가족을 대동하고 君代丸(당시 여객선 이름)편으로 해상공격을 입지 않고 무사히 귀국하셨다.
이는 삶의 터전인 東京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절망의 귀향길이었다. 게다가 50평생을 피와 땀으로 이룬 全財産을 다 버리고 오직 가족생명의 안전만을 위해 선택한 고뇌의 勇斷이셨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선친의 家族愛精神이 얼마나 고귀하고 내리 사랑이 크고 넓고 깊은지 애끓은 父情, 母情이 마냥 그립고 존경과 감사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선친은 제2人生을 고향에서 家族主義意識을 다지며 어려운 고난을 食口끼리 협동하면서 칠전팔기하는 自足生活의 여백을 보여주시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부부나, 父子, 母女, 兄弟, 자매간의 가족유대를 약화시키는 個人主義는 싫어 하셨다. 특히 가족간의 水平的관계가 돈독하고 孝婦이신 어머니께서 시부모侍奉이 극진했던 것처럼 자식이 父母를 공경하는 孝의 思想을 내리사랑 이상으로 중시하였다.
즉,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관계와 규범속에서 孝는 가정생활의 調和있는 역할과 운명을 보장하는 커다란 장치로 보시면서 가족주의지향에 價値를 두고 살림을 영위해 나가셨다.
이와같이 가족주의는 個人主義의 적대개념이라기 보다 사람이 태어나 늙어 죽을 때 까지 동물적으로나 사회적, 경제적으로나 강세와 약세가 상부상조하는 호혜구조이므로 가정과 가족은 참으로 이상적인 제도적 장치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우리는 가족을 分身처럼 共同運命体로 포용하고 사랑하신 선친의 가족애정신을 소중히 이어 간다면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이 유지되고 자손들이 번성하는데 큰힘이 될 것이다.
6. 맺 는 말
現代사회는 과학과 기계 技術文明에 힘 입어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였지만 인간관계나 家族關係에서 정신적 도덕적인 삶은 어느 때 보다도 경시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여기서 英國의 석학“아놀드 토인비”를 만났던 국내 어느名士의 말을 빌리면 “토인비”는 「父母님께 효도하라, 老人을 공경하라 숭조하라」는 韓國人의 전통적인 가족의식과 家族制度등에 관해서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름답고 훌륭한 풍습이군요 孝思想과 경노, 崇祖등 가족제도를 영원히 보존하면서 西洋에 와서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 했다고 한다.
본래 서구는 개인주의와 평등주의사회인데 반하여 우리 사회는 오래전부터 가족주의와 공동체주의에 의해서 조직되어 있어서 이는 윤리와 문화의 차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변해서 흘러가는 것이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인류사회는 산업발전과 과학문명의발달로 사람들의 생활형태, 사고방식, 선호취향 등 물질문화가 날로 바뀌며 변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원래부터 타고 난 본래의 성품, 즉 기본을 지키며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이른바 古典인 仁,義,禮,智,敬 등의 정신문화는 백년이 가고 , 천년이가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
앞에서 열거한 숭조돈목과 면학, 근로정신, 가족애 등도 선대로부터 착실하게 이어온 것이며 이는 서양인들에게도 내놓을만한 아름다운 풍습이며 고급문화이다. 왜냐면 한결같이 인간정신의 진정한 가치, 즉, 진,선,미의 가치를 추구하는 훌륭한 덕목들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선친이 지향하신 가치관을 자랑스럽게 계승하고 우리가문의 전통미덕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가장들이 선친의 “얼”을 가족들에게 주지시켜 의식을 확산하고 철저하게 준수하며 실천하는 것이 요체이다. 한편 선친 묘소를 차별화하기 위하여 비석주변의 일정범위를 경계석과 판석으로 조경공사를 하고 별지내용의 비석을 세워서 성묘하는 후손들이 비문을 읽을 수 있게하고 또 선친의 유훈을 무언으로 접하면서 諱, 渭正祖와 직계후손들이 엄숙하게 교감하는 장이 마련되기를 제언한다.
“고전은 영원하고, 역사는 반복되며, 감동은 시대를 뛰어 넘는다.”라는 진리를 반추하며 끝을 맺는다.
첨부: 碑 文 內 容(사진참조)
|